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9일 (금) 촬영.
창덕궁 후원,昌德宮后苑.昌德宮後苑
창덕궁 후원은 태종대 창덕궁 창건 당시 조성되었으며, 창덕궁뿐만 아니라 창경궁의 후원(後苑)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정자가 불타버리고, 1623년 인조 때부터 개수, 증축되어 현재의 모습을 이루었다.
창덕궁 후원은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짜기마다 정원을 조성하여, 인위적인 손질을 최소화하면서도 자연을
더 크게 완성시킨 절묘한 솜씨를 자랑한다. 4개의 골짜기에 각각 부용지, 애련지, 관람지, 옥류천 정원이 펼쳐진다.
4개의 정원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크고 개방된 곳에서 작고 은밀한 곳으로, 인공적인 곳에서 자연적인 곳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하며 결국은 큰 자연인 뒷산 매봉으로 연결된다. 세계 대부분의 궁궐 정원은 보고 즐기기 위한 관람용인데 비해,
창덕궁 후원은 여러 복합적인 기능을 수용한 정원이었다.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며 사색에 잠기던 곳이었고 때론 연회를 열고 활쏘기 놀이를 즐기던 곳이었다.
왕이 참관한 가운데 군사훈련도 행해졌고, 왕과 왕비가 백성들의 생업인 농사를 짓고 누에를 치기도 했다. - 현지 설명문 -
첫 번째 정원인 부용지이다. 부용지에는 영화당, 부용각, 규장각 등의 전각이 있다.
한국 전통 정원의 진수를 보여주는 후원 - 궁궐의 뒷동산 왕의 걸음으로 걷다.
아름답고 넓은 후원이 있는 창덕궁은 왕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짜기마다 정원을 만들었는데 부용지, 애련지, 관람지, 존 덕지 같은 연못을 만들고 옥류천 주변에는
소요정, 청의정, 태극정 등 아담한 규모의 정자들을 세워 자연을 더 아름답게 완성하였다.
연경당은 안채와 사랑채를 따로 둔 사대부 집처럼 지었으며,
궁궐의 전각이면서도 단청을 입히지 않은 소박한 모습으로 후원의 정취를 더한다.
후원은 왕과 왕실 가족의 휴식을 위한 공간이었지만, 왕이 주관하는 여러 가지 야외 행사가 열리는 장소이기도 했다,
조선 초기에는 왕이 참석하는 군사 훈련이 자주 실시되었고, 활쏘기 행사도 열렸으며, 대비를 모시는 잔치나 종친 또는 신하를 위로하는
잔치도 베풀어졌다. 또한, 왕은 후원에 곡식을 심고 길러 농사의 어려움을 체험하였고,
왕비는 친히 누에를 쳐서 양잠을 장려하기도 하였다. 후원은 창덕궁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넓고,
가끔 호랑이가 나타나기도 했을 정도로 깊다. 게다가 절경들은 골짜기마다 숨어 한꺼번에 드러나지 않으므로,
직접 걸어서 골짜기의 연못과 정자들을 찾아다녀야만 후원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 리플릿에서 -
부용지와 주합루, 芙蓉池. 宙合樓
후원의 첫 번째 중심지로서, 휴식뿐 아니라 학문과 교육을 담당하던 비교적 공개된 장소였다.
주합루 일원의 규장각과 서향각(書香閣) 등은 왕실 도서관 용도였고,
영화당에서는 때로 왕이 입회하는 특별한 과거가 치러지기도 했다.
개인적 휴식을 위한 부용정은 연못에 앞발을 담그고,
행사를 위한 영화당은 연못에 면해 있으며, 학문을 연마하던 주합루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하나하나의 건물들도 각각 특색이 있고 아름답지만,
서로 어우러지면서 서로에게 풍경이 되는 절묘한 경관을 이룬다. - 현지 설명문 -
부용지 축대 돌에 새겨진 물고기.
두 발을 부용지에 담근 부용정 옆에 또 하나의 전각이 있다. 이 전각은 사정기가 있는 사정기 비각이다.
부용정, 芙蓉亭, 보물
부용지의 정자로 정면 5칸, 측면 4칸, 배면 3칸의 +자형 전각이다. 배면 한 칸은 연못에 높은 석주를 세우고 수중 누각이
되게 하여 수상과 지상의 조화를 추구했다. 1707년(숙종 33)에 택수재라는 명칭의 정자였으나
1792년(정조 16)에 개축하면서 명칭 또한 지금의 부용정으로 고쳤으며
1795년(정조 19)에 있던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맞아 종친들과 신하들을 초청해 낚시와 뱃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 나무위키 -
부용정 뒤에 있는 괴석.
부용각에서 본 규장각.
규장각과 영화당.
영화당, 暎花堂.
부용지 동쪽에 있는 전각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이익공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광해군 때 처음 건립되었으나
현재의 전각은 1692년(숙종 18)에 재건된 것이다. 부용정 일대에서 내력이 제일 오래된 건물이다.
정조 이전까지 왕과 신하들이 연회를 개최하거나 활을 쏘는 곳이고 이후 시험장으로 활용되었다.
영화당 앞 마당은 현재 모습과는 달리 창경궁 춘당지 바로 앞까지 넓게 열린 공간이었는데, 이 마당을 '춘당대(春塘臺)'라
불렀다. 공간이 매우 넓어 문과 / 무과시험 가리지 않고 왕이 직접 행차하여 과거시험을 지켜보고 관장했으며
이곳에서 치는 과거시험을 '춘당대시(春塘臺試)라고 부르기도 했다. - 나무위키 -
북쪽에서 본 영화당.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을 상징하는 부용지.
어수문과 주합루보물.
주합루(宙合樓)는 정조 원년(1776)에 창건된 누각 건물이다. 아래층에는 왕실 직속 기관인 규장각(奎章閣)을,
위층에는 누마루를 조성했다. 규장각은 정조의 개혁 정치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책 개발과 이를 위한 도서 수집 및
연구기관으로 설립되었다. 주합루로 오르는 길에는 어수문(魚水門)이 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격언과 같이 통치자들은 항상 백성을 생각하라는 교훈을 담고 있는 이름으로,
이는 정조의 민본 정치 철학을 보여준다. 어수문 주변에는 조선시대 독특한 조경 기법의 하나인 취병을 둘러
내부가 보이는 것을 막아주는 가림막 역할과 함께 공간을 분할하는 담의 기능을 하게 하였다. - 현지 설명문 -
취병 - 꽃나무의 가지를 이리저리 휘어서 문이나 병풍 모양으로 만든 물건.
어수문 편액 뒤로 주합루의 편액도 보인다.
어수문에 조각된 청룡과 황룡.
어수문 양옆에 있는 작은 문과 나무로 가림막처럼 만들어 놓은 취병.
주합루로 오르는 계단의 소맷돌에도 아름다운 문양을 새겼다.
주합루, 宙合樓. 보물
창덕궁 부용지의 전각 중 하나로 정면 5칸, 측면 4칸, 팔작지붕 형식의 중층 전각으로 1776년(정조 원년)에 건립되었다.
경훈각처럼 층마다 명칭이 달랐다. 주합루의 경우 2층은 주합루, 1층은 어제각이라 했으며 본래 역대 국왕들의 글과 어필을
보관하던 곳으로 이후 규장각으로 개명되었다. 정조가 인재들을 양성하고 자신의 치세를 보필하는 장소였으나
일제강점기 당시 연회장으로 활용되는 등의 수난을 겪었다.
주합루 앞을 둘렀다가 살아진 취병(翠屛)은 최근 재현되었다. 주합루로 들어가는 문인 어수문은 취병과 함께 매우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는 건축물로, 조선시대에 거의 사라진 건축 의장을 풍부하게 가진 귀중한 사례이다.
어수문 양쪽의 소문 형태도 독특하거니와 어수문 내외부에는 정교한 조각을 둘러놓았다. - 나무위키 -
서향각,書香閣.
부용지 권역의 전각 중 하나로 주합루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8칸 측면 3칸의 전각으로 주합루에 보관된 각종 도서,어진과 어필 등을 말리던 포쇄소였다.
포쇄란, 좀스는 것과 습기가 스며 망실되는 것을 막고자 햇볕에 내어놓고 말리는 것을 의미한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총독부에
의해 양잠소로 변질되어 한동안은 뜬금없이 누에 치는 곳으로 안내가 버젓이 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서행각 본래 기능대로
안내가 되고 있다. 다만, '친잠권민(왕실에서 친히 누에를 치는 것은 백성들에게도 권해야 한다)이라는 게판은
현재까지 걸려 있다. 보이지 않지만 서행각 위에 희우정이 있다. - 위키백과 -
어수문 옆에 있는 우물. 네 개의 우물 중 하나이다. (이 사진은 지난여름에 촬영한 것임)
우물 옆 계곡에서 흐르는 물을 토해내고 있는 누혈(漏穴, 배수구)
부용정 사정기 비각이다.
한 칸의 팔작지붕 건물인데, 세조 대에 부용지 일대에서 4개의 샘을 발견하여 우물로 만들었는데,
숙종 대인 1690년 이들 우물을 정비하고 내력을 적은 비를 세우고 비각을 만들었다. 사정비(네 개의 우물)의 유래이다.
부용정의 석등.
영화당 앞을 돌아서,
애련지로 간다.
부용지 정원을 지나면 두 번째 정원인 애련지 일원의 정원이 나온다.
금마문(金馬門)을 통해 들어가면 좌측 축대 위에 기오현(奇傲軒)이란 편액이 걸린 의두합(倚斗閤)과 운경거가 있다.
의두합(왼편 건물)과 운경거(오른편의 작은 건물)
금마문(金馬門)을 통해 들어가면 좌측 축대 위에 기오현(奇傲軒)이란 편액이 걸린 의두합(倚斗閤)과 운경거가 있다.
의두합(倚斗閤)에는 기오현(奇傲軒)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의두합은 가운데 두 칸은 대청마루로, 좌측은 누마루로, 우측은 온돌방으로 지었다.
1827년(순조 27)에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당시 독서 공간으로 세워졌으며 본래는 의두합(倚斗閤)이라 불렀다.
의두합 옆에 있는 작은 건물은 '운경거'이다.
정, 측면 1칸의 팔작기와지붕이다. 방 1칸에 마루 반 칸으로 이루어져 있어 궐내에서 제일 작은 전각이며, 마루 밑으로
다섯 개의 구멍이 나 있다. 책과 악기를 보관하는 공간으로, 습기와 좀스는 것을 막고자 환기와 통풍을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애련정
애련지에 위치한 전각으로 정, 측면 1칸에 익공계 사모 지붕을 하고 있다.
1692년(숙종 18)에 세워졌고 액명은 중국 송나라 때 주돈이가 쓴 애련설에서 빌린 것이다.
본래는 연못 한가운데 섬을 만들어 그 위에 세웠다고 했지만 현재는 연못가에 자리한 상태다. - 나무위키 -
애련지와 의두합.愛蓮池,倚斗閤.
순조의 맏아들인 효명세자(1809~1830)는 총명하고 인품이 높아 18세에 순조를 대리하여 정치를 지휘하다 22세로 요절한
왕자였다. 이곳에는 숙종 대에 건립한 애련정이 있었고, 효명세자는 1827년부터 여러 시설물을 세워 새로운 정원을 만들고
학문을 연마하며 정치를 구상했다. 그가 공부방으로 사용하였던 의두합은 단청을 하지 않아 단출하고 소박하며,
또한 독서와 사색을 위하여 궁궐 내 유일한 북향 건물로 되어 있다.
단칸의 애련정 역시 작지만 애련지 연못에 반쯤 걸친 모습은 경쾌하며 정자 안에서 내다보는 풍경은 절경을 이룬다. - 현지 설명문 -
애련설(愛蓮設) - 주돈이(1017~1073) -
물과 육지에서 피는 초목의 꽃 중에, 사랑할 만한 것들이 매우 많으나, 진나라의 도연명은 유독 국화를 사랑하였고,
당나라 이래로는 세상 사람들이 모란을 매우 사랑하였다.
나는 홀로, 연꽃을 좋아하노라.
진흙에서 나왔으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은 물결에 씻기어도 요염하지 않으며
줄기는 곧게 솟아 있지만 그 속은 텅 비어 있고,
덩굴지지도 않고 가지치 지도 않으며
향기는 멀어질수록 더욱 맑고
우뚝한 모습으로 깨끗하게 서 있어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지만 함부로 하거나 가지고 놀 수 없음을 사랑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국화는 꽃 가운데 은자이고, 모란은 꽃 가운데 부귀한 자이며, 연꽃은 꽃 가운데 군자라고 하겠다.
아! 국화를 사랑함은 도연명 이후에 들은 바가 드물도다.
나와 같이 연꽃을 좋아할 사람 누구일 것인가?
모란을 사랑하는 이들은 참으로 많은데...
통돌을 파서 만든 불로문 뒤로 운경거 건물이 보인다.
관람정(觀纜亭) 권역
이 부근은 후원 안에서 가장 늦게 지금의 모습을 갖춘 곳이며,
연지는 원래 두 네모꼴과 둥근 한 개의 연못으로 나누어졌다가 일제강점기에 하나의 곡선형으로 바뀌었다.
연못 주변에 육각 겹지붕 정자인 존덕정(尊德亭), 부채꼴 모양의 관람정(觀纜亭), 길쭉한 맞배지붕의 폄우사(砭愚榭) 등
다양한 형태의 정자들을 세웠다. 관람전 맞은편 언덕에는 단칸의 사모 지붕을 가진 승재정(勝在亭)이 날아갈 듯 앉아 있다.
1644년 건립된 존덕정이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관람정과 승재정은 1830년 대 이후에 세워졌다. - 현지 설명문 -
우측부터 관람정, 존덕정, 폄우사, 승재정
마주 보고 있는 관람정과 승재정.
관람정(觀纜亭)
관람지에 속해 있는 정자로 한반도 모양의 연못인 관람지에 놓여 있으며 부채꼴 선형 기와지붕을 한 굴도리집을 하고 있다.
건립 연대는 미상이지만 1820년대에 그린 동궐도에 관람정의 모습이 없고 1908년 제작된 동궐 도형에 그 모습이 그려져 있어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부수적인 요소로 현판의 모양이 풀잎처럼 상당히 독특하다. - 나무위키 -
관람정(觀纜亭)에서 육각 겹지붕 정자인 존덕정(尊德亭)으로 가는 길에 있는 홍예교.
홍예교 위에서 본 관람지에 두 발을 담그고 있는 관람정과 승재정.
존덕정(尊德亭)
관람지에 속해 있는 정자로 동시대의 정자들과 달리 이중 지붕 구조의 육각 지붕으로 만들어진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어서
육우정(六隅亭) 또는 육면정(六面亭)이라고도 불렀다. 정자의 마루도 안쪽과 바깥쪽으로 구분되어 2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4개의 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다. 천정은 우물정자로 구성되고 보개 천장과 같이 화려한 장식으로 구성되었으며
가운데에는 황룡과 청룡이 장식되어 있다. 1644년 (인조 22)에 세워졌다.
정자 내에는 정조가 만천명월주인옹이라고 쓴 글귀가 남아있으며
이에는 모든 하천에 달이 뜨지만 하늘에 떠있는 달은 하나고 그 달이 나니까 왕권은 지엄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 나무위키 -
정자 천정의 가운데를 장식한 황룡과 청룡(2023년 4월 24일 촬영)
존덕정 내에 걸려 있는 현판 <萬川明月主人翁自序,만천명월주인옹자서, 둘째 줄>로 시작되는 정조의 교시.(2023,4.24 촬영)
존덕정과 정조의 교시
존덕정 안 북쪽 벽에 '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는 제목으로 빽빽하게 쓴 현판이 있는데 정조가 집권 말기인 1798년에 직접 지은
글이다. "세상의 모든 시내는 달을 품고 있지만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유일하니, 그 달은 임금인 나이고 시내는 곧 너희 신하들이다.
따라서 시내가 달을 따르는 것이 우주의 이치"라는 강력한 내용이다. 평생 왕권강화를 위해 노력했던 정조의 준엄한 꾸짖음을
듣는 듯하다. 천장 중앙에는 쌍룡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 역시 왕권의 지엄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현지 설명문-
萬川明月主人翁自序,만천명월주인옹 낙관,
모든 강을 비추는 밝은 달 같은 주인이라는 뜻으로, 여러 인재와 백성을 밝게 이끄는 군주를 의미합니다.
정조는 치우침 없이 국정을 이끌어 탕평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탕탕평평 전에서 2024, 1, 10 촬영 -
폄우사(砭愚榭)
존덕정 서편에 위치한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본래는 초익공계 맞배지붕을 하고 있고, 부속 건물이 남향으로 붙어있는
ㄱ자 형태였으나 1908년 그려진 동궐 도형에서는 ㅡ자형으로 그려져 있어 도중에 변형이 있었던 걸로 추정된다.
이 일대의 건물 중에서는 온돌방까지 갖춰있어 겨울에도 사용이 가능한 곳이었다.
액호인 폄우는 '어리석은 자에게 돌침을 놓는다'는 뜻으로,
임금이 자신을 되돌아 보고 어리석음을 깨우쳐 덕을 높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승재정(勝在亭)
승재정(勝在亭)
관람지 옆에 위치한 정자로 정, 측면 1칸으로 익공계 사모 지붕을 하고 있다.
세워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820년대 그려진 동궐도에
지금의 자리에 초정이란 전각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아 그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 나무위키 -
규장각의 뒤쪽에 있는 희우정
주합루 뒤편에 자리 잡은 희우정은 정면 2칸의 작은 전각으로, 왕의 열람실이었다고 한다.
1645년(선조 23)에 초당으로 세웠으며 원래 이름은 취향정(醉香亭)이었다.
1690년(숙종 16)에 가뭄이 심하여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렸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내려 가뭄이 해소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붕을 기와로 바꾸고 희우정이라 개칭했다. - 나무위키 -
연경당(演慶堂) 보물
창덕궁 후원에 위치한 전각으로 정면 6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이다.
1828년(순조 28)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기간에 순조의 진작례를 올리기 위해 진장각(珍藏閣) 옛 터에 세워져 당시 효명세자의
왕권 강화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전각이다. 궁궐의 다른 전각들과 달리 궐내에서 유일하게 민가 형식으로 지어졌는데,
사대부가를 모방했다고 하지만 일반적인 사대부가의 상한선이 99칸인 것에 비해
연경당은 그 규모가 120칸에 달해서 일부에서는 왕자나 공주의 사저인 궁가(宮家)를 모방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사대부가 형식의 전각이지만 안채와 사랑채가 합쳐져 있어 마당을 좌우로 가른 담을 기준으로 공간을 구분하며,
안채의 경우 일반적인 안채와 달리 부엌이 존재하지 않고 별채에 있다.
1865년 고종 때 새로 증축되거나 권역이 넓어져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참고로 효명세자의 사후 순조가 말년에 보낸 곳이다. - 나무위키 -
연경당 정문엔 장락문(長樂門)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장락문을 들어서면 또 하나의 담이 있고 양쪽에 문이 있는데, 왼쪽은 안채, 오른쪽은 사랑채로 들어가는 문이다.
안채로 통하는 수인문이다.
사랑채로 통하는 장양문(長陽門)
수인문으로 들어가면 만나게 되는 안채이다. 우측의 담장 쪽의 건물은 사랑채이고,
안채 전경.
장양문으로 들어오면 만나게 되는 사랑채이다. 좌측의 문은 안채와 통하는 문이다.
사랑채 우측의 동판으로 지붕을 올린 건물은 선향재란 건물이다.
선향재(善香齋)
사랑채 동쪽에 위치한 전각으로 정면 7칸, 측면 2칸이다. 1865년에 연경당을 넓히면서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주로 서재나 손님을 응접하는 접대실의 역할을 했다. 경복궁의 집옥재처럼 측면을 청나라 풍 양식의 벽돌로 세웠고 마루 앞에는
서양식 차양 시설이, 지붕은 기와가 아닌 동판으로 갖춰져 있어 이국적인 요소가 돋보이는 건물이다.
특이한 점으로는 일반적인 건물이 남향인데 비해, 선향제는 동향이어서 습기가 많이 차고 태양열을 제대로 배출해 주지 못함으로
책을 보관하는 서재로는 말짱 꽝이었다고 한다. 이에 온돌을 통해 습기를 빼주어야 했다고 한다. -나무위키 -
전면 7칸의 선향재.
선향재 내부 모습. 넓은 마루방이다.
선향재 동판 지붕 안쪽의 모습.
농수정(濃繡亭)
선향제 뒤에 위치한 정자로 장대석 기단 위에 세워진 정, 측면 1칸의 익공계 사모 지붕 형태를 하고 있다.
선향재와는 동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용도 또한 불명이다.
1886년(고종 23) 고종황제와 왕세자 순종황제가 이곳을 배경으로 사진을 촬영한 사진첩이 현전하고 있다.
선향재의 좌측면은 청나라 풍 양식의 벽돌로 만들었다.
우측의 문은 안채의 후원으로 통하는 문이다. 문 우측으로 살짝 보이는 건물은 별채로 부엌이다.
후원에서 본 농수정과 선향재.
농수정 좌측에 있는 문은 후원으로 통하는 문이다.
佑申門(우신문)은 사랑채 후원과 안채 후원 사이에 있는 문이다.
우신문 앞에서 본 사랑채의 후경.
우신문으로 들어와서 본 안채의 후경, 문 너머로 안채의 정문인 수인문이 보인다.
안채의 후면과 서쪽 행랑채.
서쪽의 행랑채에서 본 안채.
안채와 서쪽 행랑채와 수인문이 있는 남쪽 행랑채.
안채의 대문인 수인문과 서쪽 행랑채.
서쪽 행랑채 끝에서 본 안채,
안채 뒤로 보이는 건물은 별채인 반빗간으로 정면 8칸 측면 1칸의 건물로 부엌으로 쓰였던 건물이다.
창덕궁 후원에서 나가는 길.
창덕궁 향나무 천연기념물.
창덕궁 향나무는 높이가 12m이고, 뿌리 부분의 둘레는 약 5.9m이다. 나이는 약 750년으로 추정된다.
이 향나무는 1830년 무렵의 창덕궁을 그린 <동궐도>에도 그려져 있다.
향나무는 향기가 강해 제사를 지낼 때 향을 피우는 재료로 사용된다.
이 향나무도 역대 임금들의 초상화를 봉안하고 차례를 올리던 선원전 주변에 있어 제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첫댓글 와 방대한 자료
자알~ 즐감 하며
보았습니다~^^
창덕궁 한바퀴 잘 돌았네요 감사합니다 꽃피면 가볼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