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
우희정
꼭 전해 줄 게 있다며 그가 내민 것은 작은 접부채였다. 노란 바탕에는 어느 잡지에 실린 내 수필 한 구절과 그림이 다소곳하였다. 이게 웬 횡재인가. 그는 문단의 큰 어르신이고 나는 일천한 수필가 아닌가. 황공하여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지만 원래 표현을 잘 못하는 성격이니 달리 뜻을 전할 방법이 없었다. 워낙 인심 좋기로 소문난 분이니 까마득한 후배에게 주는 격려의 뜻이려니 여기기로 했다.
몇 주가 지났을까. 또 하나의 부채가 왔다. 물론 배달도 그가 직접 하였다. 지난번처럼 수필 한 구절과 그림이 담긴 부채를 주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총총히 갔다. 몇 번의 계절이 바뀌어도 그는 여전히 전해 줄 게 있다며 왔고 그리고 갔다.
어느 날 문득 방안을 둘러보니 부채가 그득하였다. 접부채를 시작으로 원선(방구부채), 쥘부채, 미선(尾扇), 세미선, 곡두선(曲頭扇) 등등. 크기와 모양도 다양하여 같은 게 거의 없었다. 세모, 네모, 원형, 역삼각형…. 천천히 아주 천천히 꼭 꼭 짚어 세어보았다. 무려 아흔일곱 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흔일곱 번째도 그는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돌아서 갔다.
그 모습에 아쉬움을 느낀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아쉬움이 날로 진한 여운으로 가슴에 고이기 시작했고 그 깊은 곳으로부터 따뜻하고 부드럽고 향기로운 안개가 피어났다. 그렇게 돌아서 가는 그의 고독과 열정이 오롯이 전이되어 나는 많이 앓았다. 전해 줄 게 있다는 그의 말이 무시로 맴돌았다. 전해 줄 것! 그가 백을 채우기 전에 나는 그것을 분명히 받았고 모든 두려움을 이겨낼 용기를 얻었다.
부채는 팔덕선(八德扇)이라고도 한다. 시원한 바람을 일으켜 더위를 쫓아주고 파리나 모기 같은 해충을 쫓아준다. 가려운 곳을 긁을 수도 있고 악취를 날려버리고 곰팡이도 막아준다. 햇볕을 가려 그늘을 지워주고 피하고 싶은 사람이 오면 얼굴을 가릴 수도 있다. 그리고 춤이나 판소리 등 공연의 소품으로도 빼놓을 수 없다. 또한 액운을 막아준다고도 하였으니 부채의 용도가 그뿐이랴. 바닥에 앉을 때는 깔개로 쓰이기도 했고 아궁이의 불길을 더 세게 할 때도 요긴했다. 어린 시절 부엌에는 으레 낡고 그슬린 부채 하나 선반 어디엔가 꽂혀 있지 않았던가.
부챗살 수와 꼭지 모양, 선추의 종류에 따라 합죽선, 반죽선, 죽절선 등등 30여 종에 달하는 접부채, 그중에서도 그가 직접 그림을 넣은 화선을 나는 제일 좋아한다. 하여 여름날이면 수시로 부채를 손에 든다. 부채가 가진 팔덕선 중 그 첫 번째인 더위를 쫓는 일도 무시할 수 없지만 그보다는 부챗살을 펼칠 때면 엄전스레 모습을 드러내는 풍광으로 하여 한껏 호사를 누리는 편이다.
그래서 해마다 단오를 맞으면 창포물에 머리를 감지는 못할망정 부채를 마련한다. 작년에 쓰던 것은 고이 모셔두고 새 부채를 그려달라고 그에게 조른다. 그토록 수시로 부채를 갖다 줄 때는 언제고 이젠 열정이 식었다며 엄포를 놓으면서 더위 맞을 준비를 한다. 옛날에 임금이 단오를 맞아 신하에게 더위를 이겨 건강하라는 뜻이 담긴 부채를 하사했다지만 나도 그에 버금갈 셈을 챙기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운명처럼 한 집에 살고 있다. 굳이 말하자면 우리는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서로에게 부채의 덕성을 모두 바치고 있는 것이다. 고단할 때도 속상할 때도 그가 그려준 부채를 바라보면 나도 모르게 행복감에 젖어든다. 그리고 뭉클한 가슴으로 기도를 드리게 된다.
첫댓글 _((()))_ _((()))_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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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秋扇이 생각납니다 _(())_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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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나 다양하고 예쁜 부채를 가지고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부자일 겁니다.
저는 기껏해야 싸구려 접부채와 광고가 실린 플라스틱 부채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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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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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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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