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드의 생애
그는 1727년 2월15일에 회중 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동년, 그는 예일대학의 설립자중 한 분이며 뉴헤이븐의 목사인 제임스 피어폰트의 딸인 사라 피어폰트와 결혼하였다.
그의 외조부인 솔로몬 스티타드가 목회하던 노드햄턴교회의 부목사로 부임한 후 1750년 그 교회에서 추방될 때까지 섬겼다.
1729년 에드워드는 노드햄턴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주님은 그의 많은 기도에 응답하시고 그의 수고에 축복하셔서 교회가 부흥되었다. 노드햄턴교회에서는 에드워드의 설교에 의해 많은 회심자가 생겨났고 마을 전체의 분위기가 변화되었다.
1726년- 23세 때 그의 외할아버지가 섬기고 있던 노스햄프턴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이때쯤 뉴잉글랜드의 신앙은 청교도 이주자들의 첫세대를 지도하였던 영적 거성들을 계승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물질적 번영이 도덕성과 경건성을 혼미하게 하였으며, 저들의 영적 관심을 점차 빼앗아가 버렸다. 1720년에 인크리스 메더 박사는 "뉴잉글랜드로부터 떠나가는 영광"이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18세기 초반 수년이 지났을 때에도 거의 변화가 없었다.
1731년 7월에 노드햄턴의 에드워즈 목사가 보스톤의 대중집회에 초청받아 설교를 함으로써 널리 알려지며 에드워즈의 생애에 획기적인 사건이 되었다. 특히 에드워즈의 알미니안 주의를 반박한 설교들이 부흥을 일으키게 된 계기가 되었다. 에드워즈가 노드햄턴에 미친 영향들을 상당히 컸다. 불과 반년 만에 300명 이상의 남녀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꼭 200가구로 구성된 노드햄턴의 전체 주민이 각성하게 되었는데 이 역사는 실로 놀랄만한 것이었다. 그 불길이 뉴햄프셔주의 이끝에서 저끝까지 퍼져 갔으며 또한 커넥티컷주의 많은 지역으로 타올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1735년에 노드햄턴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소책자가 "놀라운 회심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영적 대각성 보고서가 런던과 보스톤에서 발행되었다. 이에 대해 에드워즈의 전기 작가 드와이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 사건에 대한 소문은 널리 퍼져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서 총체적인 회개를 일으켰으며, 복음 전파가 효과있게 수행되었는데 그것은 사도시대에 일어났던 것 이상으로 놀랄만한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30여년간의 무난한 가정 생활을 유지했으며,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하루에 한 번씩 아내와 합심하여 기도하였다. 에드워즈와 사라 사이에 11명의 자녀가 탄생했으며, 자녀들은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기도하도록 훈련받았다. 저녁 식사 후에는 가족들과 약 1시간에 걸친 대화의 시간을 가졌던 에드워즈는 청교도적 경건을 자녀들에게 자상히 가르쳤다.
에드워즈가 목회하는 동안 두 차례에 걸쳐 영적 대각성이 일어났다. 먼저는 1734-1735년 노드햄턴에 일어난 역사였고, 두 번째는 1740-1741년이었는데 이 때에는 뉴잉글랜드 전역에 걸쳐서 일어났다. 두 번째 대각성의 특징은 조지 휫필드와 사역했다는 점이다. 1740년에 보스톤의 여러 목사들이 휫필드를 뉴잉글랜드로 초청하였는데, 그렇게 방문한 것이 "마른 장작에 불을 붙이는 것과 같은"것이 되었다. 휫필드와 에드워즈의 우정은 이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페리 밀러는 뉴잉글랜드에 대해 말하기를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미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휫필드는 폭발시켰다"라고 했다. "뉴잉글랜드 전역에서 교인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1741년 헷포어드에서는 27명이, 노오스 스토닝톤에서는 104명이, 보스톤의 올드사우스교회에서는 6개월만에 60명이, 같은 도시의 뉴오드교회에서는 12개월만에 102명이 늘었다. 1741-1742년에 힝헴에서는 45명이, 플리머쓰에서는 84명이, 미들보로우에서는 174명이 늘어났다." 에드워즈는 이 해에 수 많은 설교를 하며 몸이 쇠약해졌다. "땅도 지옥도 그 어떤 것도 그 주에서 계속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지역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는 다른 어떤 시대에도 보지 못했던 커다란 역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끼친 부흥의 영향력은 어떤 현대 비평가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조나단 피어슨은 1741년에 말하기를 '수많은 영혼이 진노 가운데서 떨고 있을 때'를 '우리의 오순절'이라고 했다. 이때 에드워즈가 부흥을 주도한 세 권의 책이 있는데 '성령의 사역의 표적들을 분별함' '1740년 뉴잉글랜드의 신앙부흥에 대한 소고' '신앙의 열정'이란 책을 남기게 만들었다.
1750년 6월 23일 에드워즈는 그가 24년간 사역해 온 자신의 교회로부터 축출당하게 된다. 이 사건의 발단은 에드워교회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재력가의 아이들이 외설적인 책을 읽었는데 그가 이것을 꾸중함으로써 야기되었다. 에드워즈와 교회 평신도 지도자간의 갈등은 신학적으로 확대되어 결국 교회 정회원 230명이 에드워즈의 사임을 찬성하고 반대자는 오직 23명 뿐이었다. 에드워즈는 메사추세스 변경 지역인 스탁브리지 교회의 초청을 받고 이에 응한다. 말할 수 없는 경제적 어려움이 뒤따랐지만 한편 한적한 환경 속에서 그의 사상을 정리하여 그동안 밀쳐 두었던 대작들을 이곳에서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의 '의지의 자유'도 이 시기에 쓰여졌다.
1757년 9월에 에드워즈에게 가장 적합한 일이 부여되었다. 프린스톤 대학의 학장으로 선택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행정 재능과 학식을 채 발휘하기도 전에 천연두로 인해 1758년 3월 22일에 사망한다. 그의 나이 54세였다. 그가 마지막 남긴 말들은 그가 살았던 생애를 말해 주고 있다. 그는 임종을 지켜보는 딸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라. 그리고 두려워말라"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는 자신의 아내에게 마지막 인사말을 남겼다. "오랫동안 우리 사이에 있었던 신비한 연합은 내가 믿은 대로 영적인 성질의 것이었으므로 영원히 계속될 것이오" 질병도 사인이었으나 무엇보다도 한 사람의 고독한 목회가 노스햄스턴 교회로부터 입은 큰 상실감과 스탁브리지에서 했던 수고로 말미암아 지쳐 있던 에드워즈를 영원한 안식처로 초대하신 하나님의 뜻이었을 것이다. 칼빈주의자로서 에드워즈는 죽음까지 전폭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맡겼기에 평온한 임종을 맞이했다. 그의 아내도 6개월 후에 에드워즈의 뒤를 따랐다.
그가 죽은 지 약 150년이 지난 후에, 조나단 에드워드의 후손들의 삶을 연구해 본 결과 조나단 에드워드의 후손들은 모두 873명이었다. 그 가운데 대학총장이 12명, 교수 65명, 의사 60명, 목회자와 성직자 100명, 군장성 75명, 저술가 85명, 변호사 100명, 판사 30명, 국가 공무원 80명, 국회의원 5명, 미국 부통령 1명, 그리고 260명의 평범한 신앙인들로 살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목회를 처음 시작했을 당시 영국은 처음의 청교도 정신으로부터 차츰 멀어져 형식적이고 복음과 멀어져가는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고 그러한 시대적 상황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신앙회복을 주장하였다.
당시 그의 메시지는 가뭄에 단비와 같았다. 말씀이 선포되는 동안 전체가 다 눈물을 흘리기도 했으며 어떤 이는 주님의 구원의 사랑 때문에 감사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었다.
특히 “그의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있는 죄인들”이라는 설교는 미국을 일깨우는 유명한 설교가 되었다.
"죄인들이여, 당신이 처해있는 위험한 상황을 잘 살펴보십시오.
이미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은 타오르고 있으며, 지옥의 불구덩이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용광로는 이제 뜨겁게 달아 있으며 당신을 받아들일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이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길은 오직 예수님을 올바로 믿는 길 밖에
없습니다.
어서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십시오 "
그의 메시지는 죄악으로 잠자고 있는 미국을 일깨우는 타오르는 불길이 되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는 성도들에게는 성찬식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이것으로 교회의 지도자들과 갈등을 일으켜 24년간 사역해온 교회로
부터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어떤 사상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성경이 최고의 권위를 차지하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