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9일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루카 11,47-54
지식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갇히지 마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천상 지식의 흐름을 막는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을 나무라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이들의 문제점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지식을 인간이 감당할 수 있다고 믿는 교만에 있었습니다.
인간이 모이면 그 모임 안에는 그 모임을 가능하게 하는 지식이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공동체에 속하게 되면 그 공동체에 흐르는 지식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지식은 공동체에 담기고 그 공동체에 속하면 그 지식의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문제점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도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저마다 ‘나는 바울로파다’ ‘나는 아폴로파다’ ‘나는 베드로파다’ ‘나는 그리스도파다’ 하며 떠들고 다닌다”라며 각자의 지식대로 분열되는 교회를 비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시는 교회는 하나이고 그 교회만이 “진리의 기둥”입니다.
류시화의 『인생 우화』는 폴란드의 ‘바보들의 마을, 헤움’에서 일어난 일들을 우화로 엮은 책입니다.
우화의 형태로 세상에 존재하는데 잘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풍자한 이야기들입니다.
여기에 「해를 보여주지 않는 이유」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근처의 상업 도시로 출장을 갔다가 돌아온 마을 의회 대표 베렉이 그 도시 시청 벽에 걸린 해시계에 대해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마침 그 동네에 시간의 기준이 될 해시계가 없어서 각자 조금씩 차이가 나는 시계들을 맞출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의회를 열어 해시계를 만들어 마을 중앙 광장에 설치하기로 결의합니다.
해시계가 완성되었을 때 우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엄청난 노력과 재정을 들여 만든 해시계가 진흙 웅덩이 속에 비를 맞으며 서 있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또 해시계는 이미 그 마을의 자랑이 되었기에 혹시 다른 마을 사람들이 해시계가 그렇게 취급되는 것을 보면 자신들의 이미지가 안 좋아질 것이 두려웠습니다.
헤움 사람들은 다시 의회를 열어 해시계를 어떻게 보호하면 좋을지 상의하였습니다.
그들은 해시계 옆에 벽을 만들어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게 하고 지붕을 씌워 비를 맞지 않게 하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또 막대한 재정을 들여 누가 보아도 자랑스러운 해시계 박물관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마을 중앙에 세워진 어떤 도시에도 없는 해시계 박물관을 보며 내심 자랑스러워했습니다.
해시계는 지식의 총체입니다.
그런데 그 지식이 한 공동체 안에 갇히면 어떻게 될까요?
쓸모없게 됩니다.
해시계는 해를 받아야 합니다.
모든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교만하여 항상 그 지식에 담을 쌓고 지붕이 되려고 합니다. 따라서 지식이 무용지물이 되지 않게 하려면 담과 지붕을 헐어내어 하늘의 빛을 받게 해야 합니다.
저는 논문을 발타살의 교회론에 관해 썼습니다. 처음 논문 제목은 “발타살 신학 안에서의 마리아-교회, 그리스도의 신부”였습니다.
폰 발타살은 교황청 교회 일치성 장관이었고 2차 바티칸 공의회에도 큰 영향을 미친 위대한 현대 신학자입니다.
그러나 논문을 다 읽으신 지도 신부님은 “발타살 신학과 마리아-교회, 그리스도의 신부”로 바꾸어 책을 내주셨습니다.
발타살 신학 안에 저의 논문 내용이 머물지 않고 오히려 그를 비판하는 내용도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발타살 신학 안에서의”가 아니라 “발타살 신학과”로 바꾸어 저의 생각과 바타살 생각이
다름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삼위일체 신학이 발타살과 다릅니다.
발타살은 삼위일체를 남자와 여자로 볼 때 성령을 그 자녀로 보았지만, 저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오가는 선물로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들 모습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는데 성령께서 그 관계 안에 들어가 있으셔야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이미 성립된 후에 태어나는 자녀가 성령이어서는 안 됩니다.
어쨌든 저는 논문을 쓰면서도 아무리 위대한 학자라고 하여도 그 안에 사로잡히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참 스승은 예수님이시고 그 지식을 지닌 공동체는 상지의 옥좌이신 성모님으로 하는 가톨릭교회뿐이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학파에 속하면 분명 완전한 진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러한 자세를 취할 때 “네가 발타살과 그의 학파 박사 신학자들보다 더 공부를 많이 했고
똑똑하다는 말이냐?”라며 교만하다고 비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진정한 스승은 그리스도, 마리아, 가톨릭교회뿐입니다.
저는 최대한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지식을 “직접” 들어야 하겠다는 생각했습니다.
누군가를 거쳐서 오는 지식은 오염되게 마련입니다.
그래도 성인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은 매우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마리아 발토르타의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입니다. 이것의 진위는 우리가 판단할 능력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어느 정도 알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금서로 지정했다가 결국엔 신자들이 판단할 것이라고 출판을 허가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알아볼 눈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눈은 우리가 어떤 특정 학파나 집단에 속하려는
마음이 있을 때 가려집니다.
사람을 따르지 맙시다.
요한 사도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이들, 곧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고 지금도 그 상태를 보존하고 있으므로, 누가 여러분을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기름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기름부음은 진실하고 거짓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1요한 2,27)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19일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루카 11,47-54
진노하시는 예수님,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루카 복음서는 자비와 치유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이 흘러넘치는 은혜로운 복음서입니다.
죄인인 우리 각자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뜨거운지, 읽을때마다 저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합니다.
치유사화 한 대목 한 대목 접할때 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똑같은 환자인 바로 나를 눈여겨보시고, 나에게 다가오시고, 나를 굽어보시고, 나와 접촉하신다는 느낌에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가 계속 봉독하는 복음에 등장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사뭇 다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대놓고 율법교사들을 도발하시며, '어디 한번 해볼테면 해보아라.'는 식의 강력한 도전장을 던지십니다.
불의와 위선, 사악함과 이중성을 도무지 못견뎌하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토록 부드럽고 따뜻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마치 싸움닭같은 모습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공개적인 질타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었습니다.
눈에 독기를 품고 복수심으로 이글거리며 어떻게든 예수님의 목에 올가미를 씌우려고 많은 질문을 던지며 그분을 코너로 몰고갔습니다.
진노하시는 예수님!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느님의 얼굴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도 다양한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때로 안쓰러운 마음에 우리를 꼭 끌어안으시기도 하지만 끝까지 정신 못차리고 당신께로 돌아서지 않을때 우리를 당신 품에서 떼어놓으십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강력한 경고의 말씀이나 섬뜩한 질책 역시 그분 사랑의 발로입니다.
어서 정신 차리라는! 빨리 당신 품으로 돌아오라는! 땅만 쳐다보지 말고 하늘을 올려다보라는!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강론>
(2023. 10. 19. 목)(루카 11,47-54)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지혜도,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낼 터인데, 그들은 이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박해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 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루카 11,47-51).”
여기서 ‘너희’는, 복음 말씀 안에서는 율법학자들을 가리키는데(루카 11,46), 말씀의 뜻을 생각하면 ‘모든 위선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오늘날의 위선자들도 해당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불행하여라!” 라는 말씀은, “심판을 받고 멸망하게 될 것이다.” 라는 경고입니다.
<확정된 일에 대한 예고는 아니고, 멸망을 당하지 않으려면 회개하라고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47절과 48절은, 위선자들이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드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이 아니라, 겉으로는 예언자들을 존경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있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너희 조상들과 다르지 않다.”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실제로는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있으면서도, 옛날에 죽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존경하는 척 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 아비에 그 자식들이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지혜’ 라는 말은, ‘지혜로우신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49절은,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박해를 받게 된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이미 예언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받는 박해를 하느님께서 다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받는 박해는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박해자들의 범죄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보내신 것은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이고, 사람들을 회개시키려고 하시는 것은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위선자들이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박해하는 것은 자신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께 반역하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50절과 51절은,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자들을 하느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시고 처벌하실 것이라는 경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라고 세 번이나 반복하십니다.
이것은 그만큼 박해자들의 죄가 크다는 것과
그들에 대한 심판이 엄중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이 세대’는 ‘모든 시대의 모든 박해자들’입니다.
‘아벨’은 창세기에 나오는 그 아벨입니다.
유대교에서는 아벨을 첫 번째 예언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즈카르야’는 역대기 하권 24장에 나오는 사제입니다.
역대기 하권은 구약성경에서는 공식적으로 이스라엘의 마지막 역사서이기 때문에, 유대교에서는 즈카르야를 마지막으로 살해된 예언자로 생각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그 후에도
많은 예언자들이 박해를 받았고, 살해당했습니다.
<신약시대 때에는 세례자 요한이 박해를 받았고, 살해당했고, 예수님의 사도들도 그랬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일이 생깁니다.
그런데 박해가 외부에서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내부에서도 위선자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요즘에 특히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받는 박해에 관한 말씀을 해설하면서, “우리는 지금 어느 편에 서 있는가?” 라고 묻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나는 예수님 편에 서 있고, 예언자들 편에 서 있다.” 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자칭 ‘열성적인 신앙인들’이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박해하는 일이 많았고,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일을 이미 예언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요한 16,2-3).”
이 말씀은 유대교만을 겨냥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오늘날의 그리스도교도 함께 겨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열성적인 신앙인이라고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위선자들인 경우를 어떻게 식별할 수 있는가?
기준은 아주 단순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 충성을 다 바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랑’이 그 마음 안에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는 그 사랑(마태 5,44).>
그런데 사랑은 없고, 미움과 증오심만 가득 차 있다면, 그 사람은 위선자입니다.
“예수님과 교회를 위해서” 라는 명목으로 예언자들을 박해하는 자들의 마음에는 미움과 증오심밖에 없고, 바로 그 미움과 증오심은 그들이 위선자들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증거가 됩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나는 신앙인으로서 ‘하느님과 예수님의 선과 사랑’의 실현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내 마음 안에는 정말로 사랑이 가득 차 있는가?
사랑을 위해서 박해를 감수할 수 있는가?”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