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일을 맞이하면서 꼭 기억해야할 두분의 이야기 삼상17:41-47 시127:1
북한이 오늘 동해상을 향해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올해 18번째 무력시위다. 군 당국은 현재 북한이 오늘 발사한 탄도미사일의 비행거리와 고도·속도 등 세부 제원을 분석 중이다. 지난달 10일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론 세 번째 무력도발이다. 북한은 현재 제7차 핵실험도 준비 중인 상황이다. 북한은 김일성이 죽으면서부터는 김일성이 태어난 4.15일을 태양절이라고 하여 민속명절로 정했다. 그날은 인민들이 먹고 쉬는 날로 기억하는 날이니 기다려지는 날이다.
그런데 우리 남한에서도 북한의 태양절 못지 않은 자살하여 생을 마감한 노무현대통령의 제삿날이면 성대히 치루어지는 것을 본다.
지난 5월 23일 오후 2시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서 13주기 노대통령 추도식이 열렸는데 노무현 정부에서 국무조정실장,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국무총리를 지낸 한덕수 총리를 비롯하여 문 전 대통령내외와 민주당 인사들의 참석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해찬 전 대표와 한명숙 전 총리, 문희상 전 국회의장 등 당 원로 인사들을 비롯하여 윤호중·박지현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을 비롯해 박홍근 원내대표, 이재명 총괄선대위원장 등 지도부와 당 소속 의원들이 대거 집결했다. 이외에도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이은주 정의당 원내대표가 정당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였고 여권 핵심 인사로는 국민의힘 권성동 원내대표가 정부에서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을 비롯하여 관람객 등 1만 5000명(경찰추산)이 참석했다고 한다. 이번 노 전 대통령 기일을 맞아 문 전 대통령과 이 재명을 지키기 위해 결집해 달라'는 메시지를 지지자들에게 보낸 셈이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대로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들 중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는 것은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 솔직하고 꾸밈없는 대통령으로 보여졌는데 소위 박연차게이트에 연루되었기 때문에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박연차 게이트 사건은 박연차가 여야를 망라하고 수많은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뿌린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노건평이 연루되면서 동생인 노무현 전 대통령까지 검찰에 출두하게 되었고, 결국 수사 도중 자살이란 비극적인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박연차 게이트' 수사는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이 구속되면서 정치권 로비설을 집중 신문하면서 박 전 회장의 돈 500만달러가 노 전 대통령의 조카사위 연철호씨를 통해 아들 건호씨에게 건네진 정황을 포착한 데 이어 노 전 대통령은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올려 "집에서(권양숙 여사) 박 회장에게서 100만달러를 받아 채무변제에 썼다"고 노 전 대통령 측에서 돈을 받은 것을 실토한 만큼 검찰로서는 실제 돈을 받은 당사자가 노 전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밝혀내는 데 주력했다. 이후 검찰은 연철호씨를 체포한 데 이어 권 여사와 건호씨를 소환조사하고 정 전 비서관을 구속하는 등 수사를 가속화하는 중에 노무현전 대통령은 자살이라는 승부수로 수사종결로 마무리를 지었던 것이 노무현대통령 자살사건의 전부이다. 그런데도 금년도 노무현대통령 제삿날에 이렇게 많은 인사들이 찾아오다니 이것이 제정신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뇌물 받은 것이 드러나면서 자살한 대통령의 집과 묘소가 지금은 민주당의 성지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노대통령 유서장에는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고 하였건만 유서와는 정반대로 성지가 되었고 이제는 우상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노대통령은 대통령신분을 이용하여 뇌물을 받으면서 부정을 저지른 범법자임에 틀림없는데 제사날이 올적마다 봉하마을이 들썩이는 것은 제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해가 될 수 없는 일이다.
오늘은 6월 첫주일로 현충일을 맞이할 적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혈들을 기념하는 날인데 정말 그분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내가 지금 존재할 수 있었을까 하는 마음과 만약 그분들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역사속에서 사라졌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벌써 6.25한국전쟁이 일어난지도 어느 덧 72년을 맞이하는데 전쟁은 종료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진행형으로 지금까지 휴전을 하고 있는 것이 어느새 69년이나 되었다. 그러나 세월은 흘러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지도 72년이 되다보니 전쟁을 한 사람들은 대부분 죽었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날의 참담함을 모르고 그저 흘러간 이야기로 생각하는 것 같다. 더욱이 문재인 정부들어서는 몇개의 사단이 해체되고 휴전선 GP초소가 철거되고 휴전선 둘레길이 개방되면서 마치 통일이 곧 올 것처럼 착각을 하는데 분명한 것은 북한식으로 적화통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현실앞에 신앙인들은 국가의 위기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정신차리지 않으면 제2의 6.25는 언제든지 다시 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6.25전쟁이 났을 때 김일성 나이가 38세인데 그의 손자 김정은의 나이가 올해 39세이니 뭔가 일이 벌어질 것 같기도 하지만 나이야 비슷하더라도 더욱 확실한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지도자의 거짓말로 인하여 백성들의 안보불감증이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으며 국민들은 통일이라는 말에 또 한번 속아서는 안된다. 72년 전에도 안보불감에 빠져 있다가 전쟁난지 삼일만에 서울이 북한에 점령당함으로서 세계전쟁사중 유례없는 전쟁사를 기록하였는데 이나라는 핵무기도 없고 미사일도 별로고 땅굴을 부인하는 상황에서 또 다시 제 2의 6.25전쟁이 터진다면 과거와는 비교 되지 않을 정도로 훨씬 더 무자비하고 더 혹독한 피해가 오리라고 생각한다. 우리 대한민국이 어떻게 세워진 나라인지 한 나라의 역사는 그 나라의 고대사나 중세사도 근세사도 중요 하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는 대한민국이라는 현대사 만금 중요한 역사는 없다고 생각한다. 역사하면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이셨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명언인 '역사를 잊은 민족은 재생 할 수 없다.'라는 명언으로 하여금 우리에게는 이런 역사관이 절실히 느껴지는 때가 지금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패망으로 2차 대전종료와 함께 갑자기 찾아온 해방과 함께 1948년 8월 15날 대한민국의 정부수립이 시작된 것이 대한민국의 역사 시작이다.1948년에 대한민국이 수립된 것은 우연히 세워진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하에 세워진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우리나라 애국가에는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부른다. 대한민국은 시작자체가 하나님의 함께하심이었다. 시간이 없어 자세히 말은 못하지만 해방한 것에 대해 우리 힘은 단 1%도 안된다는 것이니 우리의 해방은 하나님의 주신 선물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시간 이것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해방 후 대한민국이 세워진 후 2년도 안되어 일어났던 6.25한국전쟁에서 거의 다 죽었던 대한민국을 다시 살려주신 것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참혹한 전화를 입은 인류는 더 이상 인류가 전쟁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1945년 10월 24일 가맹국 51개국으로 발족한 국제연합 UN이 창설 되었다. 만약 UN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세상에 다시 존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1949년의 경우 통화량 팽창으로 물가가 2배로 뛰면서 경제적 상황이 불안한 가운데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제1대 국회의원 선거가 최초로 치러졌다. 그 당시 국회의원 임기는 2년 이었지만 이때 헌법을 제정하였기에 제헌국회의원이라고 한다. 제1대 총선으로 뽑힌 국회의원은 200명이 간접적으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8월15일 대한민국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했다.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한 후 처음으로 대통령을 포함한 국회가 어떻게 열렸는가를 당시 속기록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단군이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처음열리는 국회에서 대통령을 포함하여 전 국회의원이 기도하면서 제헌국회가 시작하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왜 우리나라는 교회가 이렇게 많은 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그에 대한 설명을 잠시 들어보시라. 대한민국이 탄생하기 위해 1948년 5월 10일 역사적인 총선을 통해 국회의원들이 뽑혔는데 거의 기독교인들이었다. 우리나라 제헌국회 속기록 첫 장을 열면 기도로 국회를 개원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48년 5월 30일 대통령 이승만은 이윤영 목사에게 기도로 국회를 열 것을 주문합니다.‘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하나님께 기도를 올려 주시기를 바랍니다.’고 대통령이 말하자 이윤영의원은 기도문을 다음과 같이 읽었습니다.‘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사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 성시하신 것으로 저희들은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이 기도문이 국회가 처음 열렸을 때 하나님께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이 기도를 한 후 국회에서 처음으로 헌법과 국정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리라 생각되는데 어떻게 당시 기독교인이 전 국민의 5%도 안되는 때에 이런 일이 가능했었겠는가?
1.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 역사적 배경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과 소련이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념대결과 패권다툼이 벌어졌는데 그 현장이 바로 대한민국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가 임박한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흑해 연안의 휴양도시 얄타에서 영국, 미국, 소련의 수뇌부가 모여 2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논의한 얄타회담 결과로 한반도가 38선을 경계로 미소 양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는 계기를 마련한 회담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1945년 8월15일 우리나라는 일본 식민지로부터 해방을 맞이하였지만 기쁨도 잠시였고 얄타회담에 의해 38선을 기준으로 남한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은 1948년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가 출범하였는데 문제는 북한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자리를 잡았지만 한국은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이념논쟁이 각 진영에서 전염되듯이 일어났다. 남한에서 공산주의 발생은 1925년 박헌영이가 창당한 조선공산당이 있었는데 해방이 된 후 1946년 박헌영은 조선인민당·조선공산당·남조선신민당 3당이 합동하여 결성한 정당을 남조선노동당이라고 하는데 보통 남노당이 탄생하였다. 해방되기전 까지는 조선공산당에 가입하는 것이 애국운동이었고 반일운동이었으므로 일반사람들이 남로당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행방이후 적어도 80% 이상이 남노당에 가입하였을 터인데 이승만 박사가 해방후 귀국했을 때는 여윤형, 김구 박헌영 등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다 남로당에 동조하던 때이므로 이승만 박사 조만식 등 혼자서 이들과 싸우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을 것이다.1946년 9월4일 박헌영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남로당 정당을 구성하면서 신생국가인 대한민국을 흔들어 댔다. 총선전에 발표한 남로당은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무상몰수·무상분배의 토지개혁, 주요산업의 국유화를 강령으로 내세우면서 '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폭동사건'을 주도해 나갔다. 전쟁나기 까지 정치는 좌·우 이념대결로 국론이 분열되었고 사회는 극도로 혼란스러웠으며 더욱이 국방은 1949년 미군 철수로 무방비 상태였다. 그러면 건국 후 6.25 전쟁이 날 때 까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불안하였는가를 다음 사건들을 통해 알 수 있다.
(1) 남로당이 주도한 제주 4.3사건
정부가 수립되기 직전인 1948년 4월3일에 제주도에서 이른바 4·3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1947년 3·1절 기념대회에 시가행진을 구경하던 군중들에게 경찰이 총을 발사함으로써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으로 인해 민심이 악화된 것을 이용해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정부 활동을 전개하면서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민·관 총파업을 유도했다. 대규모 파업 주모자 검거작전을 벌여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되면서 이런 민심을 대변하듯이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총성과 함께 한라산 중허리에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 타오르면서 350명의 무장대는 12개의 경찰지서와 시청 등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했고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면서 전국에서 제주도가 유일하게 5·10 선거를 거부한 지역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4·3사건은 남로당 제주도당이 지령하고 남로당 전남도당과 남로당 중앙당이 지원한 사건으로 희생자수는 대략 20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오늘날 와서 제주 4.3사건을 보상해준다고 하는데 공산당 사주를 받아 국가반역한 자들에게도 보상을 한다는 것인가? 문재인은 제주 4.3사건 추모사에서 남로당의 반란폭동을 진압한 군경을 국가폭력집단으로 매도함으로써 대한민국의 헌법과 정체성을 부정한 자가 아니었던가? 문재인 대통령은 역사를 왜곡하기 위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과 제주 4.3사건에 대해 유별나게 집착한 나머지 2001년 헌법재판소에서 재판관 전원일치로 제주 4.3사건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반대하고 5.10총선거를 방해할 목적으로 조선인민공화국 건설을 지지하는 공산무장세력이 주도한 반란사건이라고 판결을 내린 사건이었음에도 이를 뒤집기 위하여 지난 4.3사건 추모사에서 그 마각을 드러내었다고 볼 수 있다.
(2) 남로당이 주도한 여순반란사건
1948년 정부수립 직후인 10월에는 전남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좌익계 장병들이 갓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1948년 10월 19일 밤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의 남로당이 사주하던 좌익계 장병들이 주동한 사건이다. 이들은 무장폭동을 일으켜 전남 동부지역을 순식간에 장악g 한 후 지리산과 백운산 등 험준한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한반도 남부지역의 이른바 빨치산투쟁을 선도하였다. 군대내에서 공산주의에 빠진 좌익계 사병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당시 우리 사회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던 가를 단편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여순반란사건이다. 이처럼 일련의 사건들이 남로당을 중심으로 일어나면서 민족의 최대 비극으로 알려진 6.25전쟁이 일어났는데 이는 1948.4·3제주사건을 시작으로 1948.10.19.여순사건을 징검다리 같은 연결선상에서 1950. 6·25 한국전쟁은 발발했던 것이다.
2. 6.25 한국전쟁은 김일성과 박헌영의 합작품이다
올해는 한국전쟁 72돌이다. 한번쯤 정리하고 넘어갈 인물이 박헌영이다. 그는 조선의 레닌으로 음미되고 비운의 혁명가로 역사가들은 지칭하기도 한다. 해방되기 전까지 그가 얼마나 공산주의를 위해 일생을 바쳤는가를 한국의 현대사는 증명하고 있다. 8.15 해방과 더불어 1946년에는 남로당을 조직하였고 남한의 지식인 거의가 그가 조직한 남로당에 가입하였다. 해방 후 불안한 시대에 그는 제주 4.3사건을 일으킨 배후자였고 여순반란사건을 일으킨 배후자였고 마지막은 6.25한국전쟁을 일으킨 공모자였다. 박헌영의 경력은 1925년에는 조선공산당 창립의 코미테른이 인정하는 간판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이말은 띠 동갑인 김일성보다 12살 위인 박헌영의 과거인력이 훨씬 앞선다는 점이다. 해방후 북한 권력 1,2인자는 김일성과 박헌영이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6.25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소련의 스탈린을 만났을 때에도 중공의 모택동을 만났을 때도 둘은 항상 같이 동행했다는 점이다. 두 사람의 의견은 언제나 같았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은 둘 중의 누구도 반대한 것이 아니라 두사람이 공동으로 일으킨 것이다.
(1) 6.25 한국전쟁 발발을 예상 못한 남한 정부
소련 수상 흐루쇼프 회고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남침공격을 위한 완벽한 계획서를 가지고 1949년 3월 소련을 방문해 스탈린을 만났다. 그리고 1950년 1월 김일성은 두번째로 모스크바를 방문해 군지원 요청과 남침 승인에 대한 확답을 받는다. 전쟁 발발하기 1950년 6월 10일 북한은 느닷없이 자신들이 억류하던 민족지도자 조만식 선생 부자와 그해 남한에서 체포된 거물간첩들을 맞교환하자는 평화공세를 폈다. 우리는 조만식 선생과 북한 간첩을 맞교환을 긍정 검토했으나 북한은 열흘간 시간을 끌다 무산시켰다. 인민군은 6월 12일부터 훈련을 가장해 38선 인근으로 이동하면서 6월 23일까지 모든 준비를 마쳤고 24일에는 해병대 병력을 실은 인민군 수송선이 동해안으로 출항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남한정부에 평화통일안을 제의하며 연막작전을 펼쳤다. 한편 남한은 북한의 평화공세에도 불구하고 6월11일부터 6월23일 까지 비상경계령을 내렸다가 북한 김일성이가 남침 준비를 완료하고 전투병력을 38선 부근에 대기하도록 준비완료한 후 전쟁발발하기 이틀 전 이런 위기상황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국방부는 오히려 6월 24일 자정을 기해 비상경계령 해제와 더불어 전 장병의 2분의 1에게 휴가를 주어 외출과 외박을 시켰으니 전방 부대 장병 절반 이상이 텅 비었던 상태에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은 선전포고 없이 38선을 넘어 북한군 포병대가 일제 포격을 개시했다. 11시경에 북한은 “남측이 우리의 평화제안을 거부하고 우리를 공격하여 아군(인민군)이 반격에 나섰다.”라는 거짓방송을 내보낸다. 1953년 7월 27일 까지 3년 1개월간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전쟁은 이렇게 막이 올랐다.
(2) 6.25전쟁의 경과우리의 든든한 미군이 6.25전쟁의 발발 소식을 듣고 한국으로 달려온 부대가 최초로 전투를 벌인 날은 7월 5일이었다. 유엔 결의에 따라 급파된 미 제24사단 21연대의 제1대대가 1개 포병대와 함께 오산 남방에서 최초로 북한 인민군과 싸웠으나 33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들어오는 적에 포위되어 많은 전사자를 내고 포위망을 탈출, 후퇴했다. 여기서 미 제24사단장 딘 소장은 몸소 적 전차에 수류탄을 던지며 용전하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이런 전시상황을 종합해 볼 때 인민군이 6월 28일 서울에 입성했을 당시 쉬지 않고 국군을 밀어붙였다면 7월 5일쯤엔 인민군이 낙동강 부근까지 도달해 사실상 한반도 전역을 장악한 상황이 되었다면 아마도 미국은 지상군 파병을 포기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인민군이 서울 입성도 3일간 지체했지만 서울을 점령한 이후 3일간이나 지체한 것이 6.25전쟁의 가장 큰 최대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당시 인민군 6사단 13연대 정치장교로 6.25전쟁에 참전했던 최태환씨는 전쟁당시 중좌(중령)의 계급으로 인민군 6사단 13연대 정치보위부 책임장교였는데 그의 주장은 "김일성은 서울 점령 후 제2대 국회를 소집해 이승만대통령 하야를 결정하는 쿠데타를 벌이려했다"고 증언을 하였다. 북한은 이승만이 퇴진한 후에 국회의원들로 하여금 8월 15일에 남과 북이 통합한다는 선언을 하는 것이 김일성의 계획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인민군은 서울을 점령한 후에 국회의원 소집을 공고 하였지만 이곳에 찾아오는 의원이 거의 없어 남한을 통합할 수 없다고 보고 7월2일 군사력으로 전 한반도를 석권하고자 한강 이남으로 공격을 결정한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최씨의 증언을 뒷받침 한 것은 6.25 당시 인민군 작전국장이었던 유성철씨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의 남침계획은 침공 사흘안에 서울을 점령하는 것으로 끝나게 되어있었다. 만약 서울을 점령하면 20만 남로당원이 일어나 남한 정권을 전복시킨다는 박헌영의 말을 믿었다고 한다. 하지만 전쟁을 사흘로 예정했지만 결과는 3년이라는 기나긴 전쟁을 보낸 것이다. 결국 인민군은 3일을 제외한 전 기간은 그들의 예상에도 없던 전쟁을 치룬 것이다.전쟁 발발은 6월 25일 9시 30분에 미국에 보고되면서 UN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28일 개최되었고, 북한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필요한 물자를 한국에 제공한다는 안건이 가결되었고. 미국은 이 결의안에 따라 7월 1일에 미 지상군을 한국전쟁에 참전시킨다. 뒤를 이어 결의에 의거해 16개국이 파병을 결정하고 의료지원 5개국도 참전한다. 1945년 10월 24일 UN이 창설되면서 당시 51개국 중 21국가가 한국 전쟁에 참전한다는 것을 두고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었는가? 세계 역사상 국제정의에 입각한 최초의 유엔군을 탄생시킨 것으로서 미국을 비롯하여 16개국 군대로 유엔군이 편성되었다. 미국은 트루먼 대통령이 미 극동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 목표를 폭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함(6월 30일)에 따라, 맥아더는 주일 미 제8군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에게 “제24사단을 한국으로 이동시키라.”라는 명령을 하달(6월 30일)하였다.1950년 6월 25일 부터 1953년 7월 27일 까지 3년 1개월간 지속된 6.25전쟁의 과정은 크게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1) 제 1단계 북한의 승세 기간북한 인민군이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전쟁 40일후에는 낙동강 일대를 제외하고는 전 영토를 내주고 말았다. 6.25전쟁이 발생한지 거의 한달이 되어가는데 승세는 북한에 유리하게 가고 있었다. 1950년 7월20일 김일성은 북한군에게 8월15일까지는 반드시 부산을 점령하라고 독촉 하였다. 북한군은 수안보에 전선사령부를 두고, 미군 정면에 제1군단, 국군 정면에 제2군단을 배치하여 이른바 ‘8월 공세(1950.8.4.∼8.25)’와 ‘9월 공세(1950.9.1∼9.15)’의 두 번에 걸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왔다. 그리하여 대구방어전투·영천전투·동해안지구전투 등 많은 공방전이 전개되어 지역에 따라서는 방어선을 돌파당할 뻔한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 낙동강 전투 중 가장 치열했던 다부동전투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2) 다부동전투6월 25일 기습적인 남침을 시작한 공산군은 7월 말에 이르러 낙동강을 도하하여 대구와 부산을 잇는 아군의 대동맥을 끊으려고 압박을 가하여 왔다. 이에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북한군의 공격에 대한 최후의 방어선으로서, 서쪽은 낙동강을 이용한 방어선과 그리고 낙동강 상류를 포함해 동북부의 산악지대를 잇는 천연장애물을 이용한 방어선을 구축하여 이를 사수하기로 하였다.8월 4일 새벽 1시를 기해 형성된 낙동강방어선은 남북 160km, 동서 80km의 타원형을 이루었는데, 낙동강 일대의 방어는 주로 미군이, 동북부 산악지대의 방어는 국군이 담당하였다. 이 방어선을 워커라인이라고도 부른다. 다부동은 대구 북방과 상주와 안동에서 대구로 통하는 도로가 합쳐지고 왜관에까지 이르는 지방도로의 필수적인 요충지였다. 다부동이 북괴의 수중에 들어갈 경우 다부동에서 25km떨어진 대구가 북한군 공격의 사정권 내에 들어가게 되므로 다부동 방어선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이었다.북한군도 이를 아는지라 다부동일대에 증강된 3개 사단과 함께 2만2천여명의 병력, 전차 20여대 각종 화기 700여기로 중무장하여 공격을 감행해 왔다. 이곳을 지키는 국군화기는 북한군의 5분의1 수준 밖에 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다부동이 북괴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은 불보듯 뻔한 것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북한군에게 계속 밀림으로써 전투다운 전투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국군과 유엔군은 8월 초부터 마산-왜관-영덕에 이르는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여 방어태세에 임하였고 북한군은 마지막 남은 총력을 기울여 낙동강 도하 공격을 개시하여 8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공세 작전을 감행하였다. 한반도의 10%밖에 남지 않은 경상도 일부지역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의 무차별 공세에 힘겹게 맞서면서 북한군의 공격을 결사적으로 저지하였다. 이에 미8군사령관 겸 유엔지상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북한군의 공격에 대해 “더 이상의 후퇴는 없다”며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라고 지시하였는데 이는 낙동강 전선을 죽음으로 지키라는 명령이었다. 낙동강 전선 이곳저곳에서 다부동전투, 영천전투 등 국가의 운명을 결정지을 만한 결전이 벌어졌다.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을 따라 영덕-청송-의성-낙동리-왜관-남지-마산을 잇는 방어선을 구축했는데 전력이 부족한 낙동강 1차 방어선을 지킬 수 없었다. 그래서 8월 11일에는 왜관-다부동-신령-기계-포항을 잇는 80km 가량의 선으로 전선을 축소하여 방어했다. 이 2차방어선을 지키지 못하면 더 이상 반격의 희망이 없다. 이미 초기에 국군과 유엔군이 밀렸으므로 8월 13일 북괴의 3사단 병력이 328고지를 공격하고 북괴 15사단이 국군 제 12연대보다 앞서 아군이 미처 점령하지 못한 674고지를 먼저 점령하였다.국군은 이미 빼았긴 328고지를 뺏고 뺏기는 피의 쟁탈전을 펼쳤고, 국군은 유학산 837고지와 674고지의 탈환을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유학산 일대의 싸움은 매우 처절하였으며 말 그대로 돌산 하나를 두고 서로 수류탄을 던져대는 근접 전투가 지속되어 양측은 하루동안에만 3천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전투가 지속되면서 대구 정면이 위태롭다고 판단한 미 제8군 사령부는 적의 주력부대를 제압하기 위하여 폭격기 편대의 공격을 퍼부었다. 무려 총 960톤의 폭탄을 쏟아부었으며 북한군의 병력과 장비에 매우 큰 피해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의 대구 공격은 다부동 축선으로 집중되어 8월 16일 다부동 바로 서쪽을 공격함으로써 방어선이 돌파될 큰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국군 1사단장은 백선엽 장군은 후퇴하는 장병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장병 여러분, 여기서 물러나면 대구가 점령되고, 대구가 점령되면 부산이 점령되고, 그러면 우리는 전부 죽던지 아니면 포로가 된다. 부산에서 죽을 바에는 여기에서 죽는 것이 낫다. 지금부터 사단장인 내가 선두에 서서 저 산을 돌격할 것이다. 귀관들은 내 뒤를 따르라! 내가 선두에서 물러나면 나를 쏘아라! 마침내 8월 23일 새벽2시 야간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유학산 837고지까지 점령하였다. 이렇듯 국군 1사단은 장교 부사관 병사들이 투혼을 발휘하여 방어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다부동전투는 매우 치열했던 탓에 매일 600~700명이 사망하였다. 다부동 전투 중 최대 결전은 최초의 전차 對 전차의 격투로 전개되었다. 18일 밤부터 북한군은 맹렬한 공격준비포격에 이어 T34 전차를 선두로 해서 공격 하였고 이에 대해 미 제27연대는 전차포와 무반동포로써 적 전차를 사격하고, 국군은 파상공격을 되풀이하는 적 보병부대에 대해 양측의 山地(산지)로부터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이리하여 개전 이래 최초의 전차 對(대) 전차의 포격전이 전개되어 미군은 적 전차 7대와 자주포 3대, 차량 수대를 파괴했다. 미군들은 좁은 협곡에서 불덩이가 수없이 교차되는 모습에 빗대 이 전투를‘볼링장의 격투’라고 명명했다. 다부동전투에서 국군의 사상자 1만여 명, 적군 사상자 1만 7500여 명을 기록했다.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게 자신감과 힘을 실어주고, '포기하지 않고 싸우면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 다부동전투는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손꼽히는 전투였다. 다부동전투에서 만약 방어선이 뚫렸다면 사실상 대구와 부산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면 전쟁은 종료되었을 것이며 오늘날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으로 봐야 한다. 만약 단 한 차례만 방어선이 뚫려도 대한민국의 국운 자체가 위태로운 지경이었던 것이 다부동전투였는데 낙동강전투의 총사령관인 워커장군의 한국사랑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과연 존재하였을까? 오늘을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워커장군에 대한 존경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낙동강전투에서 특히 다부동전투에서 우리국군과 유엔군이 북한의 집요한 공격을 막았기 때문에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이 이어진 것이다. 이 모든 성과는 낙동강전투의 사령관 해리스 워커장군의 수훈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3) 제 2단계 인천상륙작전미군을 주로 한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 (1950년 9월 15일)해, 13일 만에 서울을 탈환 (9월 28일)수복하고 38도선을 넘어 평양을 점령(10월 13일), 한국군 일부가 압록강 근처 초산까지 진격 (10월 26일)을 한 시기입니다.
(4) 제 3단계 중공군의 개입유엔군의 북진에 위협을 느낀 중공군의 개입(10월 25일)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한국군이 오산 부근까지 후퇴했다가 다시 38도선을 넘어서 (1951년 3월 24일) 철원, 금화 알대까지 진출(6월 11일)하고, 중공군 개입으로 전쟁이 새 국면에 접어들자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만주를 폭격하고 중화민국의 장개석 군을 동원해 중국 남부지방에 제 2전선을 설정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맥아더 장군의 전쟁확대론은 세계대전으로의 확대로 이어질 수 있어서 미국정부에 의해 저지되었고 맥아더 장군은 해임(4월 11일) 되었다.
(5) 제 4단계 휴전협정 성립기휴전회담 진행과 휴전협정의 성립기로 소련 유엔대표의 휴전제의를 미국이 받아들여 개성에서 본회의가 열렸다(7월 10일). 주요문제는 비무장지대 설치를 위한 군사경계선 설정, 휴전 감시기관 구성, 포로교환 등이었다. 이승만은 휴전반대운동을 전개하는 것에 미국은 한미상호 안전보장조약 체결하고 경제원조를 통해 한국군 증강 등을 조건으로 이승만을 무마시키켜서 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북한 인민군 사이에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마침내 우리 민족의 염원과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 가운데 전쟁은 휴전상태에 들어갔다.
(6) 6.25전쟁의 결과 6·25전쟁사료에 따르면 3년1개월 동안의 전쟁 피해 상황은 단군이래 일어난 전쟁 중 수많은 희생을 낸 전쟁결과는 20만명 미망인과 10만명 고아 그리고 1000만 이산가족이 발생했고 미군 사망자만도 5만 4246명(지금까지 이라크전 미군 사망자가 약4천 여명),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 사망자가 모두 62만 8833명, /부상자는 미군만 10만 380명, /유엔군 전체는 106만 4453명, /미군 실종자만 8177명, /유엔군 실종자는 47만 267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남북한 군인사상자가 모두 약 300만 명, 민간인 사상자도 모두 약 300만 명. 합계 약600만 명이 죽고 다친 전쟁이 6.25전쟁이다. 그리고 수많은 가옥이 파괴 되었으니 전쟁댓가는 5000년 역사상 대재앙임에 틀림없다.
3. 6.25 한국전쟁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두 분의 이야기 (1) 미8군 사령관 월튼 해리스 워커(Walton Harris Walker) 6.25 전쟁이 발발하자 미8군 사령관 월튼 해리스 워커(Walton Harris Walker 1889년 12월 3일~1950년 12월 23일)는 한국으로 향했다. 그는 2차대전 때 유럽에서 명성을 떨치던 장군이었는데 한국전쟁이 발발하니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이 땅에 미8군 사령관으로 사명 받고 왔다. 한국전쟁 시작 후 8월초에는 이미 전 국토의 90%, 경상남북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북한의 수중에 들어 갔던처라 미국 정부는 정말 낙동강 전투가 뚫리면 유엔군의 전면 철수를 주장했다고 한 사실은 비문 내용에 나온다.한국전에 참전한 미군병들이 매일 엄청난 숫자가 죽어가다니 미의회와 정부에서 조차 전면 철수가 거론되는 시점이었으니. 당시 파죽지세로 북한군에 거의 모든 지역을 점령당한 상황에 비추어볼 때 한국전에서의 승산이 없어 보였다.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도 New Korea Plan 이런 일련의 상황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그것은 무조건 안된다고 버텨보겠다고 말한 사람이 워커 중장이다. 미8군 사령관인 워커 중장은 총사령관인 맥아더에게 남한 사수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맥아더는 일본에 있었고 워커 중장은 한국에 있었다. 최전선에서 직접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는 입장이었던 워커 중장은 한국 장병들을 만나서 이런 말을 전한다.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 그리고 미국 장병들에게 아래와 같은 명령을 내린다. "우리는 절대 물러설 수 없다. 물러설 곳도 없고 물러서서도 안 된다. 낙동강 방어선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후퇴란 있을 수 없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한국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하나님께서 워커장군에게 한국을 지키겠다는 믿음을 갖도록 역사하셨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사람이 미군 장병들에게 내질렀던 전설적인 명언은 "Stand or die." 사수 혹은 죽음뿐. 이 명령이 낙동강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1) 월튼 워커의 무조건 한국사랑
갑작스런 사고로 순직했기에 자서전 등의 사료가 없기 때문에 사실 워커 중장의 무자비한 한국 사랑에 대한 이유는 알 길이 없다. 어쨌든, 워커 중장은 인상적이고 무자비한 명령을 했다는 이유로 미국 의회에서 미국 국민이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해 미국 장병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게 마땅한가? Stand or die."사수 혹은 죽음뿐. 조국도 아닌 전선에서 많은 희생을 내면서 이러는 건 많은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미국 정부도 워커 중장에게 사령관 집어 치우고 집에 가라고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버텨보겠다고 발벗고 나섰다. Stand or die(버티지 못하면 죽어라)란 발언 덕에 본국 의회에서 논란을 일으켜서 한참을 욕 먹어가면서도 한국을 꼭 지켜야 한다고 전쟁을 반쯤 포기한 미국 정부와 사령관을 설득하면서 낙동강 전투를 지휘한 분이 바로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다. 결국 낙동강 방어에 성공한 이후에 맥아더의 낙동강 전선 시찰이 이루어진다. 이 시찰 덕분에 맥아더 사령관의 인천 상륙작전 구상이 가능해졌고, 워커 중장은 맥아더 사령관을 도와서 인천 상륙작전까지 성공시키는 공을 세웠다. 성공 확률 1/5000이라는 전쟁영웅의 업적인 인천 상륙작전도 워커 중장이 낙동강을 지켜내지 않았다면 시작도 해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 맥아더의 선택은 탁월했지만 그 선택이 가능케 만들어 준것은 워커의 공이다. 사실 인천 상륙으로 인한 공을 따지자면 7 대 3 정도로 워커의 공적이 맥아더의 공적보다 크다 하겠다.
2) 안타까운 사고
해리스 워커장군은 1950. 12. 23 아들인 샘 워커 대위의 은성무공훈장 수상을 축하해주러 가는 중, 맞은편에서 한국군 사병이 운전하던 탄약 운반 삼륜차 트럭과 충돌로 즉사하였다. 2차대전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잠시 쉬지도 못하고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망해가는 우리나라를 구원하고 한국에 온지 6개월만에 그리 빨리 가다니 우리는 너무 안타깝고 슬프지만 하나님의 섭리라고 볼 수 밖에 없다.(마10: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의 허락없이는 그것들 중의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찮은 참새 한마리도 하나님 허락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하물며 워커 장군이야 말로 다 망하여가는 한국을 살려놓았던 너무나 큰 일을 하셨던 분이다. 무너져 떠내려가는 낙동강전선을 회복시킨 워커장군이야 말로 그게에 주어진 일을 100% 다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영광을 받으셨다. 이제 나라를 사랑하는 한국인으로서는 그를 정말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쉐라톤 워커힐 본관 정문 산자락에 세워진 비문 **
"오늘 우리가 장군을 특별히 추모하는 것은 한국전쟁 초기 유엔군의 전면 철수를 주장했던 미국 조야의 지배적인 분위기 속에서 유독 장군만이 홀로 한반도 고수를 주장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공산화를 방지하여 우리의 오늘을 가능케 한 그 공덕을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이야기
오늘의 대한민국을 존재가능하게 한 분이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주도적으로 세우신 분인데 그의 은혜를 모르고 이승만 대통령을 독재자로 매도하고 있는 거짓교사들이 있을 뿐이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독기를 품은 자가 바로 도올이라는 자인데 그는 유트브를 통한 기독교강의 중 여러차례 "이승만 이놈 *새끼!"를 반복하여 능욕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다. 그자가 욕하는 이유인 즉 "이승만은 뺏속깊이 기독교인으로 기독교 입국론을 펼쳤다"는 죄목이었다. 그것이 그렇게 비난받아 욕을 먹을 일인가? 도올 그 자는 대한민국의 건국대통령을 희롱하면서도 침략자인 김일성을 뼛속깊이 존경하여 결코 그렇게 부른 적이 없는 자일 것이다. 그는 자신이 발싸개보다 못하여 스스로 돌이라 부르면서도 역사의 정론은 부정하고 항상 역사의 뒷간에 버려진 쓰레기 학설을 들고 나와 젊은이들을 현혹하며 세상을 소란케 하는 자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예수를 잘 믿으셨던 신앙인으로서 나라를 세우시고 구하셨음에도 무지하고 패덕한 자들로부터 무단히 욕을 먹고 있는 건국대통령임이다. 다음의 글은 7년전 조선일보 양상훈 칼럼에 게제된 글이다.
50년 전 1965년 7월 19일 오전 0시 35분 하와이의 한 노인 요양원에서 나이 아흔의 한국인 병자가 숨을 거두었다. 한 달 전부터 피를 토했다. 7월 18일엔 너무 많은 피가 쏟아졌다. 옆에는 평생 수발하던 아내, 대(代)라도 잇겠다며 들인 양자와 교민 한 사람밖에 없었다. 큰 한숨을 한 번 쉬더니 숨이 끊어졌다. 어떤 어려움에도 우는 법이 없었던 아내가 오열했다. 전기 작가 이동욱씨는 영결식의 한 장면을 이렇게 전했다. 한 미국인 친구가 울부짖었다. "내가 너를 알아! 내가 너를 알아! 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는지… 그것 때문에 네가 얼마나 고생을 해왔는지. 바로 그 애국심 때문에. 네가 그토록 비난받고 살아온 것을. 내가 알아…."
그렇게 외친 미국인은 장의사였다. 그는 1920년에 미국서 죽은 중국인 노동자들의 유해를 중국으로 보내주고 있었는데 이승만이라는 한국인이 찾아와 그 관(棺)에 숨어 상하이로 가겠다고 했다. 한국 독립운동을 하는데 일본이 자신을 현상수배 중이이므로 그렇게라도 해서 그는 실제 관에 들어가 밀항에 성공했다. '너의 그 애국심 때문에 네가 얼마나 고생했고, 얼마나 비난받았는지 나는 안다'는 절규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15일 아침 서울 국립현충원 이승만 대통령 묘소를 찾았다. 필자 역시 이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 얘기만 듣고 자랐다. 그의 생애 전체를 보고 머리를 숙이게 된 것은 쉰이 넘어서였다. 이 대통령 묘 앞에서 '만약 우리 건국 대통령이 미국과 국제정치의 변동을 알고 이용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았다.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그 없이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그 없이 우리가 자유민주 진영에 서고, 그 없이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고, 그 없이 한·미 동맹의 대전략이 가능했겠느냐는 질문에 누가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까. 추모비에 적힌 지주(地主) 철폐, 교육 진흥, 제도 신설 등 지금 우리가 디디고 서 있는 바탕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그는 무지몽매한 나라에 태어났으나 그렇게 살기를 거부했다. 열아홉에 배재학당에 들어가 나라 밖 신세계를 처음으로 접했다. 썩은 조정을 언론으로 개혁해보려다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감옥에선 낮에는 고문당하고 밤에는 영어 사전을 만들었다. 이 대통령은 독립하는 길은 미국을 통하는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1905년 나이 서른에 조지워싱턴대학에 입학하고 하버드대 대학원을 거쳐 프린스턴대에서 국제정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1년 미국에서 'JAPAN INSIDE OUT(일본의 가면을 벗긴다)'을 썼다. 그 책에서 이 대통령은 일본이 반드시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책이 나온 지 넉 달 뒤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했다. 미국 정치인들은 한국인 이승만을 다시 보았다.
이 대통령은 1954년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을 이렇게 썼다. '일본인은 옛 버릇대로 밖으로는 웃고 내심으로는 악의를 품어서 교활한 외교로 세계를 속이는… 조금도 후회하거나 사죄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을뿐더러… 미국인들은 지금도 이를 알지 못하고 일인들의 아첨을 좋아하며 뇌물에 속아 일본 재무장과 재확장에 전력을 다하며… 심지어는 우리에게 일본과 친선을 권고하고 있으니….' 이 대통령은 서문을 '우리는 미국이 어찌 하든지 간에 우리 백성이 다 죽어 없어질지언정 노예는 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합심하여 국토를 지키면 하늘이 우리를 도울 것이다'고 맺었다. 평생 반일(反日)한 이 대통령을 친일(親日)이라고 하고, 평생 용미(用美)한 그를 친미(親美)라고 하는 것은 사실을 모르거나 알면서 매도하는 것이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는 "어지러운 구한말 모두 중·일·러만 볼 때 청년 이승만은 수평선 너머에서 미국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를 19세기 한국의 콜럼버스라고 부른다. 우리 수천년 역사에 오늘날 번영은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 박사의 공로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국민은 이 위대한 지도자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했다. 거인이 이룬 공(功)은 외면하고 왜곡하며, 과(過)만 파헤치는 일들이 지금도 계속된다. 건국 대통령의 50주기를 쓸쓸히 보내며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의 자해(自害)와 업(業)을 생각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물러난 후 겨울에 난방할 땔감도 없었다. 하와이에선 교포가 내 준 30평짜리 낡은 집에서 궁핍하게 살았다.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친정에서 옷가지를 보내줄 때 포장한 종이 박스를 옷장으로 썼다. 교포들이 조금씩 보내준 돈으로 연명하며 고국행 여비를 모은다고 5달러 이발비를 아꼈다. 늙은 부부는 손바닥만 한 식탁에 마주 앉아 한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렸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이 대통령은 근대화된 사고로 어떻게 하면 이 나라를 자유민주국가로 성장시킬 수 있느냐를 고심하던 애국자였다. 해방되던 해인 45년 이미 70세(당시 한국 남자의 평균수명은 43세)의 노구로 귀국해 48년 초대 대통령에 올랐다. 흔히 이 대통령을 백범 김구(1876~1949) 선생과 비교해서 평가하곤 한다. 조국의 미래에 대한 우남의 생각은 백범과 달랐다. 단적으로 얘기해 김구 선생은 낭만적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김일성하고 만나 얘기하면 왜 통일이 안 되겠느냐”고 주장했다. 실제로 백범 선생은 5·10 총선을 앞둔 48년 4월 북한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 김일성을 만났다. 하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곧이어 북한은 남쪽에 공급해 왔던 수풍발전소의 전기를 끊어버렸다. 당시 북한은 남한 전기의 70%를 공급하고 있었다. 또 그해 모내기철을 앞두고 38도선 바로 아래 황해도 연백평야의 논에 대던 물길도 막아버렸다. 반면 이승만 대통령은 처음부터 “김일성과 같은 공산주의자와 얘기를 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힘이 있어야 한다. 남한에 이북보다 더 강력한 나라를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우남이었기에 김일성이 남침했을 때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그를 막아냈던 것이다. 그러면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업적 중에 가장 두드러진 업적을 손꼽자면 첫째는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선택하여 뿌리를 내리게 한 업적입니다. 둘째는 휴전 직후 한미동맹을 맺게 한 업적입니다. 셋째는 6.25 전쟁에서 신속히 미군과 유엔군이 참가하게 하여 나라를 지킨 업적입니다. 넷째는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단군 이래 처음으로 소작인들이 자기 땅을 가질 수 있게 한 업적입니다
1) 토지개혁이 6.25한국전쟁의 승리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위대한 업적 중의 하나가 토지개혁입니다. 해방 직후 우리나라의 토지 소유자들의 상황은 심각하였습니다. 농업 국가였던 때에 농촌 인구의 70%-80%가 소작인들이었습니다.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세워야겠는데 소작인들이 이렇게 많아 경제가 일어나지 못하고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그래서 농림부 장관이던 조봉암에게 토지개혁팀을 꾸리게 하여 지주들의 농토를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주는 토지개혁 사업을 착수하였습니다. 북한의 김일성 정권은 1946년에 토지개혁을 실시하였으나 북한 공산당 정권의 토지개혁과 남한의 민주정부의 토지개혁은 내용이 달랐습니다.북한의 토지개혁은 무상몰수 무상분배였습니다. 남한의 토지개혁은 유상몰수 유상분배였습니다. 거기에다 결정적인 차이가 북한은 토지 소유권을 농민들에게 주지 않고 경작권만 주었다가 후에 회수하여 정부 소유로 하였다. 남한은 지주들에게도 값을 치르고 회수하고 소작인들에게도 값을 치르게 하되 5년간 농사지은 수확에서 갚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북한과는 달리 토지를 받은 소작인들에게 소유권까지 주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토지개혁을 완성한 시기는 6.25 전쟁이 일어나기 2달 전인 1950년 4월 20일에 마쳤습니다. 이것이 요즘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신의 한 수였습니다. 그 시기에 토지개혁을 완수하였기에 2달 뒤에 일어난 6.25 전쟁이 일어나자 공산화되지 아니하고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토지개혁이 6.25 전쟁이 일어나기 2달 전인 1950년 4월 20일에 끝났기에 인민군이 내려왔을 때 토지를 얻게 된 과거의 소작인들이 자기 땅을 지키기 위하여 용감히 싸운 덕으로 침략군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경제 전문가의 진단에 의하면 그때 토지개혁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더라면 유엔군이 참전하였더라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라 합니다.한국의 토지개혁은 세계 전체에서 가장 모범적인 성공 사례로 평가 받습니다. 한 예로 월남전의 경우가 있습니다. 월남전은 경제적인 면에서는 토지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 전쟁이었습니다. 침략국인 프랑스에 줄 서서 지주가 된 카톨릭 신자들과 소작인들인 불교 신자들 간의 싸움이 월남전이었습니다. 미국 CIA가 이 점을 간파하고 월남 지도자들에게 베트콩을 물리치려면 한국처럼 토지개혁을 하라고 충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월남 지도자들과 카톨릭 지도자들은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결국은 카톨릭 지주들은 땅문서를 쥔 채로 베트콩들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2) 한미방위조약 체결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동맹을 맺은 후 거의 70년, 그 동안 한국은 평화와 번영을 누려왔습니다. (A) <한미상호방위조약> 이전 70년먼저 <한미상호방위조약> 이전 70여년 동안 이 땅 안팎에 무슨 일이 터졌는지 큰 사건들 중심으로 10 개만 정리해봅니다.1. 임오군란과 대원군 납치1882년 임오군란이 터지자 이를 기화로 청나라 군대 3,000명과 일본 군대 400명이 조선으로 들어왔습니다.청나라 군대는 숭례문(남대문) 밖에 주둔했는데 이 부대를 외교 차원에서 방문한 흥선 대원군을 강제로 납치, 청나라 톈진(天津)으로 압송, 당시 청나라의 실권자였던 리홍장이 멋대로 대원군을 심문하고 톈진 서쪽 바오딩(保定)에 구금시켰어요. 3년이 흘러 1885년이 되어서야 대원군을 풀어주어 겨우 귀국했습니다.2. 동학란과 청일전쟁1894년 학정에 못견딘 전라도 고부 농민들이 전봉준과 동학교도들을 중심으로 난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이를 기화로 일본이 조선에 대규모 군대를 보내었고 조선에서의 지배권을 놓고 청나라와 일본 양국 간에 청일전쟁(1894~1895)이 터졌지요.이 때 일본군이 한양으로 들어와 한양 경복궁을 지키는 조선군과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접전 끝에 일본군이 승리하고 고종은 사로잡혔습니다! 일본군 소좌가 칼을 빼들고 고종을 협박했었지요! 일본군은 이어 평양으로 진격 평양성을 지키던 조선과 청나라 연합군을 격파했고 청나라 군대는 을밀대에서 항복했어요. 연이어 벌어지는 여러 전투에서 일본은 모두 승리했고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차지했습니다. 3. 1895년 을미사변청일전쟁이 1895년 4월 일본의 승리로 종결되자 조선 내에서 일본의 위세는 더욱 더 대단해졌고 동년 1895년 10월 8일 일본 낭인(사무라이보다 낮은 계층)들이 경복궁에 난입, 옥호루에 숨어 있던 민비(명성황후)를 죽였습니다. 고종은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지요. 이 사건을 후세 역사책에서는 '아관파천'이라 부른다.4. 1905년 을사조약, 외교권을 상실5.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선이 망했습니다!6. 1919년 3.1 운동7.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과 태평양 전쟁 발발8.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 8월 9일 나가사키 원폭 투하!. 1945년 8월 15일 일본 무조건 항복으로 해방!9.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10. 1950년 6월 25일 북한군 침략전쟁! 이 전쟁으로 300만 명이 죽고 전국이 잿더미! 1953년 7월 27일 휴전(B) <한미상호방위조약> 이후 70년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하면서 핵심은한반도와 그 주변에 미군을 배치한다는 내용입니다.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군대가 주둔한 이후 70년.반도에 큰 난리 없이 70년을 지내왔어요...포항제철 삼성전자 현대조선 경부고속도로.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다,세계 10대 강국이 되었지만 그 기간동안 북한군 병사들은 의무복무기간 10년 북한 경제는 발전할 수가 없어요. 북한은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수백만 명이 굶어죽은 아시아 최빈국이 되었다. (C) <한미상호방위조약>이전 70년과 이후 70년 비교하면 <한미상호방위조약> 이전 70년 동안 우리 나라에 난리가 나면청나라 군대가 들어와서 왕의 아버지를 납치해가고(임오군란)우리 나라에 난리(동학란)가 나면 일본 군대가 쳐들어와서 경복궁 지키는 군대와 싸워서 경복궁을 점령하고 왕은 사로잡히고(청일전쟁)왕비는 칼 맞아 죽고(을미사변) 나라는 망하고(한일합방)태극기 들고 독립을 외치면 총에 맞고 감옥가고(3.1 운동)독립군 광복군의 힘이 아닌 이승만 외교의 힘으로 간신히 독립했더니(1945년 8.15 해방)소련 중공 군대를 등에 업고 6.25 전쟁을 일으킨 북한 김일성..(1950년 6.25) 그 6.25로 300만 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맺어진 후 70년이 흘렀습니다...그동안 무슨 난리가 있었나요? 전쟁 있었나요? 아니요! 동맹이란 이렇게도 중요한 겁니다.그러나!..이재명이가 중국에서 제일 큰 방송국인 관영 CCTV 인터뷰에 나와서 자신이 대통령되면 한반도에 배치된 미국 사드를 철수시키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면 한미동맹이 무사할 것 같습니까?한미동맹이 무너지면 그동안 누려왔던 평화와 번영이 어찌 될까요?나라 자존심 운운하면서 전시작전권 회수하고 사드 철수시키고한미동맹 무너지면 어찌 될까요?대한민국이 중국을 이길 힘이 있나요?러시아 이길 힘이 있습니까?경상도 김천 성주 지역을 지나다 보니"사드 가고 평화 오라!" 이렇게 적힌 플래카드들이 눈에 띄더군요.중국 러시아 이길 힘은 없어도 북한 핵무기에 대항할 힘은 없어도평화타령 불러대면 평화가 옵니까? 과거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자마자 미국에 특사를 보낸 적이 있지요.
우리는 자주국방하겠다면서.그들이 주한미군 철수 운운했었어요. 그 때 미국 국방장관이 럼스펠트가 유명한 말 한 마디 했지요."자주국방! 그것 좋은 말입니다.하지만 우리 미국도 자주국방을 다 하지 못해서 여러 나라들과 동맹을 맺습니다."힘이 부족하면 동맹을 맺고 그 관계를 지켜야 합니다.그게 살 길이지요.
오늘의 현충일을 맞이하여 이 땅에 사는 자들이라면 어떻게 대한민국이 건국되어 6.25한국전쟁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최소한이라도 알아야 되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워커장군과 건국대통령 이승만을 이 땅에 보내 주신 하나님께 정말로 감사를 드려야 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