전시동 3층 302호실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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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12세기 제작
은제 도금 타출 표주박 모양 병
고려시대 12세기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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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5세기 제작
경주 금령총 출토 금제 허리띠
신라 5세기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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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5세기 제작
경주 금령총 출토 금관(보물 338호)
신라 5세기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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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1010년 제작
천흥사 銘 청동 종(국보 280호)
대한민국 국보 제280호 성거산 천흥사명 동종(聖居山天興寺銘銅鍾)
국보 지정일 : 1993.09.10.
소재지 :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용산동6가)
시 대 : 고려시대
소유자 : 국유
관리자 : 국립중앙박물관
국내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 종 가운데 가장 커다란 종으로 크기는 종 높이 1.33m, 종 입구 0.96m이다.
종 위에는 종의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는데, 신라 종의 용보다 고개를 쳐 들어 올린 모습을 하고 있다. 소리 울림을 도와 준다는 용통은 대나무 모양이며, 편평한 부분인 천판 가장자리에는 연꽃무늬를 돌렸다. 몸체의 아래와 위에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한 너비 10㎝ 정도의 띠를 두르고, 꽃과 덩굴로 안을 채워 넣었다.
위에 두른 띠 바로 아래로는 4곳에 사각형의 유곽을 만들고 그 안에 가운데가 도드라진 9개의 연꽃을 새겼다. 유곽 아래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원형으로 2곳에 두었고, 구슬로 테두리하고 연꽃으로 장식하였다. 당좌 사이에는 2구의 비천상을 두었는데, 1구씩 대각선상에 배치하여 신라종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유곽 바로 아래에는 위패형의 틀을 설치하고 그 속에 글을 새겨, 고려 현종 원년(1010)에 주조되고 성거산 천흥사에 있던 종임을 알 수 있다.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신라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 다음으로 큰 종으로 제작기법이나 양식이 고려 범종을 대표하는 종이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 1010년 제작
천흥사 銘 청동 종(국보 280호)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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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성거산 천흥사 동종
법보신문 기사 입력일 : 2019.10.01.
글 :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
여전히 유랑 중인 고려왕실 동종
왕건, 후삼국 통일기념해 창건
1010년 당시 가장 큰 동종 축조
조선시대 폐사한 후에 유랑길
1969년 국립중앙박물관 이전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높이 1.68m로, 상원사 동종, 성덕대왕 신종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동종이 있다. 국보 제280호로 지정된 이 종은 본래 충남 천안시 성거산 천흥사에 있던 것으로, 종의 몸통에 ‘성거산천흥사종명통화28년경술2월일(聖居山天興寺鐘銘統和二十八年庚戌二月日)’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서, 고려 현종이 즉위한 1010년에 주조된 사실을 확인해준다.
‘성거산’과 ‘천흥사’.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전설에 따르면 성거산은 고려 태조 왕건이 삼국통일 과업 마무리로 동분서주할 때 이 산을 보고 “성스러운 신령이 있다”며 제사를 지내게 하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산과 똑같은 이름이 자신의 출생지이자 고려의 도읍지가 되는 송악(개성)에도 있으니, 왕건이 이 지역을 천안(天安)이라 하고 이 산에 성거산이란 이름을 붙인 정치‧심리적인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왕건은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한 뒤 이를 기념하는 뜻에서 이 성거산에 천흥사(天興寺)를 착공하여 4년 뒤인 940년 완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절은 고려왕실의 특별한 지원을 받는 유가종 사찰로, 앞에서 말했듯이 그 70년 뒤인 1010년에는 거대한 동종과 보물 제354호로 지정된 5층석탑 등을 축조하였다. 폐사된 지 오래된 이 천흥사 터에는 그밖에 보물 제99호로 지정된 당간지주도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전성기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준다.
천흥사 동종은 고려시대 범종 중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워서 그 시대를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 천흥사가 폐사되면서, 이 종은 이곳저곳 유랑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 조선 인조 때에는 남한산성에서 병사와 주민들에게 시각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되었고, 그 뒤 다시 세상에 등장한 것은 이 종을 손에 넣은 어느 일본인이 이것을 1910년에 이왕가박물관(덕수궁미술관)에 팔아넘기면서다. 그 뒤 1938년 덕수궁으로 옮겨졌다가 1969년에 다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되었지만, 이곳도 이 종의 본래 자리가 아니라서 아직 유랑이 끝났다고 할 수 없다.
어쨌든 남한산성에서는 오랜 세월 함께 했던 이 종의 인연을 살려 행궁 안 종각에 본래 종의 세배 크기로 복원한 동종을 달아놓고 있으며, 천안시에서도 이 종을 기본 모델로 하면서도 비천상 대신에 비둘기‧무궁화 등의 문양을 새겨 넣고 아래쪽에는 ‘천안(天安)‧지안(地安)‧인자안(人自安)’ 글자를 새긴 ‘천안시민의 종’을 주조하여 2011년 말에 ‘동종제작 1000년 기념’ 타종 행사를 열기도 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이 ‘성스러운 신령이 머문다’고 보고 싶었던 성거산에 ‘하늘[왕조]을 흥하게 할 절’로 지은 천흥사였지만 결국 폐사되고 종은 유랑생활을 이어갔다. “박물관으로 팔려간 덕분에 일제강점기 동종 공출을 피해 살아남았다”고 자위하기에는 마음이 쓰리다.
고려시대 전기 제작
금동 다층소탑(공양탑)
고려시대 전기 제작
금동 다층소탑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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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682년경 제작
감은사터 발견 동탑 사리구(보물 1359호)
통일신라 682년경 제작
감은사터 발견 동탑 사리구(보물 1359호)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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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12세기 제작
청동 은입사 물가 풍경무늬 정병(국보 92호)
청동 은입사 물가풍경무늬 정병(靑銅 銀入絲 蒲柳水禽文 淨甁)
국적·시대 : 한국 - 고려
재질 : 금속 - 동합금
크기 : 높이 37.5cm, 입지름 1.1cm
지정 문화재 : 1962년 국보 지정
소장품번호 : 본관 2426
소장기관 : 국립중앙박물관
정병은 맑은 물을 담아두는 병으로, 본래 승려가 지녀야 할 열 여덟 가지 물건 중 하나였으나 점차 불전에 바치는 깨끗한 물을 담는 그릇으로 사용되었다. 불교의식을 할 때 쇄수게(灑水偈)를 행하면서 의식을 인도하는 승려가 솔가지로 감로수를 뿌림으로써 모든 마귀와 번뇌를 물리치도록 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고려시대의 정병은 대체로 몸체가 계란형이며, 매끈하게 빠진 긴 목 위로 뚜껑 형태의 둥근 테가 놓인다. 그 위로 다시 대롱형의 물을 넣고 빼는 첨대(尖臺)가 솟아 있으며, 몸체 한쪽에는 중간을 잘록하게 좁힌 비녀처럼 생긴 귀때[注口]가 튀어나와 있다. 정병은 물가의 풍경을 담아냈는데, 언덕 위로 길게 늘어진 버드나무, 물 위로 노를 저어가는 어부와 낚시꾼 등이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아름다운 정경이다. 이 모든 풍광이 표면에 홈을 파서 은선을 두드려 박는 은입사 기법으로 장식되었다. 병의 긴 목에는 구름무늬, 동체의 어깨와 굽 주위에는 여의두무늬[如意頭文], 귀때에는 풀무늬[草文]가 입사되었다. 은을 돌린 굽은 지금은 파랗게 녹슨 몸체와 어울려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청동제의 병에 은상감을 한 예는 적지 않으며, 이러한 기법이 고려청자에도 통용되어 주목된다.
고려시대 12세기 제작
청동 은입사 물가 풍경무늬 정병(국보 92호)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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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12세기 제작
청동 은입사 물가 풍경무늬 정병(국보 92호)
고려시대 제작
청동 은입사 병
고려시대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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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제작
철제 은입사 투구장식(중앙)과
철제 금은입사 마구(우)
조선시대 제작
철제 은입사 투구장식(중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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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가 조선 건국 직전
금강산 비로봉에 봉안한
사리장엄구
(고려시대 1390년~1391년 제작)
이성계가 조선 건국 직전
금강산 비로봉에 봉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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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어 소리를 내는 체험을 해 볼 수 있는
금강령 모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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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동 3층에 있는
도자공예 청자 전시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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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제작의 시작
고려 청자의 시작과 발전
국보 제97호인
청자 음각 연꽃 넝쿨무늬 매병
(고려 12세기 제작)
청자 음각연화당초문 매병(靑磁 陰刻蓮花唐草紋 梅甁)
종목 국보 제97호(1962년 12월 20일 지정)
수량 1개
시대 고려 시대
소유 국유
주소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용산동6가)
청자 음각연화당초문 매병(靑磁 陰刻 蓮花唐草紋 梅甁)은 연꽃과 덩굴무늬를 음각으로 넣은, 고려청자 매병이다.
특징
각진 입 부분과 어깨에서부터 벌어져 풍만하면서도 유려한 곡선을 보여주는 동체로 이루어져 훤칠한 맛이 나는, 잘생긴 매병이다. 몸체 전면에 비스듬히 깎은 비교적 굵은 선으로 음각된 연화당초문이 대범하게 장식되었으며, 굽 둘레에는 간결한 뇌문대가 돌려 있다. 유색은 담녹청색으로 맑고 빛깔의 깊이가 있으며, 은은한 광택이 나 있다. 그물모양의 유빙렬이 성기게 나있다. 원래 이 매병은 중국 송대의 매병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으며, 고려 중기에 전래된 이후 세련되기 시작하여 고려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이루어내게 된 것이다. 12세기 후반 강진 사당리 가마에서 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이다.
주해
매병이란 병의 아가리가 좁고 몸의 어깨는 넓으며 아래로 갈수록 홀쭉해지는 병을 말한다.
유빙렬(釉氷裂)은 도자기를 가마에서 꺼낸 뒤에 유약이 식으면서 간 금을 이르는 말이다.
국보 제97호인
청자 음각 연꽃 넝쿨무늬 매병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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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음각연꽃넝쿨무늬 매병(국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는 고려시대(12세기)에 만든 “청자 음각연꽃넝쿨무늬매병(靑磁陰刻蓮唐草文梅甁, 국보)”이다. 이 매병은 작은 아기라와 풍만한 어깨와 몸통, 잘록한 허리 등 고려청자 매병에서 볼 수 있는 한국적인 특징들을 잘 갖추고 있는 작품이다. 몸통에는 연꽃넝쿨무늬가 음각으로 표현되어 있다. 맑고 투명한 회청색 유약이 고르게 씌워져 있다. 전남 강진 가마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비색청자로 잘 알려진 고려 순청자 전성기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매병(梅甁)은 인삼주 등 고급 술을 담기 위한 용기로 사용되었을 것을 추정하고 있는 청자의 대표적인 형태이다. 중국 당나라와 송나라에서 전해진 것으로 보고 있는데, 고려에 전해진 이후 곡선이나 양감 등에서 중국과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여 고려만의 독특한 조형미를 만들어냈다. 귀족적인 취향이 많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 매병은 검소하면 단아한 백자를 선호했던 조선시대에는 많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좁은 아가리 넓고 풍만한 어깨와 몸통, 잘록한 허리 등 청자 매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몸통에 음각으로 연꽃 넝쿨무늬가 새겨져 있다.
연꽃무늬를 감싸고 있는 넝쿨무늬의 윤곽선은 조각칼을 뉘여서 음각하였기 때문에 반쯤 양각된 것처럼 보인다. 고려청자에 사용된 음각기법은 초기에는 가늘고 예리한 음각무늬이지만, 고려청자 전성기인 12세기 중엽이 되면 이처럼 선이 굵어지고 반양각된 것처럼 처리하는 특징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인종 장릉에서 나온
비색청자와 공예품
인종 장릉에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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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지정
청자 어룡형 주전자(靑磁 魚龍形 注子)
[고려시대 12세기 제작]
청자 어룡모양 주전자(靑磁 魚龍形 注子)
1962년 국보 지정
다른 명칭 : 국보 청자 어룡형 주전자(靑磁 魚龍形 注子), 청자 비룡형 주자(靑磁 飛龍形 注子)
국적·시대 : 한국 - 고려
크기 : 전체높이 24.4cm, 뚜껑높이 5.3cm
소장기관 : 국립중앙박물관
이 주전자는 상상 속의 동물인 어룡(魚龍)이 물을 박차고 힘껏 뛰어 오르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어룡은 머리가 용, 몸통이 물고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렇게 인물이나 동식물의 형상을 본떠서 만든 청자를 상형청자라고 한다. 상형청자는 모본이 되는 형상의 대표적인 특징을 골라서 묘사했기 때문에 어느 경우에는 모본보다 강한 느낌을 준다.
국보 지정
청자 어룡형 주전자(靑磁 魚龍形 注子)
[고려시대 12세기 제작]
국보 지정
청자 어룡형 주전자(靑磁 魚龍形 注子)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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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지정
청자 투각 칠보 무늬 향로
(고려시대 12세기 제작, 경기도 개성 출토)
청자 투각 칠보문뚜껑 향로(靑磁 透刻 七寶文蓋 香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목차
정의
개설
내용
특징
의의와 평가
정의
투각·첩화·상형·상감 등 각종 기법을 통해 제작된 12세기 고려 시대 향로.
개설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15.3㎝, 대좌 지름은 11.2㎝이다. 뚜껑은 투각기법으로 칠보문을 장식하고 있으며, 향로 몸체에는 섬세한 잎맥을 첩화기법으로 표현하였다. 굽다리 부분에는 향로를 등에 얹고 있는 듯한 모습의 토끼 세 마리가 장식되어 있다.
내용
고려 중기 청자는 고려왕조의 내적인 성장 위에 북송과의 국교가 다시 열리고 요(遼)와는 서로 실리를 취하는 가운데, 문화가 융성해가는 시기에 제작되었다. 12세기 중엽 무신란이 일어나지만 요업은 비색청자와 상감청자에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당시 고려청자와 관련한 문헌기록으로 송(宋)나라 태평노인의 『수중금(袖中錦)』에 기록된 “고려비색 천하제일”이라는 내용과,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기재된 내용을 통해 당시 고려청자의 높은 수준에 대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선화봉사고려도경』에는 “산예출향(狻猊出香)”이라는 특수한 기형에 대해 소개하고 있어, 고려 중기는 특수기형으로 상형 청자의 아름다움을 발휘한 시기임을 알 수 있다. 이 점을 증명하듯 다양한 장식기법으로 표현된 청자투각칠보문뚜껑향로는 고려 12세기 청자의 정수로 불릴만하다.
특징
청자 투각칠보문뚜껑향로는 음각 · 양각 · 투각 · 상감 · 첩화 등 다양한 장식기법을 절묘하게 적용하여 조화와 균형을 두루 갖추었다. 향로는 뚜껑, 몸체, 받침 등 3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분에 서로 다른 장식기법을 사용하여 세부의 형태를 표현하고 있다. 뚜껑 위에는 다복(多福) · 다수(多壽) · 다남(多男)을 기원하는 전보(錢寶)를 투각 장식하여 둥그렇게 올렸고, 이를 통해 연기가 피어오르도록 하였다.
향로의 몸체는 타원형으로 한 송이 커다란 국화를 연상케 하며, 여러 장의 국화잎이 감싸고 있는 꽃봉오리 모양의 상단 부분과 이를 여섯 개의 잎이 받치고 있는 하단 부분으로 구분되는 2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표면을 감싸고 있는 국화 잎들은 앞쪽 중앙이 뾰족하게 돌출되어 있고 좌우측 가장자리가 톱니모양으로 만들어져 사실적이며 각각의 잎에 여러 개의 수직선으로 잎맥을 나타내고 있다.
몸체의 하단에 배치된 여섯 개의 잎은 끝이 위로 들린 채 반전되어 전체에 변화를 주기도 하며 경쾌한 느낌을 준다. 또한 각각의 잎은 각도를 잘 분배한 균등한 모습으로 커다란 몸체와 연결되어 아래쪽 받침으로 무게를 분산시키는 기능적인 역할도 하고 있다.
향로의 받침은 지름이 큰 원반형으로 뚜껑의 받침과 크기만 다를 뿐 형태와 꽃모양의 장식을 유사하게 만들어 통일성과 안정성을 확보하였다. 상단에는 몸체 하단의 잎과 연결되어 향로를 받치고 있으며 하단에는 세 마리의 토끼를 배치하여 향로를 떠받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크기는 작지만 토끼의 귀나 얼굴, 몸체 등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상형청자의 진수를 보여준다. 토끼는 불교의 본생담 설화와 관련이 있어 불교 용구인 향로를 이루는 한 축으로 몸체의 연판문과 조화를 이룬다.
의의와 평가
이 향로는 고려 전성기 비색청자의 조형적 우수성과 비색의 전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향로의 뚜껑과 받침을 뒤집어 보면 각각 안 바닥 세 곳과 네 곳에 각각 규석을 잘게 부수어 받침재료로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다. 규석받침은 전라남도 강진과 부안의 청자가마에서 고려 11∼13세기에 만들어진 최고의 청자 중 대접이나 접시, 완과같은 크기가 작은 종류를 제작할 때 쓰이던 받침재료이다.
또한 청자 투각칠보문뚜껑 향로와 유사한 파편이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가마터에서 발견되므로 이곳이 제작지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전세 유물 중에서도 일본 도쿄국립박물관[東京國立博物館]에 유사한 청자향로가 소장되어 있어 다양한 유물이 개경을 중심으로 소비되었으며 이 향로 역시 지배층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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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투각 칠보 무늬 향로
(고려시대 12세기 제작, 경기도 개성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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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투각 칠보 무늬 향로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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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사람 모양 주자
[고려시대 12~13세기 제작, 대구 달성군 내동 출토]
청자 사람모양 주자 (고려 12~13세기) 국보
인물의 형상을 정교하게 본떠 만들었다. 의복의 생김새와 봉황이 장식된 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받쳐 든 복숭아로 보아 도교의 도사나 전설 속 서왕모를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왕모는 곤륜산 정상에 있는 궁에 살면서 불로불사와 신선 세계를 주관한다고 전해진다.
국보 지정
청자 사람 모양 주자
[고려시대 12~13세기 제작, 대구 달성군 내동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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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사자 모양 향로
[고려시대 12세기 제작]
청자 사자모양 뚜껑 있는 향로
12세기, 국보, 높이 21.2㎝, 입지름 11.1㎝,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향을 피우기 위해 사용된 향로는 그 원래의 재료나 형태가 금속기에서 비롯되지만 도자기 제작기술의 발달과 함께 청자로도 이를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청동으로 만든 향로를 그대로 본떠 제작하기도 하였지만 자유로운 변화가 가능한 흙을 이용하여 다양한 조각장식이나 문양이 가미되었다.
조각장식이 있는 경우는 대체로 뚜껑이 있는 향로에서 보이는데 주된 장식 소재는 동물이다. 사자나 원앙, 오리 등 현실생활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기린, 어룡, 구룡 등 상상 속의 동물들도 자주 등장한다.
이 향로는 향을 태우는 화사(火舍)와 이를 덮는 뚜껑으로 이루어져 있다. 뚜껑에는 사자모양의 조각장식이 있는데, 사자는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동물로 여겨져 석탑이나 석등 그리고 불교 의식과 관련된 도구에 자주 등장하는 문양 소재이다. 이 향로 역시 불단에서 향을 피우던 도구로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이 향로는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에 기술된 사자모양 향로와 관련하여 주목받아왔다.
기록에 따르면 "산예출향(狻猊出香, 사자모양을 한 향로를 이름) 역시 비색인데, 위에는 쭈그리고 있는 짐승이 있고 아래에는 연꽃이 있어 그것을 받치고 있다. 여러 기물들 가운데 이 물건만이 가장 뛰어나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 향로가 비록 서긍이 보았던 향로와는 차이가 있지만 12세기 전반 청자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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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사자 모양 향로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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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사자 모양 향로
[고려시대 12세기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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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죽순 모양 주자
[고려시대 12세기 제작, 경기도 개성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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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용머리 장식 붓꽂이
[고려시대 12세기 제작, 경기도 개성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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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상감 매화 대나무 학무늬 매병
[고려시대 12~13세기 제작, 경남 하동군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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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상감 보자기 무늬 매병
[고려시대 12~13세기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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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상감 보자기 무늬 매병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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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철화 버드나무 무늬 병
[고려시대 12세기 제작]
청자 철화버드나무무늬 통모양 병(국보), 2015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는 고려시대(12세기)에 만들어진 “청자 철화버드나무무늬 통모양 병(청자 철화양류문 통형 병, 국보)”이다. 긴 통모양의 병 앞 뒤에 한 그루씩 버드나무를 붉은 흙으로 그려 넣은 소박한 병이다. 병은 전제적으로 직선적인 단순한 원통 모양을 하고 있다. 몸통에 그려넣은 버드나무 2그루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장식은 없는데 단순하면서도 품위있는 분위기를 주고 있다. 버드나무는 현대 회화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그림처럼 버드나무의 특징을 잘 파악하여 단순화 시켰다. 고려청자나 조선백자를 비롯하도 도자기에서는 많이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이 작품은 고려청자의 여러 기법 중 철화(鐵畵)기법을 사용한 대표적인 청자이다. 철화기법은 산화철 성분 안료로 무늬를 그리고 음악을 입혀서 구워 무늬가 검게 나타나게 한 청자이다. 철화청자에는 사물의 특징을 간결하면서 생동감있게 묘사한 예들이 많다.
단순한 원통모양을 하고 있는 병이지만 우아하면서 세련된 늬김을 주고 있다. 철화기법을 사용해서 그린 버드나무는 현대회화에서 볼 수 있는 그림들과 비슷하다.
철화청자의 특징인 대담한 의장과 구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다른 철화청자에 비하면 무늬가 비교적 간결하지만 버드나무를 재구성하여 다른 차원의 세련미를 만들어냈다.이렇게 독특한 형태의 통형병은 청자의 기형 가운데 이례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국보 지정
청자 철화 버드나무 무늬 병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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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지정
청자 상감 모란무늬 항아리
[고려시대 12~13세기 제작, 경기도 개성 출토]
청자 상감 모란무늬 항아리(靑磁 象嵌 牡丹文 壺)
국적·시대 : 한국 - 고려
출토지 : 경기도 - 개성부근
크기 : 높이 19.7cm, 입지름 19.7cm
지정 문화재 : 국보
소장품번호 : 덕수 6238
소장기관 :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시대에는 청자와 더불어 각종 동기(銅器)가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청자의 기종(器種)과 기형(器形) 가운데 같은 시대에 사용된 동기를 그대로 청자로 옮겨 만든 것이 많다. 이 청자 항아리도 그런 예 가운에 하나이며, 양쪽에 달린 동물 모양 손잡이는 동기의 디자인에서 유래한 것이다. 높이가 20.1cm로 고려청자 중 드물게 큰 그릇인데, 서울과 경기도 지방에서 방구리라고 불리는 질그릇과 크기나 형상이 매우 비슷하며 음료(飮料)를 담는 데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몸체 양면에 모란꽃을 상감하였는데 크고 시원스러운 그릇 모양과 문양이 잘 어울린다. 백상감된 모란꽃의 꽃술과 꽃잎 둘레를 매우 가는 흑선으로 처리하였고 음각선으로 세밀하게 꽃잎 맥을 표현하였다. 꽃 부분의 백토 상감은 매우 두터워서 일부 부풀어 오른 곳도 있다. 맑은 녹색이 감도는 회청색 유약이 전면에 얇고 고르게 입혀져 있으며, 유약의 투명도가 높고 광택이 청아하다.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국보 지정
청자 상감 모란무늬 항아리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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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지정
청자 철채 퇴화 풀잎무늬 매병
[고려시대 12~13세기 제작]
보물 지정
청자 철채 퇴화 풀잎무늬 매병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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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상감 소나무 인물 무늬 매병
[고려시대 12~13세기 제작, 경기도 개성 출토]
청자 상감 소나무 인물 무늬 매병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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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지정
청자 상감 매화 대나무 학무늬 매병
[고려시대 12~13세기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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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상감 매화 대나무 학무늬 매병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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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청자를 계승한
상감 분청사기
고려 청자를 계승한
상감 분청사기에 관한
설명문
조선왕실이 애용한
분청사기
조선왕실의 분청사기
조선의 도자기, 분청사기와 백자
보물 347호
분청사기 상감 물고기 무늬 매병
[조선시대 15세기 전반 제작]
보물 347호
분청사기 상감 물고기 무늬 매병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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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259호
분청사기 상감 인화 구름 용무늬 항아리
[조선시대 15세기 전반 제작]
국립중앙박물관 선정 우리 유물 100선
분청사기 구름용무늬 항아리
국보 제259호
조선시대의 도자기는 분청사기와 백자로 대표된다. 유교사회의 이념과 질서를 구현한 매체로서 오백여 년 조선의 역사와 함께한 백자와 달리, 분청사기는 고려 말 상감 청자의 전통을 밑거름으로 16세기 후반 무렵까지 조선의 도자 문화를 풍성하게 일구었다.
여의주를 전력하여 쫓는 용 묘사, 15세기 전반에 나온 분청사기의 정수
조선(15세기), 높이 48.5cm, 국보 259호. 상감 장식의 역동적인 용을 중심으로, 작은 국화 무늬를 인화 기법으로 정성껏 꾸미고 엷은 청색의 맑은 유약을 입혀, 분청사기 고유의 조형성이 돋보인다.
분청사기는 회청색의 도자기 표면에 백토를 입혀 장식하는 방식에 따라 크게 상감(象嵌), 인화(印花), 조화(彫花), 박지(剝地), 철화(鐵畵), 귀얄, 분장(粉粧)으로 나뉘는데, 그 중 상감과 인화 기법은 분청사기 장식의 골자를 이룬다. 본래 상감은 바탕이 되는 재질에 다른 재료를 박아 넣어 장식하는 방법으로, 고려시대 은입사 공예나 나전칠기에서 시도되었고 상감청자에서 만개했던 독창적인 공예 기법이다. 상감 청자에서 보듯이 무늬를 음각으로 새기거나 파내고 여기에 붉은 색의 자토나 백토를 메운 뒤 유약을 입혀 구워내면, 흑색과 백색이 절묘한 대조를 이루게 된다. 나아가 일일이 새겨서 표현하는 방식에서 진일보하여 도장을 찍어 보다 효율적인 공정으로 처리한 것이 인화 기법이다. 이와 같은 상감과 인화 장식은 고려 후기 청자의 주류를 이루었고, 조선시대 분청사기의 주요한 장식 기법으로 거듭나면서 조선의 미감으로 정착하였다. 특히 [분청사기 구름 용 무늬 항아리](국보 제259호, 높이 48.5㎝)는 상감과 인화 기법이 조화를 이루는 15세기 전반 분청사기의 정수이다. 회청색 바탕흙의 몸체에다 상감 장식의 역동적인 용을 중심으로, 작은 국화 무늬를 인화 기법으로 정성껏 꾸미고 엷은 청색의 맑은 유약을 입혀, 분청사기 고유의 조형성이 돋보인다.
고려시대부터 제작되던 형태를 몸체로 한 이 항아리는 백색의 넝쿨 무늬 ‘당초문(唐草文)’과 흑색의 윤곽선으로 이루어진 3단의 무늬 띠를 경계로 하여 그 사이에 4단의 무늬가 장식되었는데, 가장 중심인 무늬는 흑백색의 상감으로 표현된 두 마리의 용이다. 좌향(左向)으로 여의주를 전력하여 쫓는 용을 묘사한 것으로, 전체적인 형태는 세련미가 떨어지지만 비늘이나 갈기와 같은 부분 처리는 세밀한 선으로 성의 있게 상감하였고, 구름 속을 뚫고 나아가는 힘찬 기세만은 놓치지 않고 잘 살렸다.
그 중 한 마리가 아래쪽 넝쿨 무늬 띠를 발로 살짝 밟은 듯이 처리한 모습은 용을 다소 낮게 배치한 구도를 재치 있게 승화시켜 시각적 묘미를 더한다. 특히 용은 왕권의 상징으로 용 무늬 항아리 ‘용준(龍樽)’은 궁중의 여러 의례 시에 사용되었는데, 이 용 무늬 항아리도 왕실과 관련된 용도로 짐작해 볼 수 있다.
밑바닥이 뚫려 있는 항아리, 제작의도는 밝혀지지 않아
일부 수리가 된 항아리의 입 안쪽에서 목 바깥쪽으로 촘촘하게 찍은 작은 국화 무늬는 조선시대 인화 기법의 면모라 할 만하다. 빈틈없이 도장을 찍어 도자기 바탕의 색깔이 아닌 무늬와 더불어 하얗게 면을 처리한 방식은 조선시대 인화 기법의 전형적인 특징인 것이다. 이는 어깨 부분을 감싸듯이 펼쳐진 여의두 무늬, 여의두문(如意頭文) 주변에도 화사하게 장식되어 눈꽃 같은 인화 장식의 그윽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흑색의 윤곽선 안에 백색의 선을 살려 두 겹으로 표현한 여의두 무늬는 안쪽으로 반원형의 도안화된 파도 속에 작은 연꽃과 수금(水禽)으로 추정되는 부정형(不定形)의 면이 상감으로 처리, 여의두 무늬 주변의 인화 장식과 어우러지면서 용이 배치된 공간과 대비를 이룬다.
끝으로 맨 아래쪽에는 역시 흑백의 조화를 이루는 연꽃잎 무늬 ‘연판문(蓮瓣文)’이 돌아가며 장식되고 그 안에는 연꽃잎을 돋보이게 장식하는 화려한 무늬가 상감되어, 항아리의 위쪽 공간을 보다 안정감 있게 떠받치고 있다.
한편 이 항아리가 갖고 있는 한 가지 내밀한 특징은 밑바닥이 없이 뚫려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용도나 제작 기법 등에 대한 여러 견해가 제시되었지만 명확한 근거는 불충분하다. 다만 이 항아리를 빚어낸 완성도를 고려하면 미완성이 아닌 의도적인 처리일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 청화백자의 영향과 조선 분청사기의 변용
그러면 이러한 장식 구성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긴밀한 구성의 배경에는 일찍이 중국 청화백자의 영향이 반영되었다. 원대부터 본격화된 청화백자의 유행은 이후 중국의 도자 문화를 새롭게 열었고, 명대에도 지속되면서 더욱 다채롭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도자 문화의 조류에 따라 여러 경로를 통해 전래된 중국 청화백자는 조선 백자보다 앞선 백자 문화의 단면으로서 조선 도자의 발전에도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용 무늬가 중심이 되면서 위아래 여의두 무늬와 연꽃잎 무늬로 이루어진 구성은 특히 원대 청화백자 항아리나 매병에서 확인되고 용의 자세는 명대 청화백자의 표현과 흡사하여, 당시 조선의 주류적 도자였던 분청사기에 중국의 청화백자 양식이 접목, 조선 분청사기만의 경지로 변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새로운 문화를 담다
15세기 전반이 조선이라는 역사의 전환기이자 국가의 기틀이 확립되던 시기였던 만큼 도자 문화도 시대의 흐름 아래에서 변화하고 정착하였다. 고려 청자의 전통이 분청사기로 이어지면서 조선의 독자적인 도자 문화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고, 중국 청화백자의 영향이 분청사기의 제작에도 반영되어 조선 도자의 모습으로서 재창조되었다. 그리고 역사적 전통과 문화적 교류 속에서 새롭게 일군 조선의 도자 문화는 유교적 사회상과 맞물리면서 점차 백자 위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분청사기 구름 용 무늬 항아리]는 전통의 계승과 타 문화의 소통이 융화된 시대의 산물로, 조선이라는 신세계 속에서 일어선 조선 도자의 발돋움을 담고 있다. 한국인의 가슴 속에 활달한 개성과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간직된 분청사기이지만, [분청사기 구름 용 무늬 항아리]는 조선 문화가 새롭게 꽃피기 시작한 순간의 시대성을 발현하고, 조선 왕실의 권위를 표명한 도자기의 하나로서 다시금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국보 제259호
분청사기 상감 인화 구름 용무늬 항아리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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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175호
백자 상감 연꽃 넝쿨무늬 대접
[조선시대 15세기 제작, 이홍근 기증]
백자 상감 연꽃 넝쿨무늬 대접(白磁 象嵌蓮花唐草文 大楪)
국적·시대 : 한국 - 조선
크기
높이 7.6cm, 입지름 17.5cm
지정 문화재 : 국보
소장품번호 : 동원 887
소장기관 : 국립중앙박물관
고려 연질 백자의 계통을 이은 작품으로, 조선시대 상감백자 중 가장 아름다운 예술품 가운데 하나이다. 조선시대 상감백자가 대개 유약이 거칠고 상감 솜씨도 미숙한데 비해, 이 대접은 마무리가 깔끔하고 부드러운 질감을 잘 표현하였으며 무늬를 나타낸 수법도 섬세하다. 단정한 도자기 형태에 맞게 간결하게 표현된 넝쿨 무늬는 중국 원말~명초 청화 백자의 문양과 유사하며, 문양의 선은 예리하면서도 부드럽다. 대접의 생김새는 중국 명나라 초기 대접과 매우 닮았지만 상감기법이나 유약의 특징은 고려백자의 전통을 보인다. 경기도 광주의 분원 관요에서 15~16세기경에 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국보 175호
백자 상감 연꽃 넝쿨무늬 대접
[조선시대 15세기 제작, 이홍근 기증]
국보 175호
백자 상감 연꽃 넝쿨무늬 대접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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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054호 지정
백자 병
[조선시대 15~16세기 관요에서 제작한 최고급 백자 병]
보물 1054호 지정
백자 병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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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남대문로 발견
백자 항아리
[조선시대 15~16세기
경기도 광주 관요에서 제작한
최고급 백자]
서울 중구 남대문로 발견
백자 항아리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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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상감 모란 나비 무늬 편병
[ 조선시대 15세기 제작]
백자 상감 모란 나비 무늬 편병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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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동 3층에 있는
도자공예 분청사기 백자 전시실의
안내표지
2024년03월24일(일요일) 서울 [국립 한글박물관&국립 중앙박물관] 탐방기
탐방지 : 서울 [국립 한글박물관&국립 중앙박물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National Museum of Korea, 國立中央博物館)
대한민국의 가장 큰 보물 창고
소재지 : 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휴관일 1월1일, 설날 당일, 추석 당일.
이용 시간 월ㆍ화ㆍ목ㆍ금요일 09:00 ~ 18:00, 수ㆍ토요일 09:00 ~ 21:00, 일요일ㆍ공휴일 09:00 ~ 19:00.
※2017년 7월 1일부터는 개관시간 9시→10시로 조정.
목차
30평 아파트 1300채 규모의 거대한 박물관
70만 년의 세월을 넘나드는 가장 빠른 타임머신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한국의 미소, 반가사유상
역사의 부침에 따라 수난을 당한 사연 많은 탑
눈길 닿는 모든 것이 한국 미술사의 대표적 명작
박물관 밖도 국보와 보물 천지
체험의 즐거움으로 왁자지껄한 어린이박물관
스마트한 관람을 위한 사전 준비는 홈페이지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은 넓고, 크고, 깊다. '국립', '중앙', 그리고 '박물관'. 그 이름에서도 품위와 무게가 느껴진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문화유산의 보고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전국 각지 박물관의 종합관 격이다. 게다가 역사 연표와 영상 등을 활용해 유물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어, 우리 아이의 '역사 공부'에 이만큼 훌륭한 교과서도 없다.
30평 아파트 1300채 규모의 거대한 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은 용산에 터를 잡기 전까지 숱하게 이전했다. 1986년부터 1995년까지는 조선총독부 건물(사진에서 광화문 뒤로 보이는 건물로 1995년 철거)을 사용했다.
총 33만 점의 국보급 유물을 품은 국립중앙박물관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박물관 순위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대지 면적이 약 9만 평(30만m²), 총면적(한 건축물의 각 층 바닥 면적의 합계)이 약 4만 1000여 평에 이른다. 계산상으로는 30평 아파트 1300채를 합친 면적이다.
이를 하루 만에 모두 섭렵하겠다는 '욕심'은 접어두고, 아이가 '관심'을 보이는 곳에서 오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어떨까. 게다가 국립중앙박물관은 다가갈수록 살며시 고개 드는 남산과 서울타워, 국립중앙박물관이 세수하러 나타나는 거울 연못과 박물관 녹지 공간 속 야외석조물정원, 종각, 전통염료식물원, 이웃한 용산 가족공원 등 볼거리가 넘치는 곳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고조할아버지 격인 '국립박물관'은 100년 전인 1909년 창경궁에서 태어나 1995년 현재 용산에 자리 잡기까지 전국각지로 피난민이 보따리를 싸듯이 숱하게 이전해왔다. 셋방살이를 견디며 흩어졌던 유물들이 이 자리에 모여 대가족을 이루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의 역사적 의미와 중요성은 더욱 크다.
70만 년의 세월을 넘나드는 가장 빠른 타임머신
열린 마당 오른편으로 상설전시실이 모여 있는 으뜸홀이 있다. 세 개 층을 어우르며 웅비하 듯 높이 뻗은 천장이 박물관의 규모를 가늠케 한다. 으뜸홀은 총 여섯 개의 관과 50개의 실로 되어 있다. 이곳에 상설전시된 1만 2000여 점의 유물은 주기적으로 교체된다. 같은 장소를 배경으로 방문할 때마다 사진을 찍어두고 틀린 그림 찾기를 만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으뜸홀의 내부는 마치 연극에서 무대의 장막이 걷히고 조명이 환하게 비추는 순간과 닮았다. 으뜸홀 가운데로 곧게 뻗은 '역사의 길'을 중심으로 양쪽에 전시실이 자리해 있다. 1층에는 선사·고대관과 중·근세관이, 2층에는 서화관과 기증관이, 3층에는 아시아관과 조각·공예관이 있다. 특별히 정해진 관람 순서는 없다. 기호에 따라 선택적으로 하면 되는데, 대부분 1층의 선사·고대관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꼭 챙겨볼 것은 고구려에 관한 전시다. 고구려 땅은 북한과 중국에 걸쳐 있어 우리가 볼 수 있는 유물의 수가 백제와 신라보다 현저히 적기 때문이다.
1층의 비밀은 관람객의 동선이 곧 역사의 흐름이라는 점이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현재에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그 세월은 가늠하기 힘든 약 70만 년 전의 구석기시대부터 불과 100여 년 전의 조선시대와 대한제국의 이야기까지 이어진다. 휴대폰에 있는 스톱워치로 입구에서 1층 끝까지 관람 시간을 재보자. 70만 년의 세월을 얼마나 빠른 타임머신을 타고 지나왔는지 살펴보는 것도 소소한 재미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삼국시대 전시실에 놓인 영산강 지역의 대형 독널(옹관)을 아이와 함께 살펴보자. 설명에 앞서 아이에게 질문을 건네보자. "거꾸로 뒤집어져 있는 이 항아리는 무엇에 쓰였던 걸까?" 독널은 항아리나 독 두 개를 맞붙여 만든, 죽은 사람의 시체를 보관했던 관(館)이다. 토기를 만들기 시작했던 신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도 우리 조상들은 독을 관으로 이용했다. 대형 독은 높이가 어른 키만 하다.
전시된 독널은 삼국시대 영산강 인근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땅에 묻기 위해 사용했던 것이다. 본래 독 두 개가 입구를 맞대고 캡슐처럼 연결되어 있는 형태이다. 독널의 크기는 죽은 사람이 생전에 행사하던 권력의 크기를 대변한다.
독널을 통해 아이에게 죽음과 장례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들려줄 수 있다. 아이는 열 살이 넘으면 죽음에 대한 실제 개념을 형성한다. 이때 '죽음'이라는 단어를 일부러 회피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이야기해주자. "떠나버렸어"와 같은 모호한 말보다는 직접적인 단어를 사용해 설명하는 것이 아이에게 더 도움이 된다고 한다.
한국의 미소, 반가사유상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꼭 보았으면 하는 것은 바로 반가사유상이다. 서양에 모나리자의 미소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금동일월식삼산관사유상(국보 제78호), 금동연화관사유상(국보 제83호)의 미소가 있다. 이 두 점의 반가사유상은 동시에 만나볼 수 없다. 둘을 교체하며 전시하기 때문인데, 자주 방문해 두 반가사유상을 비교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국보 제78호 반가사유상은 여성미가,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은 남성미가 감돈다. 이름은 머리에 쓴 보관의 형태에 따라 붙여졌다. 두 반가사유상 모두 오른 다리를 왼 다리 위에 포개 얹고 오른손은 뺨에 댄 채 명상에 잠겨 있다. 입가에 머금은 생기 있는 미소, 살아 숨 쉬는 듯한 표정, 부드럽고 유려한 옷 주름, 상체와 하체의 완벽한 조화, 손과 발의 섬세하고 미묘한 움직임 등은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점을 느끼게 한다. 국보 제78호, 제83호 반가사유상은 동양불교 조각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이자, 외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유물 중 하나다.
역사의 부침에 따라 수난을 당한 사연 많은 탑
역사의 길을 따라 중앙통로에 보이는 거대한 석탑은 1348년(고려 충목왕 4년) 건립된 경천사 십층석탑(국보 제86호)이다. 경기도 부소산 경천사 터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다나카 미쓰아키가 불법으로 해체하여 일본으로 가져갔었다고 한다. 다행히 일제강점기가 끝나기 전에 탑을 돌려받았으나, 그 후 오랫동안 경복궁에 방치되어 있었다. 1960년에 탑을 다시 세우고 1995년에 복원했다.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개관하면서 이곳으로 자리를 옮겨왔다. 경천사 십층석탑은 신라 탑의 형식을 따르되, 고려 말 유입된 원나라 문화도 반영되어 있다. 웅장하고 화려하면서도 전체적인 균형감이 뛰어나고 우아하다. 마치 이곳의 모든 문화재를 호위하는 무사 같기도 하다.
눈길 닿는 모든 것이 한국 미술사의 대표적 명작
2층 서화관은 서예, 회화, 불교회화, 사랑방 등의 주제로 나뉘어 있다. 이곳에서는 한국 미술사의 대표적 명작을 관람할 수 있다. 문인과 선비들은 글씨가 정신과 인격을 반영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서예는 예술 활동이면서 동시에 정신을 수양하는 과정이었다. 서예 작품을 보면서 선의 기세에 따라 달라지는 감흥을 아이와 이야기해보자.
회화실은 전시품이 가장 자주 교체되는 전시실이다. 조선시대의 회화를 풍속화, 초상화, 산수화, 화조·동물화, 사군자화, 궁중장식화와 민화 등 그림의 소재에 따라 세분화하여 전시하고 있다. 관람 전 아이와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 한 점을 꼽아보기로 하는 것도 좋겠다.
3층 공예·조각관에는 백자실, 분청사기실, 청자실, 금속공예실 등이 있다. 불교조각실에서는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한국 불교 조각의 시대적인 흐름과 함께 불교 도상에 따른 주제별 특징을 감상할 수 있다.
박물관 밖도 국보와 보물 천지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귀중한 유물은 이중삼중으로 안전장치를 하고 실내 유리관에 보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오해는 금물이다. 박물관의 야외 석조정원에도 국보와 보물이 가득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팔각 집 모양의 승탑인 염거화상 탑(국보 제104호)을 비롯해 고려 태조 왕건이 가장 공들여 세운 흥법사 진공대사탑과 석관(보물 제365호), 개성에서 옮겨온 것으로 고려 석탑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남계원 칠층석탑(국보 제100호),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종으로 알려진 보신각종(보물 제2호) 등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전시 문화재의 백미로 손꼽힌다.
체험의 즐거움으로 왁자지껄한 어린이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의 또 다른 자랑은 어린이박물관이다. 상설전시장에 전시된 유물을 어린이들이 직접 만져보고 즐길 수 있도록 복제하여 전시해 놓았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여섯 번 매회 한 시간 20분씩 300명이 선착순 입장한다. 100명은 인터넷으로 사전예약을 받고, 200명은 현장에서 표를 배부한다.
어린이박물관은 아이들 세상이다. 다소 엄숙한 느낌의 상설전시장보다 아이들의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곳이다. 옛사람들이 살았던 집의 모습을 재현해놓은 '따끈따끈, 삶의 보금자리', 농기구의 발전과 생활 양식의 변화를 학습해보는 공간인 '밥을 담는 그릇', 시대별 다양한 장신구, 금관, 복식 등을 체험하고 과거 사람들이 입었던 옷을 살펴보는 '고운 우리 옷', 음악을 통해 문화를 배우는 '마음과 영혼의 소리', 전쟁에 사용된 무기와 갑옷을 직접 입어볼 수 있는 '무기와 무사들', 동력을 이용한 에너지 생성을 직접 체험해보는 '자연 에너지 놀이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밖에 책도 읽고 박물관 신문도 만들어볼 수 있는 '작은 쉼터, 어린이들의 도서공간'이 있고 박물관 선생님들과 함께 즐거운 체험을 해볼 수 있는 '어린이 교실' 등 다양한 체험 거리도 준비되어 있다.
어린이박물관에서는 기념사진 촬영이 가능하다. 매표소 맞은편에는 '도시락 쉼터'가 있으니, 허기를 달래가면서 신 나게 뛰어놀 수 있도록 미리 먹을거리를 준비해와도 좋겠다.
스마트한 관람을 위한 사전 준비는 홈페이지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 해설은 대표 유물과 전시관별로 구성되어 있고, 오전 오후 각 2회 정도 열린다. 야외 석조물 해설은 봄가을 매주 토요일에만 진행된다. 이 밖에 예약이 필요한 '박물관 명품 유물 산책' 해설과 '이야기가 있는 전시 해설 스마트 큐레이터'도 꼭 들어봄 직하다. '이야기가 있는 전시 해설 스마트 큐레이터'는 관장이 추천한 국립중앙박물관 명품 유물 속에 담긴 숨은 이야기 등 유물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금 당장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를 즐겨찾기 목록에 추가하고, 회원 가입도 미리 해두자. 예약과 프로그램 참여를 위해서 회원 가입은 필수다. 또 홈페이지에는 미리 살펴볼 자료가 풍부하게 소개되어 있다. 알차게 구성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만 참여해도 우리 아이의 역사, 문화 교육은 별도의 학습이 필요 없을 정도다.
스마트폰 이용자라면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해설 '스마트 투어 가이드' 애플리케이션을 내려받아 가면, 안내데스크에서 따로 음성안내기를 대여하지 않아도 된다. 박물관 영상·음성안내기는 관람 전날까지 예매해야 대여할 수 있다.
관람시간
월, 화, 목, 금, 일요일: 10:00 ~ 18:00 (입장 마감: 17:30)
수, 토요일: 10:00 ~ 21:00 (입장 마감: 20:30)
옥외 전시장(정원)은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휴관일 및 휴실일
휴관일: 1월1일, 설날(2.10.), 추석(9.17.)
상설전시관 정기휴실일: 매년 4월, 11월(첫째 월요일)
상설전시관 내 특별전시실 휴실
기획전시관(특별전시 미운영시 휴실), 야외전시장은 정상 개관
2024년 휴실일: 4.1.(월), 11.4.(월)
관람료 : 무료
상설전시관, 어린이박물관, 무료 특별전시 해당
유료 : 유료 특별전시 해당
관람권 구입하는 곳: 기획전시실 앞 매표소
관람권 판매시간 : 관람 종료 30분 전까지
학생단체관람 안내
초·중·고 학생단체(30명 이상)의 박물관 관람은 사전예약제로 운영합니다.
(사전예약하지 않은 학생단체는 입장 불가)
상설전시실 층별 안내
국립중앙박물관의 상설전시장은총 7개의 관과 39개의 실로 구성되어 9,884점의 유물을 전시하여 제공하고 있으며 전시물은외부전시일정 및 유물의 보존 상태를 위하여 주기적으로 교체하고 있습니다. 상설 전시장은누구나 무료로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1층 ○중·근세관 ○선사·고대관
중·근세관
고려, 조선, 대한제국실로 꾸며진 북쪽 전시공간은 당시의 역사자료를 관람객이 쉽게 이해하고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습니다.
선사·고대관
인류가 한반도에 살기 시작한 구석기시대부터 통일신라와 발해가 공존한 남북국시대까지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여주는 통사적 전시 공간입니다
2층 ○서화관 ○사유의방 ○기증관 ○실감2관
서화관은 서화, 불교 회화, 목칠공예 등 선과 색채로 발휘된 한국전통문화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사유의 방은 우리나라의 국보 반가사유상 두 점이 나란히 전시된 공간입니다.
기증관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문화재를 전시하여 기증자들을 기리며 기증의 의미와 가치를 헤아리는 공간입니다.
※VR체험 예약 (디지털 실감 영상관 2)
※ 온라인접수는 서버시간을 기준으로 합니다.
1 VR체험은 디지털 실감 영상관 2관에서 하실 수 있습니다. 별도 관람료는 없습니다.
2 VR체험은 예약제로 운영합니다.
가상현실(VR) 체험을 제외한 디지털 실감 영상관 콘텐츠는 예약 없이 관람 가능합니다.
3 예약은 관람일 30일 전부터 가능하며, 회차 당 이용 인원은 6명입니다.
4 예약은 국립중앙박물관 누리집 회원 가입 후 진행하시기 바랍니다.
5 1회 예약 가능 인원은 최대 4명입니다.
6 아이디 당 1일 1회의 예약만 가능합니다.
7 00:00~00:30에는 시스템 점검으로 당일 예약을 할 수 없습니다.
8 예약과 취소는 회차 시작 전까지 가능합니다.
9 예약 시간 이후 도착하실 경우, VR 체험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10 VR체험은 1회 1종만 가능하며 입장 순서에 따라 콘텐츠 주제 선택에 제한이 생길 수 있습니다.
11 VR 체험은 이용자 안전과 원활한 체험을 위해 8세 이상, 키 130cm 이상인 경우만 가능합니다.
12 VR 체험은 양 손 및 몸의 움직임이 필요한 체험이므로 이용에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13 장비 소독 및 기기 교체 등 쾌적한 체험 환경 유지를 위한 1일 2회(12:30-13:00, 15:30-16:00) 점검 시간을 운영합니다.
14 문의전화 디지털 실감 영상관 2 ☎ 02-2077-9093
3층 ○조각·공예관 ○세계문화관
조각·공예관은 한국 불교조각과 고려청자와 조선 백자 등의 도자공예 그리고 금속 공예문화의 진수를 감상할 수 있는 전시공간입니다.
세계문화관은 중국, 일본, 중앙아시아, 인도•동남아시아 등 세계 각 지역의 다양한 문화를 전시한 공간입니다
지하철로 오는 방법 : 경의중앙선(문산-용문) 이촌역 2번 출구로 나와서 국립 중앙박물관까지 도보로 468m 이동
탐방코스 : [이촌역 2번 출구~국립 중앙박물관 서문~거울못 청자정~배롱나무못~국립 한글박물관~석조물정원~미르폭포~보신각종~국립 중앙박물관 으뜸홀~전시동 1층~전시동 2층~전시동 3층~(엘리베이터 이용)~국립 중앙박물관 으뜸홀~국립 중앙박물관 서문~이촌역 2번 출구]
탐방일 : 2024년03월24일(일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서울시 용산구 최저기온 8도C, 최고기온 21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7시간12분 소요)
10:14~10:55 구산역에서 6호선을 타고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가서 경의중앙선으로 환승하여 이촌역으로 간 후 이촌역 2번 출구로 나옴 [41분 소요]
10:55~10:59 서울 용산구 용산동5가 17 번지에 있는 이촌역 2번 출구에서 탐방 출발하여 국립 중앙박물관 서문으로 이동
10:59~11:02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9 번지에 있는 거울못 청자정으로 이동
11:02~11:10 사진촬영
11:10~11:12 배롱나무못으로 이동
11:12~11:20 사진촬영
11:20~11:22 국립 한글박물관으로 이동
11:22~12:03 국립 한글박물관을 관람
[국립 한글박물관
목차
1. 개요
2. 상세
2.1. 소장품
3. 교통편
4. 역대 관장
5. 역사 왜곡
6. 기타
1. 개요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9 (용산동6가)에 있는 국립 박물관. 2014년 10월 9일에 개관했다. 행정조직법상으로는 문화체육관광부의 소속기관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동남쪽에 있다. 애초에 중앙박물관 부지 일부를 사용해 건립한 것이다.
파주시 탄현면 통합 수장 센터가 건립 중이다.
2. 상세
4층 건물이지만 전시관의 목적으로 사용되는 곳은 2층과 3층이다. 가장 주가 되는 2층 입구 앞에 계단이 크게 설치되어 있고, 1층 입구는 옆의 쪽문에 있다. 4층은 직원을 위한 공간이고, 3층 내부에 4층행 계단이 있지만 직원들만 들어갈 수 있다.
2층에 위치한 상설전시관에서는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이전 이두와 향찰을 쓰던 시절부터, 한글 전산화와 글꼴에 대한 논의가 있던 20-21세기 초반까지의 시기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 훈민정음 창제 원리는 전시관 내에 설치된 스크린에서 볼 수 있고, 언문으로 천대받던 시절의 기록이 있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한글이 국문으로 지정되기부터 일제에 의해 조선어로 지위가 격하된 것, 한글을 지키기 위한 여러 사람들의 노력에 관한 내용이 전시되어 있다. 해방 이후 한글 전산화 과정에서 발명된 송기주의 네벌식 및 공병우의 세벌식 타자기, 그리고 현대에서 사용되는 글꼴에 관한 이야기까지 있다.
2021년 4월 5일부터 2022년 1월 20일까지 상설전시관 개편공사를 진행하였고, 1월 21부로 재개장되었다. 재개장한 상설전시는 <훈민정음, 천년의 문자 계획>으로 전시장은 『훈민정음』을 바탕으로 한글의 역사를 풀어낼 수 있도록 기획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국립한글박물관이 소장한 다양한 문화재급 소장 자료와 관내외에서 새롭게 발견된 한글 자료들이 소개된다. 유가사지론(13~14세기), 선종영가집언해(1495년), 간이벽온방언해(1578년), 곤전어필(1794년), 말모이 원고(1910년대) 등의 보물 자료를 비롯해 무예제보언해(1714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훈맹정음(1926년, 국가등록문화재), 송기주타자기(1934년, 국가등록문화재) 등 다양한 등록문화재들도 전시되었다. 이밖에도 조선의 22대 왕 정조가 쓴 한글 편지를 모아 놓은 정조 한글어찰첩과 양반 송규렴이 노비 기축이에게 쓴 한글 편지, 과부 정씨가 어사또에게 올린 한글 청원문, 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온공주가의 한글 자료, 일제 강점기 발명가 최윤선이 한글 교육을 위해 만든 조선어 철자기 등 다양한 이야기를 품은 유물들이 소개되어있다.
3층에서는 기획전시가 이루어진다. 상설전시관이 재개장한 시점에는 조선 시대와 근대의 여성들이 주로 지은 내방 가사를 다루고 있다. 국립한글박물관 홈페이지에서 기획전시 관련 정보를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어린이가 신나게 놀면서 한글을 이해하고 한글로 다양한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체험전시 공간인 '한글 놀이터'가 있다. '한글, 어린이가 소통하고 성장하게 만드는 힘'을 주제로 한 공간으로 일상 속에서 어린이들이 새롭게 한글을 발견하고, 한글을 통해 가족, 친구, 이웃과 생각을 나누는 기쁨을 누리며 한글문화를 스스로 창작해 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있다. '한글 놀이터'는 사전 예약으로 운영되며 국립한글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예약할 수 있다.
1층에는 한글도서관이 있다. 대부분의 분야를 취급하지만 한글박물관 내에 있는 도서관인 만큼 한글 관련 자료가 가장 주를 이루고 있다. 도서관 규모도 아담한 편이고, 열람을 위한 공간이 매우 적어 장시간 활동을 하기에는 부적합하다. 박물관 별관 건물 내에 '도란도란 쉼터'라는 휴게공간이 새로 재개장하였다. 관람객 휴식공간과 어린이 독서공간을 함께 조성하여 해당 공간에서는 어린이들이 책을 읽거나 쉴 수 있다.
2층에 카페와 기념품점이 있다. 카페의 음료 가격은 시세와 비슷한 편이고, 기념품들은 다소 비싼 편이다.
3. 교통편
도로교통
자가용을 이용하면 국립중앙박물관 서쪽에 있는 대체주차장에 추자해야 한다. 박물관과의 거리는 약 700m로 이촌역에서 접근하는 것보다 조금 더 멀다. 버스를 이용하는 경우, 서빙고로를 지나는 서울 버스 400, 502번을 타고 국립중앙박물관 용산가족공원 정류장 또는 이촌역 정류장에서 내리면 갈 수 있다.
철도교통
4호선, 경의·중앙선 이촌역에서 바로 접근이 가능하다. 되도록이면 2번 출구 옆에 있는 박물관 나들길이라는 지하도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꽤 길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무빙워크가 설치되어 있어 역의 다른 출구로 나와서 야외를 걷는 것보다 빠르게 갈 수 있다. 박물관과의 연계를 위해 지어진 곳인 만큼 통과하며 걷는 도중 박물관과 관련된 볼거리가 있다.
4. 역대 관장
문영호 (2014~2016)
김철민 (2016~2017)
김재원 (2017)
박영국 (2018~2019)
김낙중 (2019)
심동섭 (2019~2021)
황준석 (2021~2022)
김영수 (2022~2023)
김일환 (2024~현재)
5. 역사 왜곡
국립한글박물관이 유튜브에 게시하는 영상 중 대중을 대상으로 제작된 『만화로 즐기는 한글 이야기』라는 시리즈가 있다. 이 시리즈의 많은 영상은 북한 인물들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친북적 논조와 민족의 고난이나 선조의 영민함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적 논조를 가지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논조가 단순한 편향을 넘어, 이념을 지지하기 위해 사실까지 날조하는 역사 왜곡에 이른다는 점이다. 모든 사례를 일일이 다 반박할 수는 없으니 심각한 역사 왜곡의 사례 두 가지만 살펴보자.
「원고로 남은 비운의 사전_말모이, 보물이 되다!」편에서는 미완성 사전 원고인 『말모이』가 이후 편찬되는 사전의 기초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말모이』 편찬에 참여했던 김두봉이 조선으로 돌아와 『조선말 큰사전』 편찬 사업에 동참했다고 설명한다. 『말모이』는 한글학자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 편찬되던 우리말 사전으로, 주시경의 요절로 인해 작업이 중단되어 미완성으로 남겨졌다. 김두봉은 훗날 북한의 거물 정치인이 되는 인물로, 주시경의 제자로서 『말모이』 편찬에 참여했으며, 1919년에 상해로 망명하면서 스승의 유작인 『말모이』 원고를 상당 부분 반출하였다. 그러나 영상의 설명과 다르게 김두봉은 상해로 망명한 이후 해방 이전까지 귀국한 적이 없고, 『조선말 큰사전』 편찬 사업에 동참하기는 커녕 오히려 방해했다. 게다가 『말모이』는 『조선말 큰사전』을 포함하여 이후 편찬되는 사전의 기초가 되지 못했는데 그 원인이 김두봉에게 있다.
1927년 국내의 한글학자들은 사전 편찬을 재개하기 위해 이윤재를 상해로 보내 사전 편찬 경험이 있는 김두봉을 초청하고, 김두봉이 반출한 『말모이』 원고를 인수하여 새로 편찬하는 사전의 기초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김두봉은 국내로 귀국하지도 않았고 원고를 빌려주지도 않았으며 그 뒤의 김두봉의 행동은 힐난받을 만한 것이었다. 어처구니가 없게 김두봉은 이윤재에게 당시 큰 돈이었던 200원을 보내면 원고를 정리해서 보내겠다고 제안한다. 맨손으로 귀국한 이윤재는 김두봉의 말을 믿고 출판업자 이중건으로부터 200원을 기부받아 김두봉에게 보냈다. 그러나 김두봉은 약속과 다르게 원고를 보내지 않았고 원고를 손질해서 완성시키지도 않았다. 도리어 동생을 통해 사전 편찬의 의욕을 꺾는 납득하기 어려운 훈시를 전보로 보내왔다.
사전원고 정리는 장구한 시일을 요하는 것이니 그것보다도 신 철자법을 속히 보급시키는 것이 중요하니 대중이 많이 읽는 서적을 신 철자법으로 많이 박아내는 것이 가장 첩경이다.
김두봉의 이 행위는 능력도 없이 원고를 혼자 완성하려는 개인적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이로 인해 주시경의 유작인 말모이는 다른 사전의 기초가 되는 일도 없이 미완성 상태로 방기되었다. 이와 함께 열악한 환경에서 사전 편찬을 재개한 한글학자들은 혼란과 경제적 부담을 겪었다. 이윤재가 김두봉에게 보낸 200원은 결과적으로 조선어학회 사건에서 일본 제국이 조선어학회를 독립운동 단체로 몰아가는 근거 중 하나가 되었으며, 돈을 보낸 당사자인 이윤재는 일제에게 집중적인 고문을 받고 결국 옥중에서 순국했다. 이 사건은 일제강점기의 사전편찬을 다루는 다양한 문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인데도 한글박물관 측은 북측 인사를 미화하기 위해 『말모이』와 관련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김두봉의 귀국과 사전 편찬 사업 합류라는 허구로 대체했다.
「철자법 논쟁_주시경파 vs 박승빈파」편에서는 일제가 일관되게 우리 민족을 말살하려 했다고 서술한다. 그리고 주시경파의 조선어 학회가 발표한 「한글 마춤법 통일안」이 박승빈 중심의 반대에 직면했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영상과 달리 일제강점기 중반에는 '문화통치'라는 유화책을 실행하던 시기가 있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점은 이 시기에 주시경파는 탄압을 당한 게 아니라 조선총독부에 협력하여 영상의 주제인 철자법 논쟁에서 우위를 점했다는 것이다. 박승빈파가 본격적으로 주시경파에 반발하기 시작한 것은 주시경파가 참여하여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언문 철자법」 때문이지, 주시경파가 독자적으로 발표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 때문이 아니다.
1930년 최현배, 권덕규, 심의린 등 주시경파 학자들은 조선총독부의 「언문 철자법」 사업에 참여했고 이로 인해 조선총독부 산하 각급 학교가 사용하는 조선어 교재에 주시경식 철자법이 보급되었다. 이는 철자법 논쟁에서 주시경파에게 큰 우위를 가져다 주었고, 위기의식을 느낀 박승빈파의 이러한 불균형 속에서 본격적인 반대를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로 1931년에 박승빈파는 주시경파의 조선어학회에 대항해 조선어학연구회를 조직하였고, 1932년에는 동아일보가 개최한 한글 토론회에서는 양파가 정면으로 격돌하였다. 이는 모두 1933년에 「한글 마춤법 통일안」이 발표되기 이전에 일어난 일이다.
주목할 점으로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총독부의 사업에 참가한 주시경파를 비난하는 평가가 있었다.
하여간 한글運動도 現實에 잇어 우리의 思想을 기록하는 統一된 道具를 使用하여야 하겟다는 意味에서 무엇보담도 焦眉의 急務에 잇는 것인즉 蛙鷸이 相爭하고 同志가 相賊하다가 그쫓아 아무 解決된 事業이 없이 남의집웅아레 뫃여서 그 政治的 背景밑에 비로소 改正綴字法을 定하얏다는 것도 우습다란 羞耻다.
(현대어) 하여간 한글운동도 현실에서 우리의 생각을 적는데 통일된 도구를 써야 한다는 의미에서 무엇보다도 급한 일이다. 개구리와 도요새가 서로 싸우고 동지들이 서로 해치는 사이에 아무 해결된 일도 없었다. 남의 지붕아래에 모여서 남의 정치적 배경 아래에서야 비로소 개정철자법을 정했다는 것은 우습고 부끄러운 일이다.
金台俊, 「硏究者的 態度에서」, 『東光』, 1932.04.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맞춤법을 정립한 주시경파가 조선총독부의 사업에 참여하여 철자법 논쟁에서 우위를 점했다는 사실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는 불편할 수 있지만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한글박물관이 일제가 일관적으로 민족 말살을 시도했다고 거짓 서술을 하거나 박승빈파의 반대에 「한글 마춤법 통일안」을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불편한 사실을 감추기 위한 역사 왜곡이다.
세금으로 운영하는 정부의 학술기관이 지배계층의 이념을 선전하며 국민을 '계몽'하는 것에 긍정적인 면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거짓말까지 일삼는 것만은 학자로서의 양심을 배반하면서까지 주권자를 기만하는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다.
6. 기타
중국 출장 중이던 김재원 3대 관장이 2017년 12월 6일 아침에 쓰러져 사망한 채로 발견됐다. 사인은 급성 호흡정지.
방역패스 적용시설로 지정받았지만 재개장한 주부터 패스를 요구하지 않았다. 2022년 4월 거리두기 완전 해제 이후로는 미접종자도 이용 가능하다.]
12:03~12:05 석조물 정원으로 이동
[석조물 정원에는 국보 99호인 갈항사 동서 삼층석탑, 국보 100호인 남계원 칠층석탑, 보물 166호인 홍제동 오층석탑, 보물 282호인 고달사 쌍사자 석등, 보물 358호인 영천사 보제존자 사리탑 등의 유물들이 야외 전시되어 있다.]
12:05~12:09 사진촬영
12:09~12:10 미르폭포로 이동
12:10~12:15 보신각종으로 이동
12:15~12:19 사진촬영
12:19~12:22 국립 중앙박물관 으뜸홀로 이동
12:22~14:55 국립 중앙박물관 전시동 1층을 [구석기실~신석기실~청동기&고조선 전시실~부여&삼한 전시실~고구려실~백제실~가야실~신라실~경천사 10층석탑~통일신라실~발해실~고려I실~고려II실~디지털 복원 광개토대왕릉비~조선I실~조선II실~조선III실~대한제국실]의 동선으로 관람
14:55~16:32 국립 중앙박물관 전시동 2층을 [사유의 방~나눔의 서재~손기정 기증 그리스 투구~이홍근 기증 유물~박병래 기증 유물~윤동한 기증 수월관음도~이병창 기증 유물~이원순 기증 유물~최영도 기증 유물~유창종 기증 유물~이우치 이사오 기증 유물~김홍기 기증 유물~가네코 가즈시게 기증 유물~유강열(미망인 장정순) 기증 작품~록펠러재단 기증 판화~김종학 기증 유물~손창근 기증 세한도~불교회화]의 동선으로 관람
16:32~18:00 국립 중앙박물관 전시동 3층을 [불교조각~금속공예~도자공예 청자~분청사기~청화백자~철화백자~달항아리~메소포타미아~중앙아시아~인도~동남아시아~중국~인도]의 동선으로 관람
18:00~18:07 국립 중앙박물관 서문을 거쳐서 이촌역 2번 출구로 원점회귀하여 탐방 완료
18:07~18:17 이촌역에서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가는 경의중앙선 전철 승차 대기
18:17~18:56 경의중앙선 전철을 타고 이촌역에서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가서 6호선으로 환승하여 역촌역으로 이동 [39분 소요]
국립중앙박물관 안내도
국립중앙박물관 1층 시설 안내도
국립중앙박물관 2층 시설 안내도
국립중앙박물관 3층 시설 안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