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기미술관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40길 63, 부암동 210-8)
수화 김환기 사망 이듬해 설립된 환기재단에 의해 1992년 세워졌으며, 고 김환기 화백의 부인인 고 김향안 여사가 1988년부터 구상하였고, 1991년에 공사를 시작해 1993년에야 완성했다(구상부터 시작하면 5년에 걸친 작품이다)
한 개인을 기념하는 사설 미술관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이다
김환기의 작품전시를 비롯한 다양하고 활발한 기획전시, 행사, 교육프로그램 등을 운영해 오고 있다
주요 소장품은 김환기의 작품 300여 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전시는 김환기 작품의 상설 전시와 특별전, 현대미술에 대한 각종 기획전과 행사를 병행하고 있다
환기미술관은 작가의 예술이 갖는 귀중한 가치와 그가 생전에 한국미술계에 미친 영향 을 다시 되새기며 한국 현대미술의 풍부한 결실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 변동림(卞東琳)과 김향안(金鄕岸)
대한민국의 여성 수필가, 미술평론가, 겸 서양화가 이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경기여고)를 거쳐 이화여자 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문학소녀 변동림(卞東琳, 1916~2004)도 시인이자 소설가 이상과 뜨거운 연애를 한 모던걸이었다
그녀는 이상(李箱, - 본명 김해경 金海卿, 1910~ 1937)의 친구인 화가 구본웅의 나이어린 이모였다
구본웅은 친모가 산후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후 계모인 변동숙의 손에 자랐다
계모 변동숙은 구본웅을 지극정성으로 키웠다
그런데 변동숙의 아버지가 훗날 새장가를 들어 자신과 스물여섯 살이나 차이가 나는 이복여동생을 낳았다
그녀가 바로 변동림인데, 연상의 조카 구본웅의 친구 이상과 커피를 마시고 데이트를 하면서 문학을 논하다가 사랑에 빠졌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와 결혼하겠다고 결심했다
이상이 폐병을 앓고 있음을 아는 변동숙은 펄펄 뛰며 반대했지만, 변동림은 1936년 6월 이상과 결혼을 강행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고, 그래서 이상의 호적에는 변동림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부부에게 신혼의 즐거움은 잠시뿐이었다
폐결핵은 점점 심해졌고, 구본웅은 천재이자 연하의 이모부인 그가 그렇게 허망하게 삶을 마감하도록 놔둘 수 없다며, 일본으로 가서 요양하라고 돈을 건넸다
결혼 4개월 만인 1936년 9월의 일이다
일본에서 요양하던 이상은 1937년 2월 공원을 산책하다 ‘불령선인(不逞鮮人, 명령을 듣지 않는 조선인)’이라는 죄목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옷차림이 허름하거나 용모가 단정치 못한 조선인은 무조건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되던 시절이었다
이상은 니시칸다 경찰서에 34일간 구금되었는데, 이때 건강이 다시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악화되었다
얼마 후 변동림은 도쿄에 거주하는 이상의 친구에게 빨리 일본으로 오라는 전보를 받았다
도쿄 제국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한 이상이 매우 위독하다는 내용이었다
이상은 변동림이 병원에 도착하고 며칠 후인 1937년 4월 17일, “멜론이 먹고 싶소”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우리 근대문학사의 천재는 이렇게 박제가 되었다
21세에 청상(靑孀)이 된 변동림은 이상의 유골을 안고 현해탄을 건너 미아리 공동묘지에 매장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묘소는 유실되었다
이상이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고 7년 후, 자녀가 셋이나 있는 화가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1913 ~ 1974)와 살림을 차렸다
변동림이 김환기와 동거를 시작하자 이복언니 변동숙은, 부인이 있는 김환기의 첩살이를 하는 건 결국 본부인을 내쫓는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라며 결사반대했다
이에 변동림은 변씨 가문과 아예 인연을 끊겠다며 이름을 김향안(金鄕岸)으로 바꿨고, 얼마 후 김환기 는 본부인과 이혼했다
김향안과 김환기는 월북화가 근원 김용준이 살던 성북동 ‘노시산방’에서 신접살림을 차린 후 집 이름을 ‘수향산방(수화 김환기와 향안이 사는 집)’으로 바꿨다
김향안은 1955년 김환기와 함께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 미술평론을 공부했고, 다시 1963년 뉴욕으로 공부를 떠난다
1974년 목디스크 수술을 받기위해 뉴욕 유나이티드 병원에 입원한 김환기는 그게 마지막이 될줄은 꿈에도 몰랐다(김환기 나이 예순둘)
김향안과 결혼한지 꼭 30년이 되는 해였다
그로부터 꼭 30년이 지난 2004년 2월 29일 김향안 도 뉴욕에서 사망한다
허드슨강이 내려다보이는 웨스터체스터 공동묘지 에 그토록 묻히고 싶어했던 남편의 묘지 바로 옆에 나란히 누웠다
예술가의 아내 뿐만이 아니고 수필(파리와 뉴욕에 살며)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 등을 발간하고 개인전을 여는 등 스스로 예술가였던 그녀의 인생은 한국예술사에서 두 천재의 아내로 영원히 기억된다
1974년 김환기가 죽은 후 흩어진 유작과 유품을 모아 1975년 상파울루에서 김환기회고전을 열고 1978년 환기재단을 설립하여 김환기 예술을 알리는데 힘썼다
1992년 고인이 생전에 그토록 좋아했던 성북동 (수향산방)을 닮은 곳을 찾아 종로구 부암동 산기슭에 환기미술관을 설립하였는데 개인이 사비로 만든 최초의 미술관이다
♤ 만약??
만약 이상이 동경에 가지 않았더라면,
동경에 갔더라도 일경에게 붙잡혀 감옥살이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이상이 죽지 않고 살았다면,
변동림은 김향안이 되지 않았을까?
두 사람의 바람대로 이상을 따라 동림도 동경으로 가고 둘이 함께 유학 생활을 했더라면,
그래서 이상과 변동림이 마치 김환기와 김향안이 그랬듯 파리와 뉴욕으로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치며 살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어땠을까?
하지만 삶에는 만약이란 것이 없다
이상은 젊은 나이에 죽고, 변동림은 경성에 머문다
그리고 화가 김환기를 만나 젊을 때의 "오만한 지성"과는 다른 사랑을 한다
얽히고 설킨 가계도
제7대 대한민국 국립발레단 7대 단장(2014년 ~ 현재) 강수진은 구본웅의 외손녀이다
창의문 (彰義門, 자하문紫霞門, 북소문北小門)
(서울시 종로구 창의문로 118, 청운동 산 1-1)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1396년에 건립되었다
현재의 문은 1741년에 세운 것으로,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2015년 12월 2일 보물 제1881호로 지정되었다
1413년(태종 13)에는 풍수지리설에서 이 문을 열어놓으면 궁궐과 왕조에게 액을 불러온다는 미신으로 풍수학자 최양선이 건의하여 폐쇄하였다
때때로 임시 개방을 하기도 하였는데, 1422년(세종 4)에 도성을 정비하는 일을 원활히 하고자 창의문과 숙정문을 연 일이 있다
이후 한동안 열어 두던 창의문은 1446년(세종 28) 4월에 닫혔다
1469년(예종 1) 3월에도 문을 닫으라는 명이 있었다
1623년(광해군 14) 3월 12일 밤 홍제원에 집결한 반정군이 세검정과 창의문을 통과하여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영조 때에는 훈련대장 구성임(具聖任)의 청으로 창의문을 개수하기로 하여 1714년(영조 17) 6월 16일 문루를 설치하였다
한양도성(漢陽都城)
조선시대의 한양을 둘러싼 도성(都城)이다
좁은 의미로는 도읍을 둘러싼 성곽과 문을 지칭하나, 넓은 의미로는 성곽과 그 안의 공간을 가리키며, 조선시대에는 줄여서 한성(漢城)으로 불렸고, 사적(史的)으로서의 명칭은 지정 당시 서울성곽으로 정하였다가 2011년 현재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도성의 둘레는 약 18.6㎞이며, 면적은 467,922㎡ 이다
1. 축성(築城)
1395년(태조 4) 한양(지금의 서울)을 방위하기 위한 도성을 쌓으려고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정도전에게 명하여 성터의 조사 측정을 실시하였다
이듬해 음력 1월 9일 전국에서 징발한 장정 11만 8천 7백여 명을 동원하여 축성을 시작하였는데, 길이가 9970보(步 : 1보는 6자)이고 높이가 40자 2치인 도성을 97구간으로 나누어 각 구간마다 전자문에 따른 번호를 하늘 천(天) 자부터 조상할 조(弔) 자까지 붙였다
전후 98일 만에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을 따라 성벽의 축조를 완료하였다
1396년(태조 5) 9월 성문을 모두 완성하였다
정북(正北)쪽에는 숙청문(肅淸門 - 숙정문), 동북 (東北)쪽에는 홍화문(弘化門 - 혜화문), 정동(正東) 쪽에는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남(東南)쪽에는 남소문(南小門), 정남(正南)쪽에는 숭례문(崇禮門), 소북(小北)쪽에는 소덕문(昭德門 - 소의문), 정서 (正西)쪽에는 돈의뮨(敦義門), 서북(西北)쪽에는 창의문(彰義門)을 두었으며, 수문 1소(이간수문?) 를 두었다
2. 보수(補修)
1422년(세종4)에 흙으로 쌓은 곳을 모두 돌로 다시 쌓는 등 봉족(奉足)과 잡색(雜色) 32만 2천 4백 명을 동원하여 38일 만에 대대적으로 성곽을 고쳤다
1451년(문종 1)에도 성을 고쳤지만 임진왜란 때 일부가 부서졌다
1616년(광해군 8)에 개수하였으나 병자호란 때 다시 부서졌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맺은 약조 중에 성벽을 쌓지 않고 보수도 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어 부서진 채로 방치되다가, 1704년(숙종 30) 이조판서 이유(李儒)의 주장으로 5군문(五軍門)의 장정을 동원하여 1711년(숙종 37)까지 수축하였으며, 1743년(영조 19)에 다시 고쳤다
그밖에도 효종·현종·영조·순조 시대에 부분적인 개수를 행했으나 현재 남아 있는 서울의 성곽은 대체로 태조, 세종, 숙종, 순조 때의 것이다
태조 시기에 지어진 성은 자연석을 거칠게 갈아서 사용하였으며, 아래쪽은 큰 돌을 사용하고 위로 갈수록 작은 돌로 축성하였다
세종 시기에 지어진 성은 좀더 직사각형의 모습을 띄고 있으나, 돌과 돌을 갈아 자연스럽게 이으려 하였다
숙종 또는 순조 시기에는 직사각형으로 돌을 잘라서 축성하였다
3. 훼손(毁損)
1907년(고종 44) 6월에는 이완용 등의 주장에 의하여 도성을 철거하기로 정하였고, 이를 위하여 같은 해 7월 30일에 성벽처리위원회를 마련하였다
1907년 9월부터 숭례문의 북쪽 성벽을 철거하고 남지를 매립하였으며, 1908년 3월에는 흥인지문의 좌우 성벽을 헐었다 (이는 전차 선로의 부설과 관련되어 있었다)
또 1908년 9월에는 소의문과 숭례문 좌우의 성벽 총 77간을 파괴하였다
일제강점기의 도시계획과 한국전쟁으로 성문과 성벽이 많이 파괴되었다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의 전차를 부설하면서 서대문 과 동대문의 일부를 헐어내었고, 광화문과 용산 사이의 전차를 부설하면서 숭례문 부근을 역시 헐어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산성을 제외한 평지에 있던 성곽은 모두 헐리어 현재의 모습과 같이 되었다
4. 복원(復元)
1974년 박정희대통령의 국방유적 보존 및 정비 지시에 따라
구자춘 서울시장이 본격적으로 복원사업을 시작 하였다
1975년 광희문 문루 복원을 시작으로 훼손된 체성과 여장 복원, 주변 가옥 매입 등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1975년부터 삼청지구(창의문~숙정문) 복원에 이어 2012년 9월까지 진행된 인왕산 정상 구간까지 총 길이 18,627m 중 69%인 12,771m의 복원작업이 완료되었다
2013년 5월 4일 숭례문 복구 기념식과 함께 숭례문 남동측 광장구간 성벽 복원까지 마무리 되었으며, 앞으로 남산 구간, 시장공관 구간이 추가로 복원될 예정이다
그리고
2012년 11월 23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신청자격이 부여되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었으나, 2017년 3월 21일 다른 나라의 세계유산 도시 성벽과 비교해 ‘탁월한 보편적 가치 (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충족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아 등재 불가로 결정되면서 사실 상 등재가 불가능해졌다
2022년 12월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탕춘대성을 한 데 묶어《조선 수도성곽과 방어산성》이라는 제목으로 세계유산 우선등재목록에 등록 성공하여 추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