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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도 못 산다’지만, “천 년을 살고저”
크리슈나무르티 : 꺼지지 않는 불꽃,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위하여
-- "성인(聖人)"의 시대를 살면서, “내가 안 바뀌면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Because after all, look at, if you objectively, really look at your life, the daily life that you lead, what is it? A shoddy, miserable, contemptuous life, ugly, fighting, fighting, fighting, in sorrow, conflict, misery -- that is what our life is. I don't think anyone can dispute that.
결국, 자기 인생을 아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면, 실제로 영위하고 있는 일상적인 삶이라는 게, 그게 뭐예요? 천박하고 비참하면서도 방자한 삶에다가, 슬픔과 갈등으로 처참하고도 추하게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우는 것 -- 그게 우리가 말하는 삶입니다. 이걸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지요.
-- Jiddu Krishnamurti, Talk 3, Rajghat, 30 November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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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5] 그러니 “인생이 고해”라는 거고요
봄꽃, 여름꽃 갖가지 다 피었다 지고, 이제 순리에 따라 열매 맺는 계절, 정말로 서늘한 “가을”이 왔군요. 시원섭섭하게 왔습니다.
아침, 저녁으로는 누구처럼 오히려 쌀쌀맞기도 하군요. 한가위 지났으니 당연히 서늘해지겠지요. 온난화라는 게 더울 때만 느껴지는 건지, 마냥 남 얘기인 듯하고요.
은근히, 알게 모르게, 인생이라는 게 요모냥요꼴이 아주 당연하다며 살아들 가고 있는 건데 말씀입니다. 거기서 진짜로 “고모냥고꼴이 인생이겠냐?” 묻고 계신 거지요. 너무나 걱정근심에 익숙한 나머지, ‘홀가분하다’는 게 뭔지, 다들 알지도 못하는데요.
그러니 저런 말씀들이 애초에 사람들 귀에 잘 들릴 말씀이 아닌 거지요. 누구 어떤 이가 대단한 것처럼, 뭔가 그럴 듯하게 보인다고 해도, 그건 전부 다, 피차, ‘나’의 발광에 농간에 농단에 지나지 않는 거고요. 하지만 우짜등간에 인생을, 좀 ‘활짝’ 피게 살아야 안 되겠습니까? 다들 하나부터 열까지 잔뜩 ‘주눅’ 든 채로다가······. 정작, 그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니까는.
저러면서 어찌, 훈훈하고 아름답고 홀가분하게, 의미가 좀 있도록 살 수가 있겠습니까? 허구헌날,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속시끄럽게스리 걱정에 근심에! 두려움에 벌벌 떨다가도 또한 슬픔에 쩔쩔 매야만 합니다.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 매본 사람은 알게 된다!’지만.. ‘가지 많은 나무’에 아스라이 흔들리던 그 새벽 잎새들! 내 걱정근심을 대신해주는 손짓에. 설령, 인간들이 꼭 그렇게 살도록 ‘진화’해온 거라고 해도, 그게 오롯이 “숙명”은 아니라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다들 그저 “못 죽어 산다!”고들 하는 소리가 입에 붙어서는 당최 떨어질 줄을 모르니······.
순간순간으로 “삶”은 놓쳐버리고 “알아채기”도 놓쳐버리고, 그저 ‘인식’으로 뭘 어찌 해보겠다고, 탐닉에 몰입에 망아에, 기어이 “인생”이라는 사다리, 남들 밟고서라도 바짝바짝 타고 올라보겠다고, 저다지 이다지 발광들이니, 마냥 “인생은 고해여!” 그런 소리들밖에 할 줄을 모르는 거고요. 거기서 종교랍시고 역시 지나 내나 비슷한 “인생”들이 이쪽저쪽 살짝 어루만져주면서 “돈 내라!” 그거 아닙니까! 다들 기꺼이 그런 데다가 돈 갖다 바치는 겁니다. 거기서도 역시나 좀 무리해서라도 ‘다다익선’ 맞겠지요? 특히 어느 특정 조직종교 한둘은, 그 분야에서도 가히 ‘독보적’인 거 아닙니까? 들은 바로는, “돈을 가마니에 쓸어 담는다!”는 소리도 있었는데요. 재산 많은 종교인들도 쌔고 쌨지요? 그러니 그걸 또 세습하겠다고!
‘종교’ 얘기에 이어지는 말이라, 좀 그렇습니다만. 궁극적으로 “삶”은 “시간”도 아니고 “생각”도 아닙니다. 그런 걸 두고, ‘돈내라!’고 다그친단 말입니까? 저기서도, 이게, 너무 나가는 건가 싶습니다만, 매순간을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러고 살아야지요. 실제로 환갑 즈음의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더라니까요. 요새 나이로는 한참 창창한 젊은이 축에 드는 사람들이 그런 소리 하는 걸 보고는, 좀 의아했습니다만요. 그게 ‘세파’에 시달린 탓인지, 저으기 자신의 인생에 만족함을 드러내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둘의 뒤섞임이었을까요? 아니면, 그냥 체념이었을까요? 아마도, 이래저래 “‘자기 인생’에 만족하기”는 참 쉽지 않을 텐데요. 저 경우 둘 다, 똑같이 제대로 ‘의미’ 있기는 또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애도 안 낳는 거고, 기어이 인구는 줄어만 간다는 거지요? “삶”에 “의미”가 있으려면 진짜 “행복”하게 살아야 말이지요. 저들이 참으로 행복하다는 뜻이었을까요?
어쨌거나 여러분들께서는 정말로, 참으로, “행복”하십니까? “진짜로 행복한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한지 아닌지 알지도 못한다.”고 말씀하신 듯합니다만. 구태여 본문에 비추어보지 않더라도, 그, 참, “행복”하기는 쉽지 않은 경지 아닙니까. 다들 ‘혹시나’ 하다가 ‘역시나’ 하면서 끝내는 게 “인생”이라는 건데 말씀입니다. 이건 재벌도 마찬가지고, 무려 “왕”이라도 마찬가지겠지요? 제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고 해봤자, 다 마찬가지입니다. 설령, 바티칸에서 인정한 “성인”이라고 해도 역시 마찬가지지요. 근본적으로 ‘나’에 휘둘리는 한, ‘자아’에 쫓기는 한, “인생”은 행복할 수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휘둘리고’ ‘쫓기면서’ 어찌 “행복”하단 말이겠습니까? 안 되는 일이지요. 게다가 쫓기는 줄도 모르고 살다 가는 건데요. 저렇게 바티칸에서 인정한 ‘성인’이라고 한들, ‘나’한테 ‘안 쫓겼다’는 말이겠습니까?
한 번 태어난 이상, 그것도 하필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단 한 순간이나마 “천 년을 살고, 만 년을 살아버릴 일이지요.” 그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만, 진짜로 “행복”한 사람이라면, 너끈하게 그리 살 수 있을 터입니다. “순간순간”이 바로 “영원” 아니겠습니까? 왜, 어째서, 고작 한평생, 백 년도 못 되는 시간을 줄줄이 ‘고통’으로 보내고 말아야 한단 말입니까? 그건 ‘쾌락’과 “같은 동전의 양면”일 뿐인데 말씀입니다. ‘인식의 영역’ 안 쪽 말씀이지요. 왜, 각자, 그런 자신의 인생에 “책임”질 생각은 꿈에도 안 해본단 말입니까? 가장 가까이는, 그런 말도 한 번 못 들어보게 ‘가르치기 때문’ 아닙니까? “사회”니 “역사”니, 그런 건 둘째 치고 말씀입니다. 바로, 저마다 딱 한 번뿐인 “자기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말씀이지요.
아마도 소위 ‘인식의 영역’을 못 벗어난다면, 각자 스스로 저 “책임”을 질 수 없겠다 싶습니다. ‘나’ 자체가 오로지 ‘인식의 영역’ 안 쪽에서 뛰고 솟고 굴리고, 야단법석에 지랄발광하는 거니까요. 인간들이 조장해놓은 ‘가치’라는 게 그거 아닙니까. 이래저래 ‘나’에, ‘쾌락’과 ‘고통’에, 저 “슬픔”과 “두려움”에 둘둘 ‘휘감겨’ 있는 한, “휘말려” 있는 한, 어찌 “인생”이 좀 풀리겠습니까? 그걸 풀지도 못 하고 꽉 묶여 있는데, 행여나 “활짝 핀다!”고요? 애초부터 안 되는 일 아닙니까? 그게 또한 “혹시나” “역시나” 그 꼴이지요? 그 둘이 서로 번갈아 가며 사람을 못 살게 구는 게, 소위 말하는 “인생”이라는 거 아닙니까?
그걸, 글쎄, 한평생 내도록 기어이 ‘한번, 풀어라도 보자!’는 마음도 못 먹어보게 가르치겠다는 거니까요. 그럴수록 그 사회는, 그 공동체는 더 망가지기만 할 뿐입니다. 달리, 어떻게 된단 말입니까? 그러지 않아도, “사회라는 건 고여서 썩어가는 게 속성”이라고 하는 마당에 말씀입니다. 오히려 그래서 “전통”과 “보수”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하는 거겠지만요. 소위 “좋은 건” 반드시 지켜나가야 할 거 아니겠습니까! 반면에 ‘썩은 데’는 반드시 도려내야지요. ‘부스럼이 살 되겠습니까?’
거기서 “썩은 놈”들이 오히려 더 영악하고 교활하게 ‘방어막’에 ‘포위망’에 “배수진”을 치고 있는데도, ‘그 꼴’을 보고도 아무 말 안 한다는 거 아닙니까! 소위 “진보”라고 해도 마냥 ‘지꺼챙기기’에 바쁜 꼬라지뿐입니다. “홍익인간”이야 가깝지 않다는 핑계로 빼버리잔다 치더라도, 그야말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까지 잃은 나라 찾겠다시던 “독립투사” 그 “고운 마음씨”라도 기억해야 말이지요.
오늘날, 이런 꼴 보자고, 삼대를 망하게 해놓고도 끝내 ‘목숨’까지 바치셨겠습니까. 언제까지나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겁니다. 꼭 정치가만이 아니라, 교육자도 그렇고, 사회는 더 그렇고, 심지어 “종교인”까지 다 그렇지요? 거기 어디서 진짜 대대로 지켜나갈 만한 “좋은 꼴”들 보이고 있단 말입니까? 본문의 저런 인생, 이런 인생으로는 안 되는 일이지요.
이런 거 저런 거 다 없어도 “인생”을 그야말로 온전하게 활짝 피게 살아보자는 마음들을 못 먹는 거니까요. 거기서는 교육자니 정치가니 종교인이니, 묻고 따질 거 없이 전부 다 “적폐”뿐이겠지요? 그렇게 마구 굴러왔으니 “대멸종”이지요.
그래서 하시는 말씀이 “자기로부터 혁명” 아니겠습니까? 꺼져가는 배에서 “너 하나만이라도 살아라!” 그 말씀이지요. “인생”이랍시면서 다들 ‘죽어가는 거’니까 말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단 한순간이나마 ‘무시간성’의 진짜배기 “삶”을 살아버린다면, 그건 그야말로 시간상 ‘천년만년’을 사는 것에 비길 수도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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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4] “물귀신 작전,”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우선은 “삶”에 대하여, 매일매일 순간순간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말이지요. 거의 하나도 안 보는데 뭐가 되겠습니까? 그건 아마도 평생을 ‘나’에 매인 채 그냥 이대로, 별로 의미 없이 살다 갈 수는 없다는 ‘발심’이 있다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대충 다들 고만고만한 게.. 니나 내나 서로 비슷비슷해서 그저 ‘도토리 키재기’로 살다들 가는 거다, 그런 말씀이지요? 설령, 좀 달라 보인다 해도, 뭔가 있는 듯이 보인다 해도, 더는 아주 삐까번쩍 대단하게 보인다 해도, 그저 “고해”에 빠져서 어푸어푸 헬미헬프 허우적거리는 거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 말씀이기도 하고요. 그러다 어느 가을날 이에 저에 떨어지는 ‘잎다이,’ 하늘거리다가 나풀나풀 사라지고 마는 거지요.
말을 좀 바꿔서 보태자면, “인생은 절대로 고해가 아니다!” 읊조릴 것도 없이 그저 고해로 안 살아야만 진짜 좀 제대로 사는 거다, 그런 말씀이겠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이승에서는 어차피 고해니까 아등바등 지척지척 헐레벌떡 꼬르륵 살아버리고, 저승 갈 때나 좋은 데 보내줄 테니까, 돈 내라!’ 그러고는, 불쌍한 중생들 착취해먹는 무리들에게는 전혀 안 들리는 말씀이겠습니다. 그런 무리 아닌 평범한 사람들한테도 잘 안 들리는 가르침인데, 무려 자기 밥그릇 뺏길 판이라면 닐러므삼하리오 아니겠습니까? ‘화들짝’ 놀라기라도 하면 다행한 일이겠지요?
하여, 무슨 조직종교의 구성원으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저 ‘영지(?)’ 차원에서 살 것만이 요구되는 수준으로 이어지는 말씀인 듯합니다. 온전하고도 참된 “지성”으로 산다는 뜻으로 말씀입니다. 흔히들 말하는 “자유인”으로 사는 게 그런 거겠지요? ‘자연인’ 말고 말씀입니다. 어느 어떤 사회고 간에, “자유인..” 삼천리 금수강산에서도 그, 참, 만나기 어렵지요? 특정 조직종교에서 그런 말을 쓰기는 하겠지만, ‘조직’에 매여 있다면, 실제로 “자유인”이 아니지 않습니까? 역시, 저 ‘밥그릇’과도 관련이 있을 테지요.
‘이 풍진 세상..’ 저렇게 다들 고만고만 도토리 꼴이라서 떠오른 말이, “아들아, 너는 나처럼 살아버리지 마라!” 그거였는데요. 거의 아무도 호응이 없더군요. 물론 호응이야 있거나 말거나지만요. 더도 덜도 아니고 바로 저렇기 때문에, “삶”에 무슨 “생기”가 안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아 있음’이 팍팍 느껴지고 전해져야 말이지요. 하마나 저부터 안 되는 일을, 입밖에 말로만 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서로 저렇게 뭔가 오고감으로 전해지는 게 있는 사이라면, 그런 게 “관계” 아닐까요? 친구라는 사이에서도 그런 건 아주 귀하지요? 대부분 친구라는 건 다 ‘물귀신’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회라는 거 자체가 그저 하나의 “물귀신 작전”으로, 거기서도 ‘편짜기’로 통하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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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3] 좀 서운하게 들린다 해도..
구태여 가장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더라도, 우리들 대부분이 꼭 저렇게들 살아가고 있는 거지요? 니나내나 우리들 지금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참, 별 볼일 없이 사는 거 아닙니까? 설령 ‘입신양명’했다고 해도 말씀입니다.
아직 우리 세대들 인생의 해가 다 넘어간 건 아니지만, 남아 있는 세월이라고 해봤자, 인생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겠고 말씀이지요. 설령 각 세대별로 사회와 역사에 뭔가를 해놓은 게 있다고는 해도, 그게 각자의 인생에서 고급스럽게 질을 높여준다거나, 사회에 영광으로 되돌려주는 것도 아니지요? 그나마 몇 가지 공적사적 ‘보상’을 받은 게 있다고 해도, 각자 “내 인생”이라는 걸 놓고 본다면, 그런 건 참 하찮기만 하겠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라도 “인생” 하나로 참으로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 말씀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면서 참 어이없게도 한평생 “고해”로만 살아온 세월! 가만히 생각하면 참으로 억울한 일입니다. 그 전에 저렇게 “사랑”으로 살 수 있다고 가르쳐준 사람도 없었고, 자기 스스로 그런 걸 찾아내지도 못했으니까요. 누구 한 사람 살짝 귀띔만 해줬더라도, 좀 더 일찍 나 스스로 뭔가를 어찌어찌 해볼 수도 있었을 텐데 말씀입니다. 누군가가 꼭지만 살짝 틀어줬더라도.. 그러면서도 또 여전히 자식들에게 이게 그렇다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 아들 손주들 다 우리 나이쯤 되었을 때, 꼭 지금 우리만큼 허전해하지 않겠습니까? 분명히 빤히 그렇게 될 텐데도, 왜, 사람들은 꼭 “목욕탕 가는 유대인들처럼” 아무 말도 안 하고 마냥 한발한발 떼놓고만 있단 말일까요? 지금이 무슨 나찌 시절도 아니고요. 세상에는 분명히 길을 찾는 젊은이들이 있거든요!
며칠 되었습니다만, 저 문장 처음 읽었을 때부터, 뭔가 가슴 속에서 ‘싸아’하게 밀려오는 게 있었습니다. 꼭 저때뿐이겠습니까만, 나이로 따져서 제가 10 살 무렵에 하신 말씀이네요. 말씀 속에 나오는 그런 거 저런 거 하나도 해결 못 했으면서, 오늘날 뻔하게 ‘저잣거리’ ‘오동동’ 운운하기만 하고 있으니 말씀입니다. 친구라는 인간 하나더러 ‘특별한 일도 아니면서 전화 좀 하지 마라’고 했더니, “아니, 왜, 내 돈 내고 내 전화기로 내가 거는데, 왜, 그것도 못 하게 하냐?”고 윽박지르는 바람에 웃고 말았습니다만. 진짜 “의미 있게 살아보자”고 길 찾는 저 청춘들을.. 고작 흙수저니 금수저니 해서 주눅 들게 만들고 말았으며, 게다가 참다운 선생님이라고는 가물에 콩 나듯이고요. 그러니 정작 학생들이 아니라 선생들부터 “교육”을 제대로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거겠지요.
어쨌거나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거나 말거나, 그냥저냥 그렇고 그런 삶을 이대로 계속 살다 가겠단 말이지요? 이제나저제나 그걸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자신의 ‘심리적 안전’이나 도모하고자 하고, 편짜기 따위 해대는 게 저 천박함의 본질 아니겠습니까? ‘나’ 이건, 백 개 천 개 만 개 모아봤자, 아마도 말짱 도루묵일 터입니다. 이른바 ‘껍데기는 가라,’ 그 껍데기일 뿐이지요, 뭐. 그러면 그럴수록 사회는 더욱더 망가질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쉽지는 않다고 해도, 끝내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아야’ 될 일입니다. 지금 우리들 이대로의 모습으로는, 어쩔 수 없이 인생을 “고해”로 살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그 모습을 고스란히 그대로 보라’는 말씀이지요. 딱 그거 하나가 ‘시작점’입니다. 그리하여 “사랑”할 수 있는 인간으로 살게 되는 거지요.
그것도 지금 내 모습을 바꾸기 ‘위해서’ 바라보는 게 아니에요. 그냥 그 모습이 어떤지 이해하려는 관심이 생겼기 때문에, 아무런 선택 없이 그저 바라보게 되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바꾸려 한다’면 그 역시 ‘욕망’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의지’들과 똑같은 저 차원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저 바라보고 알아채는 것, 그것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효과 있는 명상이라고 하셨지요(This choiceless awareness is the only effective meditation). 참으로 중요한 “진리”입니다. “알아채기” 자체가 이미 “무위” “무아”의 영역인 셈이고요. 저 한 줄은 한 20 년 전에 원문으로 봤는데요, 딱 보는 순간 바로 외워졌던 게 아직도 안 까먹고 그대로 줄줄 나옵니다. 물론, 그 사이 여러 번 써먹었기에 그렇겠지요. 어쨌거나 저 말씀 한마디만으로도, 이 세상 다른 모든 명상 · 종교 따위를 기웃거리지 않을 터입니다.
이 세상 온갖 문제들의 가장 근원적인 해결책이 바로 저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밖에 못 살고 있기에, 세상이 요모냥요꼴인 거지요. 나 자신이 그 한 사람이고 말씀이지요. ‘나’로서는 다르게 살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역시 세상은 마냥 이따위로 굴러갈 뿐이고요. 소위 ‘종교’조차도 거기에 기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냥 보태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거대한 영역에서 유구한 역사로 갈고 닦아놓은 머리, 그야말로 막대하게 ‘주도’하고 있는 거지요. 그 분열상으로 해서 더 그렇겠고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게 무슨 세계 유일의 거대한 종교를 창시해서 독재해먹자는 발상으로 이어질 일이겠으며, ‘종교’들 끼리 연합해서 아주 균등하게 착취해먹자는 무슨 ‘연맹’ 따위를 만든다고 되는 일이겠습니까? 폭력이나 갈등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가, 바로 개인들 각자가 사실적으로 진짜 “행복”하게 사는 수밖에 더 있습니까?
그 방도라는 것은, 그야말로 정말 “종교적”으로 살아가는 길이겠습니다. 세상에 거대하게 조직되어 있으면서 인간들을 착취해먹는 저런 ‘조직종교’로서는 전혀 닿을 수 없는, 진짜배기 “종교적인 삶” 말씀입니다. 단적으로 “진리는 조직할 수 없다.” 그러셨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진짜 종교적으로 산다”함은, 세상에 고스란히 그대로 ‘기대는’ 꼴이어서는 안 되겠지요. 물론 자신의 밥벌이는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하겠습니다만. 설령 저런 사람들은 그리 쉽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그 때문에 문제가 달라지는 게 아닙니다. 아예 인간이라는 것이 딱 요렇게 살 수밖에 없도록 관습적으로 ‘교육’되는 것이라서 말씀입니다. 세상 온 천지에 조직되어 있는 종교들 역시, 인간들을 꼭 요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몰아댈 뿐이지요? 아니라면 종교라는 것이 기껏 ‘기복신앙’에 머물러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상은 각종 거대 종교들의 조직적인 대립을 바탕으로, 지구촌 구석구석까지 이다지도 갈기갈기 누덕누덕 쪼가리 나 있는 꼴입니다. 그것은 ‘국가’나 ‘민족’ 따위보다도 훨씬 더 근원적인 분열이지요. 누가 이 명백한 사실을 부정할 수 있단 말이겠습니까! 비록 이게 각 종교에서는 아예 제쳐놓는 사실이기는 합니다만. 그런 바탕을 해결하지 못하고서야, 아무리 ‘개인과 개인 사이의 분열을 치유하자’고 해도, 그게 과연 어디까지 가닿을 수 있겠습니까? ‘쪼개놓은 사과’ 얘기를 자주 하곤 합니다만, 그런 거 다시 모아놓는다고 그게 온전한 본래 사과 그대로겠습니까? 그냥 슬 누르면 바로 와작 무너지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그런 종교들의 분열 속성이, 그 사회 구성원들 의식 깊숙하게 딱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라도 나서서 갈가리 쪼개질 준비가 다 되어 있는 거지요. 5분대기조 꼴입니다.
여기서는 또 누군가가, ‘그 옛날 고타마 싯다르타 부처님 말씀도 꼭 같은 거다. 그러니 크리슈나무르티 들먹이면서 그다지 우쭐해할 것 없다’고 비아냥거릴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물론 우쭐해하는 것도 아닙니다만, 그 옛날 부처님께서도 분명히 “내 가르침을 타락시키지 마라,”고 하셨을 것이고, “진리를 조직화하지 마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2500 여년을 내려오는 동안, 인간들이 그 말씀을 하나도 안 들은 거지요. 그러기에 “아무도 부처님 말씀을 들은 이가 없다. 그래서 불교라는 것이 생긴 거다(Nobody listen to Him, that is why there is Buddhism).”는 말씀을 하신 거겠지요? 이 말씀은 이미 몇 번 써먹은 것입니다만. 오늘날 조직되어 있는 종교는 진짜 “종교적인 역할”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거지요. 각종의 ‘종교’로서 세상을 분열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빼도박도 못하는 증거입니다.
어쨌거나 그러기에 니나 내나, 각 개인들이 진짜로 “종교”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달리 길이 없다는 얘긴데요, 그래서 더더욱 사람들이 귀를 안 기울이는 것이겠지요. ‘나’에 얽매여 있으니 귀가 기울여지겠습니까? 반드시 ‘나’가 죽어야 사는 이치인데 말씀입니다. 그나마 우리 사회에는 오래전부터, 아주 옛날부터 그 맑고 고운 흐름이 흘러오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미미한 흐름이겠지만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부풀려서 말하자면, 딱 그 때문에도 ‘수수만년’ ‘나라’가 완전히 다 망하지는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그게 ‘나라’ 수준을 넘어서 “문명”이나 “문화”의 수준일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하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다 무너지는 것 같기만 합니다. 꼭 자본 때문이겠습니까만, 오늘날 극동 어느 지역에 흰옷 입고 나라를 이루고 사는 족속들의 그 ‘인간성’, 그 ‘됨됨이’, 그 “고운 마음씨”들은 와그르르 다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지 않으십니까?
이 사실에 대하여, 사람들이 도대체 뭘 얼마나 알고들 살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새로운 “성인의 시대”를 맞이해서, 정작 그분 성인께서는 이미 가시고 계시지도 않습니다만, 과연 얼마만큼의 관심과 열정으로 사회를, 국가를, 세상을 경영해나갈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그 궁금증은 잠시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의문과 의심으로 이어질 뿐입니다. 저다지도 세상 사람들이 “세계사에 유례가 없다”는 찬사를 보내고 있음에도, 정작 그런 저력과 열정으로 과연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거든요.
어떻든 세월은 잘도 흘러서, 또 한 번의 ‘설날’을 맞이하는 지금, 결국 헛된 바람으로 끝날지 몰라도, 다시 똑같은 바람을 지녀보는 시간입니다. 저렇게 진짜로 “자유로운 영혼”들이 하나 두나 태어나기를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들 하나두나 모여서 흐름이 조금이나마 강화되기만 하면 적으나마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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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3] '폼'이라도 좀 나야지..
“성인의 시대,” 이게 ‘적으나마 되는 일’쯤 되어서도 안 되겠지요. 그리고 누가 뭐래도 반드시 되고야 말 일입니다. 설령, 우리 당대에는 싹수가 노랗다고 해도 말씀이지요. 그럴수록 후대 누군가에게는 더더욱 절실한 일일 테고 말씀입니다. 가슴 저리는 일입니다.
그다지 저다지 절실함 속에서도, 다시 ‘설날’이 다가오고 있군요. 최근에는 또 어찌 게을러지는 통에, 양력 ‘설날’은 알게 모르게 그냥 지나가버린 것만 같습니다. 그만큼 ‘세월 가는 줄’도 모르고 산다는 말일까요? 그리고 그게 ‘다행’한 일일까요? 세속적으로 보면, ‘인생, 완전 다 거덜난 판’에 말씀이지요.
그만큼 하루하루를 이래저래 아주 천박하게 살아가고 있나 봅니다. 그게 인간들이 영위하고 있는 ‘인생꼴’ 아니냐, 그런 말씀이니까 이쯤이면 그냥 ‘보통’은 하는 거네요? 이 꼴이 ‘평균작’은 되겠습니까? 한때는, 이문열 소설 속에 나오는 말, ‘내 인생, 평균치도 못 살지 모른다는 게 두렵다,’ 그 말에 솔깃한 적도 있었습니다만.
어쨌거나 ‘평균치’쯤 되는 인생을 살자고, 그러라고 성인께서 오셨겠습니까? 그야말로 “이 세상에서 참으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살아라,” 그 말씀이신데요. 그게 영어로 노바디(Nobody) 아니겠습니까? 썸바디(somebody) 아닌 ‘노바디’ 말씀입니다. 문장으로 “I am nobody.” 그 말이 생각납니다. 쎔바디, 그게 순간순간 드러날 거 아닙니까! 일부러 안 보려고 해서 그렇지요.
이 한 몸, 그거나마 좀 ‘확실하게’ 될 일인데요.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아서 말씀입니다. 한때는, 그래도 ‘가기는 간다’느니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운운하기도 했는데요. 진짜 좀 ‘노바디’ 폼이 나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목숨부지’도 걱정인데요. 역시 누가 제일 잘 알겠냐, 그 꼴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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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둔덕으로 옮겨 살면서, 새삼스럽게 ‘멍때린다’는 말이 다가와서 말씀이지요. 그걸 저 “알아채기”와 어떻게 결부시킬 수는 없을까요? 훨씬 잘 다가오게.. ‘일단, 의지로는 ’아무것도 안 한다‘는 차원일 테니까요. 좀 많이 무리일까요? 2023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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