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를 칠 때 발 받침대가 필요해서>
언젠가, 어디에선가, 한학(漢學)을 전공하는 어느 학자가 쓴, 사전(辭典)과 관련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짧은 글이었는데, 참 감동적이었다. 이 학자의 스승은 사전 찾아보는 일을 공부의 시작이자 끝으로 보았던 것 같다. 이 학자를 비롯한 제자들이 질문을 하면 스승은 항상 사전을 찾아보라고 말했다고 하며, 제자들이 사전을 찾아 알아내면 스승은 “거 봐. 거기 다 있잖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니 스승 자신은 사전을 얼마나 많이 뒤적거렸겠는가? 사전을 여러 권 없앴다던가? 스승이 타계한 후 제자는 스승이 쓰던 사전을 물려받아, 누더기처럼 되어버린 그 책자를 정성껏 손질하여 자기의 책꽂이 한 가운데에 모셔두고 있다고 한다. 그 학자는 사전만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사전 찾기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까지 물려받아,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걸핏하면 사전을 찾아보게 하고, “거 봐. 거기 다 있잖아”라고 말한다고 한다.
그 글에는, 스승이 쓰던 사전 가운데 하나로, 대한화사전(大漢和辭典)이라는 것이 나온다. (일본 사람들은 자기들을 칭할 때 ‘화’(和)자를 쓰니, 그것은 한일(漢日)사전인 셈이다.) 감동적인 것으로 치면, 이 사전의 편찬 경위가 한 수 위라고 보아야 하겠다. 이 사전이 세계 최고의 한자 사전이라는 점은 중국인들도 인정하지만, 이 사전이 그렇게 훌륭하게 만들어진 것은 편찬자 한 사람의 무서운 집념 덕분이다. 편찬자인 모로하시는 1930년대를 전후한 10여 년에 걸쳐서 제 1권을 만들어내었는데, 그 과정에서 백내장을 앓아 한 쪽 눈의 시력은 완전히 잃고 다른 한 눈의 시력마저 크게 약화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이 사람은 그 후 20년에 걸쳐 마지막 제 13권까지 완성해 내었다. (사전인데, 열 세 권으로 되어 있는 거야. 색인까지 포함시키면 열 네 권이다. 각 권의 두께도 보통 사전만큼 돼.)
위의 학자의 스승은 열 세 권짜리 이 사전마저도 손 때를 입혔다고 하니, 얼마나 자주 사전을 찾아보았는지 알 만하다. 나도 이 사전을 자주 써먹었고 아주 유용하게 써먹었다. 열 세 권을 다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기타 칠 때 발 받침대로 쓰는 데에는 세 권이 딱 맞다. 나는 포개놓은 이 책자 세 권 위에 발을 올려 놓은 채 ‘로망스’와 ‘알함브라궁전의 추억’에서부터 ‘렛 잇 비’, ‘티어스 인 해븐’, ‘J에게’, ‘저 별과 달을’, 그리고 구성진 전주(前奏)를 가진 ‘목포의 눈물’과 ‘황포 돛대’ 등등을 신나게 연주하고 신나게 불러 재꼈다. 그러니까 오늘의 내가 있게 된 데에는 마로하시 사전의 공이 크다.
그러던 마로하시 사전을 어제 팔아버렸다. 나는 그 책을, 중국, 대만 등지에서 책자를 들여 와 파는 수입업자에게서 샀는데, 오늘 그 이에게 돌려 줘 버린 것이다. 나는 구입한 지 4, 5년은 족히 된 물건을 염치도 없이 물린 셈이다. 이 수입업자는 가끔씩 우리 공부 모임에 나와 수입 서적들을 소개하고 판매한다. 그럴 때면 우리는 공부하는 사람들답게 책 욕심이 발동하여 닥치는 대로 들여놓으려 하기도 하고, 박봉에 시달리는 월급쟁이들답게 책값에 혀를 내두르며 몇 번씩이나 책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그 날도 바로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그 날 따라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나는 내가 마로하시 사전을 어떤 용도로 사용해 왔는지를 말해버렸다. 그 비싼 책을 기타 발 받침대로 썼다니...... 다들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지만 업자만은 웃을 수 없었다. 그 순간, 이 사장님은 순발력과 결단력을 발휘하여 그 자리에서 반환을 약속하였다. 이 일이 있은 지도 거의 1년이 되어가는 것 같다. 그 동안 질질 끌다가 나는 그제 그 이에게 전화를 하여 시간 약속을 하고 어제 돌려 준 것이다.
한 사람이 목숨 걸고 만든 위대한 책 -- 이 책을 발 받침대로 쓴 것이 더 나쁜가, 아니면 도로 팔아먹은 것이 더 나쁜가? 내가 이 책을 그 원래의 용도로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딱 한번이지만 사전으로 사용한 적이 있다. 내가 찾아 본 글자는 ‘闕’(궐)자였다. 이 글자는 물론 ‘대궐’을 의미하지만, 한자를 좀 아는 친구들은 다 알고 있다시피, 이 글자는 ‘비우다’는 뜻도 가지고 있어서, 예컨대 ‘궐석재판’(闕席裁判) -- 즉 결석(缺席)재판 -- 등에 들어가 사용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闕’은 문(門)이되, 긴 터널 식으로 되어 있으며 문루(門樓)를 머리에 이고 있는 문이다. 그러니 덕수궁의 대한문은 ‘闕’이 아니고, 남대문이나 동대문, 북경의 천안문 등이 ‘闕’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정보를 어디에서 얻었는가? 인터넷에서 얻었다. 즉 구글, 네이버 등등을 통해서 얻었다. 그러니까 나에게 있어서 모로하시 사전은, 한번 펼쳐 보았을 때마저, 사전으로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이런 데도 모로하시 사전을 비좁은 책꽂이에 계속 꽂아 놓아야 한다는 말인가? 이런 데도 그것을 기타 발 받침대로라도 사용해 주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인가?
<세 켜의 사건들>
어제 나는 여러 가지 일을 하였다. 책을 처분한 후 성대 앞을 지나 창경궁에 들어갔다. 작은 아이를 대동하였는데, 그렇게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오랜 만에 아빠와 외출을 하여 쉬지 않고 종알거리는 고등학교 2학년짜리 계집 아이는, 성대 앞을 지나는 중에 그 아버지가 무엇인가를 찾느라고 계속하여 두리번거렸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였을 것이다. 내가 찾았던 것은 30 년 전에 알고 있었던, ‘모래틈’이라는 이름의 작은 까페였다. 물론 그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그 길을 걸어서 지나면서도, 아이에게, 30 년 전에는 네 아빠가 네 엄마의 손을 잡고 이 길을 걷곤 하였다고 말해 주지 않았다. 내가 그녀와 첫 데이트를 한 곳이 ‘모래틈’이었다. 그 날 내가 까페 문을 밀고 들어섰을 때 그녀는 카운타에 서서 어딘가에 전화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큰 키에, 검은 색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로 이뻤다.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 있나 싶게 예뻤다. 당시 미쓰 롯데 출신이라던가 하는, 서미경이라는 배우가 있었는데, 그 여자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그 여자보다 더 예뻤다.
그녀와 나는 미팅을 주선하여 서로의 친구들을 맺어주려고 한 적도 있다. 미팅 역시 ‘모래틈’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 때 내가 불러내었던 사람은 명서와 민형이이다. 당시에 민형이의 파트너가 되었던 사람은, 이제는 중견 극작가로서 유명인이 되어 버린, 주찬옥씨였다. 둘이서 데이트를 하는 도중의 일일텐데, 택시가 안 잡히자 주찬옥씨가 “치마를 걷어 올려 차를 세울까요?”라고 말했대나 어쨌대나? 명서 파트너는 영주라고 하는 사진관집 딸이었다. 이 사람은 결혼한 후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우리와 소식이 끊어졌다. 명서는 파트너에게 “당신이 여전히 예뻐 보이지 않으니 내가 아직도 덜 취한 모양이다”고 말했다던가? 아니, 그것보다는 좋은 매너를 보였다고 하던데...... 이렇게 말했다고 했던 것 같다. “당신이 예뻐 보일 때까지 계속 마셔 주겠다.” 나는 자기 친구들이 아주 예쁘다고 자랑하는 그녀의 말을 철썩 같이 믿었었다. “이렇게 예쁜 여자가 예쁘다고 말하니 얼마나 예쁠까?” 그러나 명서와 나는 그녀들이 그렇게까지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그래서 나는 명서에게 빚을 진 것이 되고 말았다. 그 날 나는 민형이에게도 빚을 졌다. 나는 여름 양복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민형이는 새로 양복을 한 벌 맞추었으면서도 내 체면을 고려해서 새 양복은 아랫 도리만 입은 채 남방 차림으로 나와 주었다. 이 친구들 빚을 어떻게 갚는다? 방법이 있기는 있다. 이번에는 너희들이 미팅을 주선해 봐. 나로서는, 양복 저고리만 벗어 놓고 나가면 되는 거 아닌가? 상대가 예뻐 보일 때까지 마셔 주는 것이 좀 문제인데......
창경원도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아니, ‘창경원’이 아니라 ‘창경궁’이지. 그 곳은 궁전으로 탈바꿈하여, 동물 구경하고 벚꽃 놀이하던 시절의 모습은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린 시절 창경원에 오면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왼 쪽으로 틀게 되어 있었고, 그 길로 들어서서는 제일 먼저 독수리나 공작 등을 보게 되어 있었다. 그 근처를 지나면서 아이에게, 이 곳이 예전에는 동물원이었다고 말해주었지만 아이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내가 회상해 내는 장면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시골에서 친척들이 올라오면, 어제 같은 일요일로 날을 잡아, 큰 찬합에 김밥을 가득 담아 가지고 온 가족이 창경원 나들이를 하였다. 바지 저고리에 중절모를 쓴 할아버지, 까만 교복을 입은 중학생 형들 -- 이런 사람들로 이루어진 인파가 전차를 타기 위해 동대문 쪽으로 몰려가는 모습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40년 전의 나는 아마도 멜빵 달린 물통을 비스듬히 찬 채, 혹은 뜨뜻미지근한 칠성 사이다를 두 손으로 소중하게 든 채 그 인파 속에 끼어 있었을 것이다. 뻐스 중앙차로제가 도입되어, 전차가 다니던 길 한 가운데로 뻐스가 다니고 있었다. 아이와 나는 차 바닥이 낮은 저상 뻐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 왔다.
소풍이 끝나고 돌아 올 때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은 텅 빈 공간뿐. 텅 빈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이라고는, 바람에 날리는 신문지 조각과 과자 봉지, 그리고, 1930년대 모더니스트 시인들이 노래하였듯이, 아이들 웃음소리의 끝자락뿐. 그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바로 조금 전에 있었던 오락시간, 보물찾기는 다 어디로 갔고, ‘모래틈’과 데이트와 미팅, 서미경이와 사진관집 딸은 또 다들 어디로 갔는지.
<또 카사 비양카 혹은 다시 대한화사전>
지난 번에 ‘카사 비양카’의 가사 일부를 번역해 올린 적이 있다. 그 나머지 부분은 이렇게 되어 있다: “집의 문을 닫아버린 것은 미움이었나/ 아이들이 전쟁에 대하여 아는 것은 무엇인가/ 낡고 겁먹고 무너져내려/ 하얀 집은 그 마을에서 사라졌네.” 이 노래가 또 다시 생각난 것은 우리 집이 이사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 직장인 우석대학교 근처(전주 인근의 삼례)로 아예 생활 근거지를 옮기기로 한 것이다. 그 동안 살았던 안양의 집도 처분하고 작은 집을 구해 아이들만 남겨 두기로 하였다. 사실은, 그로 인하여 작은 놈은 아빠와 좀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어하였던 것이며, 모로하시 사전을 처분하는 일도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단지 감상에 젖고자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 있다면, 참는 김에 조금 더 참아 보게나.
사실 나는 나흘 정도에 걸쳐서 내 정서를 분석해 보았네. 이사를 가는 것은, 심지어 가족이 흩어지지 않은 채, 게다가 더 큰 집으로 이사를 가는 것마저도, 기쁨의 정서만을 불러오지는 않는 법이므로, 최근의 내 정서는 슬픔이 그 주조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 슬픔이 어떤 종류의 슬픔인지가 불분명하였던 것이다. 슬픔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 한 가지는, 나쁜 일이 일어났을 때 느끼는 슬픔이다. 사람이란, 자기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면 기쁨을 느끼고 나쁜 일이 일어나면 슬픔을 느끼게 되어 있다. ‘좋은 일’이라는 것은 본인이 원하는 일을 가리키며, ‘나쁜 일’이라는 것은 본인이 원하지 않는 일을 가리킨다. 사람의 삶은, 좋은 일을 불러오고 나쁜 일을 회피하기 위한 활동으로 이루어진다. 그 활동은 문제 해결 활동이라고 불릴 수도 있는데, 좋은 일을 불러오거나 나쁜 일을 회피하는 것이 바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기쁨과 슬픔은 삶을 채우는 그러한 활동에 따라붙는 정서적인 부수물이다. 하여간 슬픔은, 나쁜 일이 일어날 때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다. 이는 일상을 살아가는 중에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상적인 슬픔과는 구별되어야 할 또 종류의 슬픔이 있지 않을까?
또 다른 종류의 슬픔을 말하기 위해서는 ‘변화’ 즉 ‘시간’, ‘무상’(無常) 등을 말해야 하며, 방금 말한 일상적인 슬픔을 약간 다른 방식으로 새로이 말해 보아야 한다. 사람들은 나쁜 일이 일어날 때 슬픔을 느낀다고 말하였지만, 고쳐 말하자면, 사람들은 좋았던 것이 나쁜 것으로 변할 때 슬픔을 느낀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사람들은 나쁜 것이 좋은 것으로 변할 때에는 기쁨을 느낀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그 변화의 방향에, 즉 그것이 좋은 쪽으로의 변화인지, 나쁜 쪽으로의 변화인지에 관심을 집중시키기 마련이지만, 그 관심을 잠시 거두어들이고 변화 그 자체에 관심을 집중시킬 수는 없을까? 왜 없겠는가? 그리하여 변화 그 자체에 관심을 기울인 채 관찰해 보면, 우리는,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좋았던 것은 나빠졌고 나빴던 것은 좋아졌으며 엊그제 있었던 것 같은 일들도 까마득한 옛 일이 되어 아주 멀리로 흘러가 버렸다. 모든 것이 시간 안에 놓여 있어서 사라지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이것이 슬프지 않다는 말인가? 이러한 인식이 슬픔을 불러온다면, 그 슬픔은 비일상적인 슬픔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 인식은, 현학적인 용어로, 인간의 존재 조건에 대한 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인식은, 인간으로서는 변화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인식이다. 인간이라서 슬프다는 것이요, 인간이라는 것이 슬프다는 것이다. 이름까지 붙여대면서 혼자 아는 것처럼 떠들어대었지만, 물론, 이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다.
비일상적 슬픔이라는 것이 있다. 인간이라는 것이 슬픈 것이요, 인간이라는 것이 해결되어야 할 문제인 것이다. 이 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머리로 따져 볼 때, 그 점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슬픔을 실지로 느끼는 사람, 가슴으로 그 슬픔을 느끼는 사람은 드물다. 좋았던 시절이 가고 나쁜 시절이 와서 슬픔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가고 오는 것 자체에 슬픔을 느끼는 것, 그리하여 가고 오는 것 자체를 문제로 보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것 --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니, 그것은 석가모니 같은 성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인지 모른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해(苦海)에 비유하지만, 불교적 시각으로 볼 때, 인생이 고해인 것은, 인생에 고통스러운 것이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 아니다. 고통스러운 것만이 아니고 즐거운 것까지 합세하여 고해를 이루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인간의 존재 조건에 깊이 상심하고 크나큰 슬픔을 느꼈던 것 같다.
물론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내가 나흘 동안 집중적으로 따져 본 것은, 다름 아니라, 내가 요즈음 느끼는 슬픔이 일상적인 것인가, 비일상적인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비일상적인 슬픔을 느낄 만한 계기를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한 것 같다. 나의 슬픔에 비일상적인 성격의 슬픔이 끼여들어 있다고 해도 전체의 10% 정도나 되었을까?
그러나 그것은 비루한 내 개인 사정이고, 현재로서의 내 사정이다. 인간이 인간의 존재 조건에 무관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좋은 것을 얻고 나쁜 것을 피하며 기쁨을 얻고 슬픔을 피하는 데에 온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어리석은 짓임에 틀림없다. 그 모든 것들은, 30년 전의 것들, 40년 전의 것들이 그러하였듯이, 얼마 후에는 시간 속에서 흘러가버린 것이 되어있을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최소한 머리로 따져 볼 때 이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내가 모로하시 대한화사전을 돌려 준 것은 큰 잘못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무서운 집념과 그에 버금가는 성실성으로 그 사전을 편찬하고 공부하는 일은 인간의 존재 조건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괜찮다. 그 사전을 돌려주고 그 대신에 <불교용어사전>(상, 하)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책으로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언젠가 나도 머리를 써서 비일상적 슬픔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그 슬픔을 느끼는 날이 오게될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날이 오면, 나는 그만큼은 일상적 슬픔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첫댓글 인터넷 등으로 인해 정보의 비대칭성이 사라지는 세상에서 단순히 정보의 전달에 그치는 사전류는 점차 존재 가치가 쇠퇴되는 거겠지. . 기쁨과 슬픔이 모두 살아 있다는 象으로서의 변화일 뿐이 아닐까? 凡所有象이 皆是虛妄이라.
우리 아들이 기타 배워보고싶다던데...컬났다 마로하시 사전부터 사줘야하니...ㅎㅎㅎ
"대한화사전"을 발아래 두었던 영태는 발로 움직이는 사전이 되어 있는 것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나도 부처님 가르침에 접하고 처음에 궁금한 것이 많아 불교용어사전을 인터넷에서 발견하고 옮기고 찾다보니 관련 지식이 조금 늘었던 것 같은데....苦의 의미와 모든 것이 변한다는 無常 등이 가슴에 와닿는구먼...가슴으로 기쁨을 발견하게 될 것을 기대하겠네...삼례로 이사를 간다니 보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남고, 이미 알고 있겠지만 三禮를 불교용어사전에서 찾아보는 것을 시작으로 받은 책을 열어보면 어떨지요...
수입서적 14권 짜리 한 질이면 얼만지 알아? ㅋㅋㅋ 아, '삼례'가 불교 용어란 말인가? 꾸벅.
지난 번 이야기한대로 삼례로 이사갔구나. 조만간 한번 시간내어 찾아갈께. 그리고 대한화사전에 그런 집념이 서려 있는줄 정말 몰랐다.1930년대라면 이 대한화사전 편찬동기가 만주국건국과 중국침략과 연관되어 있었을 것임. 우리나라 학자라면 모로하시같은 사람은 거의 나오기가 불가능.
영태 글 재밌다.. 이사 하려면 무지 번거러운데 고생 좀 하겠구나....
ㅎㅎ 영태야~ 민형이나 명서에게 미안 할 것 하나두없다... 자고로 여자는 자기보다 예쁜 여자를 데리고 나와 소개시켜주는 일은 절대로 절대로 없단다. 그것을 몰랐던 너의 순진함을 어느 누가 탓하겠냐~~
영태야 시간날때 읽어 보고 꼭 꼬리글 다시 달아줄께.. 미안미안
잘 읽었다. 영태야.. 영태 교수의 글을 읽노라면, 그 감정이 마치 내 감정인 양하여 빠지게 되는 것을 여러 번 느끼게 된다. 나 역시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의 교회 교의학 14권짜리를 사 놓고 아직도 읽지 못하고 있다. 기타칠 때 도구로 사용할까 보다. 계속 글을 부탁한다.
기타 받침대!!!...ㅋㅋㅋ삼례로 가면 전번에 말한 대둔산인가? 일박이일로 갈수있능겨? 갈곳이 많다..부산에 장환이집으로 해서 여기 저기.....
영태의 글이야 원래... 범상치 않은 깊음을 익히 알지만.. 이제는 꼬리글을 다는 친구들의 답도 꼬리라도 표현하기 무엇하도록... 익어있구나...![愛](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exticon61.gif)
그래 대둔산에 한번 와라. 여기 좋아. 라이브 뮤직 하는 데도 있고. 하이트맥주 공장이 있어서, 단체로 가면 맥주도 공짜로 먹을 수 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