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 치마에 노랑 삼회장 저고리를 받쳐 입고,
삼단 같은 머리채를 쪽을 쪄 옥비녀를 꽂고,
장지문을 스르르 열고 다소곳이 고개 숙이고 들어와
나붓이 큰절을 올리고 쟁반에 은구슬 구르는 목소리로 소개를 한다.
불과 40년 전만 해도 가무에 능통한 기녀들을
옥(屋)·각(閣)·루(樓) 등의 옥호를 쓰는 술집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러한 그녀들이 사라진지 이미 30년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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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전통 사회에서 잔치나 술자리의 흥을 돋우기 위해
제도적으로 존재했던 특수 직업여성,
즉 일종의 사치노예라고 할 수 있는
기녀·기생 또는 ‘말을 할 줄 아는 꽃’이라는 뜻의 해어화(解語花)로 불리던 기녀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조선 영조 때의 남인 학자 성호 이익은
그의 저서<성호사설>에서 기생이 양수척(揚水尺)에서 비롯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양수척은 키나 고리짝을 만들어 팔던 유기장(柳器匠)을 말한다.
이들은 고려가 후백제를 정복할 때 가장 다스리기 어려웠던 집단이었다.
이들 가운데 젊고 용모가 아름다운 여자를 뽑아
가무를 가르쳐 기생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 고대 제정일치 사회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무녀가
정교(正敎)가 분리되는 과정에서 기생으로 전락했다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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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때는 지방에서 일어난 고구려가
다른 여러 부락의 부족을 정벌하여 자리잡아 갈 때,
피정복 부락의 부녀자가 유녀(遊女)로 전락한 것이 기녀의 시초라고 한다.
고구려 벽화에 남아 있는 무용도는 이러한 유녀를 시사해 주고 있다.
백제에서는 부여성을 방어하는 군단이 배치되었던 곳에
‘꽃쟁취’라는 유녀가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신라는 화랑제도와 원화(源花)에서 기녀의 근원을 찾아 볼 수 있다.
화랑은 처음에 원화라하여 남모(南毛)와 준정(俊貞) 두 여자를 택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300여 명의 무리를 조직했으나 이들이 서로 질투하는 폐단이 생겨
이를 폐지하고 그 대신 귀족 출신의 청소년 중에서
얼굴이 아름답고 품행이 바른 남자를 뽑아 단장으로 삼았다.
이들 원화는 기생과 같은 것이고,
원화제도가 실시될 때에는 매춘 풍속이 있었다는 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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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오면 기녀의 신분이 확실해진다.
기생은 노비와 마찬가지로 한번 기적(妓籍)에 오르면
천민이라는 신분적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기생과 양반 사이에 태어난 경우일지라도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에 따라 아들은 노비, 딸은 기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예외로 기생이 양민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속신(贖身)이라 하여 양민 부자나 양반의 소실이 되면
재물로 그 대가를 치러주고 천민 신분을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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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은 대물림이었다.
병들어 제구실을 못하거나 퇴기가 되었을 때
그 딸이나 조카딸을 대신 기방에 들여 놓아야만 했다.
고려시대에는 기생을 교육하기 위한 학교로 교방이 있었다.
중국 당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여 기생들이 노래와 춤을 익히도록 설치한 것이다.
이들은 궁중연회, 외교사절의 접대를 위한
연회와 팔관회, 연등회 같은 국가적 의식에 참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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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기녀는 교방 및 지방 관청에 속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시대가 흐를수록 개인이 거느린 사기(私妓)도 많이 생겼다.
관청에 속한 기생은 서울에 거주하는 경기(京妓)와
지방에 거주하는 지방기로 나누어졌다.
조선시대에 경기는 장악원에 소속되어 15세부터 음률을 익히고 춤을 배웠다.
개인적으로 재능이 있으면 글씨와 그림도 공부했다.
교육은 엄격했다.
수시로 실력을 점검하여 연주가 신통찮으면 종아리를 맞았고,
소질이 없다 싶으면 고향으로 돌려 보냈다.
기녀들의 철저한 교육이 있었기에
오늘날까지 우리의 전통가락과 춤이 전수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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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기생의 길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 일생이 마냥 고달프고 그늘진 것만은 아니어서
명기로서 이름을 남긴 기녀들도 많다.
자신의 운명을 곱다라시 받아들여 한 계단 승화시킨 여인들이다.
불후의 시조시인으로 손꼽히는 송도 명기 황진이는 한시에도 뛰어났고
특히 서경덕과의 일화로도 유명하다.
그런가 하면 전북 부안의 명기 이매창은 허균·이귀 등과 교분이 두터웠고
선비들이 그녀의 시비를 세워 줄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그밖에 송이·소춘풍 등이 시조 시인으로 이름을 남겼다.
이들이 국문학사에 끼친 영향 중 가장 큰 것은 고려가요의 전승이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짙은 정한의 고려가요는
대부분 그들의 작품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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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는 또 어떤가.
선조 때의 문인 백호 임제와 장안의 명기 한우에 얽힌
시조 화답은 절로 미소를 짓게 만든다.
임제가 장안에서 콧대 세기로 이름난
한우를 찾아가 시조로 수작을 걸었다.
북천이 맑다커늘 우장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시조를 들은 한우는
그 자리에서 마음을 열어 놓았다.
어이 얼어 자리 무삼 얼어 자리
원앙침 비취금을 어이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자면 어떨꼬
이만한 풍류면 고급스럽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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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기 논개는 또 어떤가.
임진왜란 때 진주성이 함락되자 일본 장수의 허리를 깍지낀 손으로
휘어잡아 남강 물 속으로 끌고 들어간 그 용기는 어디에서 생겨났을까?
그의 절의를 이어받은 기생조합 소속 기생들이
기미년 독립만세 때에 전국 각지에서 참여하여 조선 기생의 절개를 드높였다.
민족 항일 시기에는
한말의 기생학교·기생조합이 권번(券番)으로 바뀌었다.
권번은 서울·평양·대구·부산 등 대도시에 있었다.
입학생들에게 교양·예절·일본어 학습을 시켜 청루에 내보냈다.
일부 기생들은 권번의 부당한 화대착취에 대항하여 동맹파업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들에게는 최소한 자기를 지키는 자존심이 있었다.
명월관의 진주 기생 산홍을 친일파 인사가 거금을 주고 소실로 삼으려 하자
산홍이 “기생에게 줄 돈이 있거든 나라를 위해 피흘리는 젊은이에게 주라!”며
단호히 거절한 일화는 몇번을 들어도 신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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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꽃이 만발한 정원을 산책하고 있는 당나라 현종에게
신하가 물었다. “어떤 꽃이 가장 아름답습니까?”
당 현종은 “해어화(解語花)”라고 답했다.
‘말을 알아듣는 꽃’이란 뜻의 해어화. 그가 깊게 사랑하는
양귀비를 두고 한 말이었다.
그 후로 해어화는 기생, 기녀의 별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