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 탐방일 : 2020년 9월 19일(토)
○ 탐방구간
장의사 당간지주, 총융청 터, 조지서 터 → 탕춘대 터, 세검정, 차일암 → 세검정성당, 세고사→ 자하슈퍼, (백사실계곡), 현통사, 백석동천 → 응선사, 산모퉁이 카페 → 환기미술관 → 창의문 → 윤동주문학관, (윤동주 시인의 언덕) → 윤웅렬 별장 → 현진건 집터 → 안평대군 이용 집터(무계정사지) → 무계원 → 석파정 → 부침바위 터 → 석파랑 → 홍지문, 탕춘대성 → 이광수 별장터(춘헌원)
○ 탐방시간 : 약 6시간20분(09시 ~ 15시 20분, 점심식사시간 포함)
장의사 터 (서울시 종로구 세검정로9길 1, 신영동 218-9)
삼국시대 신라의 태종무열왕 때인 659년에 세워졌다
태종무열왕의 꿈에 나타난 황산벌전투에서 전사한 화랑인 장춘랑과 파랑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이 싸움은 660년 7월로, 죽은 해 보다 창건이 앞서니 후대 사람들이 영웅으로 추대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이 지역이 백제와 신라, 고구려의 세력이 맞물린 전쟁터였다는 점과 깊은 연관이 있다
장의사는 신라가 사라진 이후에도 명맥을 이어간다
고려 때에는 예종, 인종, 의종이 다녀갔고 조선 초 태조의 첫 왕비 한씨의 기신제(忌晨祭)를 지내기도 하는 등 중요한 절이었으며 조선 초기 젊은 인재들 이 사가독서(賜暇讀書)하는 곳으로도 활용되었으 나 연산군 때 절을 철거하고 탕춘대라는 놀이터를 만들었다
장의사는 경도(京都)10영(詠)의 첫 번째로 경치가 그만큼 아름다웠다는 곳이다
이후 장의사는 사라지고, 당간지주만 남게 되었다
♤ 장의사 당간지주
보물 제235호이다
당간이란 일종의 깃대로서 큰 절의 문 앞에 세워놓 아 부처의 공덕을 나타내거나 신성한 영역임을 나타내기 위한 표시로 세우는 시설이다(짐대라고도 부른다)
돌기둥 사이에 탱화를 매단 나무 기둥을 세우고 넘어지지 않도록 위쪽 구멍에 빗장처럼 나무를 꽂아서 고정시키는 방식을 쓴다
보통은 돌기둥 두 개를 나란히 세우고 위 아래로 구멍을 뚫어놓은 형태로 남아있는데 장의사 당간 지주는 위쪽에 하나만 뚫려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높이 3.63m에 한변의 길이가 76cm와 45cm의 크기로 별다른 조각 장식이 없는 단순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간지주가 남아있다는 것은 이곳에 사찰이 있었다 는 것을 의미한다
총융청 터 (서울시 종로구 세검정로9길 1, 신영동 219-4)
인조반정(1623) 이후 후금(청)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어 도성 외곽인 경기도 일대의 방어가 절실 하던 차에 이듬해 이괄의 난 까지 겹치자 기존의 왕실호위를 다시금 보완할 필요에서 만들어졌다
설치 당시 총융군은 수원, 광주, 양주, 장단, 남양 등 경기도 일대의 정군과 속오군, 그리고 별마대군으로 조직되었는데 그 수가 2만에 달했다
1624년(인조 20) 남한산성이 개축되고 이어 수어청이 설치되면서 총융청은 점차 경기도 일대의 방어를 수어청과 나누어 담당하였다
이후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숙위를 보강하기 위하여 겨울 3개월 동안 궁성 숙위를 담당하게 되면서 중앙군의 테두리에 들게 되었다
이렇듯 조선 후기 중앙 5군영의 하나로 설치된 총융청은1750년(인조 26) 총융사를 경기병사가 겸하도록 하고 1757년 경리청(북한산성을 관리하 던 관청, 1712년 설치)을 이관 받으면서 북한산성을 중심으로 한 경기 북부 수도의 외곽 방어를 담당하 는 군영으로 자리 잡아나 갔다
이후 총융청은 정조대에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설치한 장용영에 이속되었다가 순조 초 장용영이 혁파되면서 다시 그 기능을 회복하였다
1846년(헌종 12)에 총위영(總衛營)이라고 개칭 하였다가 3년 후인 철종 원년에 다시 본명으로 고쳤다
1881년(고종 18)) 11월 실시된 군제 개혁으로 어영청, 금위영과 함께 장어영으로 통합되었다가 1884년(고종 21)에 폐지되었다
♤ 총융청의 본청은 설치 당시 사직동 북쪽에 자리했다가 1669년(헌종 10) 삼청동으로 옮긴 뒤, 1747년(영조 23) 경리청(북한산성을 관리하던 관청)을 혁파하고 총융청을 탕춘대(蕩春臺)로 옮기고 이름을 연융대(鍊戎臺)로 바꿨다
1750년(영조 26) 다시 창의문 밖 연융대 자리에 300칸이나 되는 청사를 지었다
♤ 신영동(新營洞)이란 동명도 이곳에 총융청이 이전하면서 새 군영을 지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조지서 터 (서울시 종로구 세검정로 267, 신영동 199-3)
나라에서 사용하는 종이를 만드는 관아인 조지서 (造紙署)가 있던 곳이다
1419년(태종 10) 저화법(楮貨法)을 실시할 때 저화를 만드는 데 필요한 종이를 각 도에서 나누어 만들게 하였는데 그 품질이 떨어지자 도성에서 감독관을 배치하여 종이를 만들자는 건의를 받아들여, 1415년(태종 15) 창의문(彰義門) 밖에 조지소(造紙所)라는 명칭으로 설치하였다가 1446년(세조 12)에 조지서로 개칭되었다
이곳을 택한 이유는 북한산에서 흘러오는 맑은 시내 (홍제천)가 있고 넓은 돌이 많아 종이를 제조하기에 알맞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조지서에서 만드는 종이는 최상품으로 꼽혔기 때문에 주로 왕실에서 사용하거나 중국에 조공품 으로 보내졌다
품질관리도 엄격하여 종이를 만드는 과정에서 잘못이 있었을 때는 처음에는 매 80대를 때렸고, 잘못하는 횟수가 늘어날 때마다 매 10대를 더했다
사지(司紙), 별제(別提), 제조(提調) 등의 관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편성 인원은 필요에 따라 여러 번 바뀌다가 1882년(고종 19)에 폐지되었다
탕춘대 터 (서울시 종로구 신영동 136-9, 도로명 주소 없음)
봄(春)을 질탕하게 즐긴다(蕩)는 탕춘대는 1505년 (연산군 11) 지금의 세검정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신라 고찰 장의사(藏義寺)를 폐지하고 지은 돈대(墩臺)로, 이 일대를 연회장소로 삼고 물가에 수각 (水閣)을 짓고 시냇물이 내려다보이는 바위 위에 탕춘대를 지었다
『연산군일기』12년(1506) 1월 27일을 보면 “장의문(藏義門) 밖 조지서(造紙署) 터에 이궁(籬宮)을 지으려다가 시작하지 않고, 먼저 탕춘대(蕩春臺)를 봉우리 위에 세웠다
또 봉우리 밑에 좌우로 흐르는 물을 가로질러 돌기둥(石柱석주)을 세워 황각(黃閣)을 세우고 언덕을 따라 장랑(長廊)을 연하여 짓고 모두 청기와를 이으니, 고운 색채가 빛났 다.”고 되어 있다
위 기록을 보면 지금의 세검정 앞 냇가에 까지 건물이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기록으로 보아 전년도에 건물이 완성된 것으로 추측이 되며『연산군일기』를 보면 연산군 12년 7월 두 번 이곳에서 잔치를 한 것이 확인 된다
하지만 그해 9월에 중종반정이 일어난 관계로 이 시설은 무용지물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무사를 선발하여 이 일대에서 훈련시켰다고 하여 연융대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 신영동 172번지 세검정 길가에 영조 때 해서 (楷書)로 연융대(鍊戎臺)라고 새긴 바위가 있었는 데 지금은 도로확장으로 존재 하지 않는다
♤ 탕춘대 한지마을 터 (서울시 종로구 신영동 136-8, 도로명 주소 없음)
탕춘대 한지마을은 국가에서 필요한 종이를 만들던 조지서에서 종이를 만드는 일을 했던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조지서가 있었던 세검정 계곡 좌우에는 천혜의 자연적인 조건과 서울에 인접하고 있는 지리적인 여건에 따라 자연스럽게 민간의 지장(紙匠)들이 모여들어 한지를 만들어 생계를 이어가는 한지마을 이 형성되었다
♤ 조선시대에는 이 지역에 지장 수백호가 모여 살았는데, 1961년 까지도 40~50호의 지장의 후예들이 초도지(初塗紙) 등의 한지를 옛날 그대로의 방법으로 생산하였다
1973년 초 까지만 하여도 이 근방에 종이공장이 있었으나 도로확장과 인근에 신영상가아파트가 세워지는 등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세검정 터 (서울시 종로구 세검정로 244, 신영동 168-6)
세검정(洗劍亭)의 유래에 얽힌 이야기로 세 가지가 전한다
먼저, 영조 때 총융청(摠戎廳)을 이곳으로 옮겨 도성 방위와 북한산성의 수비를 담당케 하면서 군사들의 휴식처로 세웠다는 말이 있다
당시 총융청 감관으로 있던 김상채(金尙彩)의 문집인『창암집』(蒼巖集)에는 그것이 1747년 (영조 23)의 일이며 정자는 육각정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과연 조선시대에 군사의 휴식을 위해 정자를 짓는 일이 가능하기나 했는지부터 의심스럽고, 정자가 육각정이었다는 것도 지금의 모양이나 옛 그림에 남은 모습과 달라 쉽게 판단키 어렵다)
다른 하나는 이름에 얽힌 이야기이다
1623년(광해군 15) 이른바 인조반정 주도세력의 일원이었던 이귀(李貴), 김류(金瑬) 등이 이곳에서 광해군의 폐위를 논의하고 칼[劍]을 씻었다[洗] 하여 정자 이름을 ‘洗劍亭’이라 한다는 얘기다
(그 전거(典據)로 들고 있는『궁궐지』에는 단지 “계해년의 반정 때 창의문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세검정이라 이름하였다”(癸亥反正時 由彰義門入 故名洗劍亭)고 나올 뿐 칼을 씻었다는 말은 없다)
또 연산군 때 유흥을 위해서 이 정자를 지었다는 말도 전한다(근거가 분명치 않다)
어느 이야기도 명확치는 않다
종합하여 이해하자면 아마도 조선 초기 언제쯤 경치 좋은 이곳에 정자가 생긴 듯하고, 인조반정 뒤로는 칼을 씻었다는 사연에 평화를 염원하는 뜻을 얹어 이름을 세검정으로 바꿔 부른 듯하며, 영조 때에는 정자의 중건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겸재 정선이 그린〈세검정〉이라는 부채 그림도 있다
〈세검정〉은 주변 산자락이 발을 담그고 있는 계곡물이 듬성듬성한 너럭바위 사이로 콸콸 소리라 도 낼 듯이 넉넉히 흘러내리고 그 옆 높직하고 널따란 바위 위에 정자 하나가 오롯하게 그려진 담채색 소품이다
그러나 이렇듯 적지 않은 사연을 간직한 세검정은 1944년에 가까이 있던 종이공장의 화재로 주춧돌 하나만 남긴 채 소실되었다
[1944년 2월 25일 이웃의 유지공장(油紙工場) 화재로 세검정은 전소(全燒) 되었다 -매일신보-
세검정이 1941년 화재로 없어졌다고 종로구청 안내판에 표기되었는데 확인 후 바로잡아야 한다]
지금의 정자는 1977년에 복원한 것으로, 복원 당시 겸재의 그림을 많이 참고했다고 하지만 그림 속의 정자는 물론 옛 사진 속의 세검정과도 판이하게 다르다
주춧돌은 사각기둥이 아니라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좁아드는 사다리꼴인데 그나마 너무 짧고 체감이 급격해 그 위에 얹힌 정자와 어울리지 못하고 영 어색하다
주춧돌이 짧다보니 그림 속 누각형 정자는 간 곳 없고 그저 작고 평범한 집 하나가 암반 위에 올라앉 은 모습이 되어버렸다
절병통이 사라진 지붕은 형태만 같을 뿐이며 담장도 일각문도 없이 길가에 나앉아 있을 따름이다
서울시 기념물 제4호로, 정면3칸, 측면 2칸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건평은 5.22평이다
♤ 차일암 (서울시 종로구 세검정로 244, 신영동 168-6)
세검정 밑에 있는 너럭바위를 차일암(遮日岩)이라 일컫는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이 바위에 차일(遮日)을 치고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생겨났으므로 이 바위를 차일암이라 하였는데 물이 맑고 바위가 희어서 속세(俗世)를 떠난 것 같은 풍경이었 으므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조선시대에는 실록이 완성되고 나면 내용의 유출을 막고 종이를 재활용 하기 위해 사초(史草)를 이곳 세검정 냇가에서 물에 씻어 인근에 있는 조지서에서 다시 종이로 만들었다
이 때 실록편찬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이곳 부근 차일암(遮日巖)에서 세초연(洗草宴)이라는 잔치를 베풀었다
그래서 세초는 실록이 완성되었음을 나타내기도 하고 세초연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 세초(洗草)
조선시대 실록 편찬이 완료된 뒤 여기에 사용되었던 사초(史草)나 초고들을 파기하던 제도
보통은 물에 씻어 글씨를 지우고 종이는 재생, 활용 하게 했으나 때로는 초본 자체를 소각, 파기하기도 하였다
선조 때까지는 초본들도 정본과 함께 각 사고(史庫) 에 보존했으나, 1616년(광해군 8)『선조실록』을 편찬한 뒤부터 세초가 정례화되었다
세초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실록편찬의 자료로 이용되었던 사관의 사초와 실록편찬과정에서 작성되었던 초초(初草)·중초(中草)·정초(正草) 등이었다
사초는 시정의 득실과 임금의 언동, 인물의 선악 등을 기록한 극비서류이며, 시정기는 수집된 자료를 날짜순으로 종합 정리한 것이다
♤ 홍제천과 환향녀
홍제천은 북한산에서 발원하여 홍지동, 홍은동 을 지나 백련산을 감싸돌아 불광천과 합류하여 난지도 를 끼고 한강으로 흘러간다
병자호란이 끝난 청나라는 왕자와 대신의 자녀를 인질로 보내고, 황금 100냥과 백은 1,000냥을 비롯한 20여 종의 공물을 바칠 것을 요구하였고, 50만 명(여성이 20만 명)의 포로와 인질을 끌고 심양으로 갔다
양반 부인, 사대부 여인네, 첩, 어린 처녀, 일반인의 부인들 할 것 없이 색출해 간다
2달을 걸어 심양에 도착한 조선인들은 가는 도중 말채찍으로 맞으며 추위와 기아에 죽임을 당하고, 강간 당해 죽고, 병들어 죽고, 강에 뛰어 죽은 이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다행히 심양에 도착한 조선인들은 무기를 다룰 줄 아는 남자들은 명나라와 전쟁에 대비해 징병 되었고 철을 다룰 줄 아는 기술자들은 그나마 대접을 받게 된다
인물이 뛰어난 여인들은 궁중에 들어가고 그 밖의 남자들은 머슴으로 여자는 첩 또는 창부로 노예시장 에서 대부분 팔려 나가고 어떤 이는 서역으로도 가게 된다
심양이 큰 도시이긴 하지만 한꺼번에 몇십만 명을 수용하기에 힘이 들어 청 태종은 항복의 선물로 조선에 속환하겠다고 통보를 한다
속환 방침이 발표되어 심양 거리는 매매 시장이 열려 남자는 한 사람당 닷 냥 여자는 석 냥 정도이고 양반은 열 냥 기준이었으나 돈 많은 사대부들이 가족을 빨리 빼오려고 아들 1,500냥 딸 1,000냥 첩 600냥의 높은 매매가로 인해 돌아가는 수는 매우 적었다
조선의 조정도 나름 노력했으나 경제 논리에 맞게 시장에서 형성되는 가격으로 되어 150~200 냥으 로 형성되어 가문의 대를 이을 장남이 먼저 딸이나 부인은 나중에 돈이 생길 때 데려오게 된다
여인들은 성적 노리개 첩 창부로 팔려 정절을 잃었다는 죄책감에 청나라에 주저앉거나 아이까지 낳아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9년 만에 귀국하면서 조선과의 관계가 안정되면서 10년 동안 조선으로 돌아온 여인이 5만 명으로 추정된다
여인들은 압록강을 건너면서 불안감은 있었으나 가족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며느리 아내 누이를 맞이하는 조선 남자들의 심정은 매우 복잡했다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법인데 그녀들은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향에 돌아온 여자라는 의미의"환향녀"의 이름은 오랑캐와 잠자리를 한 더러운 여자라는 악의적인 뜻으로 불리게 되었다
조선 시대 사대 부가의 이혼은 임금의 허락을 받아야 되는데 계속 상소를 올렸으나 인조는 허락하지 않는다
별당에 처박아 놓고 모든 식솔의 출입을 금지하고 이혼은 안 되고 부인들이 의지할 곳을 잃은 마음은 어떠했을까
평민들은 임금의 허락 없이도 이혼할 수 있었으므로 아내와 며느리들을 헌신짝처럼 버려 버렸다
인조는 환향녀들이 각 고을마다 지정된 강에서 몸을 깨끗이 씻으면 심신을 모두 정화된 것으로 보고 각 집안에서 따뜻하게 맞이하도록 명을 내린다
나라가 정절을 회복시켜주자는 면죄부였다
한강 소양강 금강 예성강 대동강을 회절강으로 삼는다
만일 회절한 환향녀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례가 있으면 국법으로 다스린 다고 했다
한양과 경기도가 고향인 여인들은 홍제천 깊숙한 곳(홍제원 : 홍제동 137-25)에서 몸을 씻었다
모래가 많아 모래내라 부를 만큼 물이 맑았다
홍제천은 발 디딜 틈 없이 몸을 씻는 여인들로 북적였다
그녀들은 자신을 구해준 임금님의 넓은 은혜를 기리기 위해 이곳을 "홍은"이라 했으니 홍은동의 유래이다
언제 그랬냐 싶을 정도로 홍제천 안에는 청둥오리가 새끼들을 데리고 물살을 가르며 다니고 큰 잉어들이 무리 지어 어슬렁거리고 홍제천 위의 고가도로는 그늘이 되기도 하고 비막음이 되기도 한다
시원한 폭포에 인근 주민의 쉼터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무기력한 국가와 기득권 남성들의 전유물로 이름도 없이 사라진 한 많은 조선의 여인들의 한탄을 누구에게 말하겠는가
그때나 지금이나 유유히 흐르는 홍제천의 맑은 물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런 말도 없이 그냥 한강 으로 흘러 서해바다로 간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환향녀가 화냥년으로 바뀌었고 그녀들이 낳은 자식은 호로자식으로 불리워 졌다
일제 강점기 때 위안부와 한국 전쟁의 양공주, 양갈보, 양색시의 주체는 전부 여성들이다
첫댓글 "부암동의 하루" 기대됩니다. 부암동은 백사실계곡으로 가는 길 초입에서 만나고 했던 동네네요. 감사합니다^^*
네~ 한 바퀴 돌아봅니다 ^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