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겨울의 가족여행은 전라북도로 택했다. 참 많은 곳들을 돌아다 봤지만 익산과 군산에는 가 본 적이 없어 이번 여행의 행선지는 익산과 군산 방면으로 가기로 하고 그 부근의 전주와 김제, 부안을 포함시켰다. 늘 그랬듯이 유적지를 중심으로 돌아보지만 그러면서도 사람들 살아가는 모습을 즐겨 보는 것이 우리 여행의 패턴이다. 우리는 익산과 군산을 둘러보고 전주로 와서 유명한 전주비빔밥을 먹고 1박한 뒤 김제와 부안으로 들어가 격포에서 다시 1박한 뒤 내변산을 둘러보고 나올 계획이다. 계획대로 될지는 미지수지만 늘 그렇듯 별 부담없이 짐을 트렁크에 잔뜩 싣고 경주를 출발한다.
경주에서 경부고속도로, 금호분기점에서 88고속도로, 함양에서 대전통영고속도로, 그리고 장수분기점에서 새로 개통한 장수익산고속도로를 타고 단숨에 익산으로 들어왔다. 이른바 경주에서 익산까지 고속도로가 완전히 개방된 것이다. 재미있게도 경주와 익산은 자매도시이다. 자! 여행은 시작된다.
경주에서 단숨에 익산에 들어가면서 우리는 국보 제289호, 왕궁리 오층석탑부터 찾아간다. 이 탑은 마한시대 도읍지로 알려진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에서 남쪽으로 2㎞쯤 떨어진 곳에 있는 석탑이다. 1기단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부가 파묻혀 있던 것을 1965년에 해체·수리하여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1965년 해체·수리하면서 탑의 1층 지붕돌 가운데와 탑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이때 발견된 고려시대 유물은 국보 제289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건립 시기는 옛 백제 영토 안에서 고려시대까지 유행하던 백제계 석탑 양식에 신라탑의 형식이 일부 어우러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아름다운 경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공사 때문에 지저분하기만 하다. 이제 백제 문화 복원사업도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보물 제46호인 동고도리 석불은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에 있다. 석불의 규모는 높이 4.27m로 사각석주(四角石柱)에 불상을 얇게 조각하였고 머리에는 방형 보관을 쓰고 있는 고려후기의불상이다. 옛날 1858년(철종9년) 이 고을에 부임한 군수 황종석(黃鍾奭)이 넘어져 있던 석불을 세우고 건립한「석불중건기」에 의하면 금마는 동서북의 3면이 모두 산으로 막혀 있는데, 남쪽만 터져 있어서 마을의 수호를 위하여 이곳에 석불을 세웠다고 한다. 이 불상은 민속적인 감각이 가미된 특이한 것으로서 금마의 수호신과 같은 느낌을 주고있다. 원중이는 이 석불을 아주 좋아했다. 아니면 오랜만에 평야에 나와서 그런지 마구 뛰어다녔다. 원중이는 원래 넓은 장소를 좋아한다.
익산 쌍릉은 사적 제87호로 익산시 석왕동 산 55번지에 있다. 규모는 약 14천㎡로 판석으로 석실과 연도를 축조한 백제 후기 횡혈식석실분이다.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준의 묘 혹은 백제 무왕의 묘라고 전하고 있으나 1917년 발굴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넓은 판석으로 석실과 연도를 만들어 부여 능산리 고분양식과 같은 백제 후기 고분으로 확인되었다. 백제 무왕의 묘라면 우리 경주와 인연이 많다. 서라벌의 청년 서동이 백제로 건너가 백제의 선화공주를 유혹해 결혼하였고 그 후에 백제의 무왕이 되어 한 시대를 전성기로 이끈 명군이 되었던 것이다. 무왕이 재위할 시에 백제의 도읍이 익산이었다.
우리는 익산의 유명한 유적지 미륵사지에 닿는다. 신라의 황룡사에 견주면 된다고나 할까? 그러나 미륵사에는 거대한 옛 석탑의 흔적이 남아있다. 경주의 황룡사탑은 사라진지 오래인데 말이다. 그게 목탑과 석탑의 차이이다. 미륵사지탑의 모양으로 새로 건축한 탑을 배경으로 선 둘째 민희.
국보 11호 미륵사지석탑은 그 반이 지금도 남아있다.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있는 이 석탑은 그 규모가 높이 6층 14.24m, 폭 11.5m의 정방형으로 목탑을 충실히 모방한 한국 석탑의 시원(始原)양식이다. 삼국유사 무왕조(武王條)에 기록된 미륵사의 창건 연기설화에 의하면 백제 30대 무왕이 왕비인 선화공주와 함께 용화산에 있는 사자사(獅子寺)에 불공드리러 가는 길에 연못가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여 선화공주가 무왕에게 청하여 사자사 주지인 지명법사의 신통력으로 하루밤 사이에 연못을 메우고 미륵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지금 미륵사지석탑은 새로 복원을 하기 위해 공사중인데 그 모습이 자못 인디아나 죤스의 고고학을 생각케 한다. 역시 돌로 된 유적은 남아있고 나무로 된 것은 거의 다 불타고 없어져 버렸으니 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태봉사에 있는 삼존석불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2호이다. 이 석불은 백제 때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삼존석불은 어린아이 같은 귀여운 느낌을 주는데 근래 호분으로 덧칠을 해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 태봉사 이전에 석불사에 가서 국보인 유명한 석불사 부처를 보았지만 촬영이 여의치 않아 놓치고 말았다. 특이한 부처였는데 기억 속에만 남아있다.
태봉사가 자리잡은 태봉산은 마한의 왕 기준이 세 아들의 태를 묻은 곳이라 하여 태봉산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유래를 지니고 있다. 태봉사는 지금으로 부터 60여 년 전에 한 스님이 산신의 현몽으로 이 삼존불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지은 절이라고 한다.
군산으로 가는 길에 상주사에 들렀다. 군산 상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이다. 606년(백제 무왕 7) 신라의 승려 혜공(惠空)이 창건하여 상주사(上住寺)라 하였다고 하나 당시 이 지역은 백제 영토였으므로 확실하지는 않다. 1362년(고려 공민왕 11) 혜근(惠勤)이 중창하며 현재 이름으로 바꿨으며 고려말 공민왕이 이 절을 찾아 국가의 안녕을 기원했다고 전한다. 1641년(조선 인조 19) 취계(鷲溪)가 중수하고, 1762년(영조 38)에는 학봉(鶴峯)이 중수하였다. 오늘날에는 특히 나한 기도 도량으로 유명한데 그 유래가 전한다.
1834년(순조 34) 임피현(臨陂縣) 수령 민치록(閔致祿)이 꿈을 꾸기를 하얀 갓을 쓴 세 사람이 나타나 자신들을 높은 곳으로 안내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민치록은 세 번이나 같은 꿈을 꾸자 관리들에게 현에 특별한 일이 있으면 보고하라고 하였다. 며칠 뒤 서포(西浦)에 십육나한을 실은 배가 한 척 닿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에 민치록은 십육나한을 높은 곳에 있는 이 절에 모셨고 이후 십육나한은 많은 영험을 보였다고 한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나한전, 관음전, 범종각, 요사채 등이 있다. 이 중 대웅전은 1973년 6월 23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된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한 삼존불과 영산회상도, 신중, 지장보살, 독성, 칠성, 산신 등의 탱화가 모셔져 있다. 삼존불 위 닫집에는 용두가 조각되어 있는데, 본래는 2기였으나 1기는 일제 때 일본인이 몰래 가져갔다고 한다. 용마루 위에는 청기와가 2개 얹혀 있으며, 상단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11개의 용두가 놓여 있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제 37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조선 중기의 건축 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정면 처마 밑 쇠서 위부분에 여의주를 문 용머리를 나란히 배치한 점이 특이하다.
나는 군산하고는 인연이 멀다. 아는 사람도 없고 가 본 적도 없다. 단 야구를 좋아하다 보니 옛날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를 떠 올린다. 최관수 감독이 이끌었던 군산상고는 촌 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렇게 명문팀으로 올랐는지 신화에 가깝다. 송상복, 김봉연, 김일권, 김준환, 김종윤, 양기탁, 나창기, 김용남, 김성한, 장호익, 조계현 등 군산상고의 명선수들은 부지기수이다.
위의 사진은 금강하구둑이다. 군산에 있는 금강하구둑은 전라북도 장수군 소백산맥 서사면에서 발원하여 충청북도 남서부를 거쳐 충청남도·전라북도의 도계를 이루면서 군산만(群山灣)으로 흘러드는 총길이 401㎞의 금강 하구를 막아 건설한 둑이다. 방조제의 총길이는 1,841m로 1990년에 완공했으며, 연간 3억 6천만 톤의 담수를 공급한다. 전라북도와 충청남도 일원에 농업용수와 공업용수를 공급하고, 금강 주변 지역의 홍수를 조절한다. 하구둑에 차를 세우고 서니 한쪽은 금강물이 내려와 막힌 민물이고 한쪽은 바닷물이 흘러들어온 해수여서 묘한 지역에 왔다는 느낌이 있다. 날씨는 매우 춥지만 한참 금강의 물을 내려보다가 다시 군산으로 들어온다.
군산시내에 있는 월명공원에 올랐다. 원중이가 너무 추워해 오래 있지는 못했지만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군산의 경관은 매우 아름다웠다.
익산과 군산을 둘러보고는 저녁에 전주로 들어왔다. 원래의 계획은 전주시내에 있는 성미당에서 그 유명한 전주비빔밥을 먹으려고 했지만 내일이 구정이라 금방 영업을 마쳤단다. 전부비빔밥은 전주의 명물인데 밥은 고기육수로 밥을 짓고 육회와 특이한 소스가 가미되는 비빔밥인데 그 유명세는 한국사람이라면 모두가 다 알 정도이다.
비빔밥을 먹지 못하는 아쉬움을 뒤로 한채 주변의 콩나물국밥으로 유명한 콩나루집에 들렀다. 전주는 비빔밥과 함께 콩나물국밥도 유명하지만 나는 콩나물국밥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릴 적 가난했던 탓에 밥국(우거지 넣어서 끓인 국밥)을 너무 많이 먹어서 질린 탓이다. 그래도 국밥의 육수 맛은 좋았다. 금방 배가 꺼져 밤에 배가 고팠지만.......
전주 시내 아중리에 있는 어느 모텔에 들었더니 그 시설이 호텔을 빰친다. 서울 충무로의 3성호텔을 훨씬 능가하고 내가 보기에 경주 불국사 5성호텔 코오롱호텔의 객실보다 훨씬 낫다. 이 침실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고 거실과 여러 시설들이 장난이 아니다. 우리는 전주에서의 하루밤을 편하게 쉬다 간다. 오늘 비빔밥을 먹지 못해 자금을 아꼈는데 그 덕분에 좋은 숙박지에서 자게 된다.
전주에서 1박을 한 뒤 우리는 남쪽으로 김제로 넘어간다. 전주에서 남쪽으로 보이는 유명한 모악산을 넘어가면 바로 김제이다. 그러니 유명한 금산사는 김제인 셈이다. 모악산 재를 넘어면서 금산사에 닿기 전 귀신사로 들어간다. 귀신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676년에 의상(義湘)이 창건하고 신라 말 도윤(道允)이 중창한 뒤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원명(圓明)국사가 중창하였으며, 임진왜란의 전화로 폐허가 된 것을 1873년(고종 10) 춘봉(春峯)이 중창하였다고 한다.
현존하는 건물은 보물 제826호로 지정된 대적광전(大寂光殿)을 비롯하여 명부전, 산신각, 요사체 등이 있고, 주요문화재로 귀신사3층석탑(지방유형문화재 62)·귀신사부도(지방유형문화재 63)·귀신사석수(지방유형문화재 64) 등이 있다. 최치원(崔致遠)은 이곳에서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금산사이다. 이번 여행의 특징 중의 하나가 명찰들을 많이 찾아가는데 그만큼 호남지방에는 대단한 명찰들이 많다는 얘기이다. 어제 익산 미륵사를 비롯하여, 오늘 김제 금산사, 내일 부안의 개암사, 내소사 등이 그것이다.
금산사에서도 유명한 미륵전은 1962년 국보 제62호로 지정되었다. 1·2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 3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다포(多包)집이다. 겉모양이 3층으로 된 한국의 유일한 법당으로 내부는 통층(通層)이다.
기단(基壇)은 양쪽에 자연석을 초석으로 앉힌 돌계단이 있다. 두리기둥은 매우 굵고 기둥머리 위에 평방(平枋)을 올렸으며, 머리끝 부분과 기둥 사이에 공간포(空間包)를 놓았다. 가구(架構) 방식은 1층은 고주(高柱) 4개와 20개의 기둥을 주위에 세워 고주와 이 기둥들을 커다란 퇴보로 연결하였다. 2층은 이 퇴보 위에 가장자리 기?藍? 세워 그 안쪽 고주를 퇴보로 연결하였다. 3층은 몇 토막의 나무를 이어서 만든 고주를 그대로 우주를 삼아 그 위에 팔작지붕을 올렸다. 이 특수한 가구 방식은 목조 탑파(塔婆)의 구조에서 볼 수 있는데, 심주(心柱) 각층 기둥이 연결되는 방식을 본떠서 한 개의 심주 대신에 네 개의 고주가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미륵전 뒤 배경에 등장한 산이 유명한 모악산이다. 계룡산과 함께 한국의 신령한 산으로 종교가 난무했던 지역이다. 실제로 수 많은 신흥종교들이 이 산에서 나왔다니 그 중 하나가 증산도, 대순진리교 등이다.
10여년 전에 이 곳에 온 적이 있다. 그때는 아이들을 금산사에 남겨두고 나 혼자 모악산 등반을 했었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온 것이다. 호남의 유명한 사찰 금산사는 599년(백제 법왕 1)에 왕의 자복(自福)사찰로 세워진 것이라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지금까지 전하는 바는 진표(眞表)가 762년(신라 경덕왕 21)부터 766년(신라 혜공왕 2)까지 4년에 걸쳐 중건(重建)하였으며, 1069년(문종 23) 혜덕왕사(慧德王師)가 대가람(大伽藍)으로 재청하고, 그 남쪽에 광교원(廣敎院)이라는 대사구(大寺區)를 증설하여 창건 이래 가장 큰 규모의 대도량(大道場)이 되었다.
1598년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미륵전(彌勒殿)·대공전(大恭殿)·광교원(廣敎院) 등과 40여 개소에 달하는 산내 암자(庵子)가 소실되었다. 그러나 1601년(선조 34) 수문(守文)이 재건의 역사(役事)를 벌여 1635년(인조 13)에 낙성을 보았다. 고종(高宗) 때에 이르러 미륵전·대장전(大藏殿)·대적광전(大寂光殿) 등을 보수하고, 1934년에 다시 대적광전·금강문(金剛門)·미륵전 등을 중수하였다.
금산사와 인연이 있는 고승(高僧)은 혜덕왕사(慧德王師) 이외에도 도생승통(道生僧統)·원명(圓明)·진묵(震默)·소요(逍遙)·남악(南嶽) 등 대사가 거쳐 갔거나 죽거나 하였다.
주요 건물로는 미륵전(국보 62)·대적광전(보물 476)·대장전(보물 827)·명부전(冥府殿)·나한전(羅漢殿)·일주문(一柱門),금강문(金剛門)·보제루(普濟樓) 등과, 방등계단(方等戒壇)·5층석탑(보물 215)·6각다층석탑(보물 27)·석련대(石蓮臺:보물 23)·석종(石鐘:보물 26)·당간지주(幢竿支柱:보물 28)·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보물 24) 등이 있다.
증
모악산에 있는 증산대법교 터.
증산도(甑山道)는 강증산을 교조로 하는 증산계열 종교의 종파이다. 강일순을 만물의 주재자인 상제로, 증산의 아내인 고판례를 정통 후계자인 수부(首婦)로 모신다. 1975년에 현재의 종도사인 운산 안세찬과 종정이자 아들인 경전 안중건이 중심이 되어 대전에서 창립되었다.
체계적인 교리를 중심으로 다양한 서적을 출간하고, 태을주 수행과 역사에 대한 관심을 전면에 내세워 대학가에서 널리 전파되었다. 핵심 교리는 후천개벽(後天開闢), 원시반본(原始返本), 해원(解寃), 보은(報恩), 상생(相生)이다. 다른 신흥종교에 비하여 젊은 계층의 신자의 비율이 높으며, 대학교수나 의사·한의사 등의 전문직 종사자의 비율도 높은 것이 특징이다.
흔히 대순진리회와 혼동되지만 계열이 다르다. 보천교 사람이던 조철제가 태극도를 세우고, 박한경 도전이 태극도에서 나와 대순진리회를 세웠다.
고판례를 정통성의 근간으로 보는 시각은 증산교에서부터 시작하며, 증산교는 청음 이상호가 세웠다. 월곡 차경석은 강증산의 말년 제자로 고판례의 이종사촌이기도했다. 고판례가 증산 사후 2년 뒤 기절하다가 일어나더니 증산의 혼련을 보았다 말하며 종교화한다. 이에 증산의 옛 제자 등이 모여 종교화를 시작하였으나, 차경석은 놀라운 카리스마로 무리를 장악하고 보천교를 세웠다. 이에 고판례는 전라도 김제로 빠져나갔다. 보천교는 일제 시대 최강의 민족종교였다.
보천교의 고위 간부였던 청음 이상호는 보천교주 차경석과 사이가 벌어지자 빠져나와 동화교를 세웠다. 후에 증산교란 이름을 선택, 현재에 이른다. 이상호는 차경석과 달리 강증산의 맥을 이었다고 할 만한 것이 없었으므로, 정통성을 위해 고판례를 모시며, 이에 증산교는 정통성을 고판례에게서 찾는다. (다른 계열에서는 고판례에게서 찾지 않는다.) 증산도 또한 증산교의 중요 토대를 그대로 받았다.
벽골제의 제방둑이다. 벽골제는 제천의 의림지, 밀양의 수산제와 함께 삼한시대의 저수지로 알려져 있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저수지로서 오늘날 사적 111호로 지정되어 있다. 김제 벽골제는 한국 최고, 최대의 저수지 둑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330년(백제 비류왕27)에 증축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후 고려, 조선 시대에 수리하였다고 한다.
1975년 발굴, 조사에 따르면, 제방 높이는 북단이 4.3m, 남단이 3.3m이고, 수문 구조는 높이 5.5m의 2개 석주를 4.2m간격으로 세웠으며, 서로 마주보는 안쪽 면에 너비 20cm, 깊이 12cm 요구를 만들고 목제 둑판을 삽입하여 수량을 조절하였다. 석축은 약 6m이며 가장 낮은 곳이 1.1m이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이 있다는 김제와 만경의 김만평야의 규모 만큼이나 큰 저수지가 필요했겠지.
부안에 있는 동문안 당산의 인상이 재미있다. 구멍가게와 주유소 등 주변 환경 속에 하도 아무렇지도 않게 섞여 있어서 차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은 꽤 신경으르 쓰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나 역시 그냥 지나치다가 다시 돌아와 길거리에서 당산을 만난다. 당산이란 마을의 수호신이 깃들여 살고 있는 것으로 믿어지는 일정한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로 오래된 나무가 되는 경우가 많지만 솟대, 돌기둥, 장승, 마을 뒤의 숲이 신체가 되기도 하며 흔하게는 이 모든 요소들이 두세 가지씩 복합되어 있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 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도다.
조선시대 이 지역의 유명한 여류 문인인 이매창의 시비이다. 매창은 조선시대 황진이와 쌍벽을 이루던 유명한 기생이기도 하다.
매창은 조선 선조6년에 부안현 아전인 이양종의 서녀로 태어났다. 매창은 호이고 이름은 계회, 향금이라고도 했다. 그녀는 중인 신분인 아전의 서녀로 태어나 기생이 되었으나 얼굴이 예쁘거나 교태가 흐르는 타입은 아니었고 시와 글, 노래와 거문고 솜씨, 그윽한 성품으로 사람을 끌던 여성이었다. 당시 매창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그녀를 만나러 부안을 찾았다. 그와 사귀며 정을 나누던 사람 가운데는 임진란 때 의병장 시인 유희경이 있고 문인 정치가였던 허균도 있었다. 허균은 아예 이곳에 눌러 살면서 [홍길동전]을 짓기도 했다고 한다.
그녀는 39세에 다음 시와 같이 가난과 병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다.
독수공방 외로이 병에 찌든 이 몸
굶고 떨며 사십 년 세월 길게도 살았네
묻노니 사람살이가 얼마나 되는가
어느 날도 울지 않은 적 없네.
부안에는 여러 곳에 고인돌이 있는데, 이 중에서 13기의 고인돌이 현재는 10기의 고인돌만 남아 있으며, 구암리 고인돌은 부안의 대표적 고인돌이다. 이 곳 고인돌들은 이른바 남방식으로서 자연암석으로 덮개돌을 하고, 몇 개의 굄돌로 괴었다. 구암리 고인돌은 제10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 형태가 남방식으로 청동기시대의 것들이다. 지금은 동네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어 동네 놀이터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전북 부안군 상서면에 있는 개암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의 말사이다.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변산의 절경에 매료된다. 사찰의 위치나 짜임새도 그렇지만 뒤에 배경으로 하고 있는 울금바위를 위시한 울금산성이 인상적이다. 개암사는 634년 백제의 묘련이 창건하고 삼국통일 후 원효와 의상이 이곳에 머물면서 676년에 중수하였다. 1314년(고려 충숙왕 1년)에는 원감국사가 지금의 자리에 중창하여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1783년(정조 7년) 승담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보물 292호인 대웅전이 유명하다.
개암사의 마당에 선 원중이의 손모양이 재미있다. 손바닥을 저렇게 정확하게 대칭시키는 것도 자폐증의 일종인가? 여튼 추운 날씨에도 원중이의 여행은 마냥 즐겁기만 하다. 아무런 계산과 의도가 없으니 그의 표정과 눈동자는 순수 그 자체이다. 누가 그들을 욕하랴?
유천리 도요지는 지금은 마을의 밭이 되어 버렸다. 부안 일대에 흩어져 있는 고려청자 가마터 중에서도 유천리 일대의 가마들은 가장 뛰어난 수준의 순청자와 상감청자를 구워내던 곳이다. 이 부근에서는 순청자, 상감청자의 파편이 주로 출토되지만 백자, 상감백자, 진사백자 등도 약간씩 출토되며 특히 유천리 도요지 사적비가 있는 동쪽 밭 부근의 가마터들에서는 가장 우수한 청자 파편들이 수습되었다. 유천리 도요지는 흔적 뿐이지만 사적 69호로 지정되어져 사적비를 남기고 있다.
10여년 전에 찾았던 채석강과는 많이 다르게 보이는데 이유는 현재가 밀물 시간이기 때문에 채석강의 아름다운 해변 지층절벽이 물에 많이 잠겨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 때에도 규희, 민희와 같이 왔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채석강은 76년에 전라북도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었으며 그 면적은 12만 7372㎡이다.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반도 맨 서쪽, 격포항 오른쪽 닭이봉 밑에 있다. 옛 수군(水軍)의 근거지이며 조선시대에는 전라우수영(全羅右水營) 관하의 격포진(格浦鎭)이 있던 곳이다.
지형은 선캄브리아대의 화강암, 편마암을 기저층으로 한 중생대 백악기의 지층이다. 바닷물에 침식되어 퇴적한 절벽이 마치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하다. 주변의 백사장, 맑은 물과 어울려 풍치가 더할 나위 없다. 채석강이라는 이름은 중국 당의 이태백이 배를 타고 술을 마시다가 강물에 뜬 달을 잡으려다 빠져 죽었다는 채석강과 흡사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여름철에는 해수욕을 즐기기 좋고 빼어난 경관 때문에 사진 촬영이나 영화 촬영도 자주 이루어진다. 채석강에서 해수욕장 건너 백사장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붉은 암벽으로 이루어진 적벽강이 있다.
채석강 해변에서 포즈를 취한 두 딸. 그 옛날에 같이 왔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딸들은 지금은 어느듯 어른이 되었다. 날씨는 무척 추워 겨울의 해변은 몸을 떨게 한다. 자! 이 격포에서 하루밤을 잘까? 아니면 내소가 근처의 곰소항으로 나아갈까? 고민이다.
내소사로 들어가는 입구인 전나무숲 길. 원중이의 눈동자는 역시 순수 그 자체다. 아무런 생각이 없으니 순수할 수 밖에.....지금 어떻게 할까? 하는 수 노림이 머리 속에 전혀 없으니......계절에 따라 이 전나무숲 길은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하겠지만 지금은 추워서 원중이가 제대로 내소사까지 들어갈까 하는 걱정 뿐이다.
내소사....변산반도에서는 가장 유명한 곳이겠지. 여기서 내변산 등반이 시작되는 들머리이고 유명한 직소폭포도 여기서 들어간다.
급기야 원중이는 힘이 드는지 나에게로 달려와 업어달라고 한다. 9살이고 살이 쪄 무겁지만 업어주지 않을 수가 없다. 무게가 40kg가 넘으니 무거울 수 밖에.....원중이는 지금 업고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원중이는 내가 평생 업고 가야한다. 내가 지은 業에 대한 報가 바로 원중이다. 나의 허물과 잘못으로 연유한 것이 원중이일 것이다. 그가 나의 업보이니 내가 평생 업고 가야 한다. 비단 내소사 뿐이랴!
드디어 내소사에 들어왔다. 예상대로 그 경관은 최고이다. 어디에 이런 경관이 있을까? 뒤로는 다 나오지는 않았지만 변산의 아름다운 풍광이 배치되고 절의 짜임새 또한 아름답기만 하다. 추운 날씨에도 가족은 마냥 즐겁게 촬영을 하고 있다.
대웅전 앞에 선 원중이와 그 뒤의 어느 아이의 대치된 포즈가 재미있다. 물론 원중이가 정상이 아니다. 대웅전에 올랐으니 안을 들여다 봐야 할 것이 아닌가? 두 아이는 지금 결투를 하려는 걸까? 완전히 [백주의 결투]이다. Duel in the Sun 이었는가?
부안의 유명한 백합죽이다. 백합조개를 넣어서 끓인 백합죽은 별미이다.
같이 유명한 바지락칼국수. 경상도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스타일인데 영덕의 비학산칼국수와 조금 비슷하기는 하다만 면이 다르다. 부안은 바지락 산지인 고로 바지락을 응용한 음식들이 많은 것 같다. 내일 새벽에는 내변산으로 들어간다. 등반을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모텔에 남겨놓고 내변산에 올랐다가 산을 넘어 서해로 나갈 작정이다. 거기서 다시 곰소로 돌아올 것이다. 그것으로 이번 여행은 끝이 난다.
첫댓글 말로만 듣던 내소사를 사진으로 봤네요... 멋진 여행사진, 음식과함께 잘보았습니다...
잘 계시죠? 보지 못해도 늘 근처에 있다는 생각이......
원중아 안녕,언제 한번 손잡고 인사해재이~....../금산사,채석강.내소사 ,전나무길,고인돌, 다시한번 기억을 더듬어 보았습니다.전나무길에서 소녀인양 착각하고 폼잡고 사진을 찍었는데,50대 아줌씨로 엉엉 울어버렸네요,ㅎㅎ.
안녕하세요! 인사가 늦었습니다. 부안의 추억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선배님 구경 잘했읍니다.... 가족과 늘함께 하시는 여행이 너무나 부럽읍니다....새해인사가 늦었읍니다. 늘 건강하시고 웃으시는 매일 되셔요~~^^
별 일 없습니까? 멀리 있어도 늘 가까이 있는 것만 같습니다. 늘 관심을 가져 주시니.....
지난 설 밑에, 기아자동차에서 신차로 발표된 ' 모하비 설귀성 무료 시승행사 '에 당첨되어, 정말 가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다음에 갈 때, 선배님 다녀 오신 길을 더듬어 다녀 오겠습니다.
친진씨가 한 말인데 무슨 관련이 있는지....같은 기수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