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라고 고백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 나는 (결코) 결핍되지 않습니다.” 또는 “여호와께서 늘 나의 목자 역할을 해주시니, 내가 (영원토록) 더 바랄게 없습니다.”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고백이라기보다는 선언에 가깝습니다. “여호와”는 구약 성경을 통해서 약 400여 차례나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불이 붙었음에도 타서 없어지지 않는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나는 나다I am that I am”(출3:14a)라고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① 시간을 초월하십니다. 시작도 없으십니다.
끝도 없으십니다.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는 저와 여러분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개념입니다. ② 자족自足하십니다. 누구의 지혜도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누구의 힘도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필요하면 스스로 채우십니다. 스스로 만족하십니다. 누군가를 의지할 이유가 없으십니다. 끊임없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어려워지는 저와 여러분과는 완전히 다른 분이십니다. ③ 만사의 원인을 아십니다. 아니 만사의 1차적 곧 궁극적인 원인이 되십니다. 만사의 결과를 아십니다.
아니 만사의 결과를 창조하십니다. “목자”는 고대 근동 지역에서 가장 천하게 여기던 직업이었습니다. 가족들 가운데 한 사람이 목자가 되어야 한다면, 존재 이유가 가장 적은 사람 몫으로 맡겨졌습니다. 목자는 양과 스물네 시간을 함께 지내야 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함께 지내야 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살인적인 더위와 살을 에는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반드시 함께 지내야 했습니다. 양들을 먹여 주어야했습니다. 돌봐 주어야했습니다. 쉬지 않고 달려드는 짐승들로부터 보호해 주어야했습니다. 당연히 힘들었습니다. 고단했습니다. 괴로웠습니다.
거기다 천대까지 받았습니다. 자발적으로 목자가 되겠다고 나서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습니다. 놀랍게도 우주 만물의 대주재大主宰 곧 통치자가 되시는 여호와께서 시인의 목자가 되어주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요10:14a)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선언에 따르면,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서 더할 나위 없이 높은 자리에서 더할 나위 없이 낮은 자리로 임하셨습니다. “비하卑下”라는 표현만으로는 온전히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낮아지셨습니다.
굳이 필요를 채워주지 않으셔도, 먹여 주지 않으셔도, 돌봐 주지 않으셔도, 보호해 주지 않으셔도, 여호와께서 목자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미 충분합니다. 부족하지 않습니다.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비록 (제 삶에 꼭 필요한) 무화과는 열리지 않고, 포도는 달리지 않고, 올리브 농사는 (완전히) 망하고, 밭곡식은 나지 않고...우리에 있던 양떼는 어디론가 간데없고, 목장에는 소떼가 보이지 않아도 나는 여호와 안에서 환호성을 올리렵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 뛰렵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십니다.”(합3:17-19a)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비천하게 살줄도 알며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일체一體의)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빌4:12-13)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일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기쁜 일이든지 슬픈 일이든지 다 믿음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도무지 감당하기 어려워 보이는 문제와 질병과 환난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여호와를 위해서라고 한다면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이라 할지라도 바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을 만나게 된다 할지라도 충분히, 늘, 항상, 언제나, 영원히 만족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외에 다른 목자는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시인의 고백은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 도다.”(시23:2)라고 이어집니다. “푸른 풀의 목초지들 안에 그분께서 나를 눕게 하십니다. 안식처들의 물들 위로 나를 인도하십니다.” 또는 “새롭고 신선한 풀이 많은 풀밭 안에 그가 나를 늘 휴식하게 한다. 안식처들인 물들 위에 그가 나를 정말로 늘 인도한다.”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환난이 쉬지 않고 시인을 덮쳤습니다.
하나가 해결되고 나면 또 다른 환난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가왔습니다. 양을 치던 들판에서도, 나라와 민족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대적을 완벽하게 쓰러뜨린 이후에도, 백전백승의 탁월한 전투능력을 발휘한 다음에도, 왕궁에서 진수성찬의 음식을 먹고 마시며 화려한 생활을 하면서도, 살기 위해서 숨어들어갔던 이방인의 땅에서도, 만백성이 믿고 따르는 왕위에 올라서도, 무리 천년이나 미뤄지고 있던 가나안 땅 완전정복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원했지만 도무지 쉴 수 없었습니다. 늘 지치고 힘들었습니다.
목자가 되어주신 여호와 안에서만 쉴 수 있었습니다. 안식할 수 있었습니다. 시인의 고백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시23:3)라고 이어집니다. “내 혼을 그분께서 회복시키십니다. 나를 의의 경로들 안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분의 이름을 인하여” 또는 “나의 영혼을 그 분께서 반드시 되돌아오게 하시고, 그 분께서 나를 의라는 좁게 자국 난 길 안으로 계속해서 이끌리도록 하십니다, 그분의 명예를 위하여.”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원수들이 떼 지어 시인을 에워쌌습니다. 쉬지도 않고 으르렁거렸습니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찢어발기는 사자들처럼 입을 벌리고 달려들었습니다. 시인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죽이려고 달려드는 그들과 맞서 싸울 힘이 없었습니다. 동서남북 어디서도 빠져나갈 틈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물이 잦아들듯 맥이 완전히 풀리고 말았습니다. 뼈 마디마디는 어그러지고 말았습니다. 혀는 입천장에 완전히 달라붙었습니다. 마음은 밀랍 같이 녹아내렸습니다. 너무나 고달팠습니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무기력했습니다. 죽은 자와 방불했습니다. 현실은 완벽한 구렁텅이였습니다. 그야말로 절대절망이었습니다.
목자 되시는 여호와께서 개입해 주셨습니다. 간섭해 주셨습니다. 죽을 것 같이 힘든 상황에서도 의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도록 이끌어주셨습니다. 비록 쉽지 않지만, 아니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정도로 너무나 고달파서 저절로 한숨이 쏟아져 나오지만 여호와께서 자신의 삶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사실이 깨달아졌습니다. 동시에 마치 죽은 것 같이 무기력해져 있었던 영혼이 힘을 얻었습니다. 소생蘇生하였습니다. 상황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시인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시인의 고백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라고 이어집니다. “역시 내가 사망 그늘의 계곡 안으로 (계속 걸어)갈 때에도 나는 나쁜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기로 인도하시고 당신의 지팡이로 지켜주십니다. ‘그것(막대기와 지팡이)들’이 (정말로 항상) 나를 위로합니다.”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시인이 처해 있는 상황은 은혜로 충만하지 않았습니다. 기쁘지 않았습니다.
즐겁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달팠습니다. 슬펐습니다. 단순히 힘든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사망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는 골짜기였습니다. 시인의 고백은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라고 이어집니다. “당신께서 내 앞에 상을 차려 주십니다, 내 대적들 앞에서. 당신께서 그 기름으로써 내 머리를 기름 바르셨습니다, 내 잔이 넘침!”으로 직역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또 하루도 쉬지 않고 찾아와서는 잡아먹고야 말겠다고 으르렁거리는 대적들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절대 절명의 위기였습니다. 생명은 경각에 달려 있었습니다. 누구에게서도, 무엇을 통해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힘겹게 살아왔던 시인의 인생이 완전히 끝장 날 것만 같았습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그때, 시인의 마음에 말로는 다 형용하기 어려운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즐거움이 넘쳤습니다. 환경이 달라졌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원수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다 사라졌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시인과 여호와와의 관계가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친밀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 한 분만 구원의 목자가 되신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여호와께서 그의 목자가 되어주셨습니다. 친히 인도해 주셨습니다. 친히 지켜주셨습니다. 꿈도 꾸지 못했던, 아니 꿈도 꿀 수 없었던 잔치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은혜를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넘쳐서 흐르고 흐르도록 베풀어주셨습니다. 잊지 말고 꼭 기억하십시오. 시인은 자신의 예상, 기대, 이해, 믿음과는 전혀 다른 은혜와 축복을 누리고 있지 않았습니다. 푸른 초장이 아니었습니다. 쉴만한 물가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절대 절망을 넘어서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러 있었습니다. “아! 이제는 끝장이구나!”라는 탄식과 절규가 목구멍까지 올라와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개입해 주셨습니다. 건져주셨습니다.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제 겨우 숨을 쉴 수 있을 정도의 여유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지극히 자연스럽게 기쁨과 즐거움과 함께 조금도 꾸미지 않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감사가 흘러나왔습니다. “여호와만 저의 위로가 되십니다. 여호와만 저를 풍성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고백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 시는 축복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받아 누리고 있기 때문에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아닙니다. 현재보다 훨씬 풍성한 내일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부를 수 있는 노래도 아닙니다.
비록 상황은 어렵지만 여호와와 완벽한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부를 수 있는 노래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안에, 내가 여호와 안에 머물러 있게 되었기 때문에 부를 수 있는 노래입니다. 시인의 고백은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23:6)라고 마무리됩니다. “실로 좋으심과 인애가 내 생명들의 모든 날들에 나를 뒤쫓아 올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여호와의 집 안에 거할 것입니다, 날들의 길음으로.”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이는 엄숙한 자기 결단입니다. “선하심טוֹב(토브)”은 은혜를 가리킵니다.
“인자하심חֶסֶד(헤세드)”는 언약에 바탕을 둔 사랑을 가리킵니다. “따르다רָדַף(라다프)”는 “뒤따르다, 추격하다” 등의 뜻으로,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쉬지 않고 이어진다는 의미입니다. 곧 여호와께서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부어주시는 은혜와 사랑이 쉬지 않고 이어진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여호와의 집”은 하나님 나라를 가리킵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같이 사모했었던 하나님 나라입니다. 여호와에 대한 어떤 의심이나 원망이나 불신이 개입되지 않는 나라입니다. 오히려 여호와를 향한 저와 여러분의 믿음과 헌신이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나라입니다.
세상 그 무엇도, 세상 그 어떤 상황도, 심지어 절대 절망인 죽음조차도 저와 여러분을 향한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영향을 끼칠 수 없는 나라입니다.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부어지는 은혜와 사랑에 영향을 끼칠 수 없는 나라입니다. 오히려 쉬지 않고 임하는 나라입니다. 필연적으로 영원히 여호와를 떠나지 않겠다는 결단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겠다는 결단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 무궁히 살고 싶다는 소원이 우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소중하게 여기던 모든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잃어버린 너무나 쓰라린 상황 속에서 먼저 손 내밀어 건져주신 여호와를 경험해 보셨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호흡이 주어지는 모든 순간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상황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손에 남은 것이 하나도 없는 절망 속에 던져진다 할지라도 선한 목자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살겠다고 결단해 보셨습니까? 피맺힌 결단을 여호와 앞에 고백해 보셨습니까? 교수는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 갓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기숙사에서 유대인과 한 방을 쓰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함께 먹었습니다.
언제나 함께 다녔습니다. 공부도 언제나 함께 했습니다. 유대인 친구에게는 하나의 습관이 있었습니다. 두어 시간 공부하다 지칠 때가 되면, 히브리어로 된 시 하나를 소리 높여 외웠습니다. 시편 23편이었습니다. 이 시를 외우다보면 여호와께서 자신과 함께하심이 느껴지고, 마음도 가벼워지고, 정신도 맑아지는 것은 물론 알 수 없는 힘이 주어진다는 설명까지 덧붙였습니다. 교수 역시 그때부터 시23편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그들은 공부하다가 지겨워질 때쯤 되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시편 23편을 히브리어로 소리 높여 외웠습니다.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유대인 친구는 나치의 핍박을 피해서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로부터 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지금 나치의 비밀경찰들이 들이닥쳐서 사람들을 잡아가고 있는데, 자신 역시 잡혀서 가스실로 끌려가게 될 것 같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놀란 교수는 급히 자전거에 올라탔습니다. 친구의 은신처를 향해서 달렸습니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친구를 태운 트럭이 출발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트럭을 따라가면서 큰 소리로 친구 이름을 불렀습니다.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친구가 트럭 옆으로 친 포장을 들치고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놀랍게도, 형장에 도착한 즉시 죽을 위기 상황 앞에서도 친구는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라고 시편 23편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에서 보았던 평안한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친구를 보는 교수 역시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내렸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트럭을 쫓아가면서 친구와 함께 시23편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친구와 마지막 인사를 나눴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독일의 패색은 더욱 짙어갔습니다.
나치는 끝까지 발악했습니다. 교수 역시 군대에 끌려갔습니다. 포로로 붙잡혀서 총살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 본 젊은 독일 포로들은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가스실로 끌려가던 친구가 생각났습니다. 죽음의 길을 웃으며 떠난 친구처럼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하자고 다짐했습니다. 형장에 도착한 포로들이 하나둘 쓰러지고 교수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교수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허락을 받은 교수는 잠시 눈을 감았습니다. 친구가 죽음의 길을 떠나면서 보여주었던 환한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조용히 시편 23편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 도다”라는 부분까지 외웠을 때, 알 수 없는 힘이 밀려왔습니다. 불끈 용기가 솟아올랐습니다.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평안해졌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외쳤습니다.
동시에, 형장을 관리하고 있던 연합군 장교가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함께 히브리어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라고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교수를 지금 당장 풀어주라고 명령했습니다. 사형을 중지하라는 서류에 사인했습니다. 놀라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이들에게는 조용히 “하나님의 백성은 그가 비록 악마의 제복을 입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교수는 당시를 회상하며 자신은 하나님 백성으로 죽고 싶었었다고 고백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 백성으로 죽고 싶었던 자신을 이제까지 살려주셨다는 고백까지 덧붙였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자신이 하나님 백성이라는 사실을 한시로 잊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 백성이라는 사실을 드러낼 수 있어야합니다.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야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순절 네 번째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다가오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했습니다. 부인했습니다. 떠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는 생명 하나만 남았습니다.
이 생명도 버려야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15:34b)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절규에 따르면, 심지어 아버지 하나님마저도 외면하셨습니다. 버리셨습니다. 사탄의 손아귀에 내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단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지셨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던져진 것이 아니라, 잠시 지나간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떨어져 아주 죽으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다 하셨습니다. 마침내 인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상황을 만나게 된다 할지라도, 심지어 여호와마저도 자신을 버린 것 같은 혹독한 환난과 시험을 만나게 된다 할지라도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꺼이 짊어지신 십자가를 바라보아야하는 이유입니다. 탄식으로 얼룩진 한숨과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슬픔이 동시에 쏟아져 나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무엇을 통해서도 얻을 수 없는 참된 위로와 용기와 평안을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더할 나위 없는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어진 상황을 얼마든지 참고 견디며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죽음 앞에서조차도 두려워하거나 떨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언제나, 늘, 항상, 영원히 함께하시고 또 마침내 쉴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으로 이끌어주시는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 되시니 충분합니다.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평생 여호와 하나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단할 수 있습니다. 평생 목자 되시는 여호와를 떠나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더불어 함께 동행 하는, 여호와 한 분만으로도 충분한, 더 바랄 것이 전혀 없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