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세미나] 『철학의 빈곤』 강독(3차시)
칼 맑스 『철학의 빈곤』(1847)
2024.02.15.(목)
발제자 명혜영
2장 정치경제학의 형이상학(세계관)
2.3 분업과 기계 La division du travail et les machines
<요약> 분업과 기계의 절은 프루동 ‘빈곤의 철학’ 3장, 4장에 대한 비판이다. 각각 경제발전 단계로, 분업은 그 첫 단계에 해당한다. 프루동은 분업을 통해 인간의 삶과 지성을 향상시켰지만 한편으로 불평등을 낳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경제학에서는 이미 자명한 사실로 여겨지고 있어, 그는 이를 각색한 것에 불과하다고 맑스는 비판한다. 프루동은, 이러한 분업에 의한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으로써 ‘기계=공장’을 등장시키는데, 맑스의 입장에서는 애초에 현(근)대산업 발전에 있어 분업이 발생했기 때문에 순서가 반대라고 지적한다. 게다가 프루동의 논리로는 자동 기계공장에 있어서의 분업이라는 성질이 가지는 혁명적 측면을 파악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프루동이 지향하는 종합적인 노동은 중세의 직인, 우두머리 직인을 모델로 한 쁘띠 부르주아의 이상일 뿐이다. |
분업에 대하여
프루동 |
분업이란, 그 본질로 보자면, 인간의 삶과 지성의 평등이 실현되는 양식이다. 분업은 일의 다양성에 의해 생산물에 비례성을 가져오고, 교환에 균형을 가져오고, 그 결과로 우리의 부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 분업은 경제발전의 첫 단계이면서 동시에 지적진보의 첫 단계이기도 하다.(162) 그러나 이 중요한 출발점인 분업을 자처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인류는 극심한 폭풍 속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진보는 처음에는 극소수의 특권자만의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이런 패거리가 엘리트가 된다.(163) 애덤 스미스 이후 경제학자들은 모두 분업의 법칙의 이점과 결점을 들지만, 중시되는 것은 전적으로 이점이다. 결점을 보는 것은 그들의 낙관주의에 어긋난다. 법칙의 결점이 어떻게 생길 수 있는지를 문제 삼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164)
→ 세분된 노동의 최초의 결과는 영혼의 타락이고, 그 다음에는 지출된 이성의 총량에 반비례하여 증대하는 노동시간의 연장이다. − 그러나 일의 지속시간은 하루에 16시간에서 18시간을 초과할 수 없기 때문에, 보상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루어질 수 없는 한, 그것은 가격에 의존할 것이고 급여는 감소할 것이다. 확실하게 주목해야 할 것은, 보편적 의식이 직공장(지배자)의 노동과 견습공의 수작업을 같은 반열에 놓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일당 가격 인하가 필요하다. 그래서 노동자는 인격을 타락시키는 작업에 의해서 영혼이 괴로움을 당한 후, 얼마 안 되는 수입에 의해서 몸도 또한 타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 분업은 인격을 타락시키는 일로 노동자를 몰아넣는다. 거기에는 퇴폐적인 일에 어울리는 퇴폐된 영혼이 있다. 영혼이 퇴폐함에 따라 더욱더 임금이 내려간다. 임금의 저하가 영혼의 퇴폐와 일치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프루동은 위로삼아 보편적 양심이 그와 같이 바란다고 말한다.
파가송 |
국가의 전반적인 역량이 예술의 진보에 비례하여 증가하는지조차 의심해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 기계 예술... 이성과 감정의 도움에서 완전히 벗어났을 때 완벽하게 성공하고, 무지는 미신뿐만 아니라 산업의 어머니입니다. 생각과 상상력은 길을 잃기 쉽다. 그러나 발이나 손을 움직이는 습관은 어느 쪽에도 달려있지 않다. 따라서 제조에 대한 완벽은 마음 없이 작업장을 사람이 되는 기계로 간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장교는 전투술에 매우 능숙할 수 있지만, 군인의 모든 공적은 단지 발이나 손의 몇 가지 동작을 수행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는 다른 하나는 잃은 것을 얻었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분리되어 있는 시대에, 생각하는 기술 자체가 하나의 직업을 형성할 수 있다.(애덤 파가송 <시민사회의 역사>1783)
맑스 |
르몽테는 오늘날 구성되어 있는 분업의 걱정스러운 결과들을 재치 있게 설명했다. 그리고 프루동 씨는 그것에 덧붙여야 할 것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그러나 프루동 씨의 과실로 인해, 이러한 누가 먼저인가 하는 문제에 일단 말려들었으니, 우리는 이참에 이렇게도 말해 두자. 르몽테 씨보다 훨씬 이전에, 애덤 파가송의 제자인 애덤 스미스보다 17년 전에, 이 파가송이, 특히 분업을 논하고 있는 한 장에서, 이 일을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151)
기계에 대하여
프루동 |
기계란, 분업의 법칙에 대항하는 것(반정립)이다. 또한 기계는 분업의 법칙에 의해 크게 손상된 균형을 회복시키는 것으로서 산업에 도입된다.(206) 기계란 실제로 무엇인가. 분업에 의해 조각조각 쪼개진 노동을 다시 집합시키는 방법이다... 분업의 안티노미가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계에 의해 밸런스가 제거되어 중화된다고 생각된다.(210) 기계는 노동자의 고통을 감소시킨다. 바로 그 일로 인해 기계는 노동을 단축시키고 감소시킨다. 그리고 그로 인해 노동은 날로 공급이 과잉되어 수요가 줄어든다... 산업의 개선은 쉬지 않고 거듭되어 인간의 작업을 연달아 대체시켜 나가기 때문에 항상적인 경향으로써 일의 일부는 잘리고, 따라서 노동자들은 생산에서 배제되어 간다.(222) 기계는 분업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사회경제 시스템에서 부의 원천이자 빈곤의 영원한 숙명적 원인이다.(225)
→ 푸르동은 자기의 변증법을 뒷받침하기 위해 우선은 기계를 공장으로 바꾼다. 분업에서 비참을 유출시키기 위해서 현대 공장을 전제한 후에, 다음으로 분업에 의해 발생하는 비참함을 전제로 하여, 공장을 이 변증법적 부정으로서 제안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도덕면으로 인격을 타락시킴으로써 노동자에게 타격을 주고, 육체 면에서 적은 임금으로 그에게 다시 타격을 가한 후, 또 노동자를 직공장에게 종속시키고, 그를 그 아래의 수동적 작업에까지 격하시킨 후에, 새삼스럽게 프루동은 공장과 기계를 물고 늘어져, ‘노동자에게 주인을 주어서’ 노동자를 타락시킨다고 비난한다. 이리하여 그는 노동자를 ‘직인의 위치에서 보조자의 위치로 타락하게 함으로써’ 노동자의 격하를 완성시킨다. ← 해괴한 변증법!!
→ 기계는, 쟁기를 끄는 소가 경제 카테고리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카테고리가 아니다. 기계는 하나의 생산하는 힘에 지나지 않는다. 기계를 사용하는 현대의 공장은 생산의 한 사회관계이자 하나의 경제적 카테고리이다.
맑스 |
프루동 씨에게 한 마디 충고해 두자. 각자에게 가장 선호하는 특수 작업에 전념하는 것을 허용하는 곳, 노동의 여러 부분의 분리, 프루동 씨가 세계의 시작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보는 곳의 분리는 경쟁이 지배하는 제도 아래 있는 근대 산업에서 최초로 존재하는 것이다.(155) 근대사회 내부에서의 분업을 특색 짓는 것은 분업이 각종 전문, 각종 특수전문인 및 이들과 함께 직업 백치를 낳는다는 사실이다.(162) 자동기계공장에서의 분업을 특색 짓는 것은, 그곳에서는 노동이 특수적인 성격을 모두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특수적인 발전이 정지할 때, 보편성의 욕구가 개인의 전반적인 발전을 목표로 하는 경향[노력]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자동기계공장은 특수전문인과 직업 바보를 일소하는 것이다. 프루동 씨는 자동기계 공장의 이 유일한 혁명적 측면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발 물러선다... 요컨대 프루동 씨는 소부르주아의 이상을 넘어서 나아가지 못했다. 그리고 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은 우리를 중세 장인이나 기껏해야 두목 장인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163)
→ 프루동은 어떻게 해서 공장이 분업에 의해서 생기고, 임금제가 공장에서 생기는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실로 ‘흥미를 자아내는’ 한 개의 계보도(系譜圖)를 보여준다.
(1) 생산을 그 다면적 부분으로 분리하여, 한 사람의 노동자에게 한 부분을 담당시킨다면 생산력이 배로 늘어날 것이라고 ‘알아차린’ 한 인물을 상정한다. (2) 이 인물은 이 착상의 경로를 따라서 자기가 계획하는 특별 목적을 위하여 나누어 구별된 노동자의 지속적 집단을 만들면 훨씬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남몰래 생각한다. (3) 이 인물은 자기의 착상과 그 줄거리의 이해를 얻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계획을 제안한다. (4) 이 인물은 산업의 시초에는 후에 그의 노동자가 될 동료와 대등한 입장에서 교섭한다. (5) 실제로 곧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이 원초적 평등은 주인의 우월적인 입장과 임금노동자의 종속에 의해서 급속히 소멸했을 것이다.
→ 사회 전체는, 그것도 또한 분업을 갖는 점에서 공장내부와 공통되어 있다. 현대의 공장 내 분업을 모델로 해서 그것을 사회 전체에 적용해보면, 부의 생산을 위해 가장 잘 조직된 사회는, 분명히 공동체의 다양한 멤버에 미리 정해진 규칙에 따라서 일을 분배하는 유일한 기업가만을 지휘자로서 갖는 사회일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게 되어있지 않다. 현대의 공장 내부에서 분업은 기업가의 권위에 의해서 세부에 걸쳐 규제되어 있지만, 현대사회에서는 노동을 분배하기 위해 자유경쟁 이외의 규칙도 권위도 없다.
☞ 프루동과 교환양식 D; 프루동의 책 ‘기계’의 장에서는 자유에 대한 탈선이 벌어지고 있다. 경제에 기계의 도입은 자유를 향한 도약이다(214). 자유란 행동하는 능력이며 행동하지 않는 능력이다.(216) 가라타니 유키토는 이 프루동의 자유사상, 상호성사상을 교환양식 D와 관련짓고 있다. 내 생각에는 프루동에 앞서 종교를 비판하면서 종교의 윤리적 핵심, 즉 교환양식 D를 구출하는 과제를 추구한 사상가가 있다. 칸트다. 그는 타자를 수단으로만 취급하지 말고 동시에 목적으로 취급하라는 격률을 보편적 도덕법칙으로 여겼다... 타자를 '목적으로 취급 한다'는 것은 타자를 자유로운 존재로 취급하는 것이며, 그것은 타자의 존엄성, 즉 대체할 수 없는 단독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이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즉 칸트가 보편적 도덕법칙으로 찾아낸 것은 바로 자유의 상호성(호수성互酬性)인 것이다. 그야말로 교환양식 D이다. (가라타니 유키토 『세계사의 구조』, 이와나미 서점, 2010년, 345페이지)
2.4 경쟁과 독점
<요약> 이 절에서는 프루동 『빈곤의 철학』5, 6장 3단계 경쟁, 4단계 독점을 다루고 있다. 경쟁은 노동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고, 자유를 창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폭력적인 측면은 항상 사람들을 위기에 빠뜨린다. 그 때문에, 경쟁의 균형, 즉 단속을 발견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에 맑스는 경쟁 확립의 역사성 같은 것을 프루동이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을 비판한다. 게다가 경쟁으로부터 발전한 독점도, 본래 봉건적 독점으로부터 생긴 것이므로, 순서가 역전되어 있다. 따라서 봉건적 독점의 부정의 부정이야말로 근대적, 부르주아적 독점이 될 것이지만, 프루동은 그러한 구별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 |
경쟁에 대하여
프루동 |
경쟁은 경쟁에 의해 망한다.(266) 애초에 경쟁은 분업만큼이나 노동에 필수불가결한 것이다.(267) 경쟁은 가치의 구성에 필요하다. 분배의 원리 자체에 필요하며, 따라서 평등의 실현을 위해 필요하다... 임금 보장은 가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가치는 경쟁에 의해서만 발견된다.(270) 공산주의도, 반사회주의적 민주주의도, 경쟁의 원리에 대해서는 중용의 입장이다. 즉, 나도 모르게 반혁명적인 사상이 된다.(274) 경쟁은 그 원리의 유용성 그 자체에서 악을 만들고, 바로 그 악에서 새롭게 선을 끌어낸다. 유용성은 파괴에서 나오고, 균형은 동란에 의해 만들어진다.(286) 경쟁은 그 유용한 측면을 보편화하고 최고도로 강화해야 한다. 그러나 그 부정적인 측면은 어떤 것도 남기지 않도록 철저히 소거해야 한다.(299) 경쟁을 없애는 것은 여기서 문제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자유를 없애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균형을 찾는 것이다. 내 나름대로 굳이 따진다면 단속할 일이다. 왜냐하면 개인의 것이든 집단의 것이든 모든 힘, 모든 자발성은 나름대로 한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309)
맑스 |
경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법령을 공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봤자 우리는 경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임금을 그대로 두고 경쟁의 폐지를 제의한다는 데까지 가정을 밀어붙인다면, 우리는 칙령에 의해 어리석은 행위를 할 것을 제의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은 칙령에 따라 일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법령을 제정하기에 앞서 그들은 최소한 그들의 산업적 정치적 존립조건을, 따라서 또 그들의 전 존재양식을 뿌리부터 철저히 변혁해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165)
☞ 창조적 파괴; 프루동 빈곤의 철학 에피그라프에는 ‘나는 파괴한다, 그리고 건설한다.’(Destruamet Aedificabo)라는 구절이 있다. 사이토 번역의 해제에서는, 「해당하는 부분은 없다」라고 되어 있다. 이 말은 바쿠닌의 「파괴의 정열은 창조적 의미의 정열이다」와 같이 무정부주의자 사이에서 선호된 것이지만, 사이토에 의하면, 프루동의 주장의 역점은 파괴가 아니라, 창조라고 해, 슘페터가 말하는 「창조적 파괴」에 가깝다. 또한 『신명기』 제32장 제39절에 "나는 죽이며 살린다."라는 구절은 존재한다. 프루동의 전기를 쓴 피에르 하우프트만은 코레흐트의 말 제3장 제3절의 "파괴할 때, 지을 때"가 가장 가까울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Pierre Haubtmann, Pierre-Joseph Proudhon: savie et sapensee 1809-1849, Beauchesne, 1982, p. 642.)
독점에 대하여
프루동 |
실제로 독점은 경쟁 끝에 반드시 생긴다. 경쟁은 끊임없는 자기 부정에 의해 독점을 낳는다. 독점의 이러한 시작점을 보면, 이미 그것만으로 독점은 정당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생명체에게는 운동이 불가결한 것과 같이, 사회에는 경쟁이 불가결하고, 그리고 독점은 경쟁의 목적·종점으로서 그 후에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327) 경제적으로, 독점은 부의 증진에 공헌한다.(341) 지대는 독점으로부터가 아니라 소유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345) 독점도 경쟁과 마찬가지로, 말에 있어서, 그리고 정의에 있어서 모순이 있다.(350)... 독점자는 임금 생활자를 파산에 빠뜨린다. 독점자가 노동자의 것을 횡령해 살고 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351) 독점은 일종의 보존본능을 통해 협동(아소시아시온) 같은 관념마저 타락시켜 버렸다.(366) 합자회사는 다른 모든 산업으로부터 자신의 고유한 분야를 배타적으로 지킨다. 한정하지 않는다면, 합자회사는 근본적으로 변질된다. 완전히 새로운 다른 형태의 회사로 바뀐다. 그 회사는 이제 특별히 이익의 추구를 취지로 하지 않고, 노동의 배분과 교환의 여러 조건을 컨트롤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바로, 독점의 법학이 배제하려는 협동에 다름 아니다.(371)
맑스 |
프루동 씨는, 경쟁에 의해서 발생한 현(근)대적 독점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이 경쟁은 봉건적 독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까 본래 경쟁이 독점의 반대편이었던 것이지, 독점이 경쟁의 반대편이었던 것은 아니다.(169) 실제 생활에 있어서는 경쟁, 독점 및 그들의 적대관계가 발견될 뿐만 아니라, 더욱 공식적이 아니라 운동인 곳의 그들의 총합도 또한 발견된다. 독점이 경쟁을 낳고, 경쟁이 독점을 낳는다... 독점자들이 부분적인 [경영자] 연합에 의해 그들 상호 간의 경쟁을 제한하면 경쟁은 노동자들 안에서 증진된다. 하지만 한 나라의 독점자들에 맞서 프롤레타리아 집단이 커질수록 국가 독점자들 간의 경쟁이 점점 통제하기 어려워진다... 즉, 독점은 경쟁이라고 하는 투쟁을 경과하는 프로세스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170)
→ 현대의 독점은 단순한 반정립(反定立)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은 참다운 종합인 것이다.
. 정립 – 경쟁에 선행하는 봉건적 독립
. 반정립 – 경쟁
. 종합 – 현대의 독점. 이것은 경쟁 체제를 상정하는 한에 있어서의 봉건적 독점의 부정이며, 그것이 독점인 한 경쟁의 부정이다.
이와 같이, 반대의 독점, 즉 부르주아적 독점은 종합적 독점, 부정의 독점, 대립물의 통일이다. 그것은 순수 상태의, 정상적인, 합리적인 독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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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치란 무엇입니까’라는 김 선생님의 질문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사실과 가치’의 이분법을 넘어서(힐러리 퍼트남, 2010) 참조
- 사전적 의미: 사실은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지 없는지를 밝힐 수 있는 것이고, 가치는 사람의 주관·기호 등과 관련된 것으로 과학적으로 존재 여부를 밝힐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실판단은 참과 거짓을 알 수 있으나, 가치판단은 그렇지 못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 사실과 가치는 다르다. 세계에 가치란 존재할 수 없다. 즉 가치란 세계의 한 부분이 아니다. 이것이 맥키의 주장이다. (J. Mackie, <윤리학: 옳고 그름의 탐구>, 서광사, 1990)
- 가치에 대한 판단, 당위에 대한 판단은 사실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 (흄, <인간본성론>)
- 사실과 가치가 다르다면, 따라서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이 다르다면, 윤리학은 사실을 서술하는 작업이 아니다. 윤리학은 그것과는 다른 목적을 갖고 있다. 가령 우리 감정을 표현하는 기능을 하거나 (감정주의(emotivism)라고 할 수 있는 이 견해는 에이어, <언어, 진리, 논리>(나남, 2010)에서 전개되고 있다.) 혹은 우리 행위를 규제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해어의 <도덕의 언어>)
- 사실판단은 인지적이다. 즉 참이거나 거짓이다. 그러나 가치판단은 비인지적이다. 그것은 아마 감정이나 태도와 연관되어 있다. 이것이 비인지주의의 주장이다. 이 비인지주의가 서있는 기반에 대해서 콰인은 분석과 종합의 이분법을 공박한다. (콰인의 유명한 논문, <경험론의 두 독단>) 동시에 그는 프레임 내적 질문과 외적 질문이 인지적과 비인지적인 것으로 정형화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 사실과 가치의 이분법을 부정할 수도 있다. 사실에 이미 가치가 포함되어 있다. 혹은 사실은 가치에 의해 규정된다. 과학적 작업에서조차 합리성의 규범이 포함되어 있다. (퍼트남이 <이성, 진리, 역사>에서 이런 주장을 하고 있다.)
- 아니면 객관성과 주관성의 이분법을 공박할 수 있다. 가령 이차 성질은 인간 반응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객관적이다. (맥도웰의 논문, “Values and Secondary Quality”)
- 가치는 세계의 한 부분이다. 이것이 도덕 실재론의 주장이다. 윤리적 자연주의는 가치가 사실로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가령 리차드 브란트, 길버트 하만, 데이빗 루이스 등) 윤리적 비자연주의는 가치가 그 자체 고유한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가치를 사실로 환원시키는 것은 자연주의 오류를 범한다고 무어는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