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9일 (금) 촬영.
박종인의 땅의 歷史
김옥균의 흔적 위에 서 있는 매국 귀족 박제순의 돌덩이
서울 화동 2번지 정독도서관 본관 건물 뒤편, 정독도서실 본관 건물 앞 철책 속에 커다란 돌덩이가 있다.
돌에는 한자 24글자가 새겨져 있다.
圓井之石 盖前朝物 井㽜而堙 惟石之屹 光武四年 冬平齋識
원정지석 개전조물 정원이인 유석지흘 광무사년 동평재식
뜻은 이렇다.
'둥근 우물돌이다. 아마 고려 때 것 같은데 샘은 매립돼 흔적이 없고 돌만 우뚝하다. 광무4년(1900년) 겨울 평재(平齋)가 적다.
옆에 안내판이 있는데 이렇게 적혀 있다. '이 우물에 새겨진 명문을 해석한 결과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료라 여겨져 현재와 같이
관리하게 되었다. 2000년 8월 1일 정독도서관장'
이 글을 적은 사람 '평재'는 1905년 대한제국 외부대신 자격으로 을사조약에 도장을 찍었던 평재 박제순이다.
우물돌이 남아 있는 바로 이 자리는 박제순이 살던 집터다. 규모는 지금 도서관 전체 부지 면적 1만 1000여 평 절반인 5672평이었다.
그러니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료'라는 애매한 말로 설명하느니 하지 않는 게 나았다.
박제순에 대해서 할 말이 우물물만큼 깊고 차가우니까,
박제순 돌덩이만아니다. 정독도서관에는 눈여겨볼 만한 표석과 역사적 흔적이 숱하다.
지금은 여러 가지 목적으로 책을 접하려는 시민으로 붐비는데, 100년 전까지 이 도서관 터에는 숨 막히는 역사적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김옥균과 서재필, 그리고 박제순과 식민 시대까지 도서관 터 땅 팔자로 훑어보는 격변 근대사.
어느 여자의 청원서와 김옥균
'저는 예전에 한성 북부 홍현(紅峴)에 거주하다가 갑신년(1884)에 국사범으로 바다 바깥 귀신이 된 전 참판 김옥균의 처이온데
온 가족은 어육(魚肉)의 화를 당하고 재산은 몽땅 적몰 당하는 변을 만났나이다.
1909년 1월 29일 갑신정변 주역 김옥균 아내 유 씨가 당시 대한제국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청원서를 올린다.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제 망부가 죄를 탕칙받고 관작을 회복했으나 살 곳이 전무하오니 북부 홍현에 있는 관립고등학교가 제 집터 이온 즉
미망인 심정을 헤아리시어 처분하기를 천만절축하나이다.' (각사등록근대편, 청원서2, '김옥균 처의 청원서'. 1909년 1월29일)
1884년 12월 4일(이하 양력) 김옥균이 일으킨 갑신정변은 48시간 만에 실패로 끝났다.
주모자들은 망명하고, 망명하지 못한 자들은 거리에서 죽었다. 가족은 연좌해 처형되거나 자살했다.
그리고 재산은 파가저택(破家潴澤), 집을 부수고 못을 만들어 흔적을 없애버렸다.
1894년 3월 28일 고종 정권이 보낸 자객 홍종우에 의해 청나라 상해에서 암살된 김옥균은 4월 14일 한성 양화진에서
'조선왕조 최후의' 부관참시이자 사후 능지처참을 당했다.
5월 31일 고종은 역적 처형을 축하하는 대사면령을 발표했다. 그런데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조선에 갑오개혁정부가 서자
고종은 이듬해 1월 22일 김옥균의 관작 회복 칙령을 내렸다.(1094년 음 12월27일'고종실록')
김옥균 아내 유 씨는 바로 이 칙령에 근거해 나라가 가져간 재산을 돌려달라고 대한제국 총리대신에게 청원서를 올린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적시한 옛 집터가 홍현(紅峴)이었고' 1909년 당시 그 '붉은 고개'에 관립고등학교가 들어서 있었다.
그 관립고등학교가 훗날 경기고등학교로 이어졌고, 경기고가 서울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학교 터는 도서관으로 바뀌었다.
정독도서관 잔디밭에는 김옥균 집터임을 알리는 표석이 서있다.
김옥균은 고개 아래 가회동 박규수 집에서 동료들과 모여 개화 이론을 배웠다. 박규수는 북학파 태두 연암 박지원 손자다.
함께 공부했던 홍영식, 서재필이 갑신정변을 같이 주도했다. 정변 실패 후 홍영식은 거리에서 살해당했다.
아버지인 전 영의정 홍순목은 집에서 가족을 죽이고 자살했다. 피 칠갑이 된 채 방치됐던 집은 훗날 미국 선교사 호러스 알렌이
인수해 병원을 차렸다. 알렌은 정변 때 죽을뻔한 왕비 민씨 조카 민영익을 치료해 준 의사였다.
서재필은 김옥균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가족은 누구는 자살했고 누구는 살해됐고 누구는 노비가 됐다가 죽었다.
땅이 잊어버린 혁명가 서재필
서재필은 김옥균 옆집에 살았다. 그런데 서재필 흔적은 도서관 구내에 보이지 않는다.
미국에서 재혼 후 낳은 딸 뮤리얼 제이슨은 1950년대 정부를 상대로 토지 소유권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1956년 4월 12일 대법원은
경기고 부지 가운데 3443평을 서재필 소유로 반환하라고 확정 판결했다. '경기90년사'(경기고등학교동창회, 1990)에 따르면
'정부는 예산 문제로(반환이나) 대금 지불을 미뤘고' 결국 경기고는 1972년 강남 이전을 결정했다.(경기90년사',P55)
후배 서재필과 선배 김옥균은 그렇게 북촌 좁은 골짜기에서 어깨를 부딪치며 살면서 근대화와 대(對) 중국 독립 명분을 쌓았다.
그러니 정독도서관 잔디밭에 서재필 표석 또한 있어야, 김옥균 표석이 완성된다.
中等敎育 發祥地
대한 광무 4년(서기 1900년) 10월 3일 나라에서 본교를 이 자리에 창설하였으니 실로 우리 중등교육의 획기적인 사실이며
관립으로 처음 되는 일이다. 일국의 영재 여기 모여 배운지 60여 년 배출된 뚜렷한 인재 그 수 만을 넘어 헤아리기 어려우니
빛나는 전통 가히 국내에 제일로 꼽겠다. 이제 개교 63주년을 맞아 본교가 중등교육의 발상지임을 기념하고자 동창회장 김성진씨 발의하여
동문 전신용씨의 성력으로 이 비를 세우니 이는 다만 본교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에 그칠 뿐 아니라 우리나라 교육에 뜻있는 일로
배우는 후배들의 자각을 촉구하며 앞으로 본교의 무궁한 발전과 나아가 우리 중등교육의 참다운 육성을 바란다. (비문 내용)
1963년 10월 3일 경기중 고등학교장 원흥균.
경기고등학교 이전 기념비.
이 자리는 1900년 고종 황제께서 최초의 관립 중등학교로 세우신 경기고등학교가 있던 곳이다.
나라의 으뜸가는 인재들을 76년간 길러 내던 중, 학교는 더 큰 교육의 사명을 위해 1976년 2월 20일 강남구 삼성동으로 옮겨 갔기에
이 배움의 터전을 길이 기념하려고 한다.
1978년 8월 일. 경기고등학교장 서장석. 경기고등학교 동창회장 권성기. ( 비의 뒷면에 새겨 있는 글)
관립 학교의 설립과 박재순
1899년 대한제국 정부는 정덕(正德), 이용(利用), 후생(厚生)을 갖춘 실업인 양성을 목표로 관립 '중학교 관제'칙령을 발표했다.
(1899년 4월 4일'고종실록') 그리고 이듬해 10월 현 정독도서관 자리에 관립 중학교가 개교했다.
1880년대 이미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사립학교들이 설립됐지만 제국 학교는 한참 늦었고, 교과 내용 또한
1900년 3월 '중학교규칙'에 규정된 전문과목은 빠져 있었다.(신편한국사 40, '청일전쟁과 갑오개혁-교육제도',국사편찬위)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나라가 사라졌다. 관립 한성고등학교로 운영되던 학교는
1911년 총독부 1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경성고등보통학교로 바뀌었다. 초대 교장은 홋가이도 교육자 오카모토 스케(岡元輔)였다.
학생이 늘어나면서 학교 부지 확장이 이슈가 된 1918년 2월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학교를 방문했다.
방문 2년 전 박제순이 죽었다. 총독부가 만든 관제 성균관'경학원'대제학으로 있다가 죽었다.
경성 용산역에서 열린 영결식에는 1000여 인파가 몰렸다. 자작 작위는 아들 박부양이 계승했다. 손자 박승유는이에 반발해
일본군에 자원했다가 탈출해 광복군 활동을 하며 해방을 맞았다.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박승유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박제순 집은 지금으로 치면 정독도서관 잔디밭 가운데에서 본관 뒤편 언덕 너머까지였다.
그런데 박제순은 한일병합 공로로 자작 작위를 받은 귀족이 아닌가. 그래서 교장 오카모토도
그 생전에는 "학교가 좁아서 ... 토지를... 좀..." 따위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하세가와가 학교를 찾았을 때 집은 폐허였다.
그때 총독부 학무국장 세키야데이사부로(關屋貞三郞)가 "저 집터를 쓰면 된다"라고 총독에게 제안했다. 그리되었다.
이후 학생들이 고지대를 깎아 저지대를 메우는 작업을 했고, 1919년 현재 규모 부지가 완성됐다. (이상 '경기90년사', p 120)
그 흔적이 앞에서 말한 우물돌 돌덩이다
1990년에 발간한 '경기 90년사'에는 이 돌을 1970년에 발견했고 정체는 박제순 집 우물돌이라고 기록돼 있다. 따라서
2000년 8월 1일 '정독도서관장'명의로 세워놓은 '역사적 의미' 운운하는 안내판은 대단히 비겁하다. 있는 그대로 안내하면 되는 것이다.
2023년 4월에 새로 만들어 세운 안내판.
김옥균 시호 받던 날
나라 잘 만들겠다고 일어섰다가 그 나라가 살해한 혁명가 김옥균은 집을 빼앗기고 집안은 박살 났다.
아내 유 씨 청원은 거부됐다. 대신 이듬해인 1910년 6월 29일 통감부 꼭두각시 융희제 순종은,
아관파천(1896) 직후 노변 척살당하고 관직 삭탈된 김홍집, 어윤중과 함께 김옥균을 대광보국숭록대부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하고
시호를 내리라 명했다.(1910년 6월 29일 순종실록)
전광석화처럼 부관참시와 능지처참을 당하고 또 9개월 뒤 전광석화처럼 복권된 지 16년 만이었다.
한 달이 지난 1910년 7월 29일 관립한성고등학교 옛 김옥균 집터에서 황제가 내린 시호 교지를 받는 '연사례(延諡禮) 의식이 열렸다.
시호는 '忠達(충달)'이었다. (김윤식,'속음청사'14 (한국사료총서 11집), 1910년 7월27일) 또 한 달 뒤 나라가 사라졌다.
맑은 가을날 정독도서관에 가보시라. 무엇이 보이는가,
가을비 궃게 내리는 날 정독도서관에 가보시라, 무엇이 보이지 않는가. 그 흔적들 모두가 역사다. 조선일보 박종인 선임기자.
조선 말기에 일어난 주요 사건들.
1876년 2월 26일 - 조일수호조규 체결(조선-일본) 1875년 9월 일본이 일으킨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되었다.
최초의 근대적 조약으로 조선의 자주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조선에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1882년 7월 23일 - 임오군란,
신식 군대(별기군)와의 차별에 분노한 구식 군인들이 개화정책과 집권 세력에 저항하여 난을 일으켰다.
사태 수습을 위해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였으나 곧 청으로 납치되었고,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이 커졌다.
1882년 8월 30일 - 제물포조약 체결(조선-일본)
임오군란을 계기로 일본과 체결한 조약으로서 일본에 손해배상금과 군사 주둔권,
일본에 사죄하는 사절 파견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일본공사관 수비를 구실로 서울에 일본 군대가 파견되었다.
1882년 10월 4일 -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조선-청)
임오군란 후 청과 체결한 통상 규정으로서 조선이 청에 '속해왔던 나라'임을 적어 넣었다.
이로써 조선에 대한 청의 간섭이 강화되었다.
1882년 5월 22일 -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1883년 5월 20일 - 푸트 미국 공사 조선 부임
1883년 9월 23일 - 미국에 보빙사 파견
1883년 11월 26일 - 조영수호통상조약 체결(조선-영국. 정의 중재 없이 직접 협상))
1883년 11월 26일 - 조독수호통상조약 체결(조선-독일, 주청 독일 공사였던 막스 폰 브란트가 청에 알선 요청))
1884 년 6월 26일 - 조이 수호 통상조약 체결(조선-이탈리아. 조약 체결을 위해 전권대신 파견, )
1884 년 12월 4일 - 갑신정변.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 개혁파가 서구식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이다.
1894년 7월 25일 - 청일전쟁.
조선을 사이에 두고 청과 일본의 대립이 점차 심화하였다.
일본은 1894년 7월 경복궁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도발을 시작하였고 주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은 1895년 4월에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였다.
1895년 10월 8일 - 을미사변
조선은 러시아를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려 하였다. 일본은 조선의 친러 정책 배후가 명성왕후라고 판단하였다.
당시 일본 공사였던 미우라는 일본군 수비대, 일본 공사관원, 영사 경찰, 낭인 등을 동원하여 경복궁을 기습하고
명성왕후를 시해하였다. 이 사건으로 국왕 고종은 경복궁에 갇히게 되었고, 일본은 조선의 정부를 장악하였다.
1896년 2월 11일 - 아관파천
을미사변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끼던 고종은 비밀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고종은 1년여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렀다.
이 때문에 조선의 친일 정부는 무너졌고 러시아의 영향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1896년 4월 1일 - 고종의 특사 민영환 러시아 파견
아관파천으로 정권을 회복한 고종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했다. 새로 즉위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조선에 대관식 축하 사절 파견을 요청하였고, 고종은 민영환을 특명 전권공사로 임명하여 대관식에 파견하였다.
민영환은 대관식에 참여한 이후 경제적, 군사적 도움을 요청하는 고종의 친서를 황제에게 전달하였다.
1897년 2월 20일 - 고종, 경운궁으로 환궁
아관파천 이후 고종의 환궁에 대한 여론이 커져갔다.
고종은 일본이 장악한 경복궁 대신 외국 공사관과 가까운 경운궁을 새로운 왕궁으로 선택하였다.
1897년 2월 20일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이곳을 새로운 국가의 중심으로 삼았다.
1897년 10월 12일 - 고종, 대한 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
고종은 경운궁 환궁 8개월 만인 10월 12일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올렸다.
고종은 나라의 이름을 대한 제국으로 고치고 토지측량, 서울의 도시정비, 산업의 발전, 군사력의 강화,
대한국국제 반포 등 부강한 국가를 만드는 근대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나갔다.
1899년 9월 11일 - 한청 통상조약 체결 (대한 제국- 청)
대한 제국이 선포된 2년 후 대한 제국은 종주권을 주장하던 청과 대등한 관계의 근대적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대한 제국은 수백 년간 지속되어온 중국 중심의 외교 관계를 청산하였다.
그러나 청의 외면으로 주청 대한 제국 공사의 파견은 조약 체결 후 3년이 지나서야 실현되었다.
김옥균(金玉均,1851~1894)
김옥균은 조선 말기의 예술가, 정치가, 사상가, 급진개화파이다.
1872년 문과 장원급제 후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쳤고, 충의계를 조직해 개화사상 확산에 힘썼으며,
동남제도개척사 겸 관포경사에 임명돼 울릉도와 독도를 개척했다. 임오군란 후 일본식 급진 개혁을 주장했으나,
양무운동식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외척 민씨 세력에 번번이 발목을 잡히다 못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얼마 안되는 병력 부족으로 청나라의 개입에 막혀 3일 만에 실패했으며 일본으로 망명했다.
청일 전쟁의 발발 직전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홍종우에게 암살됐다.
조선으로 송환된 시신은 부관참시 후 8도에 효수됐다. 청일 전쟁 때까지 중일 두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그의 존재는
늘 뜨거운 감자였으며 동양 3국 어디에도 그의 자리는 없었다.
후일 개화파가 집권한 뒤 복권됐고 일제강점기 순종에 의해 충달공의 시호가 추서됐다.
김옥균은 1851년 2월 23일에 충청도 공주군에서 인조 때 우의정을 지낸 문충공 김상용의 9대손 김병태와 부인 은진 송 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살결이 '백옥같이 곱고 희다'고 하여 이름을 '옥균'이라 지었다고 한다.
6살 때 김옥균은 5촌 당숙이자 당대 정계 거물인 김병기의 양자가 되었다. -이하 생략 - 출처 위키백과
급진 개화파 지도자의 말로
홍영식 - 고종의 경들은 날 놔두고 어딜 가는가?"라는 말에 마음이 흔들려 도망치는 걸 포기하고 박영교와 함께 고종을 끝까지 호위하였다.
위안스카이와도 안면이 있었고, 벼슬도 꽤 높은 사람이라서 "죽이진 않겠지" 했던 것 같지만 오조유가 이끈 청군이 고종을 데려가려 하자
이를 만류하던 과정에서 조선군에게 살해당했다. 덤으로 아버지 홍순복은 영의정이었음에도 그 일로 자결한다.
김옥균 - 일본으로 망명하여 10여 년을 방랑하며 지낸다. 내내 고종이 보낸 자객을 잘 피해 다니다 상하이에서 결국 자객 홍종우에게 살해
당한다. 이후 시신은 보존되어 조선으로 돌아오고, 그의 시신은 오체분시를 당하고 머리는 한성에 효수되며 시신은 전국 팔도를 유람한다.
참고로 양부 김병기는 갑신정변 이후 6~7년간 옥살이하다가 죽었고, 생부와 동생도 옥사했으며, 어머니와 여동생은 자결했으며,
아내와 딸은 노비가 되었다.
첫댓글 서윤도심 역사
탐방 수고많으셨습니다
슬픔.기쁨 가득한
기행문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