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두려움에 떨다
해가 바뀌어 1942년이 되었음에도 영국(England, 英國)의 현실(現實)은 암담(暗澹)하였습니다.
비록 독소전 개전(獨蘇戰開戰)으로 인하여 영국 해협전투(英國海峽戰鬪, BOB) 당시 같은 독일의 대대적(大大的)인 불벼락은 줄어들었고 더불어 독일군의 상륙 위협(上陸威脅)은 상당부분 제거(除去)되었지만,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여러 전장(戰場)에서 영국의 참담(慘憺)함은 갈수록 더해가고 있었고 회생(回生)될 기미(氣味)마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독일의 폭격으로 폐허로 변한 런던
그냥 브리튼(Britain) 섬에 짱 박혀 있는 것이 최선(最善)의 방어책(防禦冊)이었지만, 문제(問題)는 이러한 방어상의 이점(利點)은 반대(反對)로 장애물(障碍物)이기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영국은 생존(生存)에 필요(必要)한 상당부분의 물자(物資)를 해상(海上)을 통하여 외부(外部)에서 공급(供給)받고 있었는데, 비록 막강(莫强)한 영국해군(英國海軍)이 생명선(生命線)을 수호(守護)하는데 적극(積極) 나서고 있었음에도 늑대 같은 독일의 U-보트들에게 수시(垂示)로 강간(强奸)당하기 일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독일의 U-보트들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영국 본토(本土) 밖을 살펴보면 크레타(kreta)에서 쫓겨난 뒤로 독일과 전선(戰線)을 마주하고 있는 유일(唯一)한 장소인 북(北)아프리카에서는 독일의 주력(主力)도 아닌 별동대(別動隊) 수준의 독일아프리카군단(DAK)에게 영국원정군(英國遠征軍)이 일방적(一方的)으로 몰려다니기 바빴고,
아시아에서는 회심(回心)의 Z기동함대(機動艦隊)가 침몰(沈沒)되면서 말레이(Melayu)반도(半島)가 일본에게 접수(接受)되고 버마(Myanmar)와 인도(India)가 위협(威脅)을 받는 지경(地境)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일본 항공모함 아카기(赤城)
↑일본 기동함대 사령관 나구모 주이치((南雲 忠一,1887-1944) 중장 (우) 제임스 서머빌(James Somerville 1882-1949) 제독
↑영국 Z기동함대의 최후 모습
굳이 다행이라면 독일 지상군(地上軍)의 대부분은 러시아 평원(平原)에서 북극곰과 건곤일척(乾坤一擲)의 혈투(血鬪) 중이었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그동안 우호적(友好的)이기는 하였지만 중립국(中立國)이었던 미국이 영국 편으로 참전(參戰)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소련은 독일의 일방적인 공격에 패배(敗北)가 예견(豫見) 될 만큼의 위기(危機)였고 미국은 전쟁을 선언(宣言)하였지만 아무런 준비(準備)도 되어있지 않은 상태(狀態)였습니다.
↑미국의 지원을 얻게 되었지만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우위(優位)인 해군(海軍)으로 하여금 본토(本土)를 바다에서부터 방어(防禦)하는 것 외에는 이런 상황에서 영국이 할일이라고는 딱히 없었습니다.
가끔가다 장거리 폭격기(長距離爆擊機)들을 독일 영공(領空)으로 날려 보내 폭탄(爆彈)을 떨 구고 오기는 하였지만, 이것은 독일을 타격(打擊)하여 전략적(戰略的), 전술적(戰術的)으로 효과(效果)를 얻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우리도 독일의 중심부(中心部)를 공격(攻擊)한다.’ 정도의 정치적(政治的)인 선전행위(宣傳行爲)에 가까운 군사작전(軍事作戰)이었을 뿐이었습니다.
↑독일 심장부에 폭탄을 떨구는 임무를 맡았던 랭카스터 폭격기
군사적 효과(軍事的效果)도 하나도 없고 잘못하면 자국(自國)의 귀중(貴重)한 조종사(操縱士)들과 폭격기(爆擊機)들을 소모(消耗)시킬 수 있는 이러한 무모(無謀)한 폭격작전을 벌인 가장 큰 이유는 그 만큼 영국국민들의 사기(士氣)가 한없이 추락(墜落)하여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허접(許接)한 이탈리아군을 상대로 북(北)아프리카에서 반짝 승리(勝利)를 거두기도 하였지만,
1939년 이후 추축국(樞軸國)들의 공세(攻勢)에 영국은 전세계에서 일방적(一方的)으로 밀려다니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롬멜의 그림자만 보아도 도망 다녀야 했습니다(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독일의 포로가 된 영국군)
이러한 패배(敗北)의 연속(連續)은 자국민(自國民)들에게 엄청난 절망감(絶望感)을 안겨주었습니다.
특히 1940년~1941년 사이에 있었던 BOB는 윌리엄 정복왕(William I of England 1027~1087) 이래 처음으로 섬나라 영국이 대륙(大陸)으로부터 점령(占領)당할 것이라는 예상(豫想)을 들게 만들 만큼 호된 타격(打擊)을 받았습니다. 그만큼 영국민들이 느낀 위기의식(危機意識)과 패배감이 컸습니다. 때문에 이런 어려움을 반전(反戰)시킬 계기(契機)가 영국 위정자(爲政者)들에게는 필요(必要)하였습니다.
↑대책 없이 무너져가고 있던 소련은 영국에게 제2전선 구축을 요청하였습니다. (독소전 개전 초기에 독일의 포로가 된 소련군)
이때, 원래 같이 할 수는 없는 사이였지만 나찌(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 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NSDAP Nazi)라는 공통(共通)의 적(敵) 때문에 자연스럽게 동맹관계(同盟官契)가 된 소련은 영국에게 유럽에 제2전선(戰線)을 만들어 달라고 애원(哀願)하였습니다.
나찌의 대부분을 거의 혼자 상대하고 있던 소련은 체제멸망(體制滅亡)까지 예견(豫見)될 정도의 호된 1941년을 보내었습니다.
그해 겨울 전선이 정체(停滯)되었지만 1942년도 소련에게 전망(前望)이 좋아보이지는 않았고 때문에 독일의 전력(戰力)을 어떻게든 분산(分散)시킬 필요(必要)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