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 페르시아 제국과 페르시아 군대 활과 말의 사용(BC 6세기)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2. 1. 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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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페르시아 제국과 페르시아 군대
활과 말의 사용(BC 6세기)
요약 기원전 6세기 무렵, 페르시아 제국은 고대 아시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게 된다. 페르시아 군은 민족별로 다양하게 무장했는데, 주축을 이룬 것은 기병대였고 활과 투창으로 무장했다. 전장에서 활과 말을 잘 사용해 최강의 군대가 되었다.
고대국가, 전쟁에 의해 세워지고 패망하다
벽화에 나타난 페르시아 궁병들의 모습
수사의 다리우스 궁전 대계단 벽면에 있는 벽돌 부조.
고대국가는 전쟁에 의해 세워지고 전쟁으로 패망했다. 일찍이 지중해 동쪽 나일 강 유역에서 터를 잡고 출현한 국가 이집트는 주위의 모든 나라 위에 군림했던 고대의 최강국이었다. 이집트는 인접한 약소국들을 하나하나 점령하고 동으로 진출하여 유프라테스 강 유역까지 세력을 뻗쳐나갔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사에서 어떠한 강국도 천년만년 세력을 누린 나라가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이집트는 아시리아인들(오늘날 북부 시리아에서 흥기한 민족들)로부터 도전을 받고 그들과의 전쟁에서 패망했다. 아시리아도 이집트와 같은 전철을 밟으며 영토를 최대로 넓혀나갔다. 그들은 이집트를 정복하고 동으로는 소아시아 및 카프카스 산맥 지역까지 판도를 넓히고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똑같은 방식으로 아시리아는 새로운 강자 바빌로니아(오늘날 이라크)에게 망했고, 바빌로니아는 다시 페르시아(오늘날 이란)에게 몰락했다.
페르시아, 고대 아시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다스리다
기원전 6세기 무렵 페르시아 왕 키로스(Cyros, BC600경~530)는 위대한 세계정복자로서, 바빌로니아를 정복하고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인도의 인더스 강까지 진출했다. 그와 그의 아들이 영토를 확장시키는 동안 페르시아 제국은 고대 아시아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나라가 되었으며, 다리우스 1세(BC521~486) 당시는 서쪽의 지중해 지역으로부터 동쪽의 인더스 강 유역까지 모두 22개 속주를 지배했다.
키로스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 왕 키로스.
페르시아 왕은 대제국을 통치함에 있어서 먼저 정복지역의 군주들을 친절하게 대우해주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실권을 주지는 않았다. 그 대신 총독을 두고 행정과 정치를 관장하도록 했다. 아시리아가 철권정책으로 정복지역을 다스린 데 비해, 페르시아는 관용정책을 펴서 페르시아 지배에 대한 지지를 받아내려 했다. 그렇다고 지배당한 민족들이 지배하는 페르시아인들을 환영하고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일시적으로 크게 저항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페르시아의 강력한 군대, 대내외에 영향을 미치다
페르시아가 대외적으로 대제국을 지키고 대내적 반란을 효과적으로 방지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강력한 군대 덕분이었다. 페르시아군은 막강한 군사력을 유지했다. 규모 면에서 나폴레옹의 군대와 버금갔고, 조직 및 전술 차원에서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페르시아는 정복지역의 사람들로 군대를 충원시켰다. 그렇게 하여 본국 부대를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시리아의 과오로부터 배운 것이다.
페르시아는 이집트와 몇몇 주요 지역에 상비군을 운영하고, 유사시는 각 지방에서 징집하여 제국군대를 30만 명까지 확보했다. 군 조직은 10진법 편제로 각각 10명, 100명, 1,000명, 10,000명 단위의 부대와 부대장으로 편성했다. 부대장은 페르시아인들로 구성했다. 항상 최소 10,000명 이상을 유지했던 상비군은 모두 페르시아인들로 구성했다.
활과 투창으로 무장한 기병대, 페르시아 군 주축을 이루다
페르시아군은 각 민족별로 다양하게 무장했다. 바빌로니아 인 부대는 철제 헬멧을 착용하고 장창과 곤봉으로 무장했다. 박트리아 인들은 활과 도끼를, 파플라고니아 인들은 투창을 사용했다. 사르가트 유목민들은 주로 기병들로서 올가미 밧줄을 사용했다. 한편 순수 페르시아인들로 편성된 부대의 경우, 보병은 가끔 단검과 단창을 휴대하기도 했으나 주무기는 활이었다. 방패와 갑옷은 각각 나뭇가지와 천으로 만든 것을 사용함으로써 가볍게 했다. 그런데 페르시아군에 있어서 주축을 이룬 것은 기병대였고, 그들은 활과 투창으로 무장했다. 페르시아군은 활을 잘 사용하기로 유명했고, 활의 최대 유효사거리는 162m 정도 되었다.
스웨덴 기병대
페르시아 이후, 전쟁에서 오랫동안 사용된 기병대의 모습.
페르시아 전술은 일반적으로 기병공격을 펼친 다음 보병이 활로 집중사격하는 것을 특징으로 했다. 비록 전쟁에서 보병과 기병을 협동하여 사용하기는 했지만 페르시아군의 가장 큰 약점은 인종적 · 지역적으로 서로 다른 병력을 징집하여 통합 군대를 이루지 못한 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군은 기병전술을 마스터한 세계 최초의 군대였다는 사실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키로스의 기병 사용, 기병 전술의 표준이 되다
키로스는 본래 기병을 사용할 줄 몰랐다. 그러나 그는 리디아의 크로에소스 왕과의 전쟁에서 낙타부대를 사용하여 적 기병대를 격파한 바 있었다. 그때 그는 기병의 잠재적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 후 기병을 핵심으로 이용하면서 페르시아군 전술을 발전시켰다. 이와 같이 적으로부터 전법을 터득하게 되는 것은 전쟁사에서 흔한 일로서, 이후에도 우리는 그러한 예를 자주 보게 된다. 키로스가 낙타부대를 동원하여 일시적으로 성공을 거둔 것은 말들이 낙타를 무서워하여 가능했으나, 대규모의 전쟁이나 정복전쟁에서 낙타부대의 이용에는 한계가 있었다.
크로에소스 왕
리디아의 마지막 왕. 키로스와 전쟁을 벌였다.
페르시아군은 기본공격대형을 취할 때 가운데에 보병을 배치하고 좌우 양쪽에 기병을 배치했다. 그리고 기병으로 하여금 적군의 측면과 후면을 공격하도록 하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이 방법은 그 후 오랫동안 기병전술의 표준이 되었다. 페르시아군은 최소 2만 명 이상의 기병을 갖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페르시아 이후 기병은 전쟁에서 오랫동안 광범하게 사용되었다. 심지어 기관총이 판을 친 제1차대전 때도 독일과 프랑스는 각각 10만 명에 이르는 기병을 보유했었다.
페르시아 군, 효과적인 기병공격으로 최강 군대가 되다
인간과 비교할 때 말은 크고 빠르며 상대를 놀라게 하는 짐승이다. 말을 탄 기병이 공격해올 때 보병이 도망가지 않고 버티는 데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무서움을 타고 쉽게 무너지는 보병 전열에 대해 기병은 매우 성공적인 공격을 할 수 있었다. 기병공격은 또한 도주하는 적을 추격할 때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입혔다.
반면에 말들은 상대가 당당히 버티고 있을 때, 특히 창을 휴대하고 있는 전열에 대해서는 쉽게 공격하지 못하고 접근하기 전에 먼저 피했다. 이것은 동물들의 본능이다. 기병공격을 할 때 지휘관이 내려야 할 가장 어려운 결정 중의 하나는 적절한 시간을 언제로 잡느냐 하는 것이었다. 너무 빨리 공격하면 말들이 놀라고 역습당할 우려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적 보병에 대한 기병공격은 적 전열에 빈틈이 발생할 때로 한정했다. 기병은 주로 정찰활동을 하고, 일단 공격을 개시할 때는 먼저 적 기병을 노렸다. 이때도 측후방을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그리하여 적 기병이 무너지고 동시에 보병이 당황하는 순간에 공격을 개시했다.
이처럼 페르시아군은 전장에서 활과 말을 잘 사용하고 고대 서아시아 세계에서 최강의 군대를 자랑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페르시아 제국과 페르시아 군대 - 활과 말의 사용(BC 6세기)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2010. 7. 16., 정토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