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하도 신랄(!)하게 몽골의 일본 침략을 다룬 다큐를 비난했기에 주저하며 글을 씁니다.
이번 역사스페셜을 보며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합니다. 우선 '잊혀진 인물'이었던 수은(강항선생의 호) 강항 선생을 특별히 골라 비추어 주신 점은 높이 삽니다.
아울러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전쟁을 다시 한번 다뤄주셔서 또한 고맙게 여깁니다.
하지만 방송을 보면서 점점 제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구요? '적국'인 나라의 사람들은 '남의 나라 포로'를 꼼꼼히 연구하는데 비해 우리는 그러지 않고 잊어왔다는(하긴 조선 막사발이나 심수관 집안조차도 그런데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사실 때문에 부끄러웠고,
둘째로 이 방송이 수은 선생의 한쪽 면만 다루었을 뿐 나머지 한쪽 면은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일본을 가르친 위대한(?) 조선 포로'라는 사실만 크게 다루었을 뿐, 포로로 있으면서도 적국의 사정과 문물을 꼼꼼하게 적어 목숨을 걸고 고국에 보낸 수은 선생님의 용기와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이 때 적어보낸 기록을 묶은 책이 방송에서도 잠깐 소개한 [간양록看洋錄 : ['바다에 있는 세계를 보고 적은 글'이라는 뜻. 다시말해서 - 조선에서 보았을 때 - 바다 건너편에 있는 일본을 보고 적은 견문록이라는 뜻이다]입니다) 크게 다루지 않았다는 뜻이죠.
사실 수은 선생은 애초에 '주자학을 가르쳐야겠다'고 여겨 스스로 건너가시지 않고, 전쟁포로로 붙잡혀 끌려가 억지로 머무르다가 (방송에서도 밝혔지만) '배를 살 돈을 벌려고' 글을 쓰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주자학을 가르쳤다'는 사실에만 너무 매달리진 말아야 했습니다.(본인이 바라지 않았고 대단하게 여기지도 않았으니까요)
오히려 방송은 수은 선생의 (적국에 무릎 꿇지 않고 동화되지 않으려는) 지조와 절개, 그리고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침착하게(!) 적국의 사정을 적어내려갔던 [간양록]을 더 자세히 소개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수은 선생도 주자학을 가르친일은 대단히 여기지 않으셨고, 오직 '적국의 사정을 알리는' 일과 '조선에 돌아가는'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면 더욱 균형잡힌 방송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방송을 보며 아쉬워하는 것입니다.'남을 가르쳤다'는 사실만 반드시 크게 떠들어야 하나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남에게서 '배운' 점이나 영향을 받은 점을 모른척하고 말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못마땅해 하는 한족漢族의 중화사상이나 구미(歐美)인의 제국주의(:특히 이른바 '구미의 사람만이 다른 세계의 문명개화를 이끌 수 있다는 주장')와 뭐가 다르겠습니까?
열등감은 나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우월 의식을 부추길 수도 없습니다.
* 작은 제안 :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을 다루셨으니. 이번에는 베트남에서 고려로 건너온 화산 이李씨나 고려 초에 후주後周에서 고려로 건너와 고려사회를 바꿔놓은 과거제를 제안했던 쌍기를 다루시는 게 어떨까요? 수은 선생을 다루셨으니 이번에는 이걸 다루셔도 괜찮을 것입니다.
(만약 쌍기를 제대로 다루신다면, 이번 방송도 좋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가르치긴 했지만 동시에 배우기도 했다는 점을 - 쌍기를 다룬다면 - 인정하는 셈이니까요. 만약 다루신다면 방송이 국수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도 있으니, 방송국에도 해가 되진 않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역사스페셜]은 쓸모있습니다..
1. 오늘날의 일본을 보고 '일본 그 자체'(배울 점이 아니라 '모든 것'을!)에 취해 줏대를 잃고 '무조건 그들과 닮자. 그들이 되고 싶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좋은 깨우침을 줄 수 있고(풍신수길의 침략전쟁을 보여주셨으니까요)
2. 당시 일본의 사정(포로 한 명에게서 사상을 배워야 했고 그 포로가 가르친 사상이 문화를 바꿔 버릴 정도로 문화기반이 얕았던)을 아는 데 자료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이번 프로그램 자체를 내버리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 사족 : 다만 그 때 '주자학'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오늘날로 치면 어떤 의미였는지를 보다 실감나게, 예를 들어서 설명하셨다면 더 좋을 뻔했습니다. 그 점이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