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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유학의 길
소년이 슬리퍼를 질질 끌고 한길을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소년은 처마 밑에서 소나기를 피했다.
청년이 트레이닝복을 입고 운동화를 신은 채 흙탕길을 걸었다.
그런데 먹구름이 시커멓게 몰려오는가 싶더니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청년은 십 리 길을 단숨에 뛰어갔다.
중년 남성이 신사복 차림으로 구두를 신고 발걸음을 옮기며 보도을 걸었다.
그런데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떨어졌다.
중년 남성은 보도에서 나뭇잎을 주워 깊은 생각에 잠겼다.
석이는 자동차에서 나와 고개를 들어 구름 한 점 없는 중천에 덩두렷이 떠오른 달을 바라보았다. 도시의 가로등에서 벗어난 둥근 달을 보니 실로 오래간만에 석이의 감성을 불러일으켜 속말을 자아냈다.
'시 한 수 지어도 되겠다.'
석이가 속말을 하며 손님을 찾는 듯 두리번두리번했다. 차량 소통이 원활하고 인적이 드문 밤늦은 시간에 언제 손님이 이리 올지 의문스러워 차 문을 열고 들어와 운전석에 앉았는데 휴대전화 벨이 울리다가 그쳤다. 휴대전화를 들어 발신자를 확인해 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종이는 술에 취해 혀가 꼬부라진 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형~, 어디~세요~?"
"그러는 넌 이 밤중에 웬 전화냐?"
"ㅇㅇ술집 앞인데~ 이리 오실 수~ 있으세요~?"
"알았어. 십 분 정도 걸릴거야."
석이는 자동차를 재빠르게 몰고 포장 도로를 쌩쌩 달렸다. 포장 도로가 한적하여 자동차가 막힘 없이 술집 앞에 당도했다. 종이는 벽에 몸을 기대어 고개를 떨어뜨리고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렸다. 석이는 종이 앞에 자동차를 바짝 들이대고 차창을 열어 소리쳐 불렀다.
"종이야, 차에 타."
"어! 금방~ 오셨네요."
종이는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취해 비틀거리며 자동차를 탔다. 석이가 술집 앞을 출발하여 유흥가에서 벗어나 종이에게 말을 붙이려고 하는데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종이는 자신의 휴대전화 벨이 울리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석이가 종이에게 전화를 받으라고 일러 주었다.
"전화 왔어."
종이는 휴대전화를 통해 발신자를 확인하고 전화를 재빨리 받았다.
"네, 엄마!"
전화 수화기를 통해 어머니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종이는 어머니의 꾸지람이 듣기 싫어 귀에서 휴대전화를 떼었다가 얼른 대응했다.
"지금 택시 타고 집에 가고 있어요. 엄마 사랑해요~."
종이는 전화를 끊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석이는 종이의 행동을 의아하게 생각하고 물어 보았다.
"아니, 아깐 혀가 안 돌아가더만 어머니 전화는 말짱한 정신으로 말하네."
"흐흐~, 우리 엄마 화 나시면 저 고달퍼요."
종이가 석이의 질문에 대답하더니 잠을 자려고 눈을 감았다. 석이는 종이가 잠들지 못하게 말을 붙였다.
"야, 노는 날 전에 술을 마시던가 하지 너 내일 근무 안하니?"
"일하러 나가요. 아, 회사가 쉬는 날은 가족과 함께 해야 한다며 주중에 회식을 하네요."
"잘하는 짓이다! 너 그러다 내일 회사에 출근할 수 있겠니?"
"이게 한두 번인가요."
자동차가 아파트 앞에 멈추자 석이에게 돈을 주려고 종이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종이는 가죽 지갑을 펼치고 택시 요금을 물어 보았다.
"얼마예요?"
"호출비까지 한꺼번에 냉큼 줘."
"아, 진짜 형 사랑해요~!."
종이는 차 문을 열고 후닥닥 달아났다. 석이는 당장 돈을 내놓지 않으면 고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너 그러면 신고한다."
"형, 고마워요. 빠이빠이~."
석이는 종이와 아파트 앞에서 헤어지고 자동차를 몰아 그 자리를 떠났다. 전조등이 칠흑 같은 어둠을 저만치 밀어내고 자동차가 인적 없는 포장 도로를 쌩쌩 달려 원룸에 당도했다. 석이는 차 문을 열고 밖에 나와 건물 안으로 들어가며 왠지 고독을 느꼈다. 석이의 고독한 처지를 바이 모르는 바 아니나 종이 역시 그와 함께 할 형편이 아니였다.
종이는 자명종 소리를 듣고 잠결에 버튼을 눌렀다. 어머니가 세상 모르고 자는 종이를 깨우자 그는 반사적으로 시계를 보고 깜짝 놀라 침대에서 일어났다.
"앗, 큰일났다."
종이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욕실 안으로 들어가 양치와 세수를 빨리하고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어머니는 종이에게 눈을 주고 아침을 먹고 회사에 출근하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종이는 아침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집을 나서며 3가지를 꼭 챙겼다. 첫째 휴대전화, 둘째 지갑을 셋째 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런데 온 집안을 찾아보아도 휴대전화가 없어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했다.
"엄마, 제 휴대폰 못 보셨어요?"
"니가 쓰는 휴대폰을 내가 어떻게 아니?"
"우리 친엄마 맞아요?"
"내가 널 다리 밑에서 주워 와 불쌍해서 키웠어."
종이는 어머니에게서 그 이야기를 귀가 따갑도록 들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멍하니 어제 밤 일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전화기가 눈에 띄었다. 수화기를 들고 번호를 꾹꾹 누르자 신호는 가는데 휴대전화를 받지 않았다. 종이가 수화기를 전화기에 내려놓으려고 하는 찰나 낯익은 음성이 들렸다.
"석이 ‥‥, 아니 종이 휴대폰입니다."
"킥킥~, 내 휴대폰을 형이 왜 가지고 있어요?"
"니가 어제 차에 두고 도망 갔잖아."
종이는 석이가 언성을 높이자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고 도움을 청했다.
"잘 됐네요. 저 좀 태우러 오세요."
"그 대신 어제 거까지 돈 주는 거다."
"알았어요. 빨리 오시기나 해요."
종이는 전화를 끊고 현관문을 열어 아파트를 나섰다. 석이가 자동차를 거칠게 몰아 아파트 입구에 정차하자 종이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석이는 종이가 자동차를 타자마자 말을 걸지 않고 곧바로 회사로 쌩쌩 달렸다. 허구한 날 교통 법규 위반을 일삼는 직업이라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빠른 시간 안에 회사에 당도했다. 종이가 자동차에서 급히 내리려고 하자 석이가 그의 허리춤을 꼭 잡고 돈을 요구했다.
"야, 넌 이게 자가용인 줄 아니?."
"형, 집에서 급하게 서두느라 지갑을 빠뜨리고 왔어요. 다음에 꼭 줄게요."
"정말이지?"
"아, 어차피 퇴근할 때도 형 차를 타야겠네요. 그 때 줄게요."
"알았어. 오늘 밤은 나랑 함께 자는 거야."
종이는 뜻하지 않은 말을 듣고 석이에게 도와 달라고 통사정했다.
"어제 술 마시고 집에 늦게 들어갔는데 오늘 외박하면 울 엄마 삐친단 말예요. 한동안 엄마랑 말 안하고 살아 봐요. 형, 제발 이 다음에 ‥‥ 이러다가 나 단명하는 거 아닌가?"
"알았어. 어머니 때문에 내가 참지."
종이는 차 문을 열고 자동차에서 내리면서 주절거렸다.
"내가 아무래도 악마의 꾐에 빠진 거 같아."
"으하하~"
출근 시간이 끝나고 차량 소통이 원활한 오전, '김창완의 아침 창'에서 Anthony Quinn & Charlie 의 Life itself will let you know가 흘러나왔다. 석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바로 그 무렵에 에프엠(FM)방송에서 자주 들었던 음악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그래서 자동차를 갓길에 멈추고 비상등을 켠 채 음악을 감상했다.
해가 동쪽에서 떠 중천에 오래 머물러 사람들은 목이 타서 몹시 갈증이 났다. 가로수는 잎의 호홉 작용과 탄소 동화 작용으로 영양을 공급 받고 성장했다. 사람들은 가로수 그늘에서 쉬며 조금이나마 땀을 식혔다. 원색의 파라솔로 해를 가리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여름의 무더운 날씨는 개의치 않고 바지런했다. 아주머니는 가족을 위하여 억척같이 양손에 비닐 봉투를 들고 종종걸음쳐서 집으로 향했다. 많은 사람들이 한길을 오고가는 옆으로 열기를 내뿜으며 자동차가 달렸다. 오후의 풍경이 아름답게 펼쳐지는 가운데서도 고달픈 세상살이는 망인(亡人)을 잊은 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반이는 철이를 편의점에서 만나 서로 손을 흔들어 인사를 나누었다. 철이와 선아가 얼굴을 마주 보고 다정히 대화하는 것을 보고 반이가 궁금히 여겼다.
"누나는 누구야?"
"오빠 친한 친구!"
선아의 대답을 듣자마자 반이는 토라져서 말도 않고 획 돌아섰다. 철이는 출입문을 열고 편의점을 나가는 반이를 쫓아갔다. 선아는 말없이 반이의 모습을 바라보고 싱겁게 웃었다. 그리고 창을 통해 철이와 반이가 대화하는 동안에 좋은 소년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철이가 몇 마디하자 반이는 표정이 굳어졌다.
"형이 외국에 나가서 선아에게 일을 가르치고 있는 거야."
"거긴 왜 가는데?"
"어학 연수도 하고 전공 분야 공부하면서 견문을 넓히려고 가."
"나도 갈래."
"그게 니 맘대로 되는 건 줄 아니? 오늘은 바쁘니까 나중에 만나서 밥이나 먹자."
철이는 출입문을 열고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반이도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진열장에서 소주병을 꺼내 손에 들고 계산대 위에 놓았다. 선아는 반이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잘못을 지적했다.
"미성년자한테는 술 안 팔아."
"나도 사람인데 왜 안 파는 거야. 울적한 마음을 달래고 싶은데 어른들만 그러라는 법이 어딨어."
"아무리 그래도 술은 안 돼."
반이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울먹울먹하더니 애매하게 생사람을 가지고 시비를 걸었다.
"어른들이 정한 법에 내가 왜 제지를 받아야 하지?"
"그건 그 사람들한테 잘잘못을 따져. 나한테 그래 봐야 아무 소용 없어."
철이는 계산대 위에 놓인 소주병을 들어 도로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반이가 멀거니 철이의 행동을 바라보았다. 철이가 반이 쪽으로 다가오자 흑흑 흐느껴 울었다. 철이는 반이를 가슴에 안아 손으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손님이 출입문을 열고 들어오자 반이는 울음을 그치고 철이 가슴에서 벗어나 밖에 나갔다. 반이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보도블록에 눈길을 주며 무작정 걸었다.
저녁 무렵, 석이는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반이가 한길을 걸어가는 것을 발견했다. 반이는 걸음을 멈추고 얼빠진 사람처러 멍하니 먼산만 바라보고 있어 석이는 자동차를 정지했다. 차 문을 열고 밖에 나가 반이에게 성큼성금 다가갔다. 반이는 발소리를 듣더니 그제야 멀리 둔 시선을 거두고 표정을 바꾸었다. 석이는 반이의 표정을 살펴보고 짐짓 모른 체했다. 반이를 건드리면 참았던 울음보가 터질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반이는 석이의 허리를 와락 껴안고 흐느끼었다.
"아빠, 흑흑~,"
석이는 반이가 한참 울 수 있도록 내버려두었다. 반이의 울음이 누그러지자 석이가 어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물어 보았다.
"반이야, 왜 그러니?"
"아빠, 형이 외국에 간데요."
석이는 말없이 반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에 굳은 결심을 한 듯 반이의 손목을 더위잡고 자기 쪽으로 당겼다.
"아빠랑 함께 가자."
"어디요?"
"가 보면 알아."
석이는 반이를 자동차에 태우고 사진관을 향하여 핸들을 왼쪽으로 돌렸다. 자동차가 시내에 진입해 사진관 앞에 멈추자 2남자가 거의 동시에 차 문을 열었다. 석이는 반이의 손을 꼭 잡고 사진관 안으로 들어가 주인에게 머리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네, 어서 오세요."
"사장님, 제 아들 여권에 붙일 사진 좀 찍어 주세요."
"아빠~!"
반이는 석이의 허리를 와락 껴안고 너무 기뻐서 어찌할 바을 몰랐다. 석이는 반이와 눈을 맞추고 진심 어린 투로 말했다.
"우리 반이 사진 잘 나오게 찍어야 돼."
"예."
반이가 미소를 지은 표정이 보기가 좋아 석이도 저절로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사진사는 반이의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잡아 주고 사진을 찍었다.
"자, 하나 둘 셋~!"
찰칵~
석이는 반이와 함께 사진관에서 나와 자동차를 몰고 편의점을 향하여 떠났다. 신호등에 빨간 불이 들어오자 자동차가 정지선 앞에 멈추었다. 석이는 반이에게 철이의 근무 시간을 물어 다음 행동을 구상했다.
"반이야, 철이 형 아직 편의점에 있을까?"
"예, 여덟 시에 일이 끝나니까 만날 수 있어요."
"알았다."
자동차가 편의점 앞에 멈추자 석이는 반이를 안으로 들여보내 철이를 밖으로 불러냈다. 철이는 석이를 보고 환한 얼굴로 인사했다.
"아버님, 안녕하세요?"
"그래, 그동안 철이 잘 지냈니?
"예. 근데 어쩐 일로 오셨어요?"
석이는 하고 싶은 말을 주저하지 않고 시원시원하게 철이의 의향을 떠보았다.
"선약이 없다면 나와 같이 밥이나 먹자."
"예, 그러세요. 선아한테 말하고 나올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으응, 그래."
반이는 아까부터 싱글거리며 석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석이는 2학생을 데리고 장소를 식당으로 옮겼다. 석이 옆에 반이가 앉아 철이와 얼굴을 마주 보았다. 석이는 2학생에게 먹을 것을 물어 보고 음식을 주문한 후에 본론을 말했다.
"이번에 철이 외국 갈 때 우리 반이를 데려갔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좀 안 될까?"
"저는 현재 출국할 일정을 잡은 상태라 어려울 것 같아요."
"일정이 늦어지는 피해는 내가 다 보상할게."
철이는 석이의 굳건한 의지를 눈치채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서빙하는 여성이 식탁에 주문을 받은 음식을 차려 놓고 제자리로 물러갔다. 석이와 반이는 말없이 철이의 얼굴을 바라보고 어떤 대답이 나올까 조마조마했다. 철이는 석이 제안을 선선하게 받아들였다.
"아버님 생각이 정 그러시다면 다른 방안을 알아 볼게요."
"철이야, 정말 고맙다! 근데 부모님께는 뭐라고 말씀 드릴거니?"
"저의 어머니께서는 제가 열 여덟 살 때부터 스스로 결정 짓기를 원하셨어요."
석이는 감사의 뜻을 표하며 반이 일에 대해서 한시름 놓았다.
"아, 다행이다. 아무튼 이번 일 잘 부탁한다."
"예, 저녁 맛있게 먹겠습니다!"
반이는 미소가 입가에서 떠날 줄 모르고 철이와 함께 외국에 가는 상상을 했다. 3남자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다.
석이는 철이와 아침해 아파트 입구에서 헤어지고 자동차를 유턴(U-turn)했다. 자동차를 몰고 외곽 포장 도로를 쌩쌩 달려 연아가 사는 아파트에 당도해 반이에게 심부름을 보냈다.
"반이야, 엄마 좀 나오시라고 해."
"예, 아빠!"
반이가 자동차에서 내려 아파트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잠시 후에 연아가 아파트에서 나와 석이와 눈인사를 나누었다. 석이가 웃음을 띠고 연아의 안부를 물어 보았다.
"당신 잘 지내고 있는 거요?"
"예, 반이 아빠 건강은 어떠세요?"
석이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심경을 전했다.
"당신한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왜요?"
"혼자 자유롭게 살 수 있게 해줘서요."
"진심으로 말하는 거에요?"
석이는 긍정적인 표시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연아는 반이에게 들어서 대강 알고 있는 이야기를 석이에게 자세히 물어 보았다.
"반이가 뭐라고 말하는데 하나도 못알아듣겠어요."
"아, 그거요. 반이를 외국에 보내려고 해요. 아들과 함께 어떻게 해서든 살아 보려고 아등바등 애쓰지 말고 당신도 나처럼 홀가분하게 혼자 살아가는 기회를 주려고요."
"돈을 어떻게 장만하고요."
"아무래도 내일부터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야 하고, 나와 같이 철이가 반이 데리고 서류를 제출하러 다녀야 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거에요."
"제가 도울 일은 없나요?"
석이는 연아의 얼굴을 바라보고 걱정 어린 눈빛으로 위로의 말을 했다.
"당신은 어떻게 혼자 살지나 궁리하세요."
"반이 아빠, 혼자 살면 어떤 게 좋은데요?"
"제일 좋은 건 옷을 홀딱 벗어도 눈치 안 보고 생활할 수 있어서 좋아요. 히~."
연아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호호 웃더니 반이의 심경 변화를 일러 주었다.
"반이가 요즘 들어 부쩍 짜증을 내며 아빠를 왜 뺏겼냐고 저한테 대들어요."
"고 녀석 참, 만약에 반이가 나하고 산다고 했으면 큰일날 뻔 했어요."
"왜요?"
"난, 택시를 운전해서 돈을 벌어 당신에게 갖다주면 아버지로서 책임을 다한 걸로 생각하고 집안 살림과 반이 교육은 당신이 다 알아서 할 줄 알았어요. 근데 혼자 살고 보니 세 식구가 살아가면서 더 잘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아 있어요."
연아는 석이의 말이 이치에 맞아 철이 들어 보였다. 그래서 환한 얼굴로 석이의 의중을 떠보았다.
"집으로 들어가서 차 한 잔 하세요."
"아녀요. 일찍 집에 들어가 쉴래요. 그럼 또 만나요."
석이는 연아와 아파트 앞에서 헤어지는 인사하고 등을 돌려 자동차를 탔다. 자동차의 변속 기어를 넣고 가속 페달을 밟아 속력을 올렸다. 석이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고 나니 마음의 안정을 얻어 아주 홀가분했다.
연아는 침대에 누워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몇 번씩 돌아누웠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와 거실을 가로질러 반이 방으로 갔다. 반이는 연아가 깊은 잠을 자고 있을 시간에 컴퓨터 게임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머리에 헤드폰을 쓰고 컴퓨터 게임을 하며 무아경에 빠져 있는데 모니터에 2사람의 상(像)이 얼비치었다. 반이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 등골이 오싹하여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고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으악~!"
반이는 머리에 헤드폰을 쓴 채 날랜 동작으로 이불 속에 쏙 들어갔다. 연아는 반이가 컴퓨터 게임하는 것에 눈길을 주고 청소년들이 중독될 만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순식간에 벌어진 반이의 행동에 연아도 깜짝 놀라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연아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고 냉랭한 어투로 반이에게 뒤처리를 지시했다.
"컴퓨터 끄고 자."
"예."
반이가 이불을 한쪽으로 제치고 침대에서 일어나 헤드폰을 벗으며 앙살피웠다.
"엄마 땜에 간 떨어질 뻔 했잖아요."
"한번 더 그러면 컴퓨터 내다 버린다."
"죄송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반이는 컴퓨터를 끄고 침대에 누워 이불을 끌어다 덮었다. 연아는 말없이 반이의 얼굴을 바라보고 볼을 쓰다듬어 주었다. 연아가 방에서 나와 냉장고 문을 열어 물을 마시고 있는데 반이가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연아는 물을 마시다 말고 반이의 의중을 떠보았다.
"왜 그러니?"
"엄마, 저 유학 가지 말까요?"
"아니, 엄마 속 썩이는 아들 없이 편하게 살아 보게 꼭 가라."
"히히~,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우리 반이도 잘 자!"
모자(母子)는 잠자리에 들어도 감정이 상반되어 연아는 반이의 유학 문제를 걱정하고, 반이는 어두운 밤 침대에 누워 상상의 날개를 마음껏 폈다. 날이 막 밝을 무렵 모자는 히프노스(Hypnos)의 유혹에 빠져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잠을 잤다.
석이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가운데 시간이 나는 대로 짬짬이 볼일을 보았다. 제일 먼저 은행에서 돈을 대출하고, 철이와 반이를 동반하여 점심을 먹고 유학을 가는데 필요한 절차를 밟았다. 경험이 있는 철이가 서류 작성을 도와 주어 유학의 길을 계획대로 착착 진행했다. 이제부터 시간이 많이 걸려 2학생은 유학을 꿈꾸며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철이는 정아의 허락을 받아 반이와 함께 아파트에서 생활했다. 반이는 철이와 어울려 즐거운 나날을 보내며 매일같이 지냈다. 저녁 무렵 철이는 불현듯이 종이 생각이 나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가는데 종이가 휴대전화를 받지 않아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철이의 휴대전화 벨이 울려 늦기 전에 얼른 받았다.
"철이입니다."
"아, 나 종이 형인데 잠깐 볼일 보러 나간 사이에 전화했었네?"
"예, 형 좀 만났으면 해서요."
종이는 대답을 망설이지 않고 시원시원하게 응대했다.
"이왕 말 나온 김에 오늘 퇴근하고 저녁이나 먹자."
"예, 그렇게 해요. 참, 전 반이랑 함께 나갈테니까 형이 아버님께 전화로 연락하세요."
"그래, 이따 만나자."
종이는 전화를 걸어 석이의 의향을 물어 보았다. 석이는 월례회에 참석한다는 핑계로 종이의 초대를 사양했다. 종이는 기대에 어그러져 마음이 서운하고 불만스러웠다.
3남자는 레스토랑에서 만나 비프스테이크(beefsteak)를 주문하고 샐러드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반이는 종이와 눈길이 마주칠 때마다 눈웃음쳐 그의 마음을 강하게 끌었다. 종이는 반이의 얼굴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고 주의를 주었다.
"반이 너, 사람 홀리지 마."
"내가 언제?"
반이는 종이에게 되받아 소리치더니 이내 화제를 돌렸다.
"참, 내가 문제 낼게 형들이 맞춰 봐."
"어떤 문젠데?"
반이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번갈아 2남성의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수박 부부가 호박과 함께 사는데 과연 이 호박의 정체는 뭐게?"
종이는 말없이 반이가 회심의 미소를 짓는 얼굴을 바라보고 호박의 정체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철이가 즉시 답을 말했다.
"그 호박은 바로 입양됐어!"
"헉, 그걸 어떻게 ‥‥?"
철이의 명쾌한 대답을 듣고 반이는 말문이 막혀 멍하니 앉아 있다. 종이는 철이의 답을 듣고 보니 수긍이 가 박수를 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야, 철이 최고다! 근데 그걸 어떻게 생각해 낸 거니?"
"수박 얘기는 이제 단련이 됐거든요."
종이는 으하하 웃음을 터뜨리고, 철이는 득의에 찬 미소를 보였다. 식탁 위에 비프스테이크가 놓이자 철이는 양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쥐고 해외 유학을 가는 것을 종이에게 알렸다.
"저와 반이가 조만간 외국에 나갈거예요."
"오, 그래? 멋쟁이들 축하해!"
종이는 덧붙여 2학생에게 건강 관리에 실수가 없도록 단단하게 당부했다.
"거기 가면 몸이 축나지 않게 잘 먹고 사이 좋게 지내야 해."
"예, 형한테 전화로 연락할게요."
"그래, 일부러 신경 쓸 필요는 없고 마땅히 할 데 없으면 해라."
철이는 소리 없이 빙그레 미소지어 보였다. 반이가 무슨 말을 하려다 종이를 보더니 주춤했다. 식사 후에 반이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종이에게 말을 건넸다.
"형!"
"응, 왜?"
"우리 아빠한테 잘해 줘."
종이는 반이에게 뜻하지 않은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니가 그걸 ‥‥."
"언젠가 잠이 오지 않아 베란다에서 멀리 한눈에 보이는 밤 풍경을 보고 있었는데 형이 아빠와 아파트에서 헤어지는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됐어."
반이는 잠시 말을 멈추고 종이의 얼굴을 한 번 보더니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동안 아빠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가 퍽 궁금했었는데 형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왠지 맘이 편해졌어. 난 아빠를 잃었다가 되찾으면서 두 형을 얻게 되어 너무 기뻐."
종이는 반이의 얼굴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침묵을 지켰다. 철이가 반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대견하게 여겼다.
"아주, 제법 어른 같은 말을 하는구나."
반이는 칭찬을 듣자 신바람이 나서 어깨가 저절로 으쓱거려졌다. 3남자는 비프스테이크를 맛있게 먹으며 제각각 깊은 상념에 잠겼다.
3남자는 레스토랑에서 나와 한길을 천천히 걸었다. 3남자 중 가운데에 반이가 종이와 철이의 손을 꼭 잡았다. 철이가 잡은 손을 뿌리치며 저만큼 떨어져 있자 반이가 그것을 못마땅히 여겼다.
"어! 못생긴 형이 튕기고 있어?"
철이가 뒤를 돌아보고 어이없는 표정을 짓자 종이가 반이를 두둔했다.
"너 사람 볼 줄 안다."
"형, 누가 얼굴이 잘생겼나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 볼까요?"
철이가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반이는 2남성간에 시비에 개입했다.
"내가 물어 볼게."
종이는 그 일에 간여하지 않게 반이를 얼싸안으며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도대체 넌 누구 편에 서는 거니?"
반이는 갑작스런 종이의 질문에 어리둥절하여 한동안 말문이 막혔다. 2남성은 반이의 난감한 표정을 보면서 함박웃음을 지어 깜깜한 밤하늘에 퍼져 나갔다. 종이는 2학생을 아침해 아파트까지 바래다 주고 한길을 홀로 걸어갔다.
철이는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침대 위에 반이가 온데간데없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아는 부엌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다가 방문 열리는 소리가 나자 뒤를 돌아다보았다. 철이는 정아와 얼굴을 마주하고 아침 인사했다.
"어머니,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반이 깨워서 아침 먹자."
"예, 근데 반이 어디 갔어요?"
정아는 손가락으로 안방 쪽을 가리켰다. 철이가 안방 문을 열고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반이는 이불을 힘껏 껴안고 아무것도 모르고 쿨쿨 자고 있다. 철이는 미소 띤 표정으로 반이의 엉덩이를 툭툭 치며 잠을 깨웠다.
"반이야, 일어나!"
"응, 조금만 더 자고 ‥‥."
반이가 어리광부리다가 철이의 음성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눈을 번쩍 떴다.
"어! 형이 여기에 왜 있어?"
"나 참, 여기가 니네 집인 줄 아니?"
반이는 침대에서 일어나 주위를 살펴보더니 멋쩍게 씩 웃었다. 2학생은 안방에서 나와 반이가 정아에게 머리 숙여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오, 그래! 우리 막내 잘 잤니?"
"예."
"자, 밥 먹자."
반이는 세수를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철이는 정아가 식탁 위에 아침 식사를 차리는 것을 도왔다. 3사람이 식탁에 모여서 막 밥을 먹으려는데 정아가 지난밤에 관해 입을 열었다.
"우리 막내 때문에 나 한숨도 못 잤어."
반이는 정아의 말뜻을 눈치채고 딴전을 피우며 밥을 먹었다. 철이는 실상을 알고 싶어 정아에게 그것을 물어 보았다.
"어머니, 왜요?"
"막내가 엄마 젖가슴을 손으로 더듬는 바람에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철이는 호탕하게 으하하 웃음을 터뜨리더니 반이에게 주의를 주었다.
"우리 아버지께서 니가 한 행동 알면 혼날 줄 알아."
"히~."
시간은 태곳적부터 내려온 우주의 명령을 어김없이 실행했다.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 석이는 2학생이 출국하는 날에 맞추어 국제 공항을 향하여 떠났다. 가족이 나들이를 가는 것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자동차를 운전했다. 철이는 유학을 경험해 보지 않아 외국 생활의 이모저모를 구상하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반이는 철이 곁에 바짝 붙어 뭐라고 혼자 종알거리면서 흥얼거렸다.
"우~♪ 우~♬."
자동차가 국제 공항 출입구 앞에 멈추었다. 석이는 자동차에서 나와 트렁크를 열고 2학생의 캐리어 가방을 꺼냈다. 철이는 캐리어 가방을 석이로부터 건네받으며 헤어지는 인사말했다.
"아버님,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끼니 거르지 말고 몸 건강해야 된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석이는 반이에게 며칠 동안 외국을 여행하고 돌아올 것처럼 대했다.
"반이는 형 속 썩이지 말고 말 잘 듣어. 알았지?"
반이는 대꾸조차 않고 가만히 서서 석이를 응시했다. 석이가 반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뒤도 안 돌아보고 자동차를 탔다. 반이는 자동차가 포장 도로를 사르르 미끄러지듯 떠나는 것을 보고 공중전화로 단숨에 뛰어가 수화기를 들고 휴대전화 번호를 눌렀다. 석이가 국제 공항에서 벗어나려고 하는데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석이입니다."
"아빠, 저랑 헤어질 때 울까 봐 일부러 그냥 가시는 거죠?"
"야 인마, 아니다."
석이는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었는데 반이의 말을 듣고 나니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반이와 계속해서 통화하면 다 들통날 것 같아 엉뚱한 소리만 했다.
"철이 형 바꿔 봐."
"예, 형 전화 받아 봐."
"네, 아버님?"
석이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로 철이에게 반이를 부탁했다.
"혹 반이가 너한테 짐이 되면 언제든 데리고 와라."
"그런 걱정하지 마세요. 오히려 제가 심심하지 않아서 좋은 걸요."
"반이한테 잘해 줘서 여러모로 고마워!"
"아녀요. 아버님 항상 몸 건강하시고, 자주 전화 드릴게요."
철이가 전화를 끊으려고 하자 반이가 복받치는 감정을 참지 못해 울음을 터뜨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엉엉~. 아빠, 사랑해요~!"
석이는 휴대전화를 통해 반이의 돌발적인 울음소리를 들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어느새 눈물이 눈시울을 적셔 자동차를 살살 몰았다. 철이는 국제 공항에서 목놓아 크게 우는 반이를 윽박질러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
"너 울면 안 데리고 간다."
반이는 울음을 뚝 그치고 울먹이는 소리로 불만을 표시했다.
"나쁜 형, 내 감정을 무우 자르듯이 싹둑 잘라 버리냐?"
철이는 웃음을 참지 못해 킥킥거리며 반이의 볼에 눈물이 맺힌 것을 손으로 쓱 닦아 주고 매우 사랑스러워했다.
"아유, 귀여워라!"
"몰라 몰라~."
국제 공항 안에는 출국을 하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이어 서 있다. 철이와 반이는 출국 수속을 마치고 기내로 들어가 좌석에 앉아 이륙하기를 기다렸다. 여객기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여 제트 엔진에서 발생하는 굉음이 들리더니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지상에는 자동차의 행렬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석이는 장거리 운행으로 심신이 피로해 휴게소에 들렀다. 커피를 사서 마시며 먼눈을 팔고 있었는데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석이입니다."
"형, 종이예요. 지금 어디세요?"
종이는 2학생의 근황이 궁금하여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석이가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엉뚱하게 나왔다.
"너 지금 근무 시간 아니니?"
"예, 맞아요. 형, 지금 심정이 어때요?"
"그러지 않아도 아까 반이가 나를 울리더니만 너까지 내 심기를 또 건드리냐? 전화 끊어!"
"으하하~, 형이 어린애예요? 이젠 나이를 먹었으니 그 성질 좀 버릴 때도 되지 않았어요?"
"나 전화 끊는다."
종이는 석이가 전화를 끊기 전에 얼른 의중을 떠보았다.
"오늘 저녁에 술 한잔 할래요?"
"정말? 나야 좋지~!"
연아는 아파트 앞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산사(山寺)로 향했다. 자동차가 시내에서 벗어나 산사로 가는 임로(林路)에 접어들었는데 택시 앞에서 승용차가 알짱거려 앞지르기를 못하는 운전사가 짜증을 냈다. 승용차와 택시는 거의 동시에 산사 주차장에 멈추었다. 정아가 승용차에서 내리며 택시에서 내리는 연아를 힐끔 쳐다보았다. 2여성은 돌계단을 밟고 올라 산사의 대웅전 안으로 들어갔다. 마룻바닥에 넓죽 엎드려 절을 올리며 소원을 이루어 주기를 빌었다. 경건한 마음과 믿음을 가지고 소원을 청하고 나니 생활에 한층 여유가 생겼다. 그러나 목이 몹시 말라 대웅전에서 나와 옹달샘으로 갔다. 정아는 아까부터 연아의 동작 하나하나를 눈여겨보더니 급기야 그에게 말을 붙였다.
"저, 혹시 연아씨 아닌가요?"
"예, 맞아요. 근데 저를 어떻게 아세요?"
"어머나, 내 짐작이 맞았구나. 나 정아야."
"뭐, 니가 정아라고? 이게 꿈이냐 생시냐. 어머, 정말 반갑다 얘."
연아는 뜻하지 않게 정아를 산사에서 만나자 반색하며 와락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정아는 연아의 등을 도닥도닥해서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연아는 정아의 얼굴을 만져 보고 그동안 달라진 모습을 말했다.
"너 몰라보게 많이 변했어."
"이젠 나이를 먹었잖니. 근데 넌 예전의 그 모습 그대로구나."
"나도 웃을 때마다 주름살이 잡히고 나이 들어 보여."
2여성은 옹달샘에서 바가지로 물을 떠 서로 먼저 마실 것을 권하였다. 옹달샘 가장자리에 앉아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며 재회의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정아는 꿈 많은 소녀 시절을 돌아보며 예전의 연아 얼굴을 떠올렸다.
"난 요즘도 가끔 널 생각하며 학창 시절을 그리워하곤 해."
"그래, 난 그런 감성 잊어버린지 오래 됐어. 근데 넌 산사에 어쩐 일로 왔니?"
"아들이 유학 가서 불안한 마음을 덜어 놓으려고 찾아왔어."
"어! 나도 그런데."
정아는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어 사실인지 아닌지 연아에게 확인해 보았다.
"혹시 니 아들 이름이 반이 아니니?"
"니가 그걸 어떻게 ‥‥ 그럼 니가 철이 엄마구나."
"어머, 우리 아들들 통해서 벌써 만나고 있었네."
연아는 학창 시절을 돌이켜 보며 정아의 기억에 남아 있는지 물어 보았다.
"우리 시험 공부하다가 이다음에 결혼하면 아들딸 낳아 사돈 맺자고 했는데 기억 나니?"
"어렴풋이 기억이 나. 근데 둘 다 아들이라서 이걸 어쩌지?"
2여성의 웃음소리가 산사의 정적을 깨뜨리었다. 매미와 풀벌레가 2여성의 웃음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제 나름 울음소리를 냈다. 2여성은 산사 주차장에서 승용차를 타고 한적한 시골 길을 달렸다. 승용차 안에서 수다떨어 바람이 스치며 지나가는 소리와 엔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길가에 때 이른 가냘픈 코스모스가 피어 바람결에 한들거렸다.
어지러운 세상은 주어진 테두리에서 각자의 일상을 만들어 주었다. 석이는 저녁에 종이를 만날 생각에 가속 페달을 밟아 속력을 냈다. 종이는 석이를 만날 생각을 하니 근무 시간이 더디게 갔다. 철이와 반이는 마음이 들떠 밤을 세웠다. 여객기에 몸을 실고 태평양 상공을 비행할 때 단잠이 들었다. 2학생은 꿈을 꾸면서 해외 유학의 길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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