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의 초상
박해성
빨랫줄에 펄럭이는
혁명투사
체 게바라
가을볕에 잘 마른
두 팔을 휘두르며
울려고 내가 왔던가,
십팔번을 꺾으신다
- 『나래시조』2015. 봄호
新공무도하가
박해성
*
강바닥 물풀같이 흔들리며 살던 사람
그까짓 파도 몇 잎 잠재울 줄 왜 몰라서
끊어진 그물코 사이 등 푸른 날 다 놓치고
주거부정 지천명에 비틀대던 아수라도
가슴속 천둥 번개 훌훌 털어 버렸는가
동지冬至에 언 발을 끌고 살얼음 강 건너시네
*
가지 마오 공무도하, 머리 풀고 우는 바람
타는 놀빛 만다라를 수평선에 걸어놓고
어디로 흘러갔을까, 비명을 삼킨 강물은
*
지친 새 추락하듯 쭉정별 지는 이 밤
그 누가 추운 강변 아직도 서성이는지
손톱을 잘근거린다, 빈처 같은 조각달이
- 『정형시학』2015. 봄호
한우 먹는 날
박해성
이름표 목에 걸고 백 한 번째 면접을 본
삼년 백수 친구 녀석 파김치 그 몰골에 까짓 거 큰 맘 먹고 지갑 들고 나섰는데
'오늘은 한우 먹는 날' 어깨띠 두른 누렁소가 낙원가든 앞마당 트럭에 실려 두리번~
글썽한 눈망울 속엔 새털구름 흘러가고 굴레처럼 목에 걸린 명문혈통 보증서에다
온몸에 금을 긋고 어느 손이 끼적거린 친절한 부위별 명칭이 끔벅끔벅 살아있는,
저 이가 쓸데없이 뿔은 왜 키웠을까? 설익은 질문 한 점 어금니로 되씹다가
아차차 혀 깨물었다, 기어이 피를 보네
- 계간『정형시학』 2015. 여름호
안개지대
박해성
내 안뜰 가마솥에서 한 소끔 끓던 어둠
이제는 뜸들었겠지 솥뚜껑 슬쩍 밀자
저토록 하얀 아우성, 벼랑을 기어오른다
때로는 낮은 포복 늪도 질러가지만
이 세상 허방 짚어 몇 번을 넘어졌나,
편서풍 손톱자국에 숭숭뚫린 가슴이며
숨차게 달려온 길 돌아보면 한뼘인데
언제나 직진 뿐인 시간의 신호등 앞
목숨은 가벼워진다, 비눗방울 날아가듯
태양의 붉은 카펫 스르르 깔리는 순간
온몸이 금침에 찔린 한 여자 스러진다,
열두 폭 스란치마가 나팔꽃으로 피어난다
- 『월간문학』 2015. 10월호
막
박해성
'막' 이라고 뱉으면 와락 과격해지고 '막막'이라고 되씹으면 문득 숙연해진다
중복의 꼬리를 잡고 아라연꽃* 보러 가는 길, 눈부신 지느러미를 퍼덕이는
햇살 아래 이제 막 끝물 연들이 전생을 되씹는 곳' "막 살까" 그가 말한다, 꽃
대궁이 흔들린다. 각본 없는 이 연극은 언제 막을 내리려나 "사는 게 막막해'
가 "막 살까"로 들리다니 … 가슴이 무너지는지 붉은 꽃잎 뚝뚝 지는 차안과
피안을 건너 칠백년을 걸어온 이, 몸도 넋도 다 비우고 진흙탕에 주저앉아
저 봐라, 부르튼 입술로 게송을 읊조리신다
* 2009년 5월 경남 함안 성산산성에서 발굴된 고려시대의 씨앗에서 발아한 연꽃
- 엔솔러지 현대사설시조포럼 『이슬화법』 2015. Vol.6
별리別離
박해성
단추만 누르면 광속으로 열리던 유년,
휴대폰에 저장된 네 이름을 '삭제'한다. 오늘은 나 살아있음이 허영
처럼 버겁다, 학교종이 땡땡 때앵~ 목청껏 내지르며 동네 앞 무논에서
올챙이를 건져 올리던 코 째진 검정고무신 배꼽 내놓고 달려온다. 가시
내들 젖가슴과 복사꽃 함께 피던 시절 사돈도 안중에 없이 맨발로 기어오
른 고욤나무 우듬지에서 깔깔대던 단발머리들, 이건 정녕 꿈이다! 고욤처럼
떫은 꿈, 그 따스한 네 혈관에 악의 꽃이 피었다니 깨어진 사금파리인 양
벗은 가슴을 에다니 …육신의 무게를 벗어 던진 너의 미소, 언제 다시 만나
려나 젖은 손을 흔든다
술래가 집에 간 자리 실연기만 피어오르고
- 엔솔러지 현대사설시조포럼 『이슬화법』 2015. Vol.6
발해의 휴일
박해성
리모컨을 발사하자 천둥치는 말발굽소리
북북서 칼바람에 한 왕조가 무너진다
사직은 아랑곳없이 들꽃 하 흐드러지고
방목한 세월 따라 새 떼마저 흩어진 초원
어디로 가셨는가, 주작대로* 거닐던 이
살 붉은 마차바퀴가 덜컥 멈춘 한 순간,
유리창에 투신하는 저 눈발이 수상하다
비장하게 써 내리는 마지막 밀서인 양
몇 마디 적기도 전에 얼녹아 흐르는 눈물
바람의 자객들이 어둠 속을 질주한다
첩첩 침묵 무장한 채 지금껏 매복에 든
발해국 전사들이여, 떨쳐 일어나시라!
동횃불 활활 타던 동모산*의 그날처럼
채널을 정조준하고 천하를 쥐락펴락
상경*에 빛나던 별들, 자막으로 떠오른다
*주작대로- 발해의 수도 중앙부에 있는 도로 이름.* 동모산- 대조영이 발해 건국의 근거지로 삼은 곳.*상경- 발해 역사상 160여 년간 번영을 누리던 수도.
- 『가람시학』 2015. 제 6호
ㅡㅡㅡㅡ박해성 시인ㅡㅡㅡㅡ
1947년 서울 출생. 201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2012년 천강문학상 시조부문대상 수상. 2014년 제4회 천강문학상 시조부문 대상 수상. 시집 『비빔밥에 대한 미시적 계보』, 『루머처럼, 유머처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