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해설
존재 인식과 서정적 자아의 진실 탐색
--강병렬 시집 『바람의 무게』
김 송 배
(시인.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
1. “나”를 인식하는 존재의 의미 탐구
현대시의 위의(威儀)나 본령(本領)은 “나”를 인식하는 과정을 중시하면서 자신이 지나온 궤적(軌跡)에서 생성한 다양한 인생의 지향점을 탐구하면서 존재의 의미를 모색하는 경우를 많이 접하게 된다. 이는 시적인 발상이나 주제의 투영이 바로 자신의 정솽 사유(思惟)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향방을 적시하려는 시인들의 메시지가 대체로 “나”를 통한 체험과 감정, 의지, 의욕 등에서 시적인 진실을 창출하려는 의도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찍이 프랑스의 여류작가 S. 보부아르는 그의 글 「인간에 관해서」 중에서 “내가 나로 인해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은 바로 나이다. 그리고 내가 나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참여하고 있는 경우뿐이다. 한 객체가 나에게 속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나로 인해서 세워질 필요가 있다. 결국 내가 그 객체를 그 전면성에 있어서 세웠을 경우에는 완전히 나에게 속한 유일한 현실이란 전적으로 나의 행위이다”라는 언지(言志)로 나의 행위가 나의 존재 인식과 동일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강병렬 시집 『바람의 무게』를 일별하면서 이러한 나에 대한 화두를 먼저 상기하게 되는 것은 그가 작품 속에서 발현하는 의식의 흐름이 바로 나를 중심축으로 해서 형상화하는 시법을 활용하는 특성을 읽을 수 있어서 나의 존재 확인은 나를 인식하는 출발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와 생애와 함께하는
겸손하고
무서운 비밀 정보원
나의 모든 시간과
지나온 세월을
다 기억하고 있을 터인데
아주 작은 비밀까지도
움켜쥐고 절대 놓지 않는
나의 손
기도하는 곳에서는
꼬옥 감싸고
하늘의 응답을 기록하는
착한 손
--「나의 손」 전문
강병렬 시인은 “나의 손”을 통해서 겸손하게 나와 생애를 함께 영위하는 형태를 시적 상황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는 그가 나를 이해하면서 어떤 때는 “무서운 비밀 정보원”으로 나에 대해서 전부를 인식하고 있는 손이야 말로 앞에서 보부아르 여류작가가 말한 나의 행위는 바로 나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는 지금 살아온 시간과 지나온 세월, 즉 인생행로를 모두 기억하고 있지만 이러한 과거의 작은 비밀까지도 절대로 남에게 누설하지 않는 나의 동반자이다. 또한 “기도하는 곳에서는/ 꼬옥 감싸고/ 하늘의 응답을 기록하는// 착한 손”이라는 결론에서 이해할 수 있듯이 자신과 일생을 동행하면서도 다변적인 삶의 형상들을 감싸고 있는 “착한 손”임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작품 「빈손」 중에서도 “하루를 만지작거리다/ 저녁이 되어 돌아보니/ 빈손이다--중략--그런 나에게/ 석양에 펼쳐진 노을이/ 붉은 친필 남겨 준다// 시 한 편 쓰지 않고/ 빈손으로 와버린/ 당신의 모습이// 안타깝단다/ 그러니/ 세월을 아끼란다”라는 어조로 언제나 비어 있는 자신의 손에게 경고성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하늘에 떠 있는 사연
모아모아
구름 편지에 적어
당신께 훅 불어주고 싶다
구름 속으로 내려다보이는
지상의 사연과
연인들의 비밀 알았는지
하얀 안개가 가려주고 있어
당신이 잠든 침상 곁으로
날아가고 싶은 지금
이스라엘 가는 비행기
구름 속에 파묻혀
하늘의 메시지 가득 담고
순례의 길 향한다
--「내가 구름이라면」 전문
다시 강별렬 시인은 “내가 구름이라면” 하고 가정(假定)의 어조로 하나의 갈망어린 기원으로 구름을 취택하고 있다. 아마도 이스라엘 순례여행을 떠나면서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본 구름사이로 자신의 애절한 “구름 편지”를 띄우고 있다. 이러한 메시지는 지상에서 벌어졌던 자신의 행보가 하얀 안개가 차단하는 와중에서도 "나"라는 인식의 그늘에서 하나의 “싶다”는 희구의 의식으로 전이하고 있어서 존재의 의미를 더욱 함축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나를 인식한 시법은 많은 작품에서 살필 수가 있다. 작품 「나의 새벽」 중에서 “시끄러운 세상/ 잠재우려나/ 밤하늘 까맣게 닫혀있고/ 고요가 있어야만/ 잠이 든다고 나 혼자 굿나잇” 그리고 작품 「길동무」 중에서도 “나의 인생길에서/ 길동무가/ 되어준 사람/ 나를 둘러싼/ 만남 들을 생각해 본다// 지금 나의 곁에는/ 누가 있지/ 내 맘 깊은 곳에는/누가 있지” 등의 어조로 “나”를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2. 봄과 가을의 순환적 계절 이미지
강병렬 시인은 나의 삶과(실생활-real life 혹은 인생과) 동행하는 여정(旅情)에는 계절의 순환을 거역하지 못한다. 또한 우리 인간들은 춘하추동 사계절의 섭리를 수용하면서 살아간다. 특히 그는 이번 시집에서는 봄과 가을에 대한 변화에서 생성하는 다양한 자연 현상들과 거기에 수반하는 인생의 행로가 다변화함으로써 획득하는 삶의 중심에는 우리 인간들이 감내해야 하는 칠정(七情-喜怒哀樂 愛惡慾)의 애환이 작품의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경향은 어쩔 수 없이 수긍해야 하는 인생론이며 가치관일 것이다.
강병렬 시인도 이러한 계절적인 현장에서 감응하는 그의 심저(心底)에는 자연 친화의 심리적인 정감(情感)이 시적인 상황 설정과 전개 그리고 주제에까지 우리 인간들과는 밀접한 상관성이 있음을 토로(吐露)하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장자는 “밤과 낮은 생과 사와 같고 춘하추동은 사람의 일생과 같아서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다.”라는 말로 시간의 법칙이 인간들의 생활, 나아가서는 생사의 운명까지도 좌우할 수 있는 섭리를 우리는 자연에서 조감(照鑑)하는 친자연적인 정감을 간과(看過)하지 못한다.
어떡하지 비가 오면
그대 생각이 더 간절하던데
지금 봄비가 내리네
바람 따라 움직이는 빗소리
눈 감고 들으니
온 천지가 음악 감상실
때론 시 한 줄이
마음의 상처를 보듬고
삶의 허기를 달래듯이
비가 있어 시가 보이고
시가 있는 곳이라면
말석이라도 좋아서
눈 감고 마음 문 열고
빗물에 붓 잡으니
촉촉한 대지는 온통 원고지
--「봄비 멜로디」 전문
우선 그가 심취(心醉)하는 봄에 대한 멜로디를 경청해 보자. 그는 봄비가 들려주는(telling) 어조는 그 현장을 “온 천지가 음악 감상실”로 환기시키고 삶의 허기를 달래주고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 주는 “시”로 대입하는 그의 의식에는 모든 자연 현상(또는 자연 사물)에서 창출하려는 이미지는 비가 있는 곳에서는 “시가 보이고/ 시가 있는 곳이라면/ 말석이라도 좋아서” 봄비가 들려주는 멜로디를 지극히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마지막 연에서 열어 보이는 속내는 “눈 감고 마음 문 열고/ 빗물에 붓 잡으니/ 촉촉한 대지는 온통 원고지”라는 결론으로 촉촉이 내리는 봄비의 현장은 바로 그가 탐구하려는 붓과 원고지가 그의 내면에서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더불어 “시”와 동거하려는 의욕이 넘쳐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와 같이 봄과 상응(相應)하는 작품들은 다음과 같이 현현되고 있어서 그가 얼마나 봄과의 계절적인 감응을 중시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춘삼월 눈도 참 반갑다/ 그런데/ 하늘은 무슨 비밀이 많아/ 조용히 내렸지?// 발걸음 멈추고/ 바람이 전하는/ 하늘의 소리를 듣는다(「춘삼월에 내리는 눈」 중에서)
-옆에는 봄맞이꽃/ 바짝 엎드려 올려보고/ 계곡의 물소리 화음 맞춰/ 곧게 선 나무들을 춤추게 한다(「봄의 축제」 중에서)
-보송보송한 하얀 눈꽃이/ 벚나무 가지에서/ 연한 새순과 대화 나누고// 봄 눈이 들고 온 흰 쟁반에는/ 커피 한잔/ 겨울 노래/ .시 한 편(「봄에 내리는 눈」 중에서)
-맨몸에서 떨어져 나온 수많은 꽃잎들/ 바람과 함께 온 천지를 점령하니/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꽃들의 함성이 찬란하다(「꽃들의 함성」 중에서)
-이제 봄/ 사랑의 속삭임 참을 수 없었는지/ 만발한 꽃잎을 뿌리며/ 연인들의 비밀 폭로해 버린다(「벚꽃의 비밀」 중에서)
-뒷산 진달래 꽃잔치 벌리고/ 나비들까지 축제를 여는데// 이런 날/ 무슨 싸움이겠는가/ 무슨 미움이겠는가(「꽃 잔치」 중에서)
가을비
꽃잎 속에 머물다
뚝 뚝 떨어지는 모습
힘들어 보인다
축 늘어진 천사 나팔꽃
그 속에 잠시 머무는 빗물
달콤한 꿀물이 되어 떨어지는가
가을비 맞으며
꽃을 바라보는 나에게
가을이 위로해 준다
이런 날
혼자 보는 가을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추억으로 보는 것이란다
내 인생의
과거 현재 미래가
꽃잎에 머물다 뚝뚝 떨어지는 듯하다
참 아름답다
--「가을은 혼자가 좋다」 전문
강병렬 시인이 탐색하는 계절이미지는 가을이다. 대체로 가을 이미지는 풍요와 결실의 수확이다. 오곡백과가 무르익은 황금들판이나 빨갛게 익어 주렁주렁 매달인 과실들의 이미지 이외에도 마지막 매달린 나뭇잎의 고독함 그리고 비에 젖어 질척질척 짓밟히는 낙엽의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그는 “가을은 혼자가 좋다”는 제재에서 암시하듯이 고독함과 종말의 비애를 예감하는 혜안이 시적인 감흥을 상승시키고 있어서 공감의 영역은 확대되는 것이다. 그는 특히 가을비가 떨어지는 모습과 이를 바라보고 있는 “나”를 위로해주고 있으며 이러한 가을을 그는 혼자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추억으로 보”면서 “내 인생의/ 과거 현재 미래가/ 꽃잎에 머물다 뚝뚝 떨어지는 듯하다/ 참 아름답다”는 결론으로 주제를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가 가을에 대한 정념(情念)의 시법을 다수 구사하는 것은 가을에 대한 그의 인생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 다음과 같은 형태의 어조로 나타고 있는 것이다.
-듬성듬성 구름 몇 조각과/ 획 지나가는 바람 한 자락이/ 가을을 쓴다(「가을 편지」 중에서)
-연못 속 개구리 고개 내밀며/ 가을을 부추긴다/ 가을의 하모니가 평화롭다(「가을과 살고 싶다」 중에서)
-사람 걸어가는 속도만큼/ 단풍은 내려오고/ 여름은 슬슬 뒷걸음질 친다(「가을 무대」 중에서)
-가끔 바람이 불어와/ 나무에 매달린 나비들을/ 세상으로 날려 보내면// 가을의 노랑나비/ 온 천지를 휘젓고 다니며/ 축제의 춤을 춘다(「가을 나비」 중에서)
-바람이 갈 길을 잃고/ 흔들거릴 때/ 젖은 낙엽 땅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는다(「가을의 위치」 중에서)
-구름은/ 하얀 마스크 쓴 채/ 붉은 단풍 열을 재는 듯// 물든 단풍만 골라/ 언제쯤 땅으로 격리시킬까/ 가을을 체크합니다(「가을 발자국」 중에서)
3. 가족애와 불망의 이미지와 형상화
강병렬 시인의 시적인 화제는 가족애에 대한 불망(不忘)의 상념(想念)에서 출발한다. 옛말에도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고 해서 한 가족이 화목해야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는 교훈이 전해지는 바와 같이 가정과 가족의 애정은 우리 예절의 기본이다.
이러한 가정과 가족들에 대한 화목과 애정의 발현은 나의 생명과도 상관하는 부모와 형제들 그리고 아들과 딸 등의 식솔들이 동거하는 형태의 우리네 가정의 보편적인 도리(道理)로서의 존경과 우애가 동반하게 된다.
그가 우선 가족애를 현현 것은 “백 년을 약속한 아내와/ 든든한 사위가 사랑팀 되고/ 과묵한 아들과 둘째 딸이/ 나와 더불어 감사팀이다// 정의파 큰딸은 윷판을 쓰고/ 아내와 나는/ 윷판 앞에서 적군이다(「사랑의 팡파레」 중에서)”라는 가족 사랑의 팡파레를 들려주고 있어서 그가 지향하는 이미지가 적나라하게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소파에 앉아 계신 어머니
늘 같은 모습이다
주황색 한복차림에
다소곳이 모은 손
그런 모습의 어머니 앞을
지날 때면
경찰서 앞을 지나는 수배자처럼
고개가 숙여진다
거실 벽에 기대어 계신
액자 속 어머니
나를 불러 세우신다
얘야,
밥은 먹고 다니냐?
--「어머니는 오늘도」 전문
먼저 어머니에 대한 담론이다. 어머니는 지금은 거실 벽 액자 속에 계신다. 어머니는 항상 “주황색 한복차림에/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나를 불러 세운다. “얘야,/ 밥은 먹고 다니냐?”는 어머니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그는 사모곡보다는 현실적인 가족애에 그의 사유를 집중하고 있다. 외할머니를 비롯하여 아들과 딸 그리고 외손자 등등 현존하면서 동행하는 가족들의 애환이 더욱 그의 사유를 확산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선 아들에 대해서는 “내가 왜 이럴까/ 전화 한 통 받은 것뿐인데/ 아빠 됐어요 합격했어요/ 5급 공채의 아들 목소리다(「전화 한 통」 중에서)”는 아들이 5급 공채에 합격했다는 전화 한 통, 통화 뒤의 기쁨이 잘 현현되어 있으며 딸에 대해서는 “딸이 주고 간 미소 한 접시/ 내 마음의 식탁에/ 진수성찬으로 차려진다(「딸의 향기」 중에서)”라는 이제 아기 엄마가 된 딸의 미소가 역시 그를 가족간의 화목에 대한 원류를 형성하고 있어서 교감을 흡인하고 있는 것이다.
부항 생태숲 벤치에 앉아
유리알같이 맑은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아내는
아주 작은 소리로
말을 건넨다
아름다운 조각들이 모인
최상의 가을 작품을
보고 있다고
햇살이 내려다보니
쪽 구름은 비켜 가고
가을하늘 파랗게 펼쳐졌다고
그 순간 바람이 엿보고
나무에게 가을을 전했는지
붉은 이파리 하나씩 떨구고 있다고
두 팔 벌린 아내는
하늘 높이 가을을 올려놓고
계곡물 한 움큼 쥐고 뿌려 버린다
--「아내의 가을」 전문
이제는 아내와의 애틋한 애정이다. 이제 아내는 외손녀 “지현이”의 외할머니가 되었다. 강병렬 시인은 해로(偕老)해온 아내가 외손녀에게 안부 전화를 받으면서 딸에 대한 정감도 동시에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아내가 어느 날 생태숲 벤치에 앉아서 가을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가을 정경을 바라보면서 가을의 전설을 들려주고 “두 팔 벌린 아내는/ 하늘 높이 가을을 올려놓고/ 계곡물 한 움큼 쥐고 뿌려 버린다”는 다소 낭만적인 어조로 아내와의 지극한 사랑을 확인하고 있어서 공감을 유로(流露)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다시 작품 「우리 이렇게 살아요」 중에서 “푸른 봄날 아내는/ 쇼파에서 시집을 보는 나에/ 여보/ 당신은 시를 쓰고/ 나는 당신을 위해 요리를 할게요/ 우리 이렇게 살아요 한다”거나 작품 「말없는 대화」 중에서도 “나도 종종 아내의 손을 잡고/ 사색을 핑계로 돌아보지만/ 그때마다 말없이 걷는다/ 대신 손바닥을 맞잡고/ 감촉 대화를 한다“는 등 아내와의 정감 넘치는 생활 양상이 통상적인 부부생활과는 다정다감한 그의 애정을 명징(明澄)하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4. 만유의 자연에서 교감하는 서정성
강병렬 시인은 만유(萬有)의 자연에 자신을 투영하는 서정시인이다. 그는 숲과 바다, 바람, 별, 물안개, 석양 등등의 자연 사물에서 그의 시안(詩眼)이 머무는 곳에서는 자연스럽게 시흥(詩興)이 발현한다.
그는 작품 「물안개」 중에서 “잠시 뒤/ 강가에 서 있는 내 얼굴에 다가와/ 덮을 것 같더니/ 살며시/ 어루만져 주고는/ 갈대숲으로 숨는다“는 “물안개”에서 음미(吟味)하는 서정적인 이미지는 새벽 강가에 자욱한 물안개 속 물새와 갈대숲이 펼쳐보이는 정경이 감미(甘味)롭기만 하다.
나무
한 곳에 자리 잡으면
생을 마감할 때까지
떠날 줄 모르는 저 곧은 고집
우두커니 서 있는 듯 보여도
바람이 가져온
사연 읽기 바쁘다
편백나무는 한 권의 시집이 되어
새파란 이파리에 사연을 담아
흔들어 댈 때
나는 눈을 감고
지난가을에 읽지 못한 사연을
오월의 봄 다시 주워 읽는다
편백숲 향기에 취해
--「숲 향기」 전문
그가 감지(感知)하는 숲, 그 향기의 이미지는 자신이 동화(同化)하는 나무들의 속성이나 우리 인간들의 삶의 형상(形象-shape)과 흡사(恰似)한 생태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편백나무는 한 권의 시집이 되어” 서로 교감하는 "숲 향기"는 “새파란 이파리의 사연”으로 변모하고 그는 거기에 심취하게 된다.
그는 이러한 “편백숲 향기에 취해”서 시각적, 후각적인 이미지의 투영 과정에서 “나는 눈을 감고/ 지난가을에 읽지 못한 사연을/ 오월의 봄 다시 주워 읽는다”는 그의 서정적 자아를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그는 작품 「하얀 침묵」 중에서 “나무는 서 있어도/ 바람과 함께/ 흔들리고 있지// 꽃들은 같은 색깔끼리/ 해님을 따라가며/서로 안부라도 묻지”라거나 「삼천포 석양」 중에서도 “삼천포 앞 바다/ 소낙비 쏟아진 뒤/ 안개는 섬과 섬 손잡아 주고// 두둥실 떠 있는 흰 구름/ 오염된 내 마음 닦아주니/ 그 무엇보다 예술적이다”는 어조로 친화적인 대자연관이 승화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한다.
바람이 화난 듯
눈발까지 데리고 와
온종일 세상을 휘젓는다
먼 산에 펼쳐진 노을
거친 바람으로 붉어져
석양을 바라보는 나에게
따스하게 다가온다
세찬 바람
진원지 알 수 없지만
두툼한 옷깃 속에 들어와
잠시 머물다 떠나가는
바람의 뒷자리에
냄새가 멈춘 곳 낙엽이 뒹군다
--「바람의 냄새」 전문
강병렬 시인은 숲이나 나무뿐만 아니라 바람과도 정밀한 소통(疏通)을 하고 있다. “바람의 냄새”라는 후각적 이미지가 생소하기는 하지만 거기에 압축된 함의(含意)는 서정성의 단순한 현현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에서 응시(凝視)한 바람의 속성이 궁극적으로 어떠한 메시지를 제공하고 있느냐하는 변화의 이미지를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바람이 화난 듯/ 눈발까지 데리고 와/ 온종일 세상을 휘젓는다”는 상황 설정에서부터 먼 산 노을과 동화하면서 거칠고 매서운 바람으로 변하지만 나에게는 따스한 온기로 다가오는 전개과정이 작품의 묘법(妙法)이기도 하다.
이처럼 바람의 행보는 불투명하지만 우리 인간들과의 관계는 다채로운 형상으로 나타나지만 결국은 “잠시 머물다 떠나가는/ 바람의 뒷자리에/ 냄새가 멈춘 곳 낙엽이 뒹군다”는 어조로 혼란스러운 세태의 갈등에서 벗어나 섭리를 순종(順從)하는 서정적인 주제를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작품 「바람아」 중에서도 “바람아/ 수줍게 매달린 몇 개의 꽃잎은/ 얼마큼 쓰다듬고 / 그대 곁에 보내줄 거니”라는 간청은 바람이 흔들어대는 세파(世波)에서 언제쯤 벗어나서 화평하고 온화한 삶이 지속될 수 있는가하는 다소 불안감이 발현하는 기원의 의지가 담긴 바람의 유형(類型)이 잘 현현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강병렬 시집 『바람의 무게』에서 도출된 의식의 흐름은 먼저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자아의 인식에서부터 계절의 순환적인 의미의 탐구와 가족애의 절절한 형상의 재생 그리고 자연에서 교감하는 서정성을 동시에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처럼 시는 영국 시인 리처즈가 말한 바와 같이 일상생활에서 보편적인 사유로 창출하는 생활의 언어적 표현이기 때문에 시인들의 본질적인 감각과 정서의 지향점이 바로 인본주의(humanism)의 구현에서 탐색되어야 한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시집 출간을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