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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으로 난 작은 오솔길
크리슈나무르티 : 꺼지지 않는 불꽃, “자기로부터 혁명”을 위하여
-- “미륵 시대”를 살면서, “내가 안 바뀌면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Q: In what way could a statesman who understood what you are saying give it expression in public affairs? Or is it not more likely that he would retire from politics when he understood their false bases and objectives?
질문자: 선생님의 말씀을 알아들은 정부관료는, 공적인 업무에서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아니면 그게 그렇게 되는 일이 아니라 정치라는 것의 토대와 현상들이 잘못된 것이라서, 그 사람은 그냥 정치로부터 물러나버려야 할까요?
K: If he understood what I am saying, he would not separate politics from life in its completeness; and I don't see why he should retire. After all, politics now are merely instruments of exploitation; but if he considered life as a whole, not politics only -- and by politics he means only his country, his people, and the exploitation of others -- and regarded human problems not as national but as world problems, not as American, Hindu, or German problems, then, if he understood what I am talking about, he would be a true human being, not a politician.. . . if we as human beings saw the intimate connection between all these, between politics, religion, economics, and social life, if we saw the connection, then we would not think and act separatively, individualistically.
크리슈나무르티: 그 사람이 내 말을 알아들었다면, 그는 정치와 삶을 분리하지 않고, 함께 묶어버리겠지요. 그런 사람이 왜 정치에서 물러나버린다는 말인지 잘 모르겠군요. 결국, 오늘날의 정치라는 것은 단순히 착취의 도구밖에 안 됩니다만, 그런 가운데서도 그 사람이 정치를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전체적으로 본다면 -- 정치라는 게 자기 나라와 자기 국민만을 위한 것이며 다른 나라 사람들을 착취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면 -- 인간의 문제를 한 국가 단위로 보는 게 아니라, 세계적인 문제로 본다면, 미국이라거나 힌두라거나 또 독일의 문제만으로 보지 않는다면, 그냥 한마디로 그 사람이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는다면 말이지요, 그는 참된 인간이겠기에 단지 정부관료에 머물지는 않을 것입니다. . . 우리가 인간으로서 그런 모든 것들을, 정치와 종교와 경제와 사회적인 삶 사이의 그 긴밀한 연관성을 제대로 본다면, 그런 연결을 올곧게 본다면 말이지요, 그때 우리는 갈가리 찢겨진 개인으로서 생각하고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말입니다.
. . . So if the politician deals with the problems of human life merely as a politician, then such a man creates greater havoc, greater mischief; but if he considers the whole of life without differentiation between races, nationalities, and class, then he is truly a human being, though he may be a politician.
. . . 그가 단지 정치인으로 인간의 문제를 다룬다면, 그런 사람은 더 많은 재앙과 더 엄청난 해악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인종이나 국적이나 계급 따위의 차별 없이 삶을 전체적으로 다룬다면, 그는 비록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참된 인간으로 살아가겠지요.
-- J. Krishnamurti, From: Total Freedom, 'To Be a True Human Being', pp. 4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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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6] “인간이 되고 싶다”던 “곰과 범”
꼭 그쪽으로 연결시키려고 해서가 아니라, 저런 말씀에는 우째 그 옛날 “곰과 범” 생각이 먼저 나는 걸 어쩌겠습니까?
본문 요점은 한마디로 “전체적으로 봐라!” 그 말씀이겠습니다. 꼭 ‘정치’ 뿐만 아니라, “교육”이고 종교고 문화고 예술이고 간에 “먼저, 인간이 되고” 봐야지요.
나아가서 사회 그 어느 분야에서건 간에, 이게 누군가를 배척하고는 “저기, 어디 딴 데나 가서 알아보셔!”라고 등 떠밀 일도 아니고, 심지어 “산으로나 가버려라!” 윽박질러서는 더 안 되는 일이지요? 정작, 그런 사람들 더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이거늘.
‘교육’이고 ‘종교’고 간에, 세상은 점점 더 망해간다면서도, 왜, 그저, 나 몰라라 하고 만단 말일까요? 하루하루 살아가는 꼴이, 그래도 배웠다는 사람들마저 “평양성 해 안 뜬대도 난 모르오!” 똑 그 짝 아닙니까? 그나마 한다는 게, 여기 찔끔 저기 째끔 ‘땜질’이나 하고 있는 거고요. 이런 말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세상은 나쁜 놈들 때문에 망하는 게 아니라, 그 꼴을 보고도 가만히 있는 사람들 때문에 망하는 거다.”
크게 “지구온난화”니 “6차대멸종”이니 들먹이지 않더라도, 적게 러시아 전쟁, 이스라엘 전쟁 끌어오지 않더라도, 인간 세상이라는 게 하루가 다르게 전부 다 더욱더 거칠고 각박하게 흘러가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비기면, 이렇게 읽고 쓰고 하는 거 자체가 이미 ‘복’ 받은 것만 같습니다. 게다가 사실상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그다지 ‘많은 것’들이 필요한 게 아니지요? 백만, 억만장자들은 ‘돈 하나 나 하나, 돈 둘 나 둘’ 다 헤어보고 죽는답니까?
정작 “악의 축”은 ‘미국’이라느니, 그게 바뀌어 ‘중국’이라느니 해봤자, 문제는 전혀 풀리지 않습니다. 설령, “문명의 중심축이 동양으로 옮겨와봤자!” 아니겠습니까? 옮겨온들, 과연 뭘 가지고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겠습니까? 이제 ‘칼자루’ 동양이 쥐고, ‘난도질’ 동양이 해먹겠다고요? 마냥, 그들 따라만 왔으니, ‘서구가 누리던 패권’을 이제 이쪽에서 좀 ‘누려봐야겟다’ 해서는 결코 되는 일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과연 그럴 수 있겠습니까만, ‘판’이 바뀌어야지요. 가장 쉽게 하는 소리가 “문화”입니다. 저쪽 서구에는 ‘폭력’ 말고 아예 “문화”라는 게 없다는 거 아닙니까? 그쪽에서는 명색이 ‘종교’에서도 ‘인간’들에게 “복수”하는 게 “신”이지요? 안 그래도 이다지 불쌍한 인간들에게 무슨 “복수”할 일 있을 거라고. 꼭 그 꼴로, 플라톤철학, 종교전횡, 마녀사냥, 대항해시대, 노예사냥, 제국주의, 인종주의, 산업사회, 정보화시대 따위로밖에 못 굴러먹은 거지요?
근본적으로 아무래도 저딴 “신”으로는 세상 더 나아질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서구가 굴려온 세계사라는 게 기껏 요모냥요꼬밖에 안 되는 거지요? 자연정복하고 물질풍요 말고는, 거기서 과연 뭐 하나 배울 게 있단 말일까요? 아전인수, 표리부동, 양두구육, 그딴 것들밖에 생각 안 나는데요. 인간들이 하나라도 더 “행복”해야 말이지요.
세계적으로 다 그렇겠지만, 더구나 ‘정치가’들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본문, 저런 ‘정치가’는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운 사람일 것만 같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더 그렇겠지요? “동양”이라고 좀 나은 게 뭐란 말입니까?
그렇다고 여기 이 땅에서의 ‘정차가’들은, 저런 말씀들 좀 들으려고나 하겠습니까? 왼쪽, 오른쪽 전부 다 오로지 ‘지꺼챙기기’밖에 모르는 꼴들 아닙니까? 거기서 지구촌에 관심이 있단 말일까요?
토왜 아니라도, “평양성 해 안 뜬대도 나 몰라라!” 하는 판에, ‘깊이 병든 사회“나마 좀 나아지겠습니까? 대한민국은 과연 뭘 ”선도“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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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6] 한세상 살면서..
하물며 ‘관료’나 ‘정치인’에게도 이럴진대, ‘촛불시민’에게는 더 당연하겠지요. 결국 ‘촛불시민’들에게 크리슈나무르티 말씀을 소개하는 일이, 완전히 ‘오버’라거나 결코 ‘못 할 말’이 아닌 것입니다. 끝내 우리가 가야만 할 길 아니겠습니까? 단 한 사람이라도 더 꼭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하다못해 미래 사회를 끌고 갈 젊은이들이라도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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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6] 숲으로 난 작은 오솔길
크리슈나무르티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는 정치인이라면, 그는 꼭 자기 국민들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전체 인류를 생각할 것이다, 그런 말씀이지요? 같은 차원은 아니겠으나, 여기서는 다시 호세 무히카 우루과이 대통령 말씀이 생각납니다. ‘오늘날 지구적인 위기는 생태나 환경 문제가 아니라, 다만 정치적인 위기일 뿐’이라고 하셨지요. 세계 정치인들이 크게 결단할 수 있다면, 지구상의 많은 문제들이 풀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국의 이익만을 대변할 게 아니라 말씀입니다.
위의 저 질문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현실적으로 자유인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정치를 하겠는가?’ 그런 의문을 제기한 것인데요, 거기에 ‘정말 그렇다면 정치 행위로서 자신의 그 “사랑”을 행하게 될 것이다,’ 그런 대답 아닙니까?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에서 흔히 하는 소리로, 소위 저런 사람더러 ‘산으로나 가버려라!’ 하는 행태에 일침을 가하는 말씀도 되겠습니다. 물론 “사랑”할 수만 있다면, 그게 산속이든지 속세든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만, “사랑”하겠다는 사람마저도 그냥 내버려두지를 않으니 말씀입니다.
어째 말을 이어가기가 수월하지 않습니다. 질문 자체가 하나의 가정에서 출발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실제로 저렇게 정치를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정말 그 얼마나 운신하기 어렵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씀입니다. 사면이 초가라면 거기서 참된 인간이라고 해도 그들을 이끌고 가기가 쉽지 않겠지요. 그런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라고 해도, ‘일’이란 정말 하고픈 마음으로 달려들어도 어려울 때가 부지기수인데, 말로만 협동하겠다고 하는 무리들이 단지 복지부동이라면, 자유인이고 참된 인간이고 간에 그 어려움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각자가 자신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해나가야만 하겠습니다. 인간들이 점점 더 개인주의로 흐르고, 문명은 더욱 더 기계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으며, 사회는 급속도로 무너져 가는 꼴입니다. 거기서 해야 할 일이 그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한 세태 속에서 정말 저런 정치가가 있어야만 하겠지만, 정치 아닌 영역에서도 각각 그만한 인간들이 하나둘 생겨나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맨날 하는 얘기지만, 우리 세대에는 미처 못 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다음 세대에 더 망가지지는 않게라도 해놔야 하겠습니다.
더구나 그게 크리슈나무르티 가르침에 관련되는 일이라면, 참으로 수천 년 만에 완전히 새로 시작되는 일이어서, 모든 것들을 둘째로 미루더라도 이것 하나만은 반드시 온전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해놔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약육강식의 국제정세 속에서 정치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참 그 얼마 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무히카 대통령이 저렇게 말했다 하더라도 말씀이지요. 국제정세뿐만 아니라 본문에도 이 말이 나오지만, ‘세상 모든 것들은 서로 맞물려 있기에 반드시 전체적으로 다루어야만 하는 것’이지만, 실제 우리 각자의 모습은 하나하나 갈가리 찢어진 모습일 뿐이라서 기어이 거기서부터 혁명이 일어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저마다 ‘나’를 바탕으로 살아들 가고 있는데 거기서 혁명이 일어난다는 말은, 흔히들 하는 말처럼 ‘나’를 비우는 일이며, 그리하여 그 자유와 사랑과 지성과 창조를 바탕으로 삶을 온전하게 즐기며 살아간다는 뜻이겠지요? 실제로는 진짜 그런 사람 참 드물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세계적으로 볼 때, 여기 극동의 한 지역에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그러한 흐름이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극구 유일하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그런 흐름이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무의식에도 작용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다만, 이러저런 사정들 때문에 그 발현이 드디드디 미루어지고 있는 건 혹시 아닐까요?
꼭 무슨 정부 관료 아니더라도, 우리는 내면 깊이 잠자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 저력을, 설령 그게 희미해져서 그냥 ‘조금 길들어 있다’는 표현마저 과하다 해도 말씀이지요, 반드시 일깨우고 가꾸어가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정말로 ‘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듯이’ 세상 누구라도 다 부러워하도록 활짝 피울 수 있는 일입니다. 저런 바탕이 없다 하더라도 그렇게 가꾸어갈 수도 있는 일이지요. 본문은 정치와 관련된 얘기라고 하겠지만, 그 바탕은 역시 ‘개인의 혁명’에 있습니다. 세상 그 어떤 분야든지 간에 오로지 ‘혁명적인 개인’이 최우선적으로 그리고 반드시 필요한 시대 아닙니까?
이게 무슨 한 시대에 똑똑하다는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질 일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익명으로 익어가는 일이겠지요. 그 어떤 사회고 간에 정말 생각 있는 ‘지성’이라면, 무슨 일보다도 이 “진리의 흐름”에 먼저 관심을 보이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정작 우리 사회는 너무나도 조용합니다. ‘촛불혁명’에 대단한 찬사가 쏟아진다고 해도, “무리로서는 무리가 가는 데까지밖에 못 간다”는 아인쉬타인의 말도 있습니다. 거기서부터는 각 개인들이 이리도 가보고 저리도 가보고 하지 않겠습니까? 거기서 행여 무슨 오솔길이라도 하나 생기게 될 것입니다. 한 사람 두 사람 더 가고 또 가고 하다보면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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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6]
한때는 “정치검찰”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지만
인간 세상 누구라도 다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인데, 왜 하필 ‘촛불시민’은 빼야 한단 말이겠습니까? 오히려 저런 말씀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세계사에 유례없는’ “촛불시민”들 아니겠습니까? 본문 말씀대로, 그가 설령 ‘정치인’이라고 해도 제대로 듣는다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르게, 정말로 시민 · 국민을 위해서 가장 효율적으로 “정치”를 할 것입니다. “정치와 삶”을 분리하는 게 아니라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도 역시 ‘정치’와 ‘삶’은 분리되어 있는 거지요?
정치뿐만 아니라 ‘학문과 삶’도 분리되어 있고, ‘법과 삶’도 분리되어 있으며(법이라는 게 정말로 만인에게 평등하기라도 합니까? 이 세상 누구라도 ‘걸면 걸리는 게’ 법이고 ‘역으면 엮이는 게’ 법이지요? 습관적으로 해왔겠지만, 그 ‘거는 인간’들 지 ‘안 걸릴라고’ 아등바등 하는 건 아닌지.), ‘예술과 삶’도 여전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경제와 삶’도 그게 꼭 융합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진짜배기 인간으로서, 저런 제반 영역과 “삶”이 분리되지 않은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마당에, ‘국민의 화합’이나 ‘세계의 평화’가 과연 이루어질 수 있단 말이겠습니까? ‘홍익인간’이나 ‘인류공영’도 한갓 슬로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들 각자가 제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알아야지요. ‘인간’ 각자 내면에서 스스로 융화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세상”을 들먹일 수나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다. 그러니 크리슈나무르티 말씀은 오로지 ‘개인’ 각자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 것이지요. 내가 나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기껏 쾌락을 행복으로 알고 살다 죽는 것이거든요. 오로지 쾌락이 행복인 줄로만 알고 있지요?
하기사 저런 지적도 제대로 들릴 수 있게, 우리들 각자 다들 ‘귀가 뚫려 있지도 않습니다.’ 마치 난생 처음 영어 뉴스 들을 때와 비슷하겠지요. 그런 것과도 똑 같지 않겠습니까? 그런 주제에 ‘영어회화’가 되겠습니까? 제 경우입니다만, 크리슈나무르티 저서, “자유인이 되기 위하여” 처음 읽을 때, 딱 저랬거든요. 방바닥에 몇 번씩 책을 팽개칠 만큼 안 읽혔습니다. 책 모서리가 짜부라지기도 했었지요. 그런 책도 아주 여러 권 샀었습니다. 마음 가는 사람들 만나면, 읽던 책을 줘버리곤 하는 바람에 말씀입니다. 모름지기 “세상을 전체적으로 보라.”는 말씀이겠습니다.
말씀대로 저러하니 정치인도 크리슈나무르티 좀 읽으면 안 되겠습니까? 검찰총장도 좀 읽어야 안 되겠습니까? 야당 여당 당수도 좀 읽어볼 일이며, 가막소 있는 전직 대통령도 좀 읽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인류가 생겨난 지 250만년 또는 350만년 만에 진짜로 새로 오신 성인 덕분에, 그 “진리”의 말씀을 고스란히 원본 그대로 읽어볼 수 있으니까 말씀이지요. 제발, 좀, 단 한 줄이나마 좀 끈질기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인생이 행복하다’면 전혀 안 읽어봐도 되겠습니다만. 고작 가막소에나 보내고 가고 하는 당신네들 인생이 뭐 그리 “행복”하단 말입니까?
일반 시민들 비판의 대상이 옛날에는 상위 1%였지만, 이제는 상위 20%라고 한다네요? ‘그들만의 리그’라고도 불리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오늘날 대한민국 지배층이 진짜 “행복”하기라도 합니까? 그게 “그들만의 쌈박질”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만, ‘검찰개혁’ 시국에 그냥 딱 보이는 것으로 보자면, 어느 한 가족은 아주 망신창이가 되었으며, 저 힘쎈 ‘조직’ 또한 적폐청산의 확실한 대상임을 만천하에 더 드러난 것 아닌가 합니다. 그들 모두 상위 20%지요? 오늘날 검찰개혁에 극구 반대하는 꼭두각시들은, 하위 80%들의 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게 했다는 면에서, 기득권 지배층 ‘보스’로부터 밉보이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시인은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었다.’고 노래했지만, 시민 ‘8할’에 대하여 정말로 역사와 사회에 대한 관심이 한층 깊어지게 해준 것도 같아서 말씀입니다.
역시 ‘오버’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지 간에, 진짜로 ‘독립’한 인간 말고, 당파친일독재유신군부딴나라로 이어진 세력들과, 고작 거기에 빌붙어서 자신들만의 이익을 탐해온 대한민국 기득지배층들에 대한 적폐청산과 견제 없이는, 이 땅 역시 저 어느 나라처럼 그런 기득권세력들의 시민들에 대한 ‘착취’가 더 딱딱하게 찐득하게 고착화되어 갈 뿐이겠습니다. 도대체 이 나라가 그렇게 ‘칼’로 다스려 온 나라란 말입니까? 왕정 시절에도 ‘왕’이 그렇게나 함부로 하지 않았습니다. 저렇게 고여서 썩어온 기득권층의 그 폐해가 얼마나 심각하면, 지극히 합리적인 사람들까지 ‘적’로 몰아서 매장시킨단 말입니까? 저들은 꼭 그런 꼴로 우리를 지배하고 착취해온 것 아닙니까?
우리가 ‘동학’을 얘기하고, 제헌헌법에서부터 ‘기미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한다고 천명하는 것 하며, 3·15, 4·19, 10·26, 6월항쟁, 기어이 촛불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런 저력을, 시민을 고작 개·돼지로 취급해온 당신네들은 여전히 무시하고 있을 뿐이지요? 그렇지 않다면, 왜 최소한이나마 합리적인 ‘정책’이나 ‘대안’을 제시해야 할 주제에,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기’밖에 못 한단 말입니까? 사안들 세세하게 지적할 능력도 없습니다만, 그래 본들 당신네들이 기껏 이 핑계 저 구실 달아가며 빠져나가기밖에 더 하겠습니까? 친일파들 때문에 아주 단단하게 굳은 당신네 부패기득 세력들, 이제 저기 어디로 좀 ‘가야 할 때’ 아닙니까? 그게 지금이라니까요.
무관한 얘기도 아니겠습니다만, 한때, 십 수 년 전이겠습니다, “무능보다는 부패가 낫다.”고 했지요?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은 전혀 ‘무능’하지 않았습니다. 진짜 무능한 것은, 오늘날에도 그럴듯한 정책 하나, ‘개연성’이라도 있는 대안 하나 내놓는 대신에. 고작 ‘발목잡기’만 하고 있는 수구꼴통기득부패농단 세력들 아닙니까? 그러니 당신네들이 하는 짓이라고 해봤자, 삿대질에 치고 박고 쌈박질이나 일삼고 있는 것 아닙니까? 수십 년 수백 년, 당신네들한테 빌붙어먹고만 살아온 무리들과 함께 말입니다. 그게 당신네들 안에서나마 별 탈 없이 잘 화합되고 있단 밀입니까? 그게 되는 일이겠어요? ‘보수’로서 ‘시민’들에게 그다지 호응을 얻고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저들은 이 사회 그 누구 정말로 ‘지성’이고자 하는 개인들을 여전히 ‘적’으로 몰아붙이겠지만, 정작 그런 사람들은 누구라도 단지 ‘지성’이고자 할 뿐일 것입니다. 그 어느 편에 ‘가담’하지도 않겠지요. 상식적이지 못 하고 합리적이지 못 한 행태들에만 무슨 말을 한마디 해도 할 수 있을 뿐이겠습니다. 잘하는 일에는 적으나마 하나라도 더 보태려고 할 것이고 말이지요. “촛불혁명”도 모름지기 보다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세상으로 만들어가자는 것 아닙니까? 세계 각국 사람들이 한번 부러워했다고, 이게 그만두어도 괜찮은 일이겠습니까? 오히려 이제는 정말 한반도를 넘어서, 아프리카 저 더러운 물을 마시는 꼬마들, 죽어가는 그 꼬맹이도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글쎄요, 다는 안 되겠지만, 그나마 물질적으로는 이만큼 살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이제 각자 진짜 “행복”하게 살아야 안 되겠습니까? 행복할 때라야, ‘옆 사람’이 눈에 들어오는 법이지요? 물론, 각자의 재주에 따라서 ‘저마다의 소질을 개발’하기도 해야겠고, 인공지능을 더 ‘똑똑’하게도 만들어야 하겠지만, 구성원 전부가 다 그런 일에 매달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 일들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나 좀 ‘밴댕이 소가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이 다 부러워한다는 대기업, 재벌들이 앞 정권 시절 저질러놓은 뻘짓들, 삽질들 아직 다 해결도 안 되었지요? 중소기업 등쳐먹는 짓도 여전하지 않습니까?
누군가는 저더러 옛날부터 저기 어디 ‘산으로나 가버려랏!’ 하면서 처음부터 “무시”했고, ‘차별, 배제’를 넘어서 아예 “매장”시켜 놨습니다만, 그러나마나 저로서는 여기서 어딘가로 더 가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것도 “토굴”이 아주 ‘저택’입니다. 그만큼 ‘지금·여기’가 ‘다’이고 ‘끝’이지요. 하루하루가 아주 ‘충분’합니다. 매번 ‘지금 이 순간’이 전부고요. 그러니 ‘뭐가 어찌 돼도 나는 상관 없습니다(I don't mind what happen).’ 그렇게 다만 어떤 활짝 깨어 있는 에너지 상태로 살 수 있으면 되는 일입니다. ‘생각’에 폭 빠져 있으면, 그런 상태가 될 수가 없지요. 이제 남은 일은 오로지 그뿐이지 않겠습니까? 어디론가 움직일 수밖에 없는 날이 온다면, 또 그렇게 흘러가면 되는 일입니다.
그것도 그렇습니다만, 어느 한 개인이야 그렇게 산다고 하더라도, 흔히들 하는 말로, ‘정치판이란 본래 썩은 내가 진동을 한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아예 그 판에 발을 안 들여놓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확실한 사실은, 그냥 ‘나 몰라라’ 내버려두면 둘수록 더 썩어갈 거 아니겠습니까? “하다못해 벽보고 고함이라도 치라.”고 하셨지요? 이게 제 스스로의 권력으로 곪아가는 ‘검찰’에는 해당사항 없는 일이겠습니까? 대한민국에도 ‘생태계’를 문제 삼는 정치세력도 등장했습니다만, 한때는 그런 흐름이란 언감생심이었었지요? 세계사적으로 인류사적으로 엄중하거나 말거나, 저토록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거나 말거나, ‘검찰’은 오로지 ‘지꺼챙기기’ 아닙니까?
바야흐로 ‘풀뿌리 민주주의’로, 우리들 각자가 공동체의 건강성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깨달음을 얻은 시대입니다. 그것도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문화운동으로 말씀이지요. “혁명”이 “잔치”처럼 이루어졌다는 거 아닙니까? 그다지도 고귀하고 앞으로는 없을 지도 모르는, 그 보배 같은 “잔치”를 그냥 ‘정권 한 번 바꾸고 말 일’이 아니지요? 이전부터 내려오던 말도 있습니다. “촛불잔치” 말씀입니다. 전혀 무리 없이 이어지는 말 아닙니까? 그런 노래도 있지요? 그런 잔치 마당에서 오래 썩은 무리들이 나가 떨어지는 겁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놀라고도 부러워한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부디, 제발, 그런 잔치에 ‘폭력’이 개입하지 않도록 빌어도 봅니다. 하물며 “탱크”가 사람들을 뭉개서야 쓰겠습니까?
어쨌든지 간에, 본문 말씀대로 “정치”와 “삶”을 분리시키지 말아야겠습니다. ‘정치’로 ‘내꺼’ 챙길 일이 아니라, 공동체의 건강성에 기여하는 것이지요. 글쎄요, 그래도 ‘고고’한 척이나 하고, 사랑방 재떨이에 곰방대 두드리면서 ‘에헴, 톨 톨’ 하고 있을까요? 꼭 “정치” 영역에서만 그런 것도 아닐 것입니다. 경제, 예술, 학문, 교육 등등에다가 종교까지도 그런 모든 영역을 저 “잔치마당”에 초대해야겠지요. 글쎄요, 잔치마당에 ‘검찰’ 할애비, ‘종교’를 초대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만. 사회가 건강하자면 각자의 인생이 건강해야겠고, 그 밑바탕이 “종교” 아니겠습니까? 글쎄요, 오늘날의 ‘종교’는 전혀 그런 역할이 아니지요? 처음 하는 말도 아닙니다만, 크리슈나무르티 가르침은 “정말 종교적으로 살아라.” 바로 그런 말씀일 터입니다.
주저리주저리 말이 참 많지요? 이만 줄여야겠습니다. 인생 ‘다 산 건’ 아닌 듯합니다만,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다 싶은데요. 세상에 태어나서 진짜 아무것도 해놓은 게 없는 꼴로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문득, “나이 값”이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이탄”님 작품입니다. 제 스스로 쓴 시들은 보잘 것도 없고, 잘 써지지도 않습니다. 20 년도 더 전에는, 제 시집 말미에 “양심선언”을 붙이면서 앞으로는 ‘한 편 한 편 시를 쓰면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 “선언”도 해놨었는데 말씀이지요. 역시 별로 보잘 것도 없는 글, 여전히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본문에 “오늘날의 정치라는 것은 단순히 착취의 도구밖에 안 됩니다.” 그러셨습니다만, ‘오늘날의 검찰은 단순히 정치의 도구밖에 안 됩니다.’ 그렇게 바꾸어보면 어떻습니까? 거기에 저런 삿된 흐름을 바로잡고자 하는 ‘장부’도 있지요? 모쪼록 제 모자라는 점, 넘친 꼴, 틀린 곳, 좀 지적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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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값
李 炭
부탁만 하고 다니고
핀잔이나 줏어 먹고
하는 일마다 오해나 받고
하기는 했는데 신통치 않고
말이 많다는 말이나 듣고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상대는 멀고
지적지적 뒤처져 헐떡거리고
돈 버는 재주도 없고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 책장을 펴놓고
시간이나 보내고
그러면서 친구나 하늘은 좋은
이 나이 값은 얼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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