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7일 오늘의 역사
2021년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17년 연속 채택.. 한국은 3년째 불참
북한의 인권 상황 개선을 위한 북한인권결의안이 유엔 인권 담당 위원회를 17년 연속으로 통과했다. 한국은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인 2019년부터 올해까지 3년 동안 결의안 공동 제안국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유엔총회 산하 제3위원회는 17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북한의 인권 상황 악화에 대한 우려와 함께 코로나19 백신 공급을 위해 북한의 협력을 촉구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북한인권결의안을 전원 동의로 채택했다.
유럽연합(EU)이 발의하고 60개국 이상이 공동 제안국으로 참여한 이번 결의안은 회원국 가운데 어느 나라도 표결을 요청하지 않아 표결 없이 컨센서스(전원 동의)로 채택됐다. 2005년 이후 해마다 채택된 북한인권결의안은 다음달 유엔총회 본회의에 상정된다
2010년 박태환 아시안게임 2회 연속 개인종목 3관왕
광저우 아시안게임 수영 자유형 200m 1분44초80(아시아신기록) 2회 연속 금메달
자유형 400m 3분41초53(2010년도 세계최고기록) 금메달
자유형 100m 48초70(한국신기록) 금메달, 5일 동안 7 종목 출전 금 3
2009년 우희용 세계프리스타일축구연맹회장 최장거리 헤딩과 리프팅 부문 기네스 기록 2009.10.17 인천대교(21.3km)에서 4시간46분34초 동안 축구공 떨어뜨리지 않고 헤딩과 리프팅만으로 17km 이동
1989년 헤딩오래하기 신기록(5시간6분30초, 38만9694회)으로 기네스북 오름
1986년 LA국제마라톤 대회에서 풀코스(42.195km) 헤딩만으로 9시간17분만에 완주. 기록원 동행하지 않아 공식기록으로 인정받지 못함
2002년 유럽 축구묘기선수권 우승 2008년 프리스타일대회 유로백(Eurobac)2007 준우승
2007년 방글라데시에서 사이클론으로 11000여 명이 숨지는 등의 피해 발생
2005년 유엔총회 대북인권결의안 채택
2002년 내리교회 한국 감리교 미주선교 100주년 기념선교대회
2002년 조중훈 한진 회장 별세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 겸 회장이 2002년 11월 17일 오후 1시쯤 인하대학교 부속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2세였다. 조 회장은 트럭 한 대로 출발, 재계 8위의 육·해·공 종합 수송기업을 일으키는 데 평생을 바친 인물이다.
조 회장은 1920년 2월 11일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에서 8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나 25세 때인 1945년 트럭 한 대로 인천시 해안동에 수송회사인 한진상사를 설립했다. 그는 6·25 한국전쟁의 발발로 회사가 쓰러질 위기에 놓였을 때, 주한 미8군 군수물자 수송계약을 맺으면서 회사 재건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 월남전 당시 미군의 군수물자 수송을 맡으면서 회사를 비약적으로 성장시켰다.
조 회장은 특히 1969년 국영항공회사인 대한항공공사를 인수, 소형 항공기 10여대로 출발한 대한항공을 30여년 만에 보유항공기 121대를 갖춘 세계 10대 항공사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는 1977년 한진해운을 설립하고 1987년에는 당시 국내 최대선사인 대한선주까지 인수하여 한진해운을 세계 5대 선사 대열에 올려놓았다.
조 회장은 육영사업에도 힘써 1968년 인하학원을 인수했고, 1979년 한국항공대학교와 정석항공공업고등학교를 산하에 둔 정석학원을 설립, 인재를 양성했다. 또 전경련 부회장과 대한관광협회 중앙회 회장, 한불 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 한국방위산업진흥회 회장, 한국 유네스코협회연맹 회장 등을 역임하며 활발한 대외활동을 벌였다.
2002년 반달가슴곰, 지리산에서 무인카메라에 잡힘, 20년 만에 첫 공식확인
야생 반달가슴곰이 지리산에서 무인 카메라에 찍혀 서식 여부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17일, 지리산 일대에 설치된 무인카메라를 통해 지난 10월 초 야생 반달가슴곰을 촬영했다며 관련사진 등을 공개했다.
지리산 반달곰은 지난 2000년 11월 한 방송사 카메라에 잡혀 논란이 있었으며, 정부기관에 의해 서식사실이 공식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반달곰은 지난 83년 설악산에서 한 밀렵꾼에게 사살된 이후, 20년 동안 그 모습을 일반에게 감추어왔다.
이번에 촬영된 반달가슴곰은 무게가 100∼120㎏의 성체(成體)로, 이마와 귀밑이 넓고 얼굴이 둥근 형태이며 목의 갈기가 사자처럼 옆을 향해 나와 있었다. 지리산 방사 반달가슴곰 관리팀 한상훈(韓尙勳) 박사는 “국내외 전문가들의 검증과 인근 사육장에 대한 조사 결과 야생 반달 가슴곰이란 결론을 얻었다”고 말했다.
2000년 부시, 제43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
40년 만에 가장 치열했던 미국 대통령선거가 2000년 11월 17일 미 전역에서 실시됐다. 선거전부터 예측할 수 없었던 박빙의 승부는 선거결과로까지 이어졌다. 개표과정 동안에만 10여 차례나 선두가 바뀌는 등 미 선거사상 최대의 숨막히는 드라마가 연출됐다.
개표가 거의 마무리될 무렵인 이날 밤 세계언론들은 부시 후보가 고어 후보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몇몇 나라의 지도자들도 부시 후보에 축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과 몇시간 뒤 최대 격전지인 플로리다주에서 재개표가 불가피하다는 발표가 나오자 언론들과 지도자들은 당선보도와 축전을 전면 취소하는 등 한바탕 해프닝이 벌어졌다.
개표 결과, 고어가 미 전역에서 19만표 차로 부시를 따돌린 것으로 집계됐지만 그가 당선되지 못한 것은 각 주에 할당된 선거인단 538명 중 270명 이상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플로리다주 대법원과 연방 대법원까지 동원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끝에 투표 35일만인 12월 12일 부시 후보가 미국의 제43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2000년 국제 인터넷주소 관리기구(ICANN) 최상위 도메인 7개 추가
국제 인터넷주소 관리기구(ICANN)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이사회에서 인터넷주소의 포화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2000년 11월 17일 최상위 도메인에 새로운 7개 도메인을 추가했다.
이번에 결정된 도메인은 일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info 기업대상의 .biz 개인대상의 .name 전문가대상의 .pro 박물관이 사용하는 .museum 협회나 조합의 .coop 항공사의 .aero다. 새 도메인은 전 세계 기업 및 컨소시움이 제안한 47개 도메인 가운데 선택된 것으로 네티즌들의 특성을 고려해 전문성을 부여했다고 밝혔다.
ICANN은 2001년 중반부터 이들 도메인이 사용되면 최상위 도메인(.kr 등 국가도메인 제외)은 기존의 7개에서 14개로 확대돼 현재 심각한 수급불균형 상황을 빚고 있는 최상위 도메인 부족문제도 상당부분 해결될 것이라고 밝혔다.
2000년 유엔군사령부-북한, 경의선 철도와 군사분계선 발생하는 군사문제는 남북 당사자가 처리하기로 합의
유엔군사령부와 북한이 2000년 11월 17일 판문점에서 장성급 회담을 갖고 ‘경의선 철도, 도로가 개설되는 군사분계선(MDL) 이남 비무장지대 남북 관리구역에서 제기되는 기술-실무적 문제들과 군사적 문제들을 정전협정에 따라 남한과 북한 군 사이에서 협의 처리키로 한다’고 합의, 서명했다.
이날의 합의는 단순히 경의선 공사 차원을 뛰어넘어 정전협정 체제상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현행 정전협정은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 남측지역에 대한 관할은 유엔사가 맡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번 합의로 비무장지대 내에 남북한이 직접 관리하는 최초의 구역이 만들어지게 된 셈이다.
관심을 끄는 것은 행정, 기술적 차원 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문제까지 남북한이 처리키로 합의한 점이다. 이는 단순한 행정권한인 ‘관리권’은 물론 우발적인 무력충돌 사태에 대한 감시 및 처리권한인 ‘관할권’까지 남한에 위임한 것을 의미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1998년 한국-홍콩, 형사사법공조협정 체결
1997년 대북수해복구장비 북송
1994년 한국-베네수엘라, 문화협정 체결
1994년 테니스선수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 은퇴
세계 테니스사상 가장 위대했던 선수 ‘철의 여인’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가 1994년 11월 17일 가브리엘라 사바티니와의 경기를 끝으로 은퇴했다. 나브라틸로바는 이날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버지니아 슬림 여자선수권 단식1회전서 1990년 US오픈우승자인 사바티니에게 0-2(4-6, 2-6)로 패했다.
1973년 데뷔 후 21년간 1백67개 대회 및 18개 그랜드슬램대회 우승이란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던 나브라틸로바는 이로써 화려했던 선수생활을 모두 마감했다.
체코 태생으로 미국에 망명, 자유시민이 됐고 자신이 동성연애자임을 당당히 밝혀 화제에 올랐던 나브라틸로바는 경기후 열린 은퇴식에서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2000년 7월 16일. 나브라틸로바는 테니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1992년 새한국당 창당(대표 이종찬 의원)
1989년 제1회 이중섭 미술상에 화가 황용엽씨 선정
1987년 캐나다 동부 세인트존스 해역서 한국인 선원 33명 태운 온두라스의 그로브수산회사 소속 트롤어선 호산나1호 침몰 사망 12명 실종 2명
1983년 버마, 북한 아웅산테러범 대역죄로 기소
1980년 이스라엘, 중국과 비밀 군장비 판매협정 체결 발표
1980년 KBS, 공영체제로 기구개편 발표
새 권력은 기존의 매체 구조가 옛 지배세력의 이해관계를 반영한다고 보고 이 연결 고리를 끊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 출범한 정권은 언제나 새로운 미디어 정책을 내놓았다.
노태우 정부는 민영방송 SBS를 개국했고, 김영삼 정부는 케이블TV를, 김대중 정부는 디지털 위성방송 스카이라이프를 출범시켰다.
기존의 매체 구도를 가장 크게 뒤흔들어 놓은 권력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다.
전두환 정권은 1980년 전대미문의 언론 통폐합을 단행했다. 민영방송이던 TBC와 DBS(동아방송)는 KBS에 흡수 통합됐다.
또 KBS가 MBC 주식 70%를 인수해 MBC도 공영방송이 됐다. 정부가 내세운 명분은 방송의 공영성 강화였다.
이로써 ‘1공영(KBS) 2민영(MBC TBC)’이던 TV 방송 체제는 KBS와 MBC라는 2공영 독과점 체제로 전면 개편됐다.
KBS가 그해 11월 17일 발표한 기구 개편안에 따르면
△종전의 KBS TV는 KBS1 TV
△TBC는 KBS2 TV
△TBC라디오는 KBS 제3방송
△DBS는 KBS라디오서울로 각각 변경됐다.
1980년 작곡가 이흥렬 사망
1980년 중국 공산당, 공자 복권 발표
1979년 시인 주요한 사망
우리나라 자유시의 효시 ‘불노리’를 남긴 주요한 선생이 1979년 11월 17일 노환으로 사망했다. 호를 ‘송아’, 필명을 ‘벌꽃’. ‘낙양’ 등으로 썼던 주요한은 처음엔 문인으로, 그리고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언론인, 정치인 관료 경제인 등으로 한국 근대화의 과정에 폭넓게 공헌했다.
평양 출생인 그는 19세때 김동인, 최승만, 김억, 오천석, 김환 등과 최초 동인지 ‘창조’를 창간, ‘불노리’를 발표했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 편집장, 동아일보 편집국장-논설위원을 거쳤고, 4~6대 국회의원, 부흥부∙상공부 장관, 전경련 부회장, 대한선주협회∙능률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이처럼 다채로운 활동을 펼쳤지만 오늘날 그는 역시 한국 근대시의 형성기에 선구자적 공적을 남긴 ‘불노리 시인’으로 남아있다. 그는 ‘불노리’ 한편으로 한국 근대시의 조건을 거의 완벽하게 갖추어 내면서, 한국 시단에 자유시의 본격적인 출범을 선언했다. 이 시는 시대적인 아픔과 민족적 비애 그리고 지식인 청년의 우울한 심금이 잘 상징화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78년 소련, 중성자탄 시험 성공 발표
1972년 페론 前아르헨티나 대통령, 망명 17년 만에 환국
1971년 내장산 국립공원지정
국립공원 제 8호 지정(건설부고시 제 101호)
내장산은 원래 본사 영은사(本寺 靈隱寺)의 이름을 따서 영은산이라고 불리었으나 산안에 숨겨진 것이 무궁무진하다하여 내장(內藏)산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지명도 내장동이라고 부르게 된것이다.
정읍시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내장산은 순창군과 경계를 이루는 해발 600∼700m급의 기암괴석이 말발굽의 능선을 그리고 있다.
[호남의 금강]이라 불리기도 하는 내장산은 예로부터 조선8경의 하나로 이름나 있으며,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남원 지리산·영암 월출산· 장흥 천관산·부안 능가산(변산)과 함께 호남 5대 명산으로 손꼽힌다.
백두대간이니 호남정맥이니 하는 우리나라의 전통적 산맥관은 하천의 수계를 나누는 분수계를 기본개념으로 하며 노령산맥은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호남정맥에 해당한다.
호남정맥에 있는 내장산은 이런 점에서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내장산은 서쪽의 입암산(笠巖山, 해발 626m), 남쪽의 백암산(白巖山741m), 백학산으로도 불린다.
내장산과 입암산의 북쪽사면은 동진강의 상류가 되고 입암산과 백암산의 남쪽사면은 영산강의 상류인 황룡강으로 흘러 들어가며 내장산과 백암산의 동쪽사면(순창군 복흥면 일대)은 섬진강의 상류가 된다.
노령(蘆嶺)이란 이름이 유래된 갈재의 서쪽에 있는 고창 방장산(해발 710m), 동쪽에 있는 입암산·백양사의 뒷산인 백암산을 연결한 능선은 곧 전라북도와 전라남도의 경계이기도 하다.
내장산은 1971년11월17일 인근 백양사 지구와 함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총면적이 81.715㎢에 달하는 내장산국립공원은 전북에 속해있는 면적이 47.504㎢, 전남쪽이 34.211㎢로서 정읍시와 순창군, 전남 장성군에 걸쳐있다.
1971년 태국 타놈수상 친위 쿠데타
1971년 국제노동기구(ILO), 자유중국 축출하고 중공 가입 가결
1970년 소련 무인우주선 루나 17호 달 착륙
1969년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1) 협상시작
1967년 유엔총회, 통한(統韓)결의안 가결
UN총회는 17일 새벽(한국시각) 정치위에서 넘어온 통한결의안을 찬성68, 반대23, 기권26표로 압도적으로 채택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15개국이 지지한 이 결의안은 1)UN군의 한국 계속 주둔 2)‘언커크’ 활동 강화 3) UN 감시하의 자유선거를 통한 국토 통일을 규정함으로써 UN은 한국 통일에 대한 책임을 재확인했다.
17일 새벽 표결에 앞서 UN군의 한국 주둔이 UN 결의에 따르는 것으로서 이미 대부분이 철수했으며 오로지 이 지역의 평화와 안전보장을 보충하는데 목적이 있으며 대한민국이 요청하면 언제라도 완전 철수한다는 조항을 삭제하려는 기도는 좌절되었다.
이날 회의는 통한결의안의 전체적인 표결에 앞서 ‘탠지니어’가 주문(主文) 4항(UN군이 유엔 결의에 의해서 한국에 파견되었으며 평화와 안전의 유지가 그 목적임을 재확인하는 조항)에 대한 개별 표결을 요청한 바 이것 역시 찬성66, 반대24, 기권24표로 통과되었다.
1965년 유엔총회, 중공가입안을 찬반동수(47:47)로 부결
UN총회는 17일 자유중국(대만)을 축출하고 중공(중국)을 UN에 가입시키자는 결의안을 47대47, 기권20이라는 동수로 부결했다.
중공은 이로써 1949년 정국 수립 이래 15번째로 UN 가입을 저지당했다. 중공 가입 표결에 앞서 UN총회는 중국대표권문제를 결정하는데 3분의2 이상의 다수결을 요한다는 미국측 결의안을 56대49, 기권11로 채택하였다.
따라서 중공가입안은 표결에서 3분의2 선에 훨씬 미치지 못했으나,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이 처음으로 자유중국 지지에 다수 세력을 규합하지 못했음을 드러냄으로써 중공 지지 국가들에게는 정치·심리적으로 일대승리(一大勝利)를 기록하였다.
1962년 일본서 돌려받은 문화재 152점 공개
1955년 군당국, 평화선 침범 일본어선에 대한 발포방침을 발표
1954년 군사·경제 원조협정 체결
중앙청 총리실에서 우리나라와 미국 사이에 군사·경제 원조협정이 체결됐다.
우리나라의 변영태 국무총리와 부리그스 주한 미국대사가 두 나라의 대표로 협정서에 서명했다.
이 조약 체결로 우리나라는 1955년도에 미국으로부터 7억 달러의 원조를 받게 된다.
조약이 체결되기전 우리나라와 미국은 원조 규모와 시기 등의 문제로 첨예한 의견 대립을 보이기도 했다.
1952년 유엔총회, 남아공화국 인종차별정책 비난 결의안 채택
1942년 영화감독 마틴 스코세지 출생
1942년 11월 17일, 이탈리아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마틴 스콜세지는 뉴욕 퀸즈 출신으로 영화배우 로버트 드니로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블록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고 한다.
스콜세지는 종교에 연연하지 않지만 문화로서의 종교에는 상당히 얽혀산다.
그의 초기작의 공통점은 주인공이 다 이탈리아계 미국인이란 점인데 거기에 등장하는 모든 주인공들은 전부 찌질한 소시민이며, 사실상 미국 사회에 잘 동화된 듯 하면서 겉도는 캐릭터이다.
연출에서 특기할 만한 것이 주인공들의 나레이션이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자신의 부모를 카메오로 출연시키기도 했다. 어머니 캐서린 스콜세지는 스콜세지의 단편영화 ‘너 아니라고, 머레이!’로 데뷔했고 주로 이탈리아계 어머니 역할을 맡았다. 아들의 작품에 다수 출연했는데 ‘누가 내 문을 두드리는가’와 ‘비열한 거리’, ‘코미디의 왕’, ‘좋은 친구들’, ’대부 3편’, ‘케이프 피어’, ‘순수의 시대’, ‘카지노’ 등에 출연했다. 요리책을 내기도 했다.
아버지 찰스 스콜세지는 아내보다 늦게 1980년에 ‘레이징 불’로 영화배우로 데뷔했다. 1974년, 아내와 마틴 스콜세지의 다큐멘터리 영화 ‘이탈리안 아메리칸 순수의 시대’에 출연했다.
1933년 미국, 소련연방 승인
1932년 독립군 쌍성보 공격 일본군 섬멸
1932년 독립운동가 이회영 순국
한말에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회영(李會榮 ; 1867.3.17 ~ 1932.11.17.)
국권을 상실하고 4개월이 지난 1910년 12월, 한국인 40여 명이 엄동설한에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다.
우당 이회영 6형제의 일가권속(一家眷屬)들. 서울을 출발하기 전 노비들을 해방했으나 모두들 기꺼이 수행을 자청해 인원이 늘어난 것이다.
무사히 강을 건너자 이회영은 뱃사공에게 뱃삯보다 두 배나 많은 돈을 건네주며 이렇게 말했다.
“일본 경찰이나 헌병에게 쫓기는 독립투사가 돈이 없어 강을 헤엄쳐 건너려 하거든 나를 생각해서 그들을 배에 태워 건너게 해주시오.”
일행은 신의주와 중국 단둥(丹東)을 거쳐 간도 땅인 류허(柳河) 현에 터를 잡았다. 이들의 망명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회영은 삼한갑족(三韓甲族·신라 고려 조선에 걸쳐 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인 경주 이씨 백사공파 출신이다.
백사공파는 이항복 이래 8대에 걸쳐 10명의 재상을 배출한 조선시대 최고의 명문가. 이회영의 아버지도 이조판서였다.
광복 후엔 이회영의 동생 이시영이 초대 부통령이 되어 그 명성을 이어갔다.
그런 이회영이 조국의 독립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황량한 만주로 떠난 것이다.
그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엄청난 재산을 모두 처분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그 액수가 지금의 600억 원에 이른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1918년 갖고 온 자금이 바닥나면서 이회영 일가의 삶은 힘겨워졌다.
끼니를 잇지 못하기가 일쑤였고 빈민가를 전전하며 연명해야 했다.
그런 악조건에서도 이들의 독립운동은 그칠 줄 몰랐다.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이회영은 1932년 11월 만주 일본군사령관을 암살하기 위해 배를 타고 상하이(上海)에서 다롄(大連)으로 가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그리곤 혹독한 고문 끝에 1932년 11월 17일 차가운 이역 땅에서 옥사하고 말았다.
우당의 6형제 가운데 이시영을 제외한 5명과 대부분의 가족은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굶주림과 병, 고문으로 세상을 떠났다.
1917년 조각가 로댕 사망
1917년 11월 17일 근대조각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프랑스의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이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하급관리의 아들로 파리에서 태어난 로댕은 14세 때 국립공예실기학교에 입학, 조각가로서의 기초를 닦았다. 1857년부터 3년간 국립미술전문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했지만 낙방했다. 1864년 살롱에 처음으로 ‘코가 망그러진 사나이’를 출품했으나 생생한 사실적인 묘사가 심사위원들에게 거부감을 주어 낙선했다.
1878년 파리에 돌아와 벨기에 체재 중 제작한 ‘청동시대(靑銅時代)’를 출품했다
그 뒤 그의 예술은 더욱 발전해 ‘지옥의 문’ ‘생각하는 사람’ ‘아담과 이브’ ‘칼레의 시민9 등 걸작들을 낳았다.
‘지옥의 문’은 거의 40년 동안 만들었던 조각 작품이었으나 결국 미처 다 끝내지 못하고 죽어서 완성되지 못했다. 이 작품은 단 하나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 ‘키스’ ‘세 망령’ 등 거의 이백 개에 가까운 조각상들이 합쳐져 있는 거대한 크기의 작품이다.
1906년 면암 최익현 대마도에서 세상 떠남
1905년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에 을사조약 강제 체결
러일전쟁(1904년)에서 승리한 일본은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 7월),영일동맹 (1905년 8월), 포츠머스 조약(1905년 9월) 등을 통해 열강으로부터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고 조선에 대한 침략 야욕을 숨기지 않았다.
일본은 이에 앞서 한일의정서(한국정부는 시정개선에 대해 일제의 충고를 허용한다는 내용)를 강압적으로 체결하고 내정간섭을 시작했으며, 한일의정서의 시행세칙을 내세우며 토지 점령 수용, 군사행동 등을 단행했다.
1905년 11월,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에 파견되면서 보호조약 체결이 본격화되었다.
이토는 고종을 알현하고 회유와 협박을 거듭하여 보호조약 강제체결을 종용했으나, 고종은 응하지 않았다. 11월17일 이토는 한국 각료들을 일본 공사관으로 불러 보호조약 승인을 강요했지만 한국 각료들이 거부하자 덕수궁 으로 장소를 옮겨 어전회의를 열었지만 조약을 체결할 수 없었다.
회의를 주재하던 하야시는 이토를 불렀다.
이토는 헌병사령관을 대동하고 한사람 한사람에게 조약 찬성 여부를 물었고, 이에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 등은 반대했으나 학부대신 이완용, 군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은 약간의 수정을 조건으로 찬성했다.
이토는 조약체결을 찬동한 5명의 대신(을사오적)만으로 다시 회의를 열어, '한일협약조약' (을사조약의 공식명칭)을 강제 체결했다.
이 회의는 어전회의였음 에도 불구하고 고종이 참석하지 않았고 남산에서 대포로 덕수궁을 겨누고 무장한 일본군인이 궁을 포위한 채 체결되었다.
조약의 내용은 일본 정부가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약탈을 정당화한 불평등 조약
이었다. 조약이 체결되지 전국적으로 반일여론이 확산되었다. 장지연이 <황성신문>
에 <시일야방서대곡>을 발표하여 일본과 을사오적을 비판했고, 시종무관장 민영환은
자결했다. 서울 시내의 상가는 철시를 단행하고 학교는 동맹휴약에 참여했으며 전국
에서 항일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을사오적의 암살을 기도하는 등의 의열투쟁과 부국강병을 위한 자강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나 5년 후인 1910년 결국 국권을 상실했다.
을사보호조약은 협정문에는 최고통수권자인 고종의 날인이 없어 국제법상 무효이며,
불평등성과 침략성 때문에 조약이 아닌 늑약으로 부른다.
1902년 의학교장 지석영, 황성신문에 양매창론(楊梅瘡論)을 발표
1895년(고종32년) 단발령(斷髮令)
백성들에게 머리를 깎게 한 명령.
김홍집 내각(金弘集內閣)은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내정개혁에 주력하였는데, 조선 개국 504년 11월 17일 건양원년(建陽元年) 1월 1일을 기하여 양력을 채용하는 동시에 전국에 단발령을 내렸다.
고종은 단발령에 솔선수범하여 머리를 깎았으며, 내부대신(內部大臣) 유길준(兪吉濬)은 고시(告示)를 내려 관리들로 하여금 가위를 들고 거리나 성문 등에서 강제로 백성들의 머리를 깎도록 하였다.
한국에는 머리를 소중히 여기는 전통이 있었는데, 이것은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훼상(毁傷)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유교의 가르침에서 유래된 것이다.
많은 선비들은 손발은 자를지언정 두발(頭髮)을 자를 수는 없다고 분개하여 정부가 강행하려는 단발령에 완강하게 반대하였다.
더구나 김홍집 내각은 이른바 친일내각이라는 소리를 듣는 형편이었으므로, 음력폐지 ․단발령 등은 모두 배후에서 일인(日人)이 조종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을미사변 이후 배일적(排日的)이 된 국민감정을 무시하고 개혁을 단행하였으므로, 국민은 더욱 분개하여 단발령을 반대할 뿐만 아니라 의병을 일으켜서 정부시책에 대항하였다.
정부에서는 친위대(親衛隊)를 파견하여 의병활동을 진압시켰으나, 김홍집 내각은 무너졌고 김홍집도 피살되었다
1895(조선 고종 32) 음력 폐지하고 양력 사용. 개국 504년11월17일을 505년1월1일로 함
1887년 2차대전의 영웅 영국의 몽고메리 장군 출생
1869년 수에즈 운하 개통
1854년 프랑스인 페르디낭 드 레셉스가 다시 운하 뚫기를 시도했다. ‘수에즈운하 만국회사’를 설립한 그는 주식을 프랑스와 이집트 왕 몫으로 나누고, 개통일로부터 99년간 운하를 독점 운영하는 계약을 이집트와 체결했다. 공사는 1859년 4월에 시작돼 150만명의 인력이 동원되고 이집트 노동자 12만5000명의 목숨이 희생된 끝에 1869년 11월 17일 개통됐다. 대서양과 인도양, 동양과 서양을 가로막았던 단절의 벽이 마침내 무너진 것이다.
영국에 기회가 찾아온 것은 개통 6년 뒤였다. 사치로 빚에 시달리던 이집트 왕 이스마일 파샤가 1875년에 주식 전량을 영국에 팔아넘긴 것이다.
1956년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이 수에즈 운하 회사의 국유화를 선언, 운하는 이집트 소유가 됐다. 이 과정에서 같은해 10월 29일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에 반대한 영국, 프랑스와 이집트의 지원을 받는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을 견제하려는 이스라엘이 수에즈 운하를 군사적으로 장악했다. 이후 아랍권의 여론을 의식한 미국의 압력으로 3국은 12월까지 철수 하게되었다. 수에즈 전쟁, 수에즈 분쟁, 3국 전쟁, 제2차 중동전쟁으로 불리는 이 분쟁을 통해 아랍에선 ▲아랍주의 ▲사회 정의 ▲반(反)이스라엘 분위기가 고조됐다. 영국은 수에즈 사건을 계기로 ‘제국의 종언(終焉)’을 확인하고, 이후 국제 외교에서 새 강자인 미국의 편에 서는 정책을 취하게 됐다.
1858년 ‘사회주의’란 말을 처음 쓴 영국 사회주의자 로버트 오웬(1771-1858) 세상 떠남
1717년 프랑스의 계몽주의자 장르롱 달랑베르 출생
1558년 잉글랜드 최초의 여왕 메리1세 사망
1448년 세종대왕, 동국정운 반포
888년 신라, 낭혜화상(朗慧和尙) 무염(無染)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