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거리 점방/박응식-
신문지, 라면 박스 너덜한 밀창문을 연다
등 굽은 노파가 사탕 오물거리며
놓지 못한 점방의 이력을 침으로 굴려 녹이고 있는
서리 맞은 달빛 게슴츠레 보다가 더듬더듬 셈 만하는
술만 취하면 삼청교육대를 박살내고
알코올에 젖은 살을 뜯는 학선이도
잘린 손가락으로 시비 거는 달수성도
석탄가루 뱉으면서 궁시렁궁시렁
탄맥 끊어진 길 타고 간 송광교통 버스도
다시 오지 않았다
바람도 비켜가는 다닥다닥한 판잣집들
가래떡처럼 석탄이 줄줄이 쏟아지던 점방 앞에서
스산함이 익숙해져버린 폐광촌을 본다
삼십 촉수가 엎드린 아스팔트 등 빨아대고
내 낡은 귀퉁이에 희미하게 돋아나는 탄 무더기
전조등이 선을 쭉쭉 그으며 어둠을 덧칠한다
삼거리 돌아 원주민이 사는 불빛 간간히 보이고
나무판으로 꼭꼭 못질한 폐광
문을 닫고 외줄 타듯 살아 온 나는 녹슨 문고리를 잡고 흔든다
떠난 사람들 그림자 부스러기가 여기저기 떨어져 내린다
시커메진 쓸개까지 버리고 간, 지금은
무엇을 더 버리면서 물에 뜬 노을을 바라볼까
또 다른 맥을 찾기엔 막장의 무너짐이 심각하다
내 안에 침묵하고 있는 점방을 드르륵 열고
열무김치와 막걸리 텁텁한 허기를 채운다
들 고양이 울음소리에 놀란 외딴 삼거리 점방,
갱도에 갇힌 내 문을 조금씩 연다
―(『시에』2009년 봄호)
<감상>
박응식의 『삼거리 점방』은 석탄가루를 마시면서도 탄광을 떠나지 못했던 삶의 막장이다. 세 갈래의 갈림길(삼거리)은 한 곳에서 등 비비고 살던 사람들이 길을 따라 뿔뿔이 흩어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귀가 닳은 낡은 풍경 속에는 오래전 폐광을 해버린 탄광과 소주와 라면을 끓여 팔던 점방이 등장한다. 신문지와 라면박스로 바람을 막은 밀창문, 탄광과 함께 늙어버린 셈이 흐린 노파, 다닥다닥한 판잣집들. 술주정뱅이, 진폐증에 걸린 사내들, 방치된 폐광촌…버스도 오지 않는 이 을씨년스럽고 적막한 풍경은 마치 한 편의 흑백사진을 떠오르게 한다.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던 사내, 시커먼 쓸개를 달고 살아가는 광부, 모두 제 자리에서 주어진 배역을 충실히 해내고 있어 박응식은 흔히 보아왔던 소재의 진부함을 잘 극복하였다. 무너져버린 갱도와 나무판으로 꼭꼭 못질한 폐광은 세상과의 단절, 소외된 삶이다. 이제는 뒷전으로 밀려버린 석탄과 연탄,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알 수 있다. 시대의 변천사와 세월의 무상함을 이 한편의 시에서 엿볼 수 있다. 박응식은 굳게 닫힌 삼거리 점방 문을 드르륵 열고 열무김치와 텁텁한 막걸리로 허기를 채운다. 고양이 울음소리에 놀라는 외딴 삼거리 점방은 이제 시인의 의식 속에만 존재한다. 갱도에 갇힌 문을 조금씩 열어두는 것으로 박응식은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