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시리즈의 품격과 X5의 실용성 - BMW GT535i
2010/06/27 | 1
이도저도 아닌 모습의 BMW 그란투리스모를 어떤 카테고리에 담아야 할까? 한참을 몰고 다녔는데 여전히 답은 없다. ‘SUV+세단+쿠페+왜건=그란투리스모’라는 새 공식을 얻었을 뿐.
가장 강력한 라이벌 가문인 메르세데스 벤츠가 CLS를 내세워 장르 파괴에 성공하면서 BMW에 보기 좋게 한방 먹였다. 가만히 있을 BMW가 아니지 않은가. CLS가 세단과 쿠페를 결합한 크로스오버라면 BMW는 그보다 두어 개 더 넣어 주면 되는 것. 2009년 컨셉트카로 등장한 5시리즈 GT(이하 그란투리스모)가 바로 BMW가 준비한 비밀병기다.
BMW 그란투리스모는 지금껏 사용한 자동차 분류 기준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부류다. 쿠페나 세단에 넣자니 키가 지나치게 크고, SUV보다는 날렵하다. 이렇게 생긴 왜건은 봤나? 아니다. 이들 장르의 장점을 두루 섞어 놓은 모습이 그란투리스모다. 세계적으로도 희귀종이어서 지난해 뉴욕모터쇼에 등장한 어큐라 ZDX(조금 더 쿠페스럽다)만이 비슷한 컨셉트를 지녔다.
7시리즈에 견줄 만한 크기
실제로 보니 X6을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한 덩어리감(?)이 느껴진다. 5시리즈 GT(국내에선 그냥 그란투리스모)란 이름 때문에 그저 ‘중형차 키를 조금 높인 정도겠지’라고 생각했건만, 길이가 5m에서 2mm 모자랄 뿐이다. 휠베이스는 3,070mm로 정확히 7시리즈 표준형과 같다.
솔직히 말해 전체적인 외모는 ‘갖고 싶다’란 생각이 들 정도로 매력적이지는 않다. 커다란 헤드램프와 그릴은 CS 컨셉트카에서부터 이어진 BMW의 새 아이덴티티. 늦게 나온 6세대 5시리즈보다는 먼저 나온 7시리즈를 닮았다.
옆에서 볼 때 코(그릴)를 살짝 내민 모습이 심술궂어 보이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다. BMW 모델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숄더라인의 포인트를 그대로 따랐지만 그 아래쪽에 깊게 패인 캐릭터라인으로 차별화된 모습이다. 물방울 모양의 윈도라인은 쿠페의 흔적이고 D필러를 거의 트렁크 끝까지 패스트백 스타일로 뽑았다. 테일램프는 헤드램프와 마찬가지로 7시리즈와 비슷하고 트렁크 위쪽을 살짝 당겨 포인트를 주었다. 키드니 그릴과 함께 BMW 패밀리 증표인 호프마이스터 킥(부메랑 모양으로 꺾은 쿼터글라스 테두리)도 남아 있다.
세단보다 조금 높은 힙 포인트를 고려해 프레임리스 도어를 달아 타고 내리기가 쉽다. 앞좌석을 중심으로 실내는 더욱 7시리즈를 닮았다. 조금 더 높은 키를 활용해 대시보드를 두툼하게 만들었고 센터페시아의 수납공간을 위로 올렸을 뿐 다른 점을 찾기 힘들 정도다. 기어레버 주변과 센터콘솔의 구성도 7시리즈와 같다.
시동을 끄면 바탕이 검은 색으로 변하는 블랙 패널식 계기판은 4개의 원으로 이뤄진 아날로그 타입의 클래식한 모습. 스피도미터 아래에 주행가능한 거리를 나타내주는 인디케이터(세팅에 따라 디른 것도 가능)가 있고 오른쪽 타코미터 아래에는 실시간 연비를 표시해주는 기능을 갖췄다. 파란색의 배터리 그림 부분은 제동시 운동에너지를 전기로 바꾸어 저장하는 회생제동장치의 작동유무를 보여준다.
가짓수를 세기조차 힘들 정도로 세세한 부분까지 조절 가능한 전동시트는 이 차의 급이 5시리즈보다 7시리즈에 가깝다는 것을 말해준다. 시트의 감촉도 훌륭하고 수납공간이 많은 도어 트림의 쓰임새도 만족스럽다. 당연히 스티어링 휠은 전동으로 상하뿐만 아니라 앞뒤로 조절할 수 있다. 앞뒤 좌석의 헤드룸은 1,051mm와 991mm로 1,032mm와 972mm인 7시리즈에 비해 넉넉하고 레그룸은 비슷하다. 5인승이 기본이고 고급형에는 뒷좌석이 분리된 4인승 구조로 되어 있다.
7시리즈를 비롯한 세단과 비교해 그란투리스모가 내세울 수 있는 장점은 트렁크 활용도. 해치게이트식(전동식)으로 열려 커다란 물건을 쉽게 넣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트렁크공간도 최대 500L인 7시리즈에 비해 1,700L까지 활용할 수 있다. 다만, 뒷좌석을 세우고 트렁크 분리장치를 고정시키면 440L로 준다.
무겁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움직임
시승차인 535i의 심장은 직렬 6기통 3.0L 트윈 스크롤 터보 엔진으로 신형 5시리즈에 쓰이는 것과 같다. 2006년부터 BMW가 사용하고 있는 핵심 엔진(N55)으로 N54의 진화형이다. N54의 경우 트윈 터보를 사용했지만 이번엔 싱글 터보(이름은 트윈 파워 터보지만 엄연히 싱글 터보다)로 돌아섰다. 구조를 단순화하면서 원가절감을 이뤄냈고 개선된 밸브트로닉 기술과 직분사 컨트롤로 출력은 이전보다 높고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줄었다. 이런데도 터보가 하나 달렸다고 불평할 텐가?
여기에 물린 8단 자동변속기는 독일 ZF사 제품으로 5시리즈와 7시리즈를 비롯해 벤틀리 뮬산느, 롤스로이스 고스트 등에 쓰인 것과 기본구조가 같다. 구동방식은 뒷바퀴굴림. 그러나 6월경 지난 베이징모터쇼에서 발표된 550i x드라이브(6월)에 이어 9월에는 535i와 535d까지 네바퀴굴림이 더해진다.
스타트 버튼을 눌러 엔진을 깨우자 순간적으로 움찔거린다. 세로배치 직렬 6기통의 감흥으로 이해하고 싶다. 아이들링 상태의 엔진음은 차급을 생각할 때 조금 큰 편. 유럽차에 익숙한 경우라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조용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일본차나 국산 대형차 오너에겐 조금 신경 쓰일 수도 있다. 엔진음에 비해 바닥 소음과 바람소리는 잘 억제되었다.
시트 포지션이 세단보다 약간 높기 때문에 전방시야는 훌륭하지만 두툼한 D필러로 인해 후방시야는 좋지 않다. 인피니티의 어라운드 뷰와 비슷한 톱뷰(TopView) 기능을 제공해 모니터상으로 뒤의 상황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불행 중 다행. 이런 기능은 보도블록 가까이 붙여 평행주차하거나 절벽 가까이 차를 붙여야 할 때 아주 쓸모 있다. 그러나 모니터에 경고 문구로 나와 있듯이 모니터에만 너무 의지해서는 안 된다. 코너를 돌 때 전후좌우의 모니터가 아주 조금 어긋나는 상황이 일어났다. 7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앞 펜더의 카메라로 앞쪽 사각지대를 보여주는 기능은 골목주행이나 지하 주차장에서 나올 때 유용하다. 초기가속 테스트를 위해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사이버틱한 기어 레버를 D로 움직이고 가속 페달을 깊게 밟았다.
생각보다 앞이 많이 들린다. 이런 느낌은 BMW 모델 중에선 찾기 힘든 경험이라 약간 당황스럽다. 드라이빙 다이내믹 컨트롤(Driving Dynamic Control)이 컴포트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기어 레버 옆에 있는 스위치로 서스펜션과 액셀의 반응을 컴포트, 노말, 스포트, 스포트+의 4가지 중 선택할 수 있다. 또, 스포트 모드에서는 서스펜션과 액셀 반응 등을 각각 따로 세팅할 수도 있다.
느낌상으로는 7시리즈의 그것보다 변화폭이 크다. 컴포트 모드에서는 한없이 부드럽고 스포트와 스포트 플러스에 이르러서야 BMW만의 특성이 나온다. 컴포트 모드로 놓고 코너를 잡아 돌릴 때 조금 과장해서 멀미 날 정도로 흐느적거린다고 불만을 늘어놓던 동승자도 스포트 플러스에서는 역시 BMW라며 탄성을 질러댄다. 운전자 취향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도심에서는 노말 모드가 가장 편하고 고속에서는 스포츠 모드가 많은 운전자들과 궁합이 맞을 듯하다.
0→시속 100km 가속을 6.3초 만에 끝내는 기민함을 지녔지만 큰 덩치로 인해 체감 스피드는 그리 빠르지 않다. 참고로 같은 엔진을 쓰는 535i 세단의 기록은 6.1초로 0.2초 빠르다. 그래도 2,015kg이나 나가는 육중한 몸무게를 고려하면 생각보다 몸놀림이 날래다.
8단 자동변속기는 기대와 달리 그리 부드럽지 못하고 가끔씩 ‘나 변속하고 있소’라고 말하듯 작은 충격을 전달한다. 기어비(모든 모델이 같다)는 4.70을 시작으로 0.67까지 촘촘하게 조합되어 있고 종감속비는 2.81이다. 시속 100km 정속주행시 회전수를 보면 6단에서 2,300rpm, 7단 1,900rpm, 8단 1,600rpm 부근을 가리킨다. 기존 BMW의 주력이었던 6단 자동변속기의 경우 6단에서 2,100rpm으로 시속 100km를 달렸으니 꽤 큰 차이다. BMW에 따르면 8단 자동변속기로 평균 10% 정도의 연비절감 효과를 얻었다고 한다.
약 400km를 달리는 동안 트립컴퓨터에 표시된 평균연비는 8.2km/L. 2톤이 넘는 덩치를 생각할 때 훌륭한 결과다. 비록 덩치는 최근 대세인 다운사이징에 역행하고 있지만 비슷하거나 더 뛰어난 동력성능을 내면서 같은 연료로 더 많이 달릴 수 있는 깨끗한 파워트레인을 만들어낸 BMW의 엔지니어를 칭찬할 수밖에 없다.
짐작했겠지만 그란투리스모는 7시리즈의 품격을 X5처럼 유쾌하게 풀어낸 결과물이다. 7시리즈를 살 만한 경제적 여력은 있지만 이것저것 눈치를 봐야 할 상황이라면 그란투리스모가 답이다. 게다가 넓은 트렁크공간을 활용해 주말 가족여행에 쓰기에도 안성맞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