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방송 에세이(21)】
어디로 갈 것인가? / 김잠출
집착하지 마!/ 대지와 하늘, 그밖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모든 건 사라져 갈 뿐/전 재산으로도 시간을 살 수는 없어/우리는 모두 바람 속 먼지에 불과하니까/
나는 미국 Kansas 주는 가보지 않아도 캔자스시티 로열즈 야구팀은 안다. 미국 중앙에 있는지 동북이나 남동에 있는지 모르지만, 미국의 록그룹 Kansas가 1977년에 부른 ‘Dust in the Wind’는 알고 있다. 80년대 자주 부르거나 들었던 애창곡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우리는 바람결에 날리는 티끌에 불과하다는 가사가 그때는 참 멋있고 다분히 철학적이라고 믿었다. 성경에서 영감을 받아 작사했다지만 어딘지 불교적이고 허무주의 또는 염세주의를 떠올리기도 했다. 그땐 뭐 세계관 자체가 부정적이었던 시기였지만…. 일부러 멜랑꼴리(Melancholy)한 표정을 선망하던 청춘 시절이었다. LP를 틀 때마다 심오한 뜻을 혼자만 안다는 듯이, 깊은 생각에 빠진 척하면서 고뇌에 찬 표정과 폼으로 은근히 치기를 부리게 하던 곡이다.
인간이 욕망하는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의 무상함을 은유적으로 표현할 때 동원하던 단어, 먼지! 그때는 세상을 향해 그런 야유라도 퍼붓고 싶었다. 지금 다시 불러보니 나도 젊음을 잃었고 꿈은 바래졌다. 몇 번 들어도 조금은 슬프거나 쓸쓸한 감정이 번진다.
다시 가을이다. 녹음은 사라지고 풀이 마른다. 밤도 콩꼬투리도 절로 벌어지고 있다. 벼들이 고개를 숙일수록 탄성력이 커져 메뚜기들이 더 높이 뛰어다닌다. 나락은 바람이 불지 않아도 절로 춤춘다.
아직도 살아 있는 계도지
저녁 6시만 되면 시내버스에 내 목소리가 울려 퍼지던 때가 있었다. 1990년대 10년은 ‘MBC 울산 패트롤’이 탄력을 받으며 인지도를 높이던 때이다. 모든 조간을 다 훑고 종일 마이크를 들고 돌아다니며 녹음하고 편집하고 원고 쓰고 석간을 살펴 방송하며 'PD 저널리즘’을 만개하던 때로 나름대로는 언론자유를 만끽하던 시절이었다. 노사분규를 쫓아 밤샘하고 골리앗 크레인이나 수십만 톤의 원유 운반선에 올라가 현장 인터뷰를 즐거이 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열혈 청춘의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의욕이 넘친 과잉 취재였는지,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었는지는 모르나 시청 기자실의 비리를 방송한 다음 날 입사 후 처음으로 사표를 냈다.
사건의 실마리는 후배 PD의 제안이었다. 시청에 갔다가 기자실에 들렀는데 “기자들이 화투판을 벌이고 있더라.”면서 성역없는 고발 아이템으로 적격이라고 했다. 나도 대략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당시 기자실은 철저히 폐쇄적 공간이었다. 공무원도 시민도 임의대로 출입할 수 없었던 성역이었고 철옹성이자 요새였다. 이튿날 현장에 가 몰래 마이크를 사용했다. 복도에는 공중전화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안에는 낮잠 자는 사람, 모포를 펴고 동양화 놀이에 열중하고 있는 몇몇이 보였다. 간부 공무원도 함께 비위(?)를 맞추느라 립 서비스를 하고 있었고 사무실 한 귀퉁이에는 여직원 한 명이 지루한 표정을 지으며 껌을 씹고 있었다. 여직원은 항상 라디오를 켜 놓고 모니터를 했는데 12시 시보와 함께 종이에 받아쓰기를 하고 있었던 게 특이했다. 방송의 정오 뉴스를 녹음해 타자한 뒤 오후에 신문기자들에게 원고를 복사해 전한다고 했는데 월급은 누가 주나 물으니 시청 임시직 공무원이라던가 뭐라면서 기분 나쁘단 반응을 보였던 거 같다. 그럼 기자들은? 이리저리 알아보니 기업체 홍보팀이나 대관 전담 인력을 만나 흥정(?)하거나 고스톱 삼매경을 즐기며 점심은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 기자들이 많다는 것을 확인했다. 판돈은? 높은 공무원이 가져와 분배하고 기사로 이른바 조지려는 낌새가 보이는 특정 기자에게 잃어주는 척 몰아주는 ‘짜고 치는 고스톱’을 운영하고 있었다. 직접 본 현장이고 들었으니 패트롤 방송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후배와 함께 방송했는데 여진과 후폭풍이 밀려와 곤욕을 치렀다.
중앙지의 울산 주재 기자들의 힘은 막강했다. 사장과 상무실에 쳐들어가 항의하고 프로그램을 폐지하라고 요구했다. 간사란 분은 “그놈을 잡아 오라”면서 사죄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곧바로 임원실에 불려 가니 호된 질책이 돌아왔다. 동업자 운운에 그곳에 왜 들어갔느냐 등으로 혼을 낸 뒤 흔한 말로 조인트 세게 까였다. 결론은 시청 기자실에 가서 중인환시리(衆人環視裡)에 공식 사과를 할 것을 명령했다. 입을 닫고 있다가 ‘쪽팔림이 극에 달해’ 사표를 쓰고 퇴근해 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웃픈 일이지만 당시에 상황은 차장급 일개 PD가 혼자 감당하기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더 자세한 후일담은 다음으로 미룬다.
최근 퇴근 무렵에 시청에 들렀다. 한 사무실에 들어가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가지런히 정돈된 신문이었다. 수십 장의 신문이 손도 대지 않은 채 책상에 놓여 있었다. 가져가도 되냐고 물으니 방문객들이 혹시 볼지 몰라 일괄 구독하는데 아무도 손을 대지 않는다고 했다. 내일 다 버릴 것이라며 가져가도 좋다고 했다.
계도지가 아직도 살아있다. 참 생명력 하나 끈질기다. 계도지는 유신시대의 잔재다. 통·반장(이장)이 볼 신문 구독료를 지자체가 대납하는 관언유착 관행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 국민을 계도하기 위해 시작됐다. 무지몽매한 국민이 신문을 읽고 계도와 계몽이 되어야 한다는 거창한 사명감, 신조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신문으로 교양을 쌓으라는 것은 당시로선 매력적인 말이었을 것이다.
2천년대 들어 울산을 비롯한 전국 지자체에서 공무원 노조를 중심으로 기자실과 계도지 폐지 운동이 크게 일었다. 민선 자치 시대이니 계도지를 폐지하고 기자실은 개방형 프레스센터로 전환하라는 요구였다.
첫 시작은 울산 북구청의 젊은 구청장이었다. 1998년 울산 북구는 진보 정치 1번지로 불렸다. 무소속으로 출마해 민주노총의 지지하에 초대 울산 북구청장에 당선된 조승수 구청장은 당시 전국 최연소 구청장이었다. 그는 여러 개혁정책을 펼쳤는데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전자결재를 과감히 도입하고 관행이었던 계도지 구독을 전격 중단했다. 지방지의 대대적인 공격과 PD수첩 등 서울의 방송 신문에 기사들이 쏟아졌지만, 그는 계도지 구독 예산지원을 없애고 대신 실직자와 서민들의 생활 지원에 사용했다.
기자실을 개방형 프레스룸으로 바뀐 지 오래지만 지금도 올바른 개방형 운영이 안 되는 모양이다. 계도지 성격의 신문이 쌓여 있고 기자실 또는 프레스룸엔 선택적 취재, 마음먹은 대로 쓰는 기사를 위해 한두 명의 기자만 참석한다는 지적이 많다. 최근 울산의 한 언론 단체가 공개 저격한 것을 보니 20여 년 전으로 되돌아가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동안 너무 무관심했나 보다.
정보가 기자실에 모인 기자들에게만 제공되는 이른바 특혜가 되는 관성을 깨뜨려야 한다는 주장은 지자체의 기자실을 완전히 개방하라는 요구였다. 지역 언론이 지자체와 공생관계를 이어온 관성이 아직도 있다면 견제와 감시보다 지방정부를 대변하거나 홍보하는 역할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는 비판은 올바르다. 기자실이 오랫동안 폐쇄적으로 운영되면서 그들만의 기득권으로 이어져 왔다는 주장도 맞는다. 기자실에 가보면 공중파 방송사와 특정 지역신문 기자만 출입할 수 있고 지정석이 있다. 신생 언론이나 인터넷 언론사는 진입장벽이 높아 감히 들어가지도 못한다. 바로 제지당한다. 정당한 취재권 박탈이라 항변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부분 개방, 폐쇄적 기자실 운영은 그 자체로 특권과 특혜의 상징이며, 공식 출입 기자와 비공식 출입 기자를 나누는 차별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회견에 방송사 카메라만 오고 정작 프레스센터 기자석엔 단 한 명의 기자도 앉아 있지 않은 게 현실이다.
기자실은 누구나 공유하는 시설이 돼야 한다. 점점 커져가는 1인 미디어의 역할과 비중을 생각한다면 기존의 기자실은 완전히 개방하는 게 맞는다고 본다. 기자들에게만 공개해야 할 정보란 이제 없을 것이다. 공개할 수 있는 정보는 모두 동시에 공개하고, 기자실에 있는 기자들에게 제공되는 자료는 동시에 온라인에 공개하면 된다.
언론의 권력은 시청자와 독자로부터 나온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아직도 지역 언론의 권력은 독자에게서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기사에 돈을 내는 이들이 독자가 아니라 주로 자본 권력이거나 정치·행정 권력이라는 현실은 타파되어야 할 악습이다.
어쩌면 내 주제에 ‘실데 없는 일’이지만 오늘도 고민을 계속한다. 지역방송은 과연 존재가치가 있는가? 존재 이유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왜 지역민들이 지역방송을 외면할까?
듣도 보도 못한 서울의 인터넷 언론 기자나 서울에 있는 언론사의 기자를 전화 연결해 전문가인 양 시사평론을 하고 경제분석이나 세계정세를 정리해 주는 지역방송. 지역 부동산 경기를 외면하고 서울 기자가 전하는 부동산 정보, 정치 분석을 하면서 여의도 이야기 중에 지역 정치 아젠다는 5초 정도로 끼워 넣는다.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내용이다. 인터넷에 널렸고 아침에 읽은 신문 기사를 반복하기 일쑤다. 10만 원 출연료를 서울 사람에게 헌납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밖에 없다. 구청 시청이 주민 대상 교양강좌니 뭐를 하면서 전국 순회하며 용돈 챙겨가는 연예인이나 직업강연자를 불러 목돈 안기고 교통비까지 덤터기로 부담하는 경우와 같다. 로컬 프로 진행자도 서울에서 오고 고정 게스트도 서울 사는 사람이고 내용도 전국이나 세계적인 거대 담론이다. 그 시간에 지역 문화센터나 학원들은 손가락을 빨고 지역 전문가나 강연자들은 풀이 죽어 한숨을 쉰다.
그래 놓고 지역 KBS 없애면 안 된다며 정치권에 구애를 보내고 시민단체를 동원해 성명서를 내고 시위를 하는 것을 본다. 지역방송국을 없애면 과연 지역 자치가 사라질까? 지역방송이 있는 지역엔 사람이 없고 전문가가 없을까? 이해 불가다. 그래 놓고 생사여탈 문제가 제기되면 지방자치니 지역문화 수호를 외친다. 내로남불도 유분수다. 평소에 지역민을 외면하는 지역방송이 어찌 지역 밀착형 언론이라고 주장하는지 낯부끄럽다. 괜한 소리인지 아니면 나만 그런가? 지역방송이 제발 방향을 잡고 어디로 갈 것인지를 명확히 정체성을 밝히는 커밍아웃이라도 해 줬으면 좋겠다.
관종 보다 카메오에게 배운다.
현대인들은 모두 관종들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타인의 관심을 받으려 하고 주위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대부분 사람은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한다. 그것이 사람의 본능인지 모른다. 요즘 사람들은 그런 성향이 더 도드라진다. 모두 디지털의 노예가 되어 손바닥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외부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관심에 목매는 사람’으로 예외가 없다는 말이다.
성경에 나오는 자캐오와 당나귀들은 관종과는 거리가 멀다. 자캐오 또는 삭개오라는 사람은 신약성서의 누가복음에 나온다. 예리고에서 동족을 수탈하는 세관장이었는데, 예수를 만난 뒤에 회심한 주인공이다.
자캐오는 당시 가장 멸시당하던 세리였고 무려 그 무리의 책임자인 세관장이었다. 세리는 로마제국이 통행세, 조세, 관세를 거두기 위해 직접 고용한 유대인들이었는데 세관장은 횡령을 일삼는 자라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천민으로 취급받았다. 극심한 천대와 증오의 대상이기도 했다. 허가받은 도둑놈에다 부자였으니 말이다.
<예수께서 예리고에 이르러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거기에 자캐오라는 돈 많은 세관장이 있었는데, 예수가 어떤 분인지 보려고 애썼으나 키가 작아서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길을 앞질러 달려가서 길가에 있는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갔다. 예수께서 그곳을 지나시다가 그를 쳐다보시며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라고 말씀하셨다. 자캐오는 이 말씀을 듣고 얼른 나무에서 내려와 기쁜 마음으로 예수를 자기 집에 모셨다.>
예수께서 자캐오의 이름을 직접 불렀다. 키가 작은 자캐오는 나무 위에 올라 자기 눈으로 예수님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고 예수님은 그런 자캐오의 집에 머무르겠다고 선언한다. 자캐오는 마음을 열고 회개했다.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고 부당하게 취한 재산은 4배나 보상하겠다는 결단까지 했다. (자캐오란 이름은 '순결한', '무죄한'이라는 히브리어 '작카이'(zakai)에서 유래했다. '깨끗한 자', '의로운 자'라는 뜻이다.)
자캐오는 이름대로 살아야 했는데 그렇게 살지를 못했던 것 같다. 그런 그가 세관장이라는 지위와 체면에도 불구하고 나무 위에 올라갔고, 예수님이 자기 이름을 불러주자 기쁘게 영접하고 회개와 결단을 했다. 같은 민족과 이웃들은 자신을 경멸하는데 예수님은 죄인들의 벗이 되어 주고, 병을 고칠 뿐 아니라 죄를 사해주는 권세도 있다는 소문이 돌아 BTS를 보고파 하는 아미처럼 어떻게 하든 예수님을 만나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자케오. 부정 축재로 재산은 많았지만, 마음은 늘 외롭고 수치스러웠고 그런 상황에 부닥친 자신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는 열망 또한 있었나 보다. 키 작은 게 콤플렉스였으니 수많은 군중보다 앞서 달려가 나무에 올랐다. 회개와 재산 분배의 결단을 실천한 것은 말 그대로 행동하는 믿음이다. 입으로 하는 믿음이 아닌 행동하는 믿음, 실천적 신앙이다.
“열매가 맺기 전에 반드시 꽃이 핀다. 선한 행함이 있기 전에 믿음이 있고 믿음은 행함으로 증명할 수 있다.”
성경에는 수많은 동물과 식물이 나온다. 그중에도 자주 나오는 동물이 당나귀다. 성경 속의 당나귀는 관종도 주인공도 아니다. 그저 카메오(Cameo)처럼 깜짝 등장하는 단역이다. 하지만 보잘것없는 나귀들이 내겐 친밀한 대상이다.
평화의 왕으로 이 땅을 구원하실 메시아인 예수님은 당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한다. 아브라함은 제물로 바칠 아들을 나귀에 태워 갔고 애굽으로 되돌아가던 모세의 가족도 나귀를 타고 갔다. 무지한 예언자인 발람이라는 주인을 보고 사람의 말로 책망하는 동물도 나귀다. 사울이 그토록 찾던 짐승도 나귀였다. 사울은 나귀를 찾아 이곳저곳을 헤매다가 사무엘을 만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 욥이 빼앗긴 수많은 소유물 중에도 나귀가 있었고 이스라엘 사사로 22년 동안 다스린 길르앗 사람 야일의 아들 30명은 모두 나귀를 타고 다녔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당한 사람을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을 찾아갔다. 선한 사마리아인 옆에 당나귀가 함께 있었다. 역시 카메오 또는 조연이나 휙 지나가는 단역에 불과하다.
<어느 유대인 상인이 예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 옷이 벗겨지고 폭행당해 거반 죽은 상태로 버려져 있었다. 지나가던 사제는 이를 외면하고 피해서 갔다. 뒤따라 지나던 레위인도 역시 무시하고 지나가 버렸다. 반면 유대인들이 멸시해 마지않던 사마리아인은 달랐다.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는 가여운 마음에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짐승(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지극하게 간호했다. 다음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드리겠소.' 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말(馬, Equus)은 전쟁이나 개선장군, 승리를 상징하지만, 나귀는 평화를 상징한다. 관종이나 남들보다 자신을 높이려는 자가 아니라 착한 봉사자의 대명사이다. 등에 진 짐은 무겁고 크지만, 나귀는 기쁨과 온유, 겸손한 성품을 나타낸다. 키가 작으나 무릎이 억세고 충성스러운 모습과 표정을 가졌다. 그래서 나귀는 명예로운 이름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제 나도 선택할 참이다. 계속 관종을 쫓을 것인가 카메오에 만족할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방송국에 처음 간 어느 분이 낯선 환경에 당황해 경비 아저씨에게 좀 물어보려고 다가가자 경비가 먼저 질문을 하는데 습관적으로 던지는 말이 “어디서 왔어요?”였다. 퇴직하고 소속이 없어진 그 분은 당황한 나머지 “집에서 왔는데요”라고 대답했다고 해 많이 웃었다.
어느 대학교수도 똑같은 경험을 했지만 어디서 왔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호통을 쳤다.
“여보시오. 어디서 왔느냐고 묻지 말고, 어디로 갈 것인지를 물어보시오. 방송국에서 나와 달라고 해서 왔소.”
왕년에 어디서 무얼했으며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러니 어디서 왔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도 않다. 이미 지나왔고 다 가 버렸다.
지역 방송국에게 다시 묻는다. 아직도 과거의 영화가 그리운가. 어깨 힘은 좀 뺐는지 그때 그 시절을 못 잊고 여전히 라떼를 자랑하며 지역 맹주 역할에 만족하고 있는지.
그럼,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가? 그것이 궁금하다.
첫댓글 성경에 나귀가 이렇게 많이 등장했군요. 심지어 예수님이 그 많은 동물 중 나귀를 택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는데...
"말(馬, Equus)은 전쟁이나 개선장군, 승리를 상징하지만, 나귀는 평화를 상징한다. 관종이나 남들보다 자신을 높이려는 자가 아니라 착한 봉사자의 대명사이다. 등에 진 짐은 무겁고 크지만, 나귀는 기쁨과 온유, 겸손한 성품을 나타낸다. 키가 작으나 무릎이 억세고 충성스러운 모습과 표정을 가졌다. 그래서 나귀는 명예로운 이름의 대명사가 되었다."
카메오를 눈여겨 보아야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메밀꽃 필 무렵> 허생원의 반평생 짝지도 나귀에요. 글을 읽고 생각해보니 '카메오'입니다.
"까스러진 목 뒤 털은 주인의 머리털과도 같이 바스러지고, 개진개진 젖은 눈은 주인의 눈과 같이 눈곱을 흘렸다. 몽당비처럼 짧게 쓸리운 꼬리는, 파리를 쫓으려고 기껏 휘저어 보아야 벌써 다리까지는 닿지 않았다. ..."라고 나귀를 묘사했습니다.
방송국의 비하인드 스토리와 함께, 멈추어 생각하게 하는 글을 잘 읽었습니다.^^
메밀꽃 필 무렵이 됐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