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8일 오늘의 역사
2022년 세계 최대 활화산인 미국 하와이의 마우나 로아 화산이 38년 만에 분화를 시작
28일 미국 지질조사국(USGS)에 따르면 해발고도 4170m인 마우나 로아 화산 분화구에서 용암이 분출했다. 분화 15분 후 USGS는 기존의 화산활동 주의보를 경보로 상향하고, 항공기상 코드도 황색에서 적색으로 격상했다.
하와이 섬(빅 아일랜드)을 구성하는 5개 화산 중 하나인 마우나 로아는 지표면에 있는 가장 큰 활화산이다. 마우나 로아 화산은 1843년 이래 33차례 분출했는데, 최근 크게 분출한 사례는 1984년 3월 24일부터 4월 15일까지다. 그전에는 1926년과 1950년 분출로 산기슭 마을들이 파괴된 적이 있다.
2021년 지난달 18일 지린성 교도소를 탈옥하면서 70만 위안(약 1억3100만원)의 현상금까지 걸린 탈북인 출신 주현건(朱賢健 39)씨를 검거
2021년 페루 수도 리마 인근에서 최대 1200년 전 것으로 보이는 남성의 미라가 발견
2014년 농악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 북한 아리랑 인류무형유산 등재
2010년 경북 안동에서 구제역 첫 발생, 정부 늑장대처로 전국 확산, 한 달 동안 60만 마리 가축 살처분
2010년 위키리크스 美 국무부 외교 전문(電文) 공개
폭로 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가 2010년 11월 28일 미 국무부의 외교 전문(電文)을 공개하였다. 위키리크스는 정부와 기업의 비윤리적 행위를 고발한다는 목적으로 2006년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설립된 내부고발 전문 사이트로, 이번에 공개한 국무부 외교 전문은 이란 핵개발 우려에 따른 중동 관련 내용이 다수를 차지하며, 각국 정상에 관한 적나라한 평가를 포함하고 있다.
위키리크스의 외교 전문 폭로로 미국 버락 오바마 정부는 중요한 정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는 비난과 함께 전 세계 정부로부터 신뢰가 하락하게 되었다.
해외 언론은 위키리크스의 이번 폭로를 유출 문서가 국내외 정부 부처간 통신에 사용하는 전문(電文)이라는 점에서 '케이블게이트'라 부르고 있다.
미국은 2001년 9·11 테러 이후 안보 관련 부처 간 정보 공유를 확대하기 위해 국무부와 국방부가 전문을 함께 공유토록 한 네트워크 '시프르넷(SIPRnet, Secret Internet Protocol Router Network)'을 만들었으며, 이번에 공개된 외교 전문은 이 시프르넷에 이미 올려져 있던 것들이다.
2009년 장미란, 세계역도선수권 4연패
2009년 11월 28일 한국 역도의 간판 장미란 선수(26세·고양시청)가 경기 고양시 킨텍스 역도경기장에서 열린 2009 세계역도선수권대회 여자 최중량급(75kg 이상급) 4연패에 성공했다.
장미란은 인상에서 136kg을 들어 은메달을, 용상에서는 세계신기록인 187kg을 들어 금메달을 차지했다. 장미란은 인상과 용상 합계에서도 323kg으로 금메달을 따 대회 2관왕에 올랐다.
이로써 장미란은 2005년부터 4회 연속 세계선수권 최정상에 올랐으며, 지난해 베이징올림픽을 포함하면 5년 연속 우승을 기록하게 됐다. 세계여자역도 역사에서 세계선수권 4연패를 이룬 선수는 중국의 리야쥐안과 탕웨이팡 두 명이 있지만, 최고 권위 국제대회에서 5년 연속 우승한 선수는 장미란이 처음이다.
장미란은 인상에서 금메달을 놓쳐 3관왕을 이루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지만 이튿날인 29일 국제역도연맹(IWF)에서 올해 세계선수권대회 여자 부문 베스트 리프터로 장미란을 선정해 한국 역도 사상 최초로 세계선수권 대회 베스트 리프터로 뽑히는 영광을 누렸다.
2009년 러시아, 테러로 열차 탈선
2009년 11월 27일 오후(현지시각)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를 떠나 출발해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향하던 급행열차가 탈선해 최소 39명이 숨졌다.
오후 9시30분쯤 모스크바에서 북서쪽으로 약 350km 떨어진 노브고로드주(州)에서 승객 661명과 승무원 21명을 태운 넵스키 166호 급행열차의 후미 객차 3량이 철로를 이탈했다. 이 사고로 탈선 객차 중 2량이 완전히 전복, 파손됐다.
사건 3일후까지 러시아 당국은 39명이 숨지고 95명이 부상했으며 18명이 실종됐다고 잠정 집계했으나 중상자가 많아 사상자 수 집계에 혼선을 빚었다.
탈선은 테러범들이 설치한 TNT 7kg 위력의 사제 폭발물에 의한 테러가 원인이었다. 당초 설치한 폭발물은 2개로 알려졌으며 사건 당일에는 그 중 하나만 폭발했으며 다른 한개의 폭발물은 불발됐다.
2008년 개성관광과 남북열차 운행 중단
2008년 '존엄사(死) 인정' 국내 첫 판결
'식물인간' 상태로 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게서 인공 호흡기를 떼도 좋다는 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게 하는 '존엄사'(尊嚴死)가 법적으로 인정된 것이다.
서울서부지법 민사12부(재판장 김천수)는 2008년 11월 28일 지난 8개월 동안 식물인간 상태로 있던 김모(여·76)씨의 자녀들이 한 대학병원을 상대로 "어머니의 평소 뜻에 따라 자연스러운 사망을 위해 인공호흡기를 제거해달라"고 청구한 소송에서, "병원은 김씨에게 부착한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환자의 치료 중단 의사는 환자가 치료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듣고 난 뒤 명시적으로 표시해야 하지만, 의식불명인 경우에는 의식이 있을 당시 현재 자신의 상태라면 어떤 의사를 표시했을 것인지를 추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와 관련, 김씨가 3년 전 남편이 심장질환으로 임종을 맞게 될 무렵 생명을 며칠 더 연장할 수 있는 기관절개술을 거부했고, 가족들에게 '내가 소생하기 힘들 때 인공호흡기는 끼우지 마라. 기계로 연명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는 가족들의 진술을 토대로 김씨가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의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이 판결은 적극적 안락사 및 모든 유형의 치료 중단에 관한 것이 아니고, 치료가 무의미하고 환자에게 치료 중단 의사가 있다고 보이는 경우 의사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근거한 인공호흡기 제거 요구에 응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환자가 의학적으로 소생 불가능하다는 근거가 있어야 하며, 무의미한 생명 연장 치료를 원하지 않는다는 환자 본인의 의사(意思)가 인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후 재판부의 판결에 따라 병원측은 가족과의 합의로 김모 할머니에게 2009년 6월 23일 인공호흡기를 떼고 인공 영양·수액 공급만 실시했다. 그러나 인공호흡기를 뗀 후 자발 호흡으로 201일을 생존하여 신부전증·폐부종·다발성 장기(臟器)부전으로 2010년 1월 10일 7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에 '어디까지를 무의미한 연명치료로 볼 것인가'라는 새로운 논란이 제기되었다
2006년 공군 T-41B 실습기 퇴역 고별비행
2005년 폴 마틴 캐나다 총리 의회로부터 불신임 당함
2002년 국내 첫 액체연료 로켓 발사성공
항공우주연구원이 중심이 돼 순수 국내 기술로 독자개발한 액체추진과학로켓 KSR-Ⅲ이 2002년 11월 28일 오후 2시52분 충남 서해안에 있는 국방과학연구소 발사장에서 성공적으로 발사돼 이날 오후 2시56분에 서해상 목표지점에 추락했다.
우리나라가 독자개발한 KSR-Ⅲ은 길이 14m, 직경 1m, 총중량 6t에 추진력은 13t 수준이었다. 연구비만 5년간 780억원이 투입됐다. KSR-Ⅲ은 과학탐사용 기자재를 탑재한 채 초속 902m로 발사됐으며, 총 231초간 79km를 비행한 후 서해안 어청도 인근에 떨어졌다.
이번 액체추진 과학로켓개발사업은 과학기술부 특정연구개발사업의 일환으로 1997년 11월부터 2002년 12월까지 780억원의 예산을 투입,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을 중심으로 현대모비스·한화 등이 참여했다.
고체연료추진로켓은 일단 연료를 주입하면 10년간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고 다루기가 편리해 주로 미사일 등 군사용으로 사용되는 반면, 액체연료추진로켓은 주로 상업용으로 사용된다. 항공우주연구원 최동환 원장은 “독자 개발한 로켓으로 위성을 쏘아올린 국가는 세계에 8∼9개국뿐이며 북한의 로켓기술 수준은 우리나라보다 3년 정도 앞서 있다”고 말했다.
2000년 네덜란드 하원, 세계최초로 안락사 합법화 법안 의결
네덜란드 하원이 2000년 11월 28일 의사에게 불치병 환자의 안락사를 허용하는 법안을 의결했다. 안락사는 불치병 또는 말기 증세로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는 환자를, 본인 또는 가족의 요구에 따라 고통이 적게 인공적인 죽음에 이르게 하는 조치를 말한다. 안락사를 인간의 권리로서 인정하고 법으로 명문화한 것은 이번이 세계최초이다.
이날 통과된 법안은 환자가 불치병으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고, 다른 의학적 치료법에 대해 환자가 충분히 알고 있어야 하며, 환자가 이성적인 상태에서 안락사를 꾸준히 자의적으로 요청해야 하는 등의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또 반드시 법적으로 네덜란드 국민이어야 한다.
이 법안은 2001년 4월 10일 네덜란드 상원에 의해 최종 승인된 후 시행되기 시작했다.
1999년 한-중-일 정상 사상 첫3자회담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
1999년 우루과이 대통령에 호르헤 바트예 당선
1999년 11월 28일 실시된 남미의 우루과이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에서 집권 콜로라도당(일명 붉은 깃발당)의 호르헤 바트예(72) 상원의원이 역전승을 연출하며 당선됐다.
10월 31일 1차 투표에서 바트예는 좌파연합 진보광역전선(EPFA)의 타바레 바스케스(59) 후보보다 7% 적은 32% 득표로 2위를 했다. 그러나 1-2위가 맞붙은 결선에서 6%포인트 앞서며 52%대 44%로 뒤집었다. 그는 대권 도전 5번 끝에 당선의 감격을 누렸다.
경제학자이기도 한 바트예는 대통령을 3명이나 배출한 정치명문가 출신이다. 증조부가 1868년부터 1872년까지, 조부가 1903∼1907년, 1911~1915년 두 차례, 부친도 1947년부터 1951년까지 대통령을 지냈다. 이런 후광을 업고 1966년, 1971년, 1989년, 1994년 집권당 후보로 나섰으나 연이어 고배를 마셨다. 이번에도 남미에 불고 있는 좌파바람과 점증하는 개혁 요구, 경제 침체 등으로 바스케스 후보의 기세가 만만찮았다.
1970년대 이후 세력을 불려온 좌파세력은 최초의 사회주의자 대통령 탄생을 확신하며, 마이너스 성장과 빈부격차 확대 등 여당의 실정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하지만 다수 국민은 급격한 개혁보다는 안정 속의 변화를 택했다
1996년 소설가 김정한 사망
요산 김정한 선생은 `낙동강의 파수꾼`으로 불리면서 일제하 일본유학시절을 제외하곤 평생 고향 부산을 지킨 대표적인 향토작가였다.
193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사하촌`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낙동강 주변을 배경으로 고통받는 농민들의 삶과 항일 민족투쟁을 문학적 주제로 삼은 선생은 `항진기` `기로` `낙일홍` 등의 작품을 통해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40년 한글사용이 금지되자 붓을 꺾은 선생은 지난 1966년 58세의 나이에 단편 `모래톱 이야기`로 재등단하는 등 문학을 향한 끝없는 열정을 보였다. 그 후 `인간단지` `산거족` `수라도` 등을 통해 농민들의 건강한 삶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해 온 선생은 1987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초대의장을 맡아 활동했다.
1994년에는 제8회 심산상을 수상했고, 경남출신 후배문인들이 그의 호를 따 `요산문학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1995년 한글윈도95 시판개시
한글마이크로소프트(MS)사는 1995년 11월 28일 전국에 한글판 윈도95 동시발매를 시작했다. MS사는 편의점 LG25 전국 2백10개 매장에서 한글 윈도95 동시발매에 들어갔으며, 용산전자상가 일부 소프트웨어 상가에서는 27일부터 거래가 이뤄지기도 했다.
한글판 윈도95는MS-DOS나 윈도가 없어도 설치 가능하며, 바이러스제거용 프로그램 `브이스리플러스(V3+)`가 들어있어 컴퓨터내의 바이러스를 모두 제거할 수 있다. 또 정보처리 속도가 빠르고 각종 멀티미디어 관련장치를 별도의 호환장치 없이 장착해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운영체계이며 영문판은 지난 8월에 발표돼 상당수가 팔려 나갔다.
그러나 한글윈도95의 한글글자 코드가 국가표준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한 비난과 PC통신업계가 통신프로그램인 마이크로소프트네트워크(MSN)를 내장해 판매하는 데 대한 반발도 있었다.
1993년 온두라스 대통령선거 실시, 자유당의 카를로스 로베르토 레이나 당선
1987년 남아공 SAA사 보잉747여객기 모리셔스 해상 추락 탑승자 160명 사망 추정
1986년 남극조약 가입
1985년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 사망
브로델은 1902년 프랑스 로렌 지방에서 고교 수학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소르본 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브로델은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고교 교사로 부임했다. 이곳에서 브로델은 자기가 가르치던 여학생과 결혼했고, 낙타를 타고 사하라 사막을 여행하는 등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브로델은 1930년대 파리로 돌아왔다가 다시 상파울루 대학으로 떠났으며 브라질에서도 원시림 지역을 답사하는 등 강한 탐구심을 보였다. 다시 파리로 돌아와 박사 논문을 준비하던 브로델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출전했다가 독일군에게 포로가 된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자 첫번째 대작인 `필립 2세 시대의 지중해와 지중해 세계` 골격이 만들어진 것은 포로수용소에서였다. 종전 후 이 논문을 완성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브로델은 1948년 고등연구원 제6국(현재의 사회과학고등연구원) 출범의 주역으로 이 기관이 아날학파를 중심으로 하는 역사학 연구의 터전으로 자리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83년 문교부, 로마자표기법 개정안 확정
1980년 내무부, 도서지방 낙도개발 5개년 계획 발표
1980년 문공부, 정기간행물 66종 등록 취소
문화공보부는 1980년 11월 28일 주간이하 정기간행물 66종의 등록을 취소하고 2종의 주간지를 유사지에 통합토록하는 한편 10종에 대해서는 등록사항을 변경토록 조치했다. 문공부는 1980년 7월 31일자로 1백72종의 정기간행물의 등록을 1차로 취소하는데 이어 이날 2차 조치를 취한 것이다.
등록이 취소된 66종의 정기간행물중에는 새헌법에 따라 해산된 정당의 기관지 민주당화보(구민주공화당), 민주전선(구신민당)과 교육춘추, 디자인, 나나 등 월간지와 현대사, 사격 등의 계간지가 포함돼 있으며 잡지의 성격별로 보면 종교지가 10종, 약업의학지가 7종, 반공안보지가 4종, 각 기업이 내는 사보, 각급학교의 학보 등이다.
1980년 한·일 해저케이블 개통
한국과 일본을 잇는 해저케이블이 1980년 11월28일 개통되었다
부산과 일본 하마다 간 바다 밑 280km구간에 케이블을 포설한 것이다
이 개통으로 국내전화 가입자는 교환원을 거치지 않고 다이얼만 눌러도 일본가입자와 통화가 가능해 졌고 평균 10∼15분이 소요되던 소통난이 해소 되었다
국제전신과 텔레비전 전송 사진 등로 종전보다 쉽게 오갈 수 있게 됨으로써 다양한 국제통신수요에 대응하는 통신망을 확보하게 되었다
1979년 뉴질랜드 DC-10기 남극의 산에 추락 사망 257명
1977년 서울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과 수영장 완공
1969년 한국축구대표팀, 제2회 킹스컵 축구대회 우승
1966년 부룬디왕국에 쿠데타 왕정 전복. 수상이 정권 장악
1966년 동아일보 백광남특파원, 월남전서 순직
1962년 라오스 연립정부, 좌우 중립군을 단위국방군으로 통합 발표
1961년 유엔총회, 남아연방의 인종차별 비난안을 채택
1960년 모리타니, 프랑스로부터 독립
1958년 메디칼센터 개원
1958년 중앙의료원 개원
1956년 한미우호통상항해조약 체결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에 우호통상 및 항해에 관하여 1956년 11월 28일 서울에서 서명된 조약을 말한다. 1957년 10월 7일 서울에서 비준서를 교환하고 같은 해 11월 7일 효력이 발생하였다. 이 조약은 전문과 25개 조문으로 구성되며, 이 밖에 이 조약과 불가분의 일체로 인정되는 하나의 의정서가 있다. 이 조약은 양국간의 통상 · 거주 · 항해 등에 관하여 서로 최혜국대우 및 내국민대우를 부여하기로 규정하였다. 다만, 이 조약상 최혜국민대우규정은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에 의거하여 부여되는 특별편익에는 적용하지 않기로 하였다(1882년에 미국과 최초로 성립 · 체결된 「평화 · 우호 · 상업 및 항해에 관한 협약」에는 미국민에 대한 치외법권적 규정이 들어 있었다).
이 조약은 내국민대우의 정의를 규정하였고(동조약 제22조1항), 또 조약의 해석 또는 적용에 관한 분쟁으로서 외교교섭에 의하여 해결되지 않는 것은 원칙적으로 국제사법재판소에 부탁하도록 규정하였다(동조약 제24조). 이 조약의 기한은 10년, 그 후 어느 때라도 1년 전의 문서에 의한 예고로써 이 조약을 종결시킬 수 있다(동조약 제25조).
1954년 이탈리아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 사망
1953년 반공통일전선 결성
1949년 국제자유노동조합(IFTU) 결성
1943년 루스벨트-처칠, 카이로회담 직후 테헤란에서 스탈린과 회담
1941년 임시정부, 워싱턴에 구미외교위원회 설치. 위원장 이승만
1941년 임시정부, 대한민국건국강령 발표
1934년 진단학회, 진단학보 발간
1934년 5월 7일 오후 5시, 서울 소공동 코라다느 다방에 20여명의 한국인 학자들이 모여있었다. 한국과 인근 지역의 문화를 연구할 목적으로 탄생한 ‘진단학회(震檀學會)’의 발기총회였다. 진(震)은 중국의 동쪽, 단(檀)은 단군을 뜻하므로 ‘진단’은 우리나라를 지칭하는 말이다. 일본인들이 식민주의 사관을 전제로 한국사 연구를 주도하고 있어 우리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연구할 필요성이 절실한 때였다. 이병도·손진태·조윤제·이희승 등 당시의 대표적인 국학자 24명이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연구성과를 담은 ‘진단학보’ 창간호는 그해 11월 28일에 발간됐다. 초대 편집인 겸 발행인은 이병도가 맡았고 한성도서(주)가 발간을 도왔으나 2호부터는 회원들 스스로가 자금을 조달했다. 이병도는 집을 저당잡혀 비용을 마련했고 윤치호·김성수 등은 찬조금으로 지원했다. 이후 해외의 각 학회와 학술잡지를 교환할 정도로 성장했으나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회원인 이윤재·이희승 등이 구속되는 바람에 활동을 마감해야 했다. 진단학보도 14호를 마지막으로 중단됐다.
해방 후 속간된 진단학회는 미국 록펠러재단의 도움으로 1959년부터 1965년까지 ‘한국사’ 전 7권을 완간했다. ‘한국사’는 한국 실증사학이 이룩한 연구성과의 총결산이었으며 이후 한구의 역사학은 이 ‘한국사’를 계승하고 극복하는 과정이었다.
1930년 당인리발전소 준공
서울화력발전소 서울특별시 마포구 당인동에 있는 대한민국 최초의 화력발전소 이다
서울화력발전소는 총시설용량 38만 7,500 kW, 전력생산 연간 약 34억 kWh의 중유전소식 발전소이며
1929년 6월 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 착공하여 1930년11월28일 1호기 석탄화력발전으로 10,000KW의 생산으로 시작하였다
그후 1936년 2호기(12,5000KW)가 준공되었으나 6.25전쟁중 많은 피해를 입어
1956년 3호기(25,000KW)를 증설했다
1961년 한국전력에서 인수하여 1969년 5호기(250,000KW)를 준공하고 당인리 발전소에서 서울화력발전소로 명칭을 변경 하였다
이후 1970년에 1,2호기를 정지하고 4호기(137,500KW)의 4호기를 준공하고
1982년에 3호기를 정지 하였다
1925년 이상재,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직
1919년 대한애국부인회 간부23명 검거
1917년 파리에서 연합군대표회의
1916년 독일, 최초로 런던 공습
1910년 하와이 거주 이내수, 본국 최사라 여인과 최초의 사진 혼인
1897(조선 고종 34) 독립협회 풍수지리토론회 개최
1895년 춘생문사건 발생
1859년 미국 최초의 단편 소설작가 워싱턴 어빙 사망
1833(조선 순조 33) 창덕궁 대조전 등 불탐
1829년 러시아 작곡가 루빈스타인 출생(구력-11.16)
1820년 독일의 사회주의 철학자 엥겔스 출생
1757년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 출생
1520년 마젤란, 태평양 발견
스페인의 항해가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5척의 범선과 270여명의 탐험대를 이끌고 스페인을 떠나 세계일주 탐험에 나선 것은 1519년 9월이었다.
마젤란은 원래 포르투갈 태생으로 인도항로 등에서 무역을 배운 항해가였다. 하지만 모로코에서 현지 무어인과 한 거래를 포르투갈 왕에게 의심받자 스페인으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유럽의 강대국이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식민지를 둘러싸고 다툼이 계속 됐는데 교황 알렉산더 6세의 중재로 1494년 ‘토르데시아스 조약’을 맺어 카보베르데 제도 주변을 중심으로 스페인은 서쪽을, 포르투갈을 동쪽을 차지하기로 했다. 포르투갈은 인도항로를 통해 향료 무역으로 많은 이득을 보았지만 스페인은 인도까지 갈 방법이 없었다. 마침 스페인으로 온 마젤란이 스페인 왕 카를로스 1세의 명으로 인도를 찾는 항해를 나서게 된 것이다.
마젤란 일행이 대서양을 건너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해안을 따라 남하하다가 남위 52도50분 지점에서 알 수 없는 한 해협으로 들어선 것은 출항후 1년여만인 1520년 10월 21일이었다. 훗날 마젤란해협으로 명명된, 남미 대륙의 남단과 푸에고 제도 사이를 지나는 해협이었다.
1개월이나 지났을까. 11월 28일 갑자기 저멀리 끊없는 바다가 펼쳐졌다. 태평양이었다. 유럽인으로서는 처음 가보는 뱃길, 그러나 곧 인도가 나타날 것으로 기대했던 희망은 가도가도 육지가 보이지 않으면서 실망으로 바뀌었고 그 실망도 점차 절망으로 바뀌었다. 온갖 고초 속에서도 마젤란은 그 바다를 ‘평화로운 바다(태평양)’로 이름지었다.
99일 만에 괌섬을 만나고 곧 필리핀에까지 이르렀으나 결국 마젤란의 묏자리가 되고 말았다. 필리핀 종족간의 싸움에 휘말려 41세로 생애를 마친 것이다. 나머지 탐험대는 출항 3년만인 1522년 9월 8일에 스페인에 돌아왔으나 살아돌아온 것은 한척의 배와 18명의 선원 뿐이었다. 곧 지구가 둥글고, 콜럼버스가 발견한 것은 인도가 아니라 신대륙이었으며 그 너머에는 세상에서 제일 큰 바다가 있다는 사실이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