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과 이응노 선생 미망인의 특별한 관계
"관어해자 난위수(觀於海者 難爲水)" 바다를 본 사람은 물에 대하여 말하기 어렵다.
나혜석이 계속 나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지난 번 나혜석이 머물렀던 파리 근교의 집을 방문한 이후로 나혜석이 계속 나를 주시하고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다시 <나혜석 전집(태학사 2000)>을 꺼내 여기저기 뒤적이다 보니 한 문장이 내 시야를 잡아당긴다.
"1947년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있던 젊은 시절의 화가 박인경이 안양의 경성보육원에서 나혜석을 만났고 나혜석이 자서전 같은 것을 쓰고 있는 것을 청서해주기도 했다."
한국 동양화가의 대가 고암 이응노 화백의 미망인이신 박인경 화백은 지금 몇 십년째 파리 근교에서 살고 계신다. 내게는 지척에 있는 거리이다. 이런걸 행운이라고 해야 할까?
어쩌면 현재 생존해 계신 분 중에 나혜석을 직접 만나본 마지막 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분을 찾아가 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건 피할 수 없는 사명이다.
파리 교외에 사시는 박인경 화백을 만나러 간 날은 바람이 무척이나 불었다. 1월 날씨에도 불구하고 날씨는 봄처럼 따듯했다.
셍라자르 역에서 기차를 타고 북서쪽으로 1시간쯤 달려 도착한 곳이 보 쉬 센느. 세느강이 저 아래로 굽이굽이 흘러 돌고 있는게 무척 운치 있는 마을이었다.
파리 교외에 우아하게 서있는 한옥집
전화로 알려주신 대로 역에서 나와 육교를 건넌 후 대로를 따라 쭉 올라갔다. 마치 시골에 소풍 온 아이처럼 시선을 여기저기 정신없이 뿌리며 주위구경을 하며 가고 있는데 오른쪽 경사 위로 정갈한 한옥집이 우아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서양집들 사이에 끼어 있어도 아무런 어색함이 없는 아릿다운 한국여인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미리 열어놓으신 문을 열고 정원을 올라가 경사를 돌자마자 한국식 작은 정자가 갑자기 얼굴을 들이밀며 환영하는데 마치 잊어버리고 있었던 오랜 친구를 만나는 듯 반가왔다.
여든이 넘으신 연세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주름 하나 없이 아직도 소녀의 모습을 간직하고 계신 박인경 화백이 소녀처럼 활짝 웃으며 문을 열어주신다. 그 뒤로 두 마리의 조그만 개가 캉캉 짖으며 따라 나온다.
바람이 심한 탓으로 창의 커튼을 닫은 거실에 앉아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저 커튼 뒤에서는 바람의 강한 애무를 받아 세느강이 마구 몸을 뒤틀고 있을 것 같았지만 불행히 나의 시야는 차단되고 말았다.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오히려 우리가 찾아가서 만나고자 하는 여인의 모습이 더 선명히 떠오를 수도 있다. 점점 심해지는 거센 바람의 속도가 마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아가게 하는 듯 하더니 갑자기 60년 전에 가서 딱 멎는다.
양로원에서 만난 나혜석
1947년, 해방이 된지 얼마 되지 않은 때다. 박인경에게는 안양에서 보육원을 운영하는 외사촌 오빠가 하나 있었다. 이름하여 안양 경성보육원. 처음에는 고아원이었으나 해방 후 양로원도 겸하게 된 곳이었다.
일제 시대하에서 식민지 교육을 받았던 박인경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정신대로 잡혀가지 않기 위해 이 곳에서 얼마간 일한 경험이 있다.
해방과 함께 박인경은 서울로 올라와 이대 미대에 들어간다. 미대 2학년생이라고 기억되는 어느 봄날, 1947년의 일이다. 외사촌 오빠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기 양로원에 여류화가가 한 명 들어왔으니 같이 미술하는 학생으로서 만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으니 언제 한번 다녀가라는 전갈이었다. 한참 미술세계에 빠져있었던 미대생 박인경은 며칠 후 안양으로 내려갔다.
박인경이 안양 보육원에 도착했을 때는 따스한 햇볕이 운동장 하나 가득 내리쬐고 있었다. 태양은 스산하고 추웠던 겨울의 기나긴 터널을 막 벗어나 사지를 맘껏 늘이며 기지개라도 펴는 듯 싶었다.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햇볕을 즐기기 위해 마침 보육원에 있던 노인들이 모두 운동장에 나와 해바라기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다들 늙고 병들고 허술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중에 눈에 띄는 여자 한 분이 있었다. 그 분도 남들처럼 때가 낀 누렇게 바랜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고운 분이라는 생각이 얼핏 뇌리를 스쳤다.
순간적으로 아마도 저 분이 화가이신가 보다 생각하고 일행 앞을 스쳐 가는데 아마도 자기의 방문을 알고 있었던 듯 그 분이 자기를 보더니 슬그머니 일어서 뒤로 사라지신다. 아마도 자기 방으로 들어가시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자태가 얼마나 인상적이었던지!
'어쩜 저렇게 고울 수가 있을까?'
비록 초봄이긴 해도 날씨가 변덕스러워 무명옷이라도 입고 있어야 할 시기에 뻣뻣한 베옷 같은 옷에 여기저기 색이 다른 천으로 기운 허술한 옷을 입고 있었어도 예사 사람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돌아서는 자태에서 흘러나오는 옷의 아름다운 선과 우아한 모습이 마치 일본의 '우키요에'의 세련된 모습을 연상시켰다고나 할까.
원장실에 가서 외사촌 오빠를 만나고 오빠와 같이 화가가 묵는 방에 들어가 소개를 받았다.
여류화가 나혜석, 한국 최초의 여자유학생으로 1913년 18세의 나이로 일본에 유학가 유화를 전공하고 돌아와 1921년 26세의 나이로 서울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시회를 열었던 선구자.
1920년대 말에는 외교관이었던 남편과 같이 1년 6개월간의 구미여행을 하고 와서 왕성한 화가생활을 하다가 결국 파리에서 알게 된 최린과의 연인관계가 남편에게 발각되어 이혼을 당하게 된다. 구미여행에서 돌아온 지 1년도 채 안된 1930년의 일이고 그 때 나혜석은 35세의 젊은 나이였다.
'이혼고백장'을 쓰다
이혼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혜석은 4년이 지난 후 결국 '이혼고백장'을 발표하게 된다. 이 이혼고백장에서 나혜석은 당시 자신의 이혼 사실을 공개적으로 발표함으로써 사회에 파문을 일으킨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서양이나 동경 사람쯤 하더라도 내가 정조 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 관념이 없는 것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남의 정조를 유인하는 이상 그 정조를 고수하도록 애호해주는 것도 보통 인정이 아닌가. 종종 방종한 여성이 있다면 자기가 직접 쾌락을 맛보면서 간접으로 말살시키고 저작시키는 일이 불소하외다. 이 어이한 미개명의 부도덕이냐." ('이혼고백장', 삼천리 1934, 8-9)
"남자는 칼자루를 쥔 셈이요, 여자는 칼날을 쥔 셈이니 남자 하는데 따라 여자에게만 상처를 줄 뿐이지. 고약한 제도야." ('모델', 조선일보 1933.2)
이혼 후 나혜석은 갈 곳이 없었다.
"어디로 갈까. 집도 없고 부모도 없고 자식도없고 친구도 없는 이 홀로 된 몸,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갈까." ('이혼고백장'에서)
비록 유부남이긴 했어도 최린이 파리에서 나혜석에게 한 약속이 있다. 만약에 이들의 관계가 나중에 들어나 나혜석이 이혼을 당하게 되더라도 자기가 거두어 들일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약속이었다. 그러던 사람이 서울에 와서 나혜석이 이혼을 당한 후 심적,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자 거두어 들이기는 커녕 어렵게 요청한 나혜석의 구원마저도 차갑게 거절해버린다.
자신을 버린 연인에게 소송을 걸다
가만히 있을 나혜석이 아니었다. 나혜석은 자기를 버린 연인 최린에게도 공식적으로 소송을 청구하는, 당시로서는 아무도 생각 못할 용감한 행동을 한다.
'1. 그런데 그 후 피고는 언제든지 원고의 생활비를 지급하기로 약속하고 수년간 말을 좌우로 청탁하고 한 푼의 원조도 없는 고로 원고는 경제적 비상한 고통을 받아 현재는 전혀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
1. 금년 4월 경에 원고는 부득이 자기의 전도를 개척하려고 프랑스 유학을 하기로 하여 피고에게 여행권과 보증인이 되어 달라고 하여 여비고 1천원의 지급을 청구하였던 바 피고는 의외에도 냉혹하게 이를거절하였다.
1. 피고는 원래 자기의 일시적 xx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유혹 수단을 써가지고 원고로 하여금 xx의 희생이 되게 하였는데 원고는 남편에게서 이혼되고 사회로부터 배척되어 생활상 비상한 정신적, 경제적 고통을 받아 이것이 원인으로 현재 극도의 신경쇠약이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피고는 전혀 고의로 원고의 전부(이전 남편) 김우영에 대한 처권을 침해하여 원고로 하여금 인생에 막대한 손해를 받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위자료 1만 2천 원을 상당하다고 생각하므로 청구한다." ('여류화가 나혜석 씨 최린 씨 상대 제소', 1934년 9월 20일 조선일보에 인용)
이 글은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게재되었는데 최린의 압력으로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는 삭제되었다. 궁지에 몰린 최린은 나혜석에게 소송취하를 권유하였고 나혜석은 최린으로부터 수천원을 받는 조건으로 결국 소송을 취소하게 된다.
떠돌이로 보육원까지
최린에게 받은 돈으로 나혜석은 파리로 다시 돌아갈까 망설이다가 그럴 경우 몇 년간 아이들을 볼 수 없게 되겠기에 포기하고 대신 서울에서 젊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사립미술학교를 열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지탱하지 못하였다. 이후 빈 손으로 여기저기 갈 곳 없이 떠다니다가 결국 안양 경성보육원에까지 오게 된 것이다.
당시 여대생이었던 박인경은 이런 사실을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 나혜석이란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두 여자를 소개시키고 오빠는 방을 나갔다. 마치 형무소의 감옥방처럼 자그마한 방에는 가구라고는 하나도 없이 이부자리 하나만이 덩그라니깔려있을 뿐이었다.
방에 남아 서로 얼굴을 마주한 두 여인. 한 명은 새로 시작된 서울에서의 여대생 생활에 미래가 문처럼 활짝 열려있었던, 막 피어나려는 꽃과 같은 21세의 젊은 여성이었고, 다른 한 명은 어려웠던 식민지 시대에 누구보다 화려한 젊은 시절을 보내었으나 이제는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이 되어 인생의 내리막 길을 걷고 있었던 51세를 막 넘긴 중년의 여인이었다.
손바닥만한 방에서 가깝게 본 나혜석은 여전히 고운 모습이었다. 지난 15년동안 고생하고 방랑했던 흔적은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었다. 나혜석은 다른 노인들처럼 쪽을 지고 있는게 아니라 단발 형식으로 자른 머리에 아마도 본인이 가위로 여기저기 뭉둑뭉둑 자른 듯한 모습이 마치 히피를 연상시켰다.
그럼에도 지성미가 물씬 풍기는 모습이었고 전혀 감정이 들어나지 않는 무표정에 가까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겪은 고뇌를 아마도 무심으로 극복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인경은 여류화가를 보겠다고 오긴 했어도 자신이 기자도 아니고 그다지 호기심이 많은 성격도 아니어서 이것저것 물어보지 않고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쩌면 나혜석의 인물 앞에서 입을 열 엄두가 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나혜석도 말 없이 앉아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때 박인경의 눈에 방 구석에 아무렇게나 세워두었던 나혜석의 그림들이 몇 구 눈에 들어왔다. 남성적이고 굵직한 텃치가 들어있어 힘이 느껴지는 그림. 말은 해보지 않았어도 나혜석이 풍기는 인물상과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 드는 그림이었다.
한참 동안의 침묵 깨고 내민 공책
한참을 서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으려니 나혜석이 침묵을 깨기 위한 것인 듯 방 한구석에 팽개쳐 두었던 소학교 공책을 집어 들더니 박인경 앞에 내놓는다. 손가락만한 뭉뚱 연필이 공책 속에서 떨어졌다.
"이건 내가 심심할 때 써 놓은 글인데 자서전 비슷하다고나 할까. 학생이 한 번 읽어보고 교정해서 새로 정서해 주면 좋겠는데"라고 물어온다. 얼떨결에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일단 공책을 들고 나왔다.
집에 돌아와서 읽어보니 우선 글씨체가 구형식의 글이어서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고 내용면에서도 본인의 화려했던 과거만을 그려놓은 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시 일본에 대한 반감이 심할 때였는데 왜 나혜석은 자신의 과거만을 회상하고 있는지, 왜 미래에 대한 계획은 없는지, 한창 젊은 나이의 박인경에게는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다. 당시의 박인경에게는 어려운 숙제처럼 여겨졌고 당장 자신도 시험준비도 해야 하는 등 해야 할 일도 많아 거절을 하였다.
노트를 나혜석에게 직접 건네주었는지는 기억에 남지 않는다. 어쩌면 오빠에게 대신 건네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면서 오빠에게 왜 나혜석이 보육원에서 그림을 그리지 않는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라고 말했던 기억도 나는 것 같다.
나중에 오빠에게 들은 얘기인데 얼마 후 나혜석은 친정오빠가 와서 데리고 갔다고 한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나혜석이 그나마 갖고 있었던 그림들과 써놓았던 글들이 모두 불태워졌다고 한다.
엄동설한 서울 어딘가에서 홀로 가다
이혼당해서 집안을 망신시켰다는 이유 하나로, 젊어서는 자기를 그토록 위해주었던 오빠에게도 버림받아 다시 갈 데 없이 홀로 된 나혜석. 여기저기 친구와 친지들을 찾아 가도 차가운 냉대만 받았던 나혜석은 결국 길거리를 헤매다가 그 다음 해인 1948년 12월, 서울의 추운 길거리에서 홀로 외롭게 사망했다.
몇 년 전인가, 박인경은 나혜석의 몇 개월간의 보육원 생활을 옆에서 가까이 지켜보았던 사촌오빠에게 나혜석 얘기를 해달라고 해보았지만 별 얘기를 들려주지 않았던 오빠였다. 그 오빠도 지금은 이 세상을 떠나고 없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운명이 어찌될지 모릅니다. 속 마디를 지은 운명이 있습니다. 끊을 수 없는 운명의 철쇄이외다. 그러나 너무 비참한 운명은 왕왕 약한 사람으로 하여금 반역케 합니다. 나는 거의 재기할 기분이 없을 만치 때리고 욕하고 저주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필경은 같은 운명의 줄에 얽히어 없어질지라도 필사의 쟁투에 끌리고 애태우고 괴로워하면서 재기하려 합니다." (이혼고백장)
|
| |
|
|
|
강변, 유채, 23X32cm, 개인소장
인천풍경, 합판에 유채, 15x22cm, 개인소장
다솔사, 합판에 유채, 54x69cm, 개인소장
선죽교, 목판에 유채, 23x33cm, 개인소장
나혜석
'여자도 사람이외다'
나혜석의 세속적인 삶은 파멸일망정 자기시대를 정직하게 살다간
예술가로서 나혜석을 패배자로 쉽게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 '여성'으로 보다도 한 '인간'으로 살고자 했던 당당한 사람
▲ 수덕여관 전경 / ⓒ2005 이정근
백두대간을 따라 뻗어내린 태백산맥에서 말을 갈아타고
서해를 향하던 차령산맥이 잠시 쉬어가는 곳에 수덕여관이 있다.
충남 예산 덕숭산 자락에 수덕사가 있고
수덕사 일주문 바로 왼쪽에 곧 쓰러질 것 같은
초가집 한 채가 수덕여관이다.
한 때는 이 나라의 내로라하는 시인, 화가, 묵객들이 드나들던 여관은
주인도 객도 떠나가고 곰팡이 냄새나는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나그네를 맞이한다.
돌계단을 올라 마당에 들어서니
이응노 화백이 자연석에 새겨놓은
'수덕여관'이라는 네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쇠락한 초가집을 뒤로 하고 숨고르기를 하며 돌계단을 바라보니
종실 큰스님으로부터 호되게 꾸지람을 듣고
의기소침하여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계단을 올라오던
69년 전 나혜석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 고암 이응노가 새겨놓은 암각 글씨 / ⓒ2005 이정근
"임자는 중노릇 할 사람이 아니야."
세파에 휩쓸려 지친 몸을 이끌고
친구 김일엽이 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수덕사를 찾은 나혜석에게 만공선사가 꾸짖듯이 한 말이다.
만공선사가 누구인가?
1871년 정읍에서 태어나 태허스님을 은사로
당대의 큰스님 경허를 계사로
사미계를 받아 득도하고 근대 선(禪)불교를 중흥시킨 큰스님이다.
이러한 스님으로부터 중 되는 것을 거절당했으니
나혜석의 발걸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종실 큰스님이 김일엽은 불제자로 받아들이고
나혜석은 "안 된다"라고 했다면
득도한 스님이 가지고 있는 잣대는 무엇이었을까?
만공스님에게 불자의 길을 거절당한 후 공주 마곡사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한 나혜석과 만공스님의 잣대를
어떻게 해석해야 옳을까?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신여성으로 자리매김한
두 여자의 행로가 궁금해진다.
▲ 만공선사 글씨 / ⓒ2005 이정근
김일엽이 1921년 9월 21일 동아일보에 기고한
<부인 의복개량에 대하여 한 가지 의견을 드리나이다>라는
계몽성 글에, 요샛말로 표현하면 딴지를 걸고
동성인 여자를 형(兄)이라 칭하는 나혜석의 발칙한 칼럼이
<김원주 형의 의견에 대하여>였다.
물론 동아일보가 당대의 신여성 두 사람의
논쟁을 유도하여 구독 부수를 올리려는 저의도 있었지만
여성성에 대한 시각이 다르고
자존심이라면 쌍벽을 이루는 당대의 페미니스트였다.
여기에 등장하는 김원주는 김일엽의 본명이다.
일엽(一葉)이라 하면 달마대사가
한 잎의 갈대로 배(舟)를 삼아 중국으로 건너간 고사에서 유래하지만
26세에 요절한 일본의 전설적인 여류작가 히구찌 이찌오(一葉)가
1896년 사망하던 해에 김일엽이 태어났기 때문에
김일엽이 문학작품 활동을 시작할 무렵
그 의미를 살려 춘원 이광수가 지어준 이름이다.
평남 용강에서 목사의 맏딸로 태어난 김일엽은
진남포 삼숭 여학교와 이화학당에서 공부하다
일본 닛산학교로 유학 간 신세대 여성이었다.
미국에서 자연과학을 공부하고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내정된 이노익이라는 40세 된 신사와
22세 때 결혼한 김일엽은 결혼생활 4년 동안
한쪽 다리가 불구인 남편으로 인해 심적 고통을 많이 겪었다.
일본 유학시절 본처가 한국에 있는 시인 노월 임장화와
간통한 사건으로 이혼한 김일엽은 일본 명문가 출신
오따 세이죠와 열애에 빠져
아들 김태신을 낳아 오따에게 넘겨주고 귀국했다.
그 후 친구 유덕의 애인이었던 방인근과
삼각관계에 빠져 스캔들을 일으키다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국기열과 동거에 들어가게 된다.
이즈음 불교에 서서히 심취하던 김일엽은
독일 부르크스 부르크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백성욱 박사의 불교논리에 매료됨은 물론 인간 백성욱과 사랑에 빠졌으나
백성욱이 속세를 털고 비구승이 되어
금강산으로 들어가 버리자
불교를 더 깊이 알고 싶다는 일념으로
재가승 하윤실과 동거에 들어간다.
▲ 수덕사 현판 / ⓒ2005 이정근
신시(新詩)의 효시로 알려진
육당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보다 1년 빠른
1907년 '동생의 죽음'이라는 시를 써 사실상 우리나라 신시의 지평을 열고
구 한말에서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변화무쌍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간
한국 최초의 신시 여류시인 김일엽은 1928년 그의 나이 33살에 속세를 접고
불가에 귀의하여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다'는
스승 만공선사의 질타를 받아들여 붓마저 꺾어버린다.
목사의 딸로 태어나 가부장적인 사회인습에 숨막혀 하던 김일엽은,
여성은 남성을 위한 소모품이 아니라고 절규했고
여성은 남성을 위한 장식물이 아니라고 부르짖으며
몸을 던져 연출한 행위 예술가이며 전위 예술가였다.
또 여성은 어머니 아니면 창녀라는 이분법적 기독교 신화에
반기를 든 용기 있는 행동가였다.
▲ 수덕여관 간판 / ⓒ2005 이정근
나혜석이 이혼의 아픔을 안고 충남 예산에 있는
덕숭산 자락을 찾아든 이유는
거기에 나이도 같은 동갑이고 잡지 <폐허>와 <삼천리>에서
동인으로 활동하던 김일엽이 파란만장한
32년 속세의 삶을 접고 여승으로 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수덕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나혜석은 수덕사로 직행하지 않고
일주문 바로 옆에 있는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나혜석이 수덕여관에 와 있다는 전갈을 받은 김일엽이
암자에서 내려와 두 사람은 반갑게 회포를 풀었지만
한 사람은 여성을 옥죄는 사회제도가 한없이 원망스러운 이혼녀이고
또 한 사람은 그것을 초월한 여승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너처럼 중이 되겠다"는 나혜석의 부탁에 "너는 안 돼"라고 만류했지만
"조실스님(만공)을 뵙도록 도와줘"라는 나혜석의 간청에 못 이겨
김일엽은 만공스님 면담을 주선했지만 답은 똑같았다.
몇 년 전 경성에서 만났을 때, 속세를 접고 여승이 되겠다고
속내를 털어놓는 김일엽에게
"현실 도피의 방법으로 종교를 선택해서는 안된다"라고 면박을 주던
나혜석이 이제는 처지가 바뀌어 머리 깎고 중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그만큼 이 땅에서 신여성으로 살아가기
힘들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텅 빈 여관방에는 지친 몸을 누이던 나혜석의 체취는 간데없고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찌른다.
▲ 수덕사 일주문 / ⓒ2005 이정근
만공선사로부터 "임자는 중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야"라는
일언지하의 거절을 당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수덕여관에 머무르며
'중 시켜 달라'고 시위하던 어느 날.
"엄마가 보고 싶어 현해탄을 건너 왔다"는
열네 살 앳된 소년이 찾아왔다.
그 소년이 누구냐 하면
김일엽이 일본 유학시절 일본 명문가 출신
오다 세이죠와의 사이에 낳은
사생아이며 김일엽의 아들인 김태신이다.
모정에 목말라 있는 아들에게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김일엽을 보고
어쩜 저렇게도 천륜을 거역할 수 있을까
라고 느낀 혜석은 모정에 굶주린 그 소년이 잠자리에 들 때
팔 베게를 해주고 젖무덤을 만지게 해주었다.
이때 나혜석 역시 모성에 주려 있는 세 아이의 엄마였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본 김일엽은 속세의 연민을 끊지 못하는
나혜석이 중노릇을 못 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 창호가 찢긴 수덕여관 / ⓒ2005 이정근
관리인도 떠나버린 여관에는 잡초만 무성할 뿐
한 시대를 풍미했던여인들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쓰레기가 어지러이 널려 있고 곰팡이 냄새만 넘쳐나는 여관방 어디에도
모정에 굶주린 태신에게 가슴을 열고
봉긋한 젖무덤에 소년의 손을 끌어다 얹어주던 나혜석의 모습은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78년 전 1927년.
그 당시 일반인들은 감히 꿈도 못 꾸는 세계여행을 하고
프랑스 파리에서 그림공부를 하고 돌아와 서양화를 그리는
최초의 여류화가라는 찬사를 받으며 뭇 남성과 사랑도 많이 했고
세 아이의 엄마이기도 했던 나혜석이
홀로 산사(山寺)에 있는 친구를 찾아와
여관방에서 친구의 아들에게 가슴을 열어준 사연은 무엇일까
/ 글;이정근
경력사항
호는 정월,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
1921년 3월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한국 여성화가로서 최초의 개인전
1918년 '경희', 정순' 등의 단편소설을 발표
1926년부터 남편과 함께 세계일주
1929년 이혼 후, 충청남도 공주 마곡사에서 수도생활을 하였다.
대표작으로 《누드》가 있다.
‘신여성’으로 죽을 것인가‘조선 여자’로 살아남을 것인가
“가자, 파리로 살러 가지 말고 죽으로 가자. 나를 죽인 것은 파리다.
나를 정말 여성으로 만들어준 곳도 파리다. 나는 파리에 가서 죽으련다.
찾을 것도 만날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돌아올 것도 없다.
영구히 가자, 과거와 현재가 공인 나는 미래로 나가자.”
영원한 신여성 나혜석은 이혼을 한 후 이런 시를 썼다.
그러나 그는 불행히도 죽음조차 자유로울 것 같았던
파리가 아니라 자기를‘탕녀’라 했던 조선에서,
마지막 흔적조차 아는 이 없이 생을 마감했다.
나혜석은 왜 파리에서 죽고 싶었을까?
당시 지식인 남성들은 그런 그를 두고
“서구 부르주아의 생활에 침 흘리는 탕녀”라 매도했지만,
파리는 나혜석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자유로움을
담고 있는‘세계’였을 것이다.
이미 세계를 경험하고 세계와 관계 맺기 시작했던 여자들,
그러나 그 여자들이 경험했던 세계를 용납하지 않았던 조선,
해방된 신여성으로 죽을 것 인가,
가족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조선 여자’로 살아남을 것인가,
그 선택이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면 믿어지는지.
나혜석과 김일엽, 윤심덕 같은 신여성들의 삶이
내 것인 양 여겨져 그 과감한 발언에 환호하면서도
활짝 피지 못한 삶에 가슴 시려한 지 여러 해 지났다.
그 동안 나혜석기념사업회가 만들어져 신여성들의 삶을
새롭게 조망하는 노력을 하고 있고 나혜석의 삶을
연극 무대에 올리는 작업도 있었다.
이제는 자유연애나 이혼 스캔들로 범벅이 된
탕녀 이미지로 신여성을 바라보는 유치찬란한 시각은 자취를 감추었고,
제법 많은 여성들이 신여성과 만나면서
페미니스트의 계보를 다시금 그려보는 듯해 반갑다.
인형의 家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
기뻐하듯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는 위안물 되도다.
노라를 놓아라
최후로 순순하게
엄밀히 막아논
장벽에서
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게
남편과 자식들에게 대한
의무같이
내게는 신성한 의무 있네
나를 사람으로 만드는
사명의 길로 밟아서
사람이 되고저
노라를 놓아라
최후로 순순하게
엄밀히 막아논
장벽에서
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게
나는 안다 억제할 수 없는
내 마음에서
온통을 다 헐어 맛보이는
진정 사람을 제하고는
내 몸이 값없는 것을
내 이제 깨도다
노라를 놓아라
최후로 순순하게
엄밀히 막아논
장벽에서
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게
아아 사랑하는 소녀들아
나를 보아
정성으로 몸을 바쳐다오
맑은 유혹 횡행할지나
다른 날, 폭퐁우 뒤에
사람은 너와 나
노라를 놓아라
최후로 순순하게
엄밀히 막아논
장벽에서
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게
|
나혜석(羅蕙錫.1896.4.18∼1946)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ㆍ소설가. 본관 나주. 호 정월(晶月). 경기 수원 출생. 군수를 지낸 기정(基貞)의 딸. 1918년 일본 도쿄(東京)여자미술학교 유화과를 졸업하고, 1920년 김우영(金雨英)과 결혼하였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제1회부터 제5회까지 입선하였고, 1921년 3월 경성일보사 건물 안의 내청각에서 한국 여성화가로서 최초의 개인전을 가졌다. 1926년부터 3년 간 남편과 함께 세계일주, 귀국 도중 파리에서 그린 정원화(庭園畵)가 도쿄의 이과전(二科展)에 입선되었다.
[폐허] 동인으로 출발, 이름난 작품 없이 문사(文士)로 활약하다가 기구한 방황 끝에 말년을 불교에 의탁하였다.
한편, 1918년 <경희> <정순> 등의 단편소설을 발표하여 소설가로도 활약하였다. 한때 무절제한 생활로 물의를 일으켰으며, 말년에는 서울시립남부병원, 청운양로원에서 보내다가 1929년 이혼하고 충남 공주의 마곡사(麻谷寺)에 들어가 수도생활 중 사망하였다.
서양화가. 본관은 나주(羅州). 호는 정월(晶月).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 화가이다. 한말에 사법관을 거쳐 군수를 지낸 기정(基貞)의 5남매 중 둘째 딸로 수원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에 신미술인 양화를 전공하기 위하여 동경의 여자미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1918년에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돌아와 잠시 정신여학교 미술 교사를 지냈다.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하여 5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1921년 경성일보사 내청각(來靑閣)에서 첫 유화 개인전을 가졌으며, 4월에는 제1회 서화협회전람회에 홍일점으로 유화를 출품하였다. 1922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해마다 작품을 출품하여 수상과 특선을 거듭하였다. 1931년에는 동경의 제국미술원전람회에서도 입선하였다. 1927년에는 만주 안동현(安東縣) 부영사로 일본 정부 외교관 신분이던 남편 김우영(金雨英)과 함께 세계 일주 여행에 올라 파리에서 약 8개월간 머무르면서 야수파 계열의 화가가 지도하던 미술연구소에서 수업하였다. 이어 유럽 각국의 미술관 순례를 통해서 미술 시야를 넓히고, 미국을 거쳐 1929년에 귀국하였다.
그 뒤 화가로서의 정상적 활동은 1935년 서울에서 가졌던 소품전을 마지막으로 중단하였다. 그리고 이혼과 정신 장애, 반신불수의 비극 속에서 세상의 버림을 받다가 생애를 마쳤다. 작품 경향은 크게 2기로 나눌 수 있다. 파리에 가기 이전에는 주로 사실적인 수법으로 인물과 풍경을 그렸다.
그 뒤로는 야수파와 표현파 등의 영향을 받아들인 한결 참신한 수법을 보였다. 그밖에 문재(文才)도 뛰어나 많은 문필 업적을 남겼으며, 동경 유학 때부터 여권 신장의 글을 발표한 여권 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하였다. 대표작으로 파리에서 그린 〈무희〉(국립현대미술관 소장)와 〈스페인해수욕장〉 등이 있다.
서양화가. 호는 정월(晶月). 신문학을 존중하는 개화된 가정에서 기정의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도쿄에 유학중이던 오빠 경석의 권유로 1913년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유화를 전공했다. 유학시절에는 최승구ㆍ이광수와 사귀면서 동경 유학생 동인지였던 [학지광]에 여권신장을 옹호하는 <이상적 부인> 등의 글을 발표했다.
1918년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함흥 영생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 미술교사를 지내다가 3ㆍ1운동에 참가 후 체포되어 수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 1920년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했고, 남편의 도움으로 1921년 서울 경성일보사 내청각(來靑閣)에서 첫 전람회를 열었다. 서울에서 열린 최초의 서양화전시회로, [매일신보]의 기사에 의하면 "낙역부절하여 인산인해"(絡繹不絶人山人海)였다고 한다.
1923년 일본 외무성 관리가 된 남편을 따라 만주에 거주했다. 1927년 모스크바를 거쳐 프랑스ㆍ영국ㆍ이탈리아ㆍ스페인 등을 여행하면서 미술관과 박물관을 견학하고 파리에서는 야수파 계열의 그림을 그렸다. 제1~11회까지 조선미술전람회에 9번 출품하여 제3회 때 <가을의 정원>으로 4등상, 제4회 때 <낭랑묘(娘娘廟)>로 3등상, 제5회 때 <천후궁(天後宮)>으로 특선을 받았다.
유럽 여행 중 사귄 최린과의 만남이 문제가 되어 귀국한 뒤인 1931년 이혼했다. 그 뒤 사회의 인습적인 도덕관에 저항하는 <우애결혼, 실험결혼> <이혼고백서> 등 자신의 입장을 강변하는 글을 발표했으나 사회의 냉대로 점점 소외되었다. 1935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전시회를 열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그 뒤 수덕사ㆍ해인사 등을 전전하며 유랑생활에 들어가 정확한 행적을 알 수 없다. 1946년 서울 자혜병원에서 행려병자로 쓸쓸히 인생을 마감했다.
【작품세계】
그녀의 작품은 크게 1918년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 졸업 때부터1927년 무렵 만주 봉천 시기까지, 유럽 체류에서 1930년대 초반까지 그리고 미술활동을 거의 중단한 이후의 3시기로 나눌 수 있다.
초기에는 사실주의적 경향의 작품을 그렸다. 1924년 판넬에 제작한 <만주 봉천 풍경>은 안정된 구도에 색채의 표현이 부드럽고, 비교적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어, 서양화 도입 초기의 사실주의적이고 인상주의적인 화풍을 견고하게 다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유럽 여행을 통해서는 활달한 필치와 과감한 표현으로 점차 바뀌어갔다. <자화상>(1928)에서는 강한 색채의 대비적 효과를 살린 표현기법으로, <스페인 해수욕장>(1928경) <불란서 마을 풍경>에서는 거침없는 필치에 자유분방한 기법으로 야수파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1931년 이혼 이후 생활과 정신의 불안정을 반영하듯 작품에는 생동감과 활발함이 사라졌으며 작품창작도 거의 하지 않았다. 죽은 뒤에 그의 글을 모아 <날아간 청조>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 등이 발간되었다.
【미술작품】<누드> <무희> <자화상> <스페인해수욕장> <가을의 정원> <낭랑묘(娘娘廟)> <천후궁(天後宮)>
【단편소설】<정순(貞順)>(1918) <경희>
【수필】<이상적 부인> <우애결혼, 실험결혼> <이혼고백서>
------------------------------------
<나혜석, ‘이혼 고백’ 여권(女權) 의식 불당겨> - ‘아듀, 20세기’(조선일보.1999. 4. 14)
입센의 <인형의 집> 노라의 가출이 유럽의 여권 의식에 불을 당겼다면 한국 여권의식은 화가 나혜석의 이혼이 성냥불을 그었다 할 수 있다.
1934년 8, 9월호 월간 잡지 [삼천리]에는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한 ‘이혼 고백서’가 두 달에 걸쳐 실렸다. 화가 나혜석의 공개적 ‘이혼 고백서’. 당대의 명사였던 변호사 김우영과 11년 결혼생활을 이혼으로 마친 나혜석은 이 글 내내 체념과 회한, 고통으로 가득찬 심경을 드러냈다. 당시 서른여덟이었던 나혜석은 1929년 파리에서 최린(전 천도교 교령)과 벌였던 연애 행각이 뒤늦게 국내에 알려지면서 1931년 이혼을 ‘당했던’ 판이다. 소생 4남매는 모두 남편에게 남겨두고 빈 몸으로 쫓겨난 그는 화려했던 시절을 뒤로한 채 신문 잡지에 글쓰는 것으로 업을 삼았다. ‘이혼 고백서’에 이어 그는 최린을 상대로 낸 보상비 청구소송, "당신과의 연애로 이혼을 당했으니 나를 책임지라"는 재판 청구로 또 한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나혜석의 결혼과 이혼, 최린에 대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은 20세기 자유연애 풍조가 시작된 시대의 풍경화다. 개화기에 태어난 신여성은 1920년대 이후 ‘모던 걸’(modern girl)로 한걸음 더 내디뎠다. 서구 풍물을 누구보다 빨리 받아들인 이들은 여성을 속박하는 유교적 인습과 도덕률을 벗어버리자고 외쳤다. 신식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은 주로 글쓰기를 통해 사회 변화를 촉구했고, ‘스스로 선택한’ 자유연애로 여성적 자아를 확인하려 들었다.
18세에 동경여자미술학교에 유학한 나혜석은 이광수 등과 친교하는 한편, 여성의 권리를 부르짖는 <이상적인 부인> 같은 글을 유학생 동인지에 발표해 유명해진다. 스물다섯에 한국 여성으로는 처음 유화 개인전을 가진 그는 조기 침후(朝起寢後.모닝) 커피를 즐기는 멋쟁이였다.
이들 신여성의 자유연애는 그러나 시대와 불화한다. 아니, 차라리 정면 충돌한다. 당대의 최고 작가 김동인은 소설 <김연실전>에서 이들 엘리트 신여성의 자유연애 지상주의를 통렬히 비웃었고, 촉망받던 작가 김일엽은 이루지 못한 사랑을 뒤로 하고 수덕사로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수많은 여성 작가들이 자유연애란 이름 아래 지식인 남성들과 스캔들을 일으켰고, 작가적 재능보단 스캔들 메이커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 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의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는 유명한 고별기를 남긴 나혜석. 이혼 후 육신과 정신에 깃든 병으로 끝내 남루한 행려병자로 폭풍과 불꽃의 삶을 마친다.(하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