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28일 (수) 촬영.
한국인의 일생.
<한국인의 일생> 전시관에서는 조선시대(1392~1910)에서 현대까지
한국인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겪게 되는 주요 과정을 전시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 이념에 의해 아들 중심의 가계 계승이 가장 중요했기에, 출산 전부터 남자아이를 기원하였다.
출산 후에는 백일잔치, 돌잔치를 열어 아이가 무사히 성장한 것을 축하하였다.
남자는 20세에 관례(冠禮)를 여자는 15세 전후에 계례(筓禮)를 치러 어른으로 인정받았다.
혼례를 통해 가족을 구성하고, 남자는 관직에 나가거나 직업을 가져 가족을 부양하며,
여자는 집안 살림을 관장하였다. 사람이 죽으면 가족은 그 슬픔을 상례를 통해 극복하며,
돌아가신 조상에 대해 제사를 지냄으로써 자손의 번창과 친족의 화합을 도모하였다.
오늘날에는 이념과 가치관 등의 변화로 성별 관계없이 아이의 출생이 중요한데,
백일과 돌잔치를 열어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관습이 이어지고 있다.
성년식은 축소되었고, 혼례 또한 비교적 간소화 되었지만, 의례의 기본 구조와 의미는 변하지 않았다.
혼례로 형성된 가족 이외에 가족은 구성과 개념이 다양해지고, 남녀의 역할 구분도 점차 사라져간다.
상례와 제례 문화 또한 형식과 절차 등이 변화되었으나
조상을 기리며 후손의 안녕과 가족의 화합을 꾀하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출생을 하면 대문 앞에 금줄을 쳤다. 아들일 경우에는 빨간 고추를 금줄에 매달았다.
출생, 出生, Birth.
조선시대에는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가계 계승이 사회적인 관습이었기 때문에 어느 집안에서나 아들 출생을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대부분의 집안에서는 삼신할머니에게 '자손번창'과 건강한 남자아이의 출산을 기원하였다.
출산 후에는 대문에 금줄을 쳐 아이의 출생을 알리고 부정한 출입을 막았으며, 태를 태항아리나 깨끗한 곳에 묻거나 불에 태워
아기가 잘 자라기를 기원하였다. 유아 사망률이 높았으므로 아이가 태어난 지
!00일 후에 백일잔치를 열어 비로서 축하하고, 1년 후에는 돌잔치를 열어 아이의 장래를 점쳤다.
오늘날에는 성별과 상관없이 아이의 출생을 축하하는데, 주로 병원에서 출산하면서 출산과 산후의 금기와 의례는 사라져 간다.
백일을 기념하고 돌잔치를 열어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길 바라며 축하하는 관습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자식바라기
기자(祈子)는 자식을 얻기 위해 기원하는 민간신앙으로 '기자신앙' 또는 '기자행위'라고도 한다.
전통사회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자식을 낳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가계를 잇기 위해 아들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민간에서는 자식 중에서도 아들을 얻어 무병장수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자행위를 널리 행하였다.
혼인 후 오랜 기간 아이가 없으면 아이를 낳게해 달라고 산신 기자석 서낭 부처 칠성 등에 기원하였다.
또한, 특정 음식을 먹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믿음도 있었는데, 이런 관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기자 별전,祈子別錢 / 조선 후기, 정성채 기증.
아들의 잉태나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만든 기념 화폐로, 부귀(富貴), 다남(多男), 자손창성(子孫昌盛) 등의 문자를 새겼다.
백동자도 8폭 병풍, 百童子圖八幅屛風 / 조선 후기.
어린아이들의 천진한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아들의 출산과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길상화(吉祥畵)이다.
물에서 수영하며 멱감기, 닭싸움, 원님 행차하기, 잠자리 잡으며 놀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태항아리,白磁胎缸(백자태항) / 조선 후기.
왕실이나 상류층 아기의 탯줄을 잘라 보관하는 백자항아리로, 태에 아이의 운수가 달려 있다고 하여 좋은 날을 택하여 명당에 묻었다.
탯줄 / 1968, 김복순 기증.
탯줄은 산모와 뱃속의 아이를 연결해 주던 것으로,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오면 그 태를 잘라준다. 이를 '삼 가르기'라고도 한다.
태를 자를 때 사용하던 도구는 성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출세하라는 의미에서 낫을 사용하고,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재주가 좋아진다고 하여 가위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삼신단지,三神(産神) 壺 / 2006, 재현품.
아이를 점지하고 산모를 보살피는 삼신의 신체(神體)이다. 단지 안에 쌀을 넣고 한지로 덮은 후에 주로 안방의 시렁 위에 올려놓는다.
삼신상,三神(産神)床 / 2006, 재현품.
삼신(三神)은 아이를 점지해 주고 출산 후에는 아이와 산모의 건강을 돌봐주는 신으로, 산신(産神)이라고도 한다.
삼신상은 출산을 도와준 삼신에게 감사의 의미로 올리는 상이다.
출산 전에는 삼신상에 한지를 깔고 쌀, 미역, 정화수 등을 올려 순산을 기원하고,
출산 직후에 상 위의 쌀과 미역으로 국밥을 지어 산모에게 먹였는데 이를 '첫국밥'이라 한다.
출산 후에는 삼신상에 밥, 미역국, 정화수를 각기 세 그릇씩 올려놓고 아이가 아무 탈 없이 자라기를 빌었다.
며느리에게.
순산 후에 국밥은 잘 먹고 있으며, 아이도 장수하게 생겼느냐?
섭섭해 하지 마라, 어찌 번번이 아들만 낳겠느냐? 며느리를 위로하는 시아버지편지.
아기에게
네가 간 후에 오래이니 네 몸은 무사하냐?... 순산하고 아들을 낳았으니
그런 경사가 없다만 너희 아버님이 계셨으면 오죽이나 좋아하셨으랴. 어머니의 순산 축하 편지.
배넷저고리.
며느리를 위로하는 시아버지 편지 / 1914, 이석희 기증.
아들을 낳지 못한 며느리를 위해 시아버지 이중하(李重夏)가 며느리 동래 정씨에게 쓴 편지이다.
여자아이를 낳았다고 걱정하지 말고, 집안의 사정이 어렵지만 유모는 꼭 구하라는 당부의 말을 전하고 있다.
애기구덕 / 20세기 중반 이후, 1/5 축소.
제주도에서 아이를 눕혀 재울 때 사용하는 요람이다.
갓난아이를 데리고 밭에 나갈 수 있도록 만든 침대로, 아이를 눕힌 채 짊어지고 다니기도 하였다.
돌, 周㱑(주세).
돌은 아이가 태어난 지 1년이 되는 첫 생일로, 아이가 무사히 첫 생일을 맞이한 것을 기념하고 장차 잘 자라기를 바라는 뜻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돌상에는 아이의 장수를 기원하는 백설기와 실타래 이외에 '돌잡이' 물건을 놓고 아이의 장래를 점쳤다.
전통사회에서는 남자아이가 돈이나 곡식을 잡으면 부자, 책, 붓을 잡으면 문관, 활, 화살을 잡으면 장군이 되고,
여자아이가 실패나 가위 등을 잡으면 재주가 뛰어나고 바느질과 길쌈에 능한 현모양처가 될 것이라고 여겼다.
요즘에도 돌상, 돌잡이 등 돌을 기념하는 의례는 지속되고 있지만, 그 형식과 내용은 변화되고 있다.
태어난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돌이 되었으니 돌상에 있는 붓이랑 먹을 잡거라, 옥나무 뿌리 내렸으니 재목으로 자라나서
뜰 가득히 옥 가지와 잎이 무성하길 바란다. - 어린 손자 여달의 돌잔치에 지어 보내다 - 이익(1681~1763) <성호전집>
돌잡이, 抓周(조주)
아이의 첫 생일상인 돌상 위에 여러 가지 물건을 놓고, 아이가 집는 물건으로 아이의 장래를 점쳐본다.
남자아이 돌잡이 상에는 학문이나 무예와 관련된 물품을 올려놓고, 여자아이의 상에는 바느질이나 길쌈에 관련된 물건들을 올려놓는다.
돌잡이에 사용하는 물건들은 아이가 잘 살기를 바라면서 부자를 의미하는 쌀과 돈을, 공부를 잘하기 바라며 책과 붓을,
또한 무병장수를 바라며 실과 국수를, 바느질과 길쌈에 능한 현모양처가 되길 바라며 바늘, 자 등을 가까운 데 놓아둔다.
한편 오늘날의 돌잡이는 아이가 성장하면서 갖게 될 직업이나, 특성들을 잘 표현해 주기를 바라는 부모들의 소망을 담아 표현된
마이크나, 청진기, 판사봉 등 여러 가지 물건을 추가하기도 한다.
책가도 10폭 병풍 / 20세기
선비의 방처럼 책, 문방구, 고동기 등 선비들이 곁에 두고 즐기던 기물을 조합하여 그린 그림이다.
남자아이 돌잔치에 장차 글공부하기를 바라면서 돌상 뒤에 놓거나, 아이의 방을 장식할 때 많이 사용하였다.
천인천자문 / 1934.
집안에 아이가 태어나면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천 명의 사람에게 일일이 찾아다니며 한 글자씩 받아서 만든 천자문이다.
천인의 지혜가 아이에게 전해져 장차 학문 성취, 건강을 염원하는 뜻을 지니며, 돌을 맞이하는 아이의 돌상에 놓는다.
시권,試券 /1852, 이동영 기증.
과거 시험의 답안지로, 과지(科紙)라고도 한다. 1852(철종 3)에 이만기(李晩耆,1825~1888)가 식년(式年) 문과 전시(殿試)에서
작성한 과거시험 답안지로 "式年 文科 殿試 丙科 第十三人望'식년 문과 전시 병과 제십삼인방"이라는 붉은색 종이를 붙여 놓았다.
시험 제목은 '生之歲正月甲子朔四百有四十五甲子,생지세정월갑자삭사백유사십오갑자'(賦,부)로, 성적은 삼하三下이다.
이만기는 문과 병과(丙科) 제13인으로 급제(당시 합격자 39명 가운데 23위의 성적)해 벼슬길에 올라
권지 승문원 부정자(종 9품)가 됐다. 이만기는 퇴계의 11대 손이다.
교육,敎育,Education.
조선시대에는 삼강오륜을 바탕으로 하는 유교적인 윤리교육을 통해 도덕적인 사회를 만들려고 하였다.
국가에서는 효자, 충신, 열녀를 표창하고,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등을 그림과 함께 한글로 번역하여 보급하였다.
남자는 서당에서 글 읽기와 쓰기 등을 배우고, 과거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향교나 서원에서 유교경전이나 역사책을 공부하였다.
여자는 집안에서 받은 한글 교육으로 문자 생활이 가능해져, 편지를 주고받거나 한글 번역서에서 새로운 정보를 얻어 지식을 넓혀 갔다.
오늘날에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주로 학교 교육을 통해 학습한다.
조선시대와 달리 남녀 구분 없이 일반적으로 유치원과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등에서 지식을 배우고 익힌다.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거나 그 과정에 해당하는 교육을 마치면,
적성에 따라 대학교를 진학하거나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각종 시험과 평가를 치른다.
문자도 8폭 병풍 / 조선 후기.
유교적 덕목인 효(孝), 제(悌), 충(忠), 신(信), 예(禮), 의(義), 염(廉), 치(恥)의 자획과 관련된 유교의 교훈적 내용의 고사를
형상화하여 그린 그림이다. 문자도의 여덟 글자는 유교 윤리를 집약한 것으로 '소학'을 통해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학교,學校. Schools
학교는 학생들을 위한 교육 장소로, 여기에서 학생들이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지식을 습득하는 형태로 교육이 이루어진다.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최근까지 입시 위주의 교육 제도하에서 상급학교 진학을 목표로 하는 교육풍토가 형성되었고,
이러한 풍토는 무한 경쟁의 입시 제도를 만들어 입시지옥, 과다한 사교육비의 지출, 과외라는 고질병을 만들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억압적, 획일적 주입식 교육방법을 지양하고, 개성을 존중하며 자유와 창의적 활동을 권장하는 학생참여형 교육이
늘어나면서 학생의 능력이나 특성에 맞는 적합한 교육 기회가 제공되고 있다.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조선 세종 때 설순(偰循) 등이 삼강에 모범이 될만한 충신, 효자, 열녀의 행적을 그림과 함께 한글로 번역한 윤리 교육서이다.
학습서적.
조선시대에는 한자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자의 뜻과 음을 익히기 위해 <천자문>을 배웠다.
그리고 기초적인 윤리 소양을 위해 삼강오륜과 옛 성현의 행적을 정리한 <동몽선습,童蒙先習-중종 때 학자 박세무가 저술>이나
<소학,小學-송나라 유자징이 8세 안팍의 아동들에게 유학을 가르치기 위해 1187년에 편찬한 수양서>,
가족 예절서인 <주자가례,朱子家禮-송나라의 성리학자 주희가 일상 생활의 예절에 관해 모아 기록한 책, 관혼상제 등> 등을 배웠다.
또한, 유교적 덕목과 과거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향교나 서원에서 유교 경전인 사서(四書,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삼경(시경, 서경, 역경)과
중국 역사서인 <자치통감절요>를 공부하고, 문장 작성을 익히기 위해 중국의 명문장을 모아 놓은 <고문진보> 등을 암송하였다.
시비한향벽계개 柴扉閑向碧溪開 사립문이 한가로이 푸른 시내로 열렸는데
송노정공월자래 松老庭空月自來 늙은 소나무 빈 뜰로 달이 절로 찾아드네
독대명창서권질 獨對明窓舒卷秩 홀로 밝은 창을 대하여 책을 펼치니
비연요여성현재 斐然要就聖賢裁 공부한 문장을 성현에게 다듬고자 함이네.
성년식 관례,冠禮
조선시대에는 <주자가례>의 영향으로 남자는 "관례'라는 성인식을 하였다.
남자는 20세 전후에 집안 어른들 앞에서 상투를 틀고 치관(緇冠), 유건(儒巾), 갓 등을 차례로 쓰며 성인 이름인 자(字)를 받는
관례를 행하였다. 예서(禮書)의 보급으로 사대부가(士大夫家)를 중심으로 삼가례(三加禮)를 행하였으나,
집안의 사정에 따라 시가례(始加禮) 및 자관자례(字冠者禮)만을 행하는 등 관례를 간소화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단발령의 시행으로 전통적인 의미의 관례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시가례 - 빈객(賓客)이 관례자에게 읍하면 관례자가 자리에 나아가고 빈객은 관과 건을 씌운다. 관례자는 방에 가서 심의에 대대를 두르며
신을 신고 나온다.
재가례 - 모자(또는 입자)를 씌우고, 조삼(또는 단령, 도포)에 혁대, 가죽 띠를 두르고. 혜(가죽신)를 신는다.
삼가례 - 복두(또는 사모, 유건)를 씌우고, 난삼(또는 단령)을 입고 신(목화)을 신는다.
초 례 - 빈객이 관례자에게 술을 한 잔 따라주면, 술을 땅에 조금 따른 후 마신다.
자관자례 - 빈객은 관례자에게 자(字)를 지어준다. - 사례편림 -
성년식은 아이가 자라서 어른으로 인정받는 의례로 시대와 계층, 성별마다 달랐다.
조선시대 양반가에서는 중국 <주자가례>의 영향으로 남자는 '관례', 여자는 '계례,筓禮'라는 성년식을 치렀다.
남자는 20세 전후에 집안 어른들 앞에서 상투를 틀고 갓 등을 차례로 쓰며, 성인 이름인 자(字)를 받는 관례를 행하였다.
여자는 15세 전후로 쪽을 찌고 비녀를 꽂는 계례를 행하였는데, 일반적으로 혼례로 성년식을 대신하였다.
농가의 남자는 일정한 나이가 되면, 마을공동체로부터 힘과 농기구 다루는 기술 등을 평가받은 후 성인으로 대접을 받았다.
오늘날의 성년식은 과거와 비교해 축소되었지만, 만 19세에 이르면
성년으로서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받고, 법정 대리인의 동의 없이 법률 행위를 행사할 수 있다.
계례,筓禮
조선시대에는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영향으로 여자는 '계례'라는 성인식을 하였다.
여자는 15세 전후로 쪽을 찌고 비녀를 꽂는 계례를 행하였는데, 혼례로 성인식을 대신하였으므로 일반적으로 혼례 전에 행하였다.
비녀.
들돌 / 1990년대
들돌 밑에 100근(斤, 약 60kg)이라고 쓰여 있다,
진새례, 入世禮.
음력6~7월은 식물의 성장이 가장 왕성하며 일손이 빠쁜 철이자, 6월의 유두, 7월의 칠석과 백중 같은 성장의례가 치러지는 계절이다.
이 시기에 세시풍속이자 일생의례(一生儀禮)로 볼 수 있는 진새례가 치러진다. 진새례를 치르는 나이를 정해두기도 하며,
나이 제한 없이 대개 15세에서 20세 사이의 아들을 둔 집에서 마을 사람들과 협의하여 치러지기도 한다.
진새례의 자격요건으로 들돌들기가 행하여지는데, 일종의 성년의례의 성격을 가진다.
사대부가에서는 15세가 넘은 남자아이를 대상으로 관례를 치르지만,
농촌에서는 온전한 품삯을 받을 수 있는 청년을 대상으로 마을에서 인정하는 성년식인 진새례를 치른다.
진새례를 치른 사람은 본격적으로 일터에 나가서 어른들로부터 일을 배우게 되며, 두레를 낼 경우는 한 사람의 몫을 차지하게 된다.
관직과 직업
조선시대는 엄격한 신분사회였지만, 엄격한 사회제도와는 달리 법적으로는 과거(科擧) 시험을 통해서 신분 상승이 가능한 사회였다.
학문을 숭상하는 유교 사회에서는 문관을 무관보다 우대하였으며,
신분과 남녀 성별에 구분을 두었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일정한 지위와 직업의 범위가 달랐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고 사회 변화에 따라 직업 제한과 같은 구분은 없어졌다.
집주릅(가쾌家僧, 사쾌舍僧- 집을 사고파는 사람들 사이에 흥정을 붙이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
매분구(賣粉嫗 - 조선시대의 매분구는 지금의 메이크업 아티스트이다) 등 형식은 변하였어도
조선시대부터 계속되어온 직업이 있었던 반면, 사라지거나 새로 생겨나는 등 직업에 변화가 일어났다. 오늘날은 남녀 차별없이
조건과 능력에 따라 다양하고 전문화된 일을 선택하여 개인이 사회에 참여하고, 사회의 일원으로 역할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등용문,登龍門
등용문은 큰 물고기가 물살이 세고 거친 용문(龍門)에 뛰어 올라 용이 되었다는 중국 고사(故事)에서 유래되었다.
과거급제가 입신출세의 관문이었으므로, 이는곧 등용문을 뜻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과거시험이 곧 출셋길이었기 때문에 선비의 거처인 사랑방에는 잉어를 새긴 벼루나 잉어가 뛰어오르는
그림인 '약리도(躍鯉圖)'나 '연리도(蓮鯉圖)'를 걸어두고 과거 급제를 꿈꾸었다.
이는 후에 관직에 나아가 '충(忠)'과 '효(孝)'를 다하려는 마음이 담겨 있다.
과거제도,科擧制度.
조선시대는 학문을 숭상하는 유교사회였기 때문에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관리로 임용되는 것은 출셋길이자 가문의 영광이었다.
그래서 문, 무과 합격자는 삼일유가(三日遊街)라고 하여 임금이 내린 어사화(御賜花)를 꽂고 악대를 동반해 3일 동안
일가친척과 시험 감독관들에게 인사를 다녔다. 과거시험 합격 증서인 백패(白牌)나 홍패(紅牌),
합격자 명단인 문무과방목(文武科榜目)은 양반가임을 입증하는 증표이자 집안의 자랑이었으므로 집안 대대로 전하였다.
과거하여 가는 사람 / 1890년대,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 생몰년 미상) 복제 (독일 MARKK 원본 소장)
과거 급제자가 사흘 동안 시험관, 선배 급제자, 친척 등을 찾아 인사하던 삼일유가(三日遊街)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급제자는 앵삼(鶯衫)에 복두(幞頭)를 쓰고, 어사화를 입에 문 채로 춤추며 말을 타고 가는데,
앞에서 악대가 악기를 연주하면서 인도하고, 뒤에는 따르는 사람들이 춤추고 있다.
신은신래,新恩新來 짓고 / 19세기 이후,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 생몰년 미상) 복제 (독일 MARKK 원본 소장)
과거 급제자가 사흘 동안 시험관, 선배 급제자, 친척 등을 찾아 인사하던 삼일유가 가운데 급제자를 놀리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과거에 새로 급제한 사람을 신은(新恩), 신래(新來)라고 하는데, 선배들이 급제자를 축하하며 놀리는 신고식을
'신래 불리다' 라고 하였다. 두 팔이 묶인 급제자는 어사화 끝을 물고 있고, 뒤에는 악사들이 있다.
무관,武官
무관은 병서(兵書)와 활쏘기 등의 무예 기술을 시험하는 무과시험 출신의 관리를 말한다. 무관은 법제상으로 문관과 동등하였지만,
무관은 정3품 절충장군(折衝將軍)까지만 올라갈 수 있어, 이들의 우두머리는 모두 문관이 겸직하였다.
무관직은 비록 문관직에 비해 차별을 받기는 하였지만, 임진왜란 이후
매년 무과 시험이 실시되고 응시 자격이 완화되면서, 평민들에게도 신분 상승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문관,文官
문관은 유학경전에 대한 지식과 논술을 시험하는 문과 시험 출신의 관리를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학문과 유학을 숭상해 무관보다는 문관을 우대하였다. 문관은 최고 정1품 영의정까지 올라 조정의 인사권뿐만 아니라
군사지휘권까지도 장악하였다. 그래서 문과 시험을 거쳐 문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최고의 출세이자 영광으로 여겼다.
초헌,軺軒 / 조선 후기, 이원강 기증.
조선시대에 종2품 이상의 관리가 타던 수레로 명거(命車), 목마(木馬), 초거(軺車), 헌초(軒軺) 라고도 한다.
고위 관리의 위세를 상징하였던 초헌은 가마와 비슷한 형태이지만, 가마보다 채가 아주 길며 외바퀴가 밑에 달려 있다.
보통 여섯 사람에서 아홉 사람이 한 조를 이루어 움직였다.
초헌은 좌석이 높게 올라 있어서, 초헌을 타는 관리의 집에는 솟을대문과 함께 문턱을 없애 초헌을 타고 쉽게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만인산,萬人傘 / 1887.
만인산은 고을 사람들이 지방 관리의 공덕을 기리며 감사의 표시로 바친 일산(日傘)이다.
전 고을 사람의 이름을 새겨 바친 일산이라 하여 '천인산(千人傘) 또는 만인산(萬人傘)이라 하며,
각자의 이름을 비단에 자수로 수놓았다고하여 '수산(繡傘)'이라고도 한다.
일산은 원래 수령이나 감사가 외직으로 나갈 때 햇볕을 가리는 의장(儀仗)의 하나였으나,
조선 후기에는 송덕비와 함께 수령의 공덕을 기리는 기념품이 되었다.
이 만인산은 1887년(고종 24) 평안북도 희천군 사람들이 희천군수 김영철(1836~1901)에게 바친 것이다.
윗면에는 김영철의 공적을 칭송하는 글과 만인산의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수놓아져 있다.
의혼,議婚
혼인을 의논하는 일로, 면약(面約)이라고도 한다. 이때 청혼(請婚)과 허혼(許婚)이 이루어지며,
일반적으로 혼담(婚談)이 오가는 것을 시작으로 대례(大禮)가 행해지기 전까지의 모든 과정을 '의혼(議婚)'이라고 한다.
(위의 왼쪽) 연길,涓吉 / 조선 후기
신랑집으로부터 사성을 받은 뒤에 신붓집에서 혼인날을 정하고 납폐 및 전안 등의 날짜를 택하여 보내는 문서로,
날받이, 택일(擇日), 납길(納佶), 추길(諏吉)이라고도 한다.
(위의 가운데) 사성단자,四星單子 / 조선 후기
무진년(戊辰年) 신랑집의 김경채(金慶采)가 신붓집에 보낸 사주이다. 혼사가 정해진 후에
신랑집에서 신붓집으로 신랑의 출생 년, 월, 일, 시의 사주를 적어서 보내면, 신붓집에서 혼인날을 정하여 보낸다.
(가운데의 분홍색과 하늘색 종이) 의양단자,衣樣單子 / 조선 후기, 한무영 기증.
혼인을 정하고 신랑과 신부가 입을 옷의 치수를 적어서 보내는 문서이다.
뒷길이, 뒤품, 앞품, 앞깃, 고대, 화장, 진동, 수구, 섶 너비, 섶 아래 등의 치수가 적혀 있다.
사주단자와 사주보, 四柱單子及四柱褓 / 1939.
버선본 / 조선 후기
버선을 지을 때 사용하는 본(本)으로, 한쪽 면에는 신랑 신부의 백년가약을 기원하는 내용을 적고 있다.
혼수물목 / 조선 후기.
신랑집에서 납폐서와 함께 보낸 신부의 혼수품을 기록하여 놓은 목록이다.
비녀, 반지, 저고리, 치마, 옷감, 방석, 화류삼층장(樺榴三層欌) 등의 물목과 수량을 적어두었다.
우암선생 계녀서,尤庵先生戒女書 / 1918
우암 송시열(1607~1689)이 혼인하는 맏딸을 위해 부녀자가 지켜야 할 행동 규범들을 적은 책이다.
부녀자로서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야 할 도리 20개 항목이 적혀 있는데, 딸에 대한 아버지의 정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납폐서,納幣書 /1881, 한무영 기증.
혼인할 때 사주단자의 교환이 끝난 후 정혼 성립의 증거로 신랑집에서 신붓집으로 예단과 함께 납폐할 때 보내는 문서로,혼서지, 예장지,
예서라고도 한다. 신사년 3월 16일 신랑집 혼주 김용적이 동생 용주의 혼례를 위해 신붓집 혼주에게 보내는 혼서로
예에 따라 납폐를 행한다는 내용을 적어두었다.
납폐,納幣
혼사가 정해지면 신랑집에서는 약혼의 표시로 혼서지(婚書紙)와 함께 신부 치맛감 등 혼수품과 그 내역을 적은 물목단자(物目單子)를
납폐함에 담아 신붓집에 보냈다. 납폐함에 담는 물건은 혼인을 상징하는 예물이기 때문에,
자손번창이나 가내평안을 뜻하는 수복 문자와 박쥐 문양으로 납폐함을 장식하였다.
함은 함진아비라 하여 보통 첫아들을 낳은 복 많은 사람이 지게 하였다.
신붓집에서는 함에 손을 넣어 처음 잡히는 옷감 색상에 따라 부부의 장래를 점치기도 하였다.
(윗줄)납폐함,納幣函, 조선 후기.
신랑집에서 혼수물목과 함께 예물을 담아 신붓집으로 보내는 함으로
신랑 신부가 한평생을 사이좋게 늙어가며(백년해로,百年偕老), 복 받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壽(수), 福(복)자를 새겼다.
(아랫줄)색실첩,色絲帖(색사첩) / 19세기 말 ~ 20세기 전반.
자수를 놓을 때 필요한 실이나 헝겊 조각 등이 엉키지 않게 정리하여 담아두는 첩이다.
시집갈 때 혼수로 장만해 가던 작은 보물상자로, 좌우로 펼쳐 열개끔 되어 있다.
겉과 안은 卍만자, 연꽃, 원앙, 모란 문양이 그려져 있어 부부의 행복을 비는 마음을 담고 있다.
(아랫줄 좌) 열쇠패. 조선 후기, 정성채 기증.
여러 개의 별전을 엮어 만든 열쇠뭉치의 노리개이다.
곳간이나 방안의 옷장, 반닫이 등에 열쇠패를 걸어 두고서 집안의 평안과 수복을 기원하였다.
(아랫줄 중) 장신구, 조선 후기.
신부가 예물로 받거나혼수로 준비한 장신구로, 떨잠, 귀걸이, 뒤꽂이 등이다.
(아랫줄 우) 대삼작노리개,大三作珩(대삼작형), 조선 후기.
혼례 등 큰 의례에만 사용하는 대삼작노리개이다. 산호가지, 옥나비, 밀화불수 형 장식과 낙지발술매듭으로 이루어진 장신구이다.
혼례,婚禮
혼례는 혼인할 때 수반되는 모든 의례와 그 절차를 의미한다.
조선시대는 남녀 구별이 엄격한 유교 사회로 중매결혼이 일반적으로 행해졌다.
중매에는 남자와 여자의 생년, 월, 일 시간을 적은 사주단자로 궁합을 맞추고,
혼사가 정해지면 혼서지(婚書紙)와 예물을 담은 납폐함을 보내 약혼을 증명하였다.
혼인절차는 전안례, 교배례, 합근례 순으로 진행되었다. 중국의 예절서인 <주자가례>에는 신랑이 신부를 자기 집으로 맞이하여
초례를 치르는 친영(親迎)으로 규정되어 있으나, 관행적으로 신랑이 신붓집에 가서 초례를 치렀다.
혼례 절차
의혼議婚 - 중매자가 혼사를 의논한다.
납채納采 - 신랑집에서 신붓집으로 청혼서와 신랑의 사주를 보낸다.
연길涓吉 - 신붓집에서 신랑집으로 납폐(納幣)와 전안(奠雁-기러기 가지고 신부의 집에...))할 날짜를 정해 택일단자를 보낸다.
납폐納幣 - 신랑집에서 신붓집으로 납폐서와 혼수품을 보낸다.
초행初行 - 신랑 일행이 신붓집으로 간다.
전안奠雁 - 신랑이 신붓집에 기러기를 바친다.
교배交拜 - 초례상 앞에서 신랑과 신부가 맞절을 한다.
합근合卺 - 신랑과 신부는 서로 술잔을 나눈다.
신방新房 - 신랑과 신부가 합방을 한다.
신행新行 - 신부가 가마를 타고 신랑집으로 간다.
현구고례 - 신부가 시부모와 시댁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다. '폐백幣帛'이라고 한다.
묘현廟見 - 사당에 신부가 왔음을 고한다.
근친覲親 - 신랑과 신부가 신붓집에 인사를 간다.
장가가고 / 19세기 말 이후, 19세기 이후,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 생몰년 미상) 복제 (독일 MARKK 원본 소장)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신붓집으로 가는 친영(親迎)행렬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보자기로 싼 기러기를 안은 안부와 청사초롱을 든 등롱꾼에 이어, 일산(日傘) 아래로 사모관대(紗帽冠帶)를 하고 사선(紗扇)으로
얼굴을 가린 신랑과 부채로 얼굴을 가린 상객(上客)이 말을 타고 신붓집으로 가고 있다.
활옷 / 1910년대, 손경자 기증.
여성이 혼례를 치를 때 입는 예복이다. 활옷의 뒷면에는 연꽃과 모란 , 학, 바위 등의 십장생을 가득 수놓고 양쪽 한삼에는 봉황을 수 놓았다.
연꽃과 모란 나비 등은 남녀의 인연, 사랑 등을 상징한다. 활옷에는 십장생 외에도 이성지합(二姓之合) 만복지원(萬福之願)
또는 수여산(壽如山) 부여해(富如海) 등의 길상문자 를 넣어 부귀와 다남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수혜,繡慧 / 20세기 중반 이후
여성용의 마른신으로, 신 전체에 십장생 수를 놓았다. 수혜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사대부가의 젊은 부녀자들이 주로 애용하였던
신으로, 개화기 이후에는 일반 부녀자들이 혼인할 때 시댁에서 반드시 장만해 주었다고 한다.
나무기러기와 기러기 보 /조선 후기
전안레에 사용되는 나무기러기와 이를 싸는 보자기이다.
기러기는 양에서 음으로 이동하는 동물로, 신랑이 신붓집으로 가기 때문에 신랑이 신붓집에 바치는 예물로 사용되었으며,
예로부터 기러기는 부부의 의리를 잘 지키겠다는 서약의 뜻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화관,花冠 / 2세기 중반 이후
부녀자들이 예복을 입을 때 갖추어 쓰는 관모이다. 종이로 관(冠) 모양을 만들고 그 위에 비단을 입히고 금박을 오려 붙인 후,
석웅황, 밀화, 비취, 진주 등 각종 보석으로 장식하며, 양쪽에 작은 비녀 2개를 꽂아서 머리에 고정한다.
초례,醋禮
신랑과 신부가 처음 만나 절하고(交拜禮), 서로 술잔을 바꿔 나눠 마시며 혼인 서약을 하는 (합근례,合卺禮) 예식을 초례라고 하며,
예식을 치르는 곳을 초례청이라 한다.
<주자가례>에 의하면 초례청은 신랑집에 차리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종래의 관행에 따라 신붓집의 대청이나 마당에 차렸다.
초례상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음양의 화합을 상징하는 청색, 홍색의 초, 솔가지와 대나무, 수탉, 암탉, 밤, 대추, 붉은 팥, 검은 콩 등을 차렸다.
초례청에서는 창홀(唱笏,진행자)이 초례상 뒤쪽에 서서 예식 순서인 홀기(笏記)에 따라 혼례식을 진행하는데,
음양의 원리에 따라 신랑은 동쪽에 서며, 신부는 서쪽에 서서 예식을 행하였다.
현구고례,見舅姑禮.
신부가 시집가서 처음으로 신랑의 부모를 만나서 배례(拜禮)하고 폐백(幣帛)을 올리는 의례이다.
신부는 친정에서 준비해온 대추, 밤, 술, 안주, 과일 등을 상 위에 올려놓고 시부모와 시댁의 어른에게 차례로 큰절을 하고 폐백을 올린다.
이 때 신랑은 함께 절하지 않고 아버지 옆에 선다. 신부에게 폐백을 받은 시부모는 치마에 대추를 던져주며 부귀다남하라고 당부한다.
이때 신부는 시부모와 시댁 식구들에게 옷이나 버선 등을 선물로 드린다.
요즘에는 예식장이나 교회 등 공공장소에서 혼례를 하는 경우가 일반적으로,
결혼식을 마친 후 예식장 또는 시댁에서 현구고례, 즉 폐백을 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願渠恭儉永家聲 원거공검영가성
詩書隱約終身事 시서은약종신사
天地絪縕 萬物生 천지인온만물생
縱是在初貽哲命 종시재초이철명
還須逐後播芳名 환수축후파방명
班資財賄且休問 반자재회차휴문
淸白子孫爲座銘 청백자손위좌명
신랑 신부 내외의 절을 앉아서 받는 자리에서 공경과 검소함으로 가문을 길이 빛내길 바라니
간략하면서도 심오한 시경과 서경을 한평생 공부하고 천지 음양의 두 기운을 합하여 자식을 낳아 기르라.
처음 태어날 대 뒤어난 자질을 받았다 할지라도 앞으로 더욱 힘써 꽃다운 명성을 떨치길 바라니
벼슬이나 재물 따위는 굳이 따지려 하지 말고 청백한 자손되는 일을 좌우명으로 삼으라.
쌍륙치고 / 19세기 말 이후,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 생몰년 미상)
쌍륙에 빠져 있는 남녀와 긴 담뱃대를 문 남녀 3명이 이를 구경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쌍륙은 두 사람 또는 두 편이 각각 15개의 말을 가지고 두 개의 주사위를 던져서 나오는 끗수대로 말을 써서
놀이판을 먼저 빠져나가는 놀이로, 악삭(握槊), 십이기(十二基), 육채(六采)라고도 한다.
쌍륙판 / 1900년대 전반, 이채희 기증.
쌍륙은 두 사람 또는 두 편이 각각 15개의 말을 가지고 두 개의 주사위를 던져서 나오는 끗수대로 말을 써서 놀이판을 먼저 빠져나가는
놀이이다. 조선시대에 집안에서 주로 지냈던 사대부 집안의 여인들에게 쌍륙은 몇 가지 안 되는 실내놀이 중의 하나였다.
바둑두고 / 1890년대,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 생몰년 미상), 복제, 독일 MARKK 원본 소장.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고, 다른 두 사람은 구경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바둑 / 조선 후기
바둑은 두 사람이 검은 돌과 흰 돌을 번갈아 가며 놓는 놀이이다. 말없이 손으로만 대화한다는 의미에서 수담(手談)이라고도 하였다.
최근에 바둑은 프로화되어 전문 기사가 배출되고, 아시안게임 종목에 채택되는 등 전통 놀이가 전승되고 있다.
장기(將棋) 두고 / 19세기 말 이후,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 생몰년 미상),
장기판을 앞에 둔 두 명의 놀이꾼이 장기에 몰입하고 있는 그림이다.
장기(將棋) / 조선 후기
장기는 두 사람이 장기알을 번갈아 두면서 승부를 내는 전통놀이이다. 언제 어디에서나 장기판을 벌여 놓고 노는데,
바쁘고 중요한 일을 잊은 채 장기 삼매경에 빠져든 모습에서 한국적인 멋과 풍류를 찾을 수 있다.
투전하는 모양 / 1890년대,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 생몰년 미상), 복제, 독일 MARKK 원본 소장.
서민들이 즐겨 놀던 투전 노름을 그린 그림이다. 투전은 도박성이 매우 강한 놀이로,
정약용(1762~1836)은 <목민심서>에서 투전을 '심보가 나빠지고 재산을 탕진하며 가족의 근심이 되는 첫째 놀이'로 규정하였을 정도였다.
투보,骰譜 / 조선 후기.
골패(骨牌) 놀이에 대한 수십 가지의 패가 그려져 있는 책으로, 한글로 적혀 있다.
그림 위쪽에는 '大三同,대삼동', '大四對,대사대', 八紅,팔홍,' 등의 패 이름이 적혀 있다.
골패,骨牌 / 조선 후기
네모난 작은 나뭇조각에 여러 가지 수효의 구멍울 판 노름 도구로,
투전과 더불어 대표적인 노름이었으나, 값이 비싸고 놀이방법이 복잡하여 투전과 달리 대중화되지는 못하였다.
어제 학(鶴)을 타고 봉래도(蓬來島-신선이 산다는 섬)에 갔다가, 성(城)은 찾지 못하고 안개 속에
세 노인을 뵈었는데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문득 나이를 묻고는 나에게 장생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였네.
한 노인이 이르길, 어려서 반고(盤古-중국 고대에 천지를 개벽한 사람)와 노닐었는데, 천지가 개벽할 때부터 아득히 같이하였고.
이로부터 아득한 우주가 이루어졌으니 나보다 뒤에 태어난 자가 어찌 짝하겠는가?
한 노인이 이르길, 내 나이는 알 수 없으나 항상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변하는 것을 보았고
매번 한 번씩 변한 것을 보며 산가지 하나를 더했는데, 산가지가 열 칸 집을 가득 채우도록 얼굴은 늙지 않았네.
한 노인이 이르길, 스승을 따라 약수(弱水-전설 속의 물 이름) 서쪽으로 갔는데,
서왕모(金母-곤륜산에 산다는 전설상의 여자 신선으로 불로장생을 한다고 전해진다)를 만나 곤륜산 정상에서 쉬었고
복숭아(서왕모가 심은 복숭아로 이를 먹으면 불로장생한다고 전해진다)를 먹고 그 씨를 곤륜산 아래에 버렸는데,
지금 그 나무가 자라서 높이가 곤륜산과 같네.
세 노인의 말이 명확해서 헛되지 않으니, 천지간에 취했다가 갑자기 깨었네.
현묘한 도(谷神)가 사라지지 않고 본성도 그대로 있으니, 능히 세 노인과 나이를가지런히 할 수 있겠네.
위는 세 노인이 나이를 묻는 그림에 대해 글을 지은 것이다.
애일당구경첩 화산양로연도 / 보물, 복제품, 한국국학진흥원 원본 소장(영천이씨 농암 이현보 종가 기탁)
농암 이현보(1467~1555)에게 90세가 넘은 부모가 생존하신 것을 기념하여
그의 지인들이 증정한 그림과 송축시(頌祝詩)를 모아 엮은 책이다. 이 책에는 '화산양로연도(花山養老燕圖)'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잔치 때 이현보는 부모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어린아이처럼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고 전해진다.
수연례,壽宴禮.
60세 이후의 생일과 특별한 날에 장수(長壽)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벌이는 의례를 수연(壽宴)이라고 한다.
조선 후기 이만영(李晩永,1748~?)이 엮은 <재물보,才物譜>에서는
"60세가 지나면 잔치를 베풀어 이를 축하는 것(壽過六十則設宴慶之)"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만큼 60세 이후의 삶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전통 사회에서는 수연례를 통해 자식의 효심(孝心),축수(祝壽)의 의미를 담은 효행사상이 강조되었으나,
최근 들어 수연례는 환갑에서 칠순으로 연령이 높아지고, 잔치가 아닌 여행으로 대신하는 등
장수를 축하하고 기원하는 의례는 시대에 흐름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경하
송재 대인의 생신을 경하드립니다.
생신이 거듭 60년에 이르러 (鐵花,철화 - 60년에 한번 핀다는 철수(鐵樹)의 꽃이다)
색동옷 입고 쌍쌍이 춤추니 기쁨이 더욱 새롭네
무릎에 앉은 여러 손자들의 재주는 여럿 중에서 뛰어나고
서로 공경하는 부인의 덕은 사람들에게 마땅하네
제문과 옥책으로 문장과 부귀를 이루었으니
선약과 약초로 진귀한 음식을 갖추었네.
단지 원하는 것은 해마다 이 잔치를 열어서
팽조를 벗 삼고 노자를 손님으로 맞이하는 것이네.
을묘년 1월 16일 그 다음날 소생 연안 김교영이 재배하고 올립니다.
노인,老人
노인은 평균 수명에 이르렀거나 그 이상을 사는 사람으로 어르신, 고령자라고 하며
요즘에는 시니어(영미문화권에서 보통 65세 이상의 사람을 가리킴), 실버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현대 고령화 사회에서 노인은 사회적 잣대로만 평가되거나 어른으로 인정받지 못할 경우도 있으며, 공동체에서 소외되기도 한다.
그러나 "노인 한 사람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 (아프리카 속담) 는 말처럼
노인은 오랜 경험으로 축적된 지혜로 후대에 바른길을 제시해 온 사회의 어른이다.
치유,治癒, healing
사람은 나이 들면서 점차 병에 자주 걸리게 된다. 조선 후기에는 병이 들거나 몸이 허약해지면 약방에서 치료하였다.
한약방에서는 주로 중국의 의학서를 참고하였지만,
허준(1539~1615)의 <동의보감>이 보급되면서 병의 증상에 따라 침이나 뜸을 하고, 약을 조제하여 병을 치료하였다.
일부 사람들은 굿이나 부적과 같은 주술 등 초자연적인 힘에 의지하여 병을 예방하거나 위안을 얻고자 하였다.
오늘날에는 한의학과 더불어 서양 의료기술인 양의학으로
병을 치료하는데, 과학 기술을 이용하여 진료와 치료를 하면서 인간의 수명은 점점 더 길어지고 있다.
굿청,一廳
굿청은 굿을 하는 장소로서, 굿상을 차리고 무신도(巫神圖)와 지화(紙花)를 비롯한 여러 기물을 진설하며 굿청을 꾸민다.
개인굿은 가정이나 전문 굿당에 차려지며, 마을굿에서는 마을신(洞神)을 모신 당(堂)이나
바닷가와 같이 지역적 특성을 고려한 장소에 마련되기도 한다. 이 굿청은 황해도굿청의 지역사례를 표본으로 삼았다.
주술과 점복
주술은 인간의 길흉을 초자연적인 힘을 빌려 기원하거나 물리치고자 할 때 행하는 방법이다.
주술은 세시풍속의 한 형태로도 많이 나타난다. 절기에 맞춰 귀신이나 재앙을 쫒고 복을 부르기 위해, 부적을 써 붙이기도 하고
무당을 불러 굿을 하기도 하였다. 또, 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하기 위해 특별히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밖에도 생년월일에 근거하는 사주, 산통의 산가지를 뽑아 괘를 해석하는 작괘점,
사람의 얼굴과 손금 모양을 통해, 판단하는 관상점 등을 통해 앞으로의 좋은 일과 나쁜 일(吉兇禍福)을 예측하기도 하였다.
거북점통.龜形占筒 / 20세기 전반.
거북점을 칠 때 사용하는 점통으로, 나무나 쇠로 만든 거북 모양의 통속에 괘(卦)를 쓴 종이나 막대를 넣은 뒤, 어떤 괘를 뽑느냐에
따라서 길흉(吉凶)을 점친다. 거북의 등에는 태극문양과 팔괘가 음각되어 있으며, 몸통 양 옆에는 '龜' '神'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산판,算板 / 20세기 중반 이후
제주도 무속에서 인간의 길흉화복을 판단하는 점구(占具)의 하나로,
천문(天門) 2개, 상잔(床盞,작은 놋쇠 술잔) 2개와 이것을 담아 던지는 산대(算臺,접시 모양으로 된 잔대)로 이루어져 있다.
천문은 놋쇠로 만든 엽전 모양으로 '天門日月천문일월'이라고 새겨져 있으며, 제주도 큰무당 이중춘 심방이 생전에 쓰던 문구이다.
상레,喪禮
상례는 죽은 사람을 땅에 묻고 탈상하는 의례를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효'라는 유교적인 윤리에 따라 삼년상을 자식의 도리로 여겼다.
자식들은 돌아가신 이의 마지막 길을 화려한 상여에 태워 보냈고, 내세(來世)를 위해 생활 용기로 쓰일 명기를 함께 묻기도 하였다.
그리고 삼년상 동안 자식은 벼슬살이나 농사일도 그만 두고
집에 마련된 상청이나 산소 곁에 여막을 짓고 돌아가신 이를 위해 마지막으로 효를 다하였다.
상례 절차와 문화는 시대의 흐름과 생활환경에 따라 많이 변화하였다. 오늘날에는 <가정의례준칙>이나 장의사 등이 일반화되면서
매장, 화장 등 상례가 간소하게 행해지고 있지만, 돌아가신 이에 대한 애도의 의미는 바뀌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상여,喪輿 /국가민속문화재, 진주 화단친목회 기증.
상여는 상례 때 시신을 묘지까지 운반하는 기구로, 규모에 따라 대여(大輿), 소여(小輿)라고 한다.
원래는 소나 말, 또는 사람이 끄는 수레였으나, <주자가례>를 수용하면서 사람이 어깨에 메는 것으로 바뀌었다.
상여의 형태는 가마와 비슷하나, 몸체 좌우에는 멜채가 있어 크기와 형편에 따라 12인에서부터 24인 등이 함께 메고 운반하였다.
상여는 대개 마을마다 마련하되 상여 틀을 분해, 조립할 수 있도록 만들며,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상엿집에 보관하였다.
이 상여는 1856년에 경상남도 산청군 전주 최씨 최필주(崔必周,1796~1856)의 장례 때 제작된 전주 최씨 고령댁 상여이다.
4층 누각식 건물 형태로, 각 층마다 죽은 이를 저승 세계로 인도하고 수호하는 인물상과, 동물상 그리고 12지 신상 등이 배치되어 있다.
행상(行喪)하는 모양 / 19세기 말 이후,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 생몰년 미상)
장지로 향하는 상여 행렬을 그린 그림으로 , 명정(銘旌)과 공포(功布), 만장(輓章), 요여(䁏輿), 운삽(雲翣)과 아삽(亞翣),상여(喪輿),
상주, 빈객 순이다. 명정에는 '학생모본모공지구' 만장에는 두보(712~770)와 백낙천(772~846)의 시 구절 등을 적어두었다.
사당
사당은 고조부모, 증조부모, 조부모, 부모 등 4대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곳이다.
사당은 대체로 집의 동쪽에 있으며, 사당 안에는 서쪽부터 고조부모, 증조부모, 조부모, 그리고 동쪽 끝에 부모 신주를 모셨다.
사당에서는 집안에 큰일이 있을 때 알리거나, 매달 초하루와 보름, 설, 추석 등의 명절 때 차례를 지냈다. 사당을 두지 못한 집에서는
벽감이나 별도의 감실을 만들어 신주를 모시거나, 사당을 그린 감모여재도로 사당을 대신하기도 하였다.
제례
제사는 돌아가신 조상을 모시고 때마다 추모하는 의례이다.
조선시대에는 조상이 마치 살아 계신 것처럼 모시는 것을 최고의 효로 여겼다.
유교적인 제례에 따라 집안에 사당을 짓거나 벽감을 만들어 고조부모, 증조부모, 조부모, 부모 등 4대 조상의 신주를 모신다.
후손들은 이들 4대 조상의 돌아가신 날, 설, 추석 등 명절 제사를 통해 감응하였다.
오늘날은 조선시대와 달리 유교 이념에서 벗어나
여러 종교의 영향으로 효와 조상에 대한 관념이 달라지면서 제례 관습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하지만 조상을 기리며 자손의 안녕과 가족의 화합을 꾀하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감모여제도,感慕如在圖 / 조선후기.
제사의 공간인 사당을 그려놓은 그림으로,
사당도라고도 한다. 집안에 사당이 없거나 제주(祭主)가 외지에 멀리 떨어져 있을 경우,
사당도에는 지방을 붙일 수 있도록 사당 중앙에 신위 형태의 자리를 비워두었다. 신위자리 앞에는 향합과 향로가 올려진 향상이 그려져 있다.
감실,龕室 / 조선 후기.
조상의 신주(神主, 죽은 사람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지붕 모양의 천판 아래, 두 개의 칸으로 구획한 작은 규모의 공간으로, 사당이 없는 집에서 사용하였다.
제사상 차림
제사상에는 일반적으로
맨 앞줄에 과일, 둘째 줄에 포(脯, 얇게 썰어 말린 고기)와 나물, 셋째 줄에 탕, 넷째 줄에 적과 전, 다섯째 줄에 메(밥)와 갱(국)을 놓는다.
그러나 제사상 차림은 각 지방의 관습이나 가문의 전통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일반적으로 제주가 제사상을 향해 오른쪽을 동쪽,
왼쪽을 서쪽이라 하였을 때, 대체로 다음과 같은 원칙에 따라 제사 음식을 차린다.
조율이시 - 왼쪽부터 대추, 밤, 배, 감 순
홍동백서 - 붉은 과일은 동쪽, 흰 과일은 서쪽.
생동숙서 - 생채(김치)는 동쪽, 숙채(나물)는 서쪽
좌포우해 - 포는 왼쪽, 젓갈은 오른쪽
어동육서 - 생선은 동쪽, 육류는 서쪽.두동미서 - 생선의 머리는 동쪽, 꼬리는 서쪽.
건좌습우 - 마른 것은 왼쪽, 젖은 것은 오른쪽.
반서갱동 - 밥은 서쪽, 국은 동쪽.
고서비동 - 아버지 신위는 서쪽, 어머니 신위는 동쪽.
안동권씨 충재 권벌 종가 제사상
경상북도봉화군 안동권씨 충재 권벌(權橃, 1478~1548) 선생 종가의 불천위 제사상을 재현한 것이다.
충재 선생이 돌아가신지 43년 후인 1591년(선조 24) 광국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어 불천위(不遷位)로 모시게 되었다.
불천위 제사음식은 기제사상을 기본으로 하지만, 가문에 따라 특색 있게 차려진다.
충재 종가 불천위 제사상의 특징은, 일반적으로 시루떡을 층별로 쌓아올리는 것과 달리
12가지 떡을 층별로 잘게 쌓아 제사상에 올리고, 이 마을의 전통유과인 오색강정을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충재(沖齋) 권벌(權橃, 1478~1548) 선생은 종계변무에 참여한 공으로 1590년(선조 23)에 광국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불천위로 모셔 졌다.
광국원종공신 1등(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공신 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에는 137명, 2등에는 136명 3등에는 599명이
합해서 총 872명이 책록되었습니다.
광국원종공신과 불천위에 대하여.
불천위,不遷位 제사.
불천위란 4대를 지나도 사당에서 신주를 옮기지 않고 자손 대대로 영원히 제사를 받들어 모시는 신위를 말한다.
불천위는 국가에 큰 공헌을 한 공신을 비롯하여 학행과 절의가 뛰어난 사람 등을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불천위 제사는
그 후손과 가문의 영광이자 집안의 위상을 상징하는 것이다.
종계변무 / 발생 1394년(태조3)6월, 종결 1589년. (광국원종공신은 종계변무에 참여한 공으로 책록되었다)
조선 건국 초기부터 선조 때까지 200여년간 명나라에 잘못 기록된 태조 이성계의 세계(世系)를 시정해 달라고 주청했던 사건
고려 말 1390년(공양왕2) 이성계의 정적이던 윤이(尹彛),이초(李初)가 명나라로 도망가서 이성계를 타도하려는 목적으로,
공양왕이 고려 왕실의 후손이 아니고 이성계의 인척이라 한 적이 있다. 이 때 윤이 등은 이들이 공모해 명나라를 치려고 한다면서,
이성계의 가계에 관해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라고 한 일이 있었다. 그 뒤 명나라는 이 이야기를 믿고,
그 내용을 명나라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그대로 기록하였다.
조선에서 이러한 종계(宗系)의 기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394년(태조 3) 4월이었다.
이 때 명나라 사신이 와서 조선의 연해민이 해구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항의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압송을 요구하는 항의문에
"고려배신 이인임지사성계금명단자운운(高麗陪臣 李仁任之嗣成桂今名旦者云云 - 고려의 신하 이인임의 후손인 성계의 지금의
이름을 단이라 하는 등)"한 것으로부터였다.
조선 태조에 관한 종계오기(宗系誤記)는 표면적으로 명나라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건국 직후의 조선으로서는
왕통의 합법성이나 왕권 확립에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종계 문제를 계기로 이성계를 무시하고 의심하였다.
뿐만 아니라, 종계오기를 빌미로 조선을 복속시키려고까지 하였다.
더구나 이인임은 우왕 때의 권신으로 이성계의 정적이었다. 그런데 이성계가 그의 후사라는 것은 모욕적인 말로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항이었다. 그리하여 이 문제는 이후 양국간에 매우 심각한 외교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조선측에서는 그해 6월 명나라의 사신 황영기(黃永奇)의 귀국 편에 변명주문(辨明奏文)을 지어 사실의 잘못된 점을
지적해 보냈다. 그 내용은 태조 이성계의 가계 22대를 간략하게 기록하고,
태조 즉위의 정당한 이유에 대해 밝히면서, 이인임의 불법적인 행위를 상세히 알렸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1402년(태종 2) 1월 성절사 장온(張溫)의 귀국 복명 속에 명태조의 유훈 가운데
조선왕의 가계는 이인임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하여 지난번의 변명이 헛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곧 사신을 파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당시 명나라는 2대 건문제(建文帝)와 3대 성조(成祖) 사이에
황제위의 계승 문제로 내란 중에 있었으므로 변무(辨誣)의 시기가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이듬해 4월 고명(誥命)과 인신(印信)의 문제가 해결되고, 이어 10월에 면복(冕服) 등을 받아 와 명나라와의 관계가
안정되었다. 그러자 조선은 11월에 사은사 임빈(林彬)을 파견했는데, 그 때에 종계변무의 임무를 겸하도록 하였다.
주청문(奏請文)에는 그 동안 명나라와의 사이에 내왕한 문서와 태조의 가계를 자세히 기록하였다.
그리고 태조가 이인임과 같은 이씨가 아님을 밝히기 위해 이인임의 가계까지 상세하게 기록해 추가로 보냈다.
그러나 명나라로부터는 명태조의 유훈이 <대명회전>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만력회전萬曆會典> 중수본에서 변명 사실을 부기 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종계변무는 이후 근 200년간이나
양국 관계에서 외교 문제가 되었고, 중종 때 반정의 합법성을 강조할 때에도 다시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즉, 1518년(중종 13) 주청사(奏請使) 이계맹(李繼孟)이 돌아와 <대명회전> 조선국조(朝鮮國條)의 주에
이인임과 그의 아들 단(旦-이성계의 이름)이 홍무 6년부터 28년까지 무릇 네 왕을 시해했다고 기록되어 있음을 보고하였다.
그러자 중종은 곧 남곤(南袞), 이자(李耔) 등을 보내어 '태조의 세계가 이인임과 아무런 관련이 없고 또 선세(先世)에 시역(殺逆)한
일이 없다. '고 밝히고 그 개정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명나라의 무종(武宗)은 이 사실을 수긍하면서도 개정하지 않았다.
그 뒤 1529년에 가절사 유보가 명나라에서 <대명회전>이 중찬되리라는 것을 듣고, 곧 예부에 주청해 이 기회에 개정할 것을 요구
하였다.
또 1539년에도 주청사 권벌(權橃), 1557년(명종 12)에는 호조판서 조사수(趙士秀), 1563년에는 주청사 김주(金澍),
1573년(선조 6)에는 주청사 이후백(李後白), 윤근수(尹根壽),
1575년에는사은사 홍성민(洪聖民) 등을 보내어 기회 있을 때마다 개정의 주장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이 때까지도 <대명회전>은 반포되지 않았고, 또한 중찬의 내용도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명나라는 <대명회전>을 중찬할 때 조선측의 주장을 부록하겠다고 언약하는데 그쳤기 때문이었다.
이어 대사간 이이(李珥)는 국군(國君)이 수무(受誣 - 무고로 인한 모욕을 당함)를 한 지
200여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이를 고치지 못해서는 안 되겠다고 하여 인재를 주청사로 보내어 강력하게 주장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581년(선조 14)에는 김계휘(金繼輝)를 주청사로 보내고 다시 1584년에는 황정욱(黃廷彧)을 보냈다.
그리고 황정욱이 중찬된 <대명회전>을 가지고 돌아옴으로써 종계변무의 목적이 달성되게 되었다.
이어 1587년에는 주청사 유홍(兪泓)을 명나라로 보내어 이번에는 <대명회전>의 반사(頒賜>를 요청하였다.
명나라의 예부에서는 황제의 친람을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다가,
예부상서 심리(沈鯉)의 상주에 의해 명제의 칙서와 함께 중수된 <대명회전> 중에서 조선 관계 부분 한질을 보냈다.
선조는 이것을 종묘, 사직, 문묘에 친히 고하였다.
그 뒤 1589년에 성절사 윤근수가 <대명회전> 전부를 받아 옴으로써 200년간의 종계변무의 외교상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게 되었다.
-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충재(沖齋) 권벌(權橃, 1478~1548) 선생은 종계변무에 참여한 공으로 1590년(선조 23)에 광국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불천위로 모셔 졌다.
광국원종공신 1등(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공신 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에는 137명, 2등에는 136명 3등에는 599명이
합해서 총 872명이 책록되었습니다.
불천위,不遷位 제사.
불천위란 4대를 지나도 사당에서 신주를 옮기지 않고 자손 대대로 영원히 제사를 받들어 모시는 신위를 말한다.
불천위는 국가에 큰 공헌을 한 공신을 비롯하여 학행과 절의가 뛰어난 사람 등을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불천위 제사는
그 후손과 가문의 영광이자 집안의 위상을 상징하는 것이다.
제기,祭器
제기는 제사에 사용되는 각종 그릇과 도구이다.
제기는 일반적으로 나무, 사기, 놋쇠 등으로 만드는데, 사당에서는 놋쇠나 사기로 만든 제기,
묘소에서는 가볍고 운반하기 쉬운 나무 제기를 사용한다. 제기는 조상을 위한 그릇이기 때문에 사당의 제기고나 특별히 만든
나무 궤에 보관하였다. 또한, 남에게 제기를 빌려주거나 팔지 못하게 하였으며, 제기가 못쓰게 되면 땅에 파묻고 다른 용도로 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