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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영화협회(AFI)선정 여배우
1. 캐서린 햅번(Katharine Hepburn, 1907년~2003년)
캐서린 호턴 헵번 (Katharine Houghton Hepburn, 1907년 5월 12일 ~ 2003년 6월 29일) 은 미국의 영화, 연극, 텔레비전 배우이다. 그녀는 그녀의 독립성과 활발한 성격으로 할리우드에서 60년 동안 주인공을 연기해 왔다. 그녀는 세련된 여성으로, 의지가 강한 연기를 맡아오면서 자신의 모습을 구축했다. 그녀는 스크루볼 코미디에서 드라마, 영화로 연기 영역을 확장했고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4번 수상하였다.
코네티컷의 부유하고 진보적인 가족에서 태어난 그녀는, 브린모어 대학교를 다니는 동안 연기를 시작하였다. 4년 동안 극장에서 연기를 한 그녀는 영화에 데뷔하기 전에 브로드웨이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계에 들어와 찍은 첫 작품인 《모닝 글로리》로 그녀는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그녀는 '흥행의 독약'이라는 표현을 들으면서 RKO 라디오 픽처스와의 계약을 파기하면서, 메트로-골드윈-메이어로 건너가 《필라델피아 스토리》로 성공하게 된다. 이후 그녀는 스펜서 트레이시를 만나 25년 동안 커플로 영화에 나오게 된다.
이후 그녀는 《아프리카의 여왕》에 출연하면서 드라마 영화에서 성공을 거두게 되고 이후 1960년대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 《겨울의 사자》로 아카데미상을 연속으로 수상받게 된다. 이후 그녀는 《황금 연못》으로 다시 한번 아카데미상을 수상받았다. 그녀는 1994년에 마지막으로 영화에 출연하였는데, 그 때 나이가 87세였다. 그녀는 2003년에 9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녀는 할리우드에서 언론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으며, 사회에서 여성 주인공에게 원하던 기대를 따르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녀는 노골적으로 말하였으며, 적극적이었으며, 운동신경이 좋았던데다, 여성이 바지를 입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 시대였음에도 바지를 입었다. 그녀는 스펜서 트레이시가 유부남이었지만, 그와 교제를 하였다. 그녀는 20세기에 미국의 여성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으며, 여성의 인식을 변화시키는데 영향을 주었다. 1999년에 미국 영화 연구소는 그녀를 위대한 여자 배우에 1위로 선정하였다.
2. 베테랑 데이비스(Ruth Elizabeth "Bette" Davis, 1989년~1989년)
베티 데이비스(Bette Davis, 1908년 4월 5일~1989년 10월 6일)는 미국의 영화, 텔레비전, 극장의 배우이다. 매사추세츠 주서 출생하였다. 연극학교를 거쳐 무대에 섰다. 1929년에 「깨진 접시」로 처음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랐다. 다음 해에는 그의 첫 소속사인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섹스어필이 슬림 섬머빌 정도밖에 안 된다'는 이유로 떨려났고, 1931년부터 영화와 무대에서 주연 배우가 되었으며 30년대 내내 워너브라더스에서 건방지고 예쁘고 유행에 민감한 도시 아가씨 역할로 그럭저럭 활동을 이어갔다.
점차 특징 있는 눈과 날씬한 몸으로 다감하고 지성적인 연기를 하여 인정을 받았다. 1936년 그는 7년간의 워너 생활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소송에 휘말리게 되었다.
당시에는 모든 스튜디오가 독점적인 7년 계약으로 배우들을 묶어 둠으로써 졸속 제작, 낮은 보수문제를 항상 안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재판에서는 졌지만 많은 대중에게 자신의 강한(영화에서 처럼)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30년대와 40년대 사이에 그는 여성 관객들로부터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구가하였다. 그는 스타로서의 황홀한 매력과 남성들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홀로 맞서는 평범한 여성상을 동시에 표출해 냈다
《청춘의 항의 (dangerous)》(1935), 《흑란(黑蘭)의 여인 (jezebel)》(1938)으로 아카데미상(賞), 《소문난 여자 (marked woman)》(1937)로 베네치아 영화제, 《이브의 모든 것》(1950)으로 칸 영화제에서 각기 주연상을 받았다
그는 영화 장르의 공연 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특히 로맨스 영화의 역할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
워너 브라더스의 간판 스타였고 아카데미상 최다 연속 후보 지명 기록 공동보유자이며 무려 11번이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지명되었던 연기파 배우이며 영화나 현실에서도 담배를 좋아하는 골초이기도 했다. 흡연으로 인한 피해로 1983년 유방암 수술을 받은 뒤에도 영화, TV시리즈에 출연하는 열정을 보였다.
하지만 결국 유방암으로 인한 합병증 때문에 1989년 마지막 영화 ‘사악한 계모’를 찍고 그해 10월 6일 숨졌다.
1999년에 미국 영화 연구소는 데이비스를 "현시대의 가장 위대한 여성 스타" 25위 중에서 2위로 선정하였다. 미국 영화 ·연극의 총본산적 존재이다. 그는 특히 1981년 킴 카네스(Kim Carnes)가 불러 그래미상까지 받은 팝송 bette davis eyes로 유명하다.
3.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 1929년~1993년)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 1929년 5월 4일~ 1993년 1월 20일)은 벨기에에서 태어난 영국의 배우이자 인도주의자이며, 본명은 오드리 캐슬린 러스턴(Audrey Kathleen Ruston)이다. 할리우드의 황금시대에 영화와 패션의 아이콘으로 활동했다. 미국 영화 연구소로부터 여배우 중 스크린 전설 3위로 선정되었고, 베스트 드레서 부문 명예의 전당 여배우로 선정되었다.
브뤼셀의 익셀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린 시절을 벨기에, 영국 및 네덜란드에서 보냈다. 암스테르담에서 소니아 가스켈 (Sonia Gaskell)과 발레를 공부한 후 1948년 런던으로 건너가 마리 램버트(Marie Rambert)와 발레 수업을 계속했다. 그후 웨스트 엔드(West End) 뮤지컬 극장에서 코러스 걸로 활동했다. 몇몇 영화에서 단역으로 출연한 후, 프랑스의 소설가 콜레트의 주목을 받았다. 1945년에 발표된 콜레트의 소설 지지(Gigi)를 원작으로 한 1951년의 브로드웨이 연극에서 주연을 맡았다. 이후 로마의 휴일(1953)에서 주연을 맡아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아카데미상, 골든 글로브상 및 BAFTA 상을 수상한 첫 번째 배우였다. 같은해 헵번은 연극 온딘에서 토니상 연극부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사브리나(1954), 파계(1959),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 샤레이드(1963), 마이 페어 레이디(1964), 어두워질 때까지(1967)와 같은 성공적인 여러 영화에 출연했다. 아카데미상, 골든 글로브 및 BAFTA(영국 아카데미 영화상) 후보에 지명되었다. 1967년까지 BAFTA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세 번 받았다. 영화에서의 경력을 인정받아 BAFTA에서 평생 공로상, 세실 B. 드밀 상(Golden Globe Cecil B. DeMille) , Screen Actors Guild Life Achievement Award 및 토니상 특별상(Special Tony Award)을 수상했다 . 아카데미상, 에미상, 그래미상 및 토니상을 받은 12 명 중 한 명이다. 나이가 들면서 헵번은 적은 수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나중에 만년의 삶 대부분을 유니세프에 헌신했다 . 1954년부터 조직에 기여했으며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의 가장 가난한 공동체에서 일했다. 1992년 12월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하면서 대통령 훈장을 받았다. 한 달 후, 헵번은 63세의 나이에 스위스의 자택에서 맹장암(대장암)으로 사망했다.
4, 잉글리드 버그만(Ingrid Bergman, 1915년~1985년)
잉그리드 버그먼(영어: Ingrid Bergman, 스웨덴어: Ingrid Bergman 잉리드 베리만, 1915년 8월 29일 ~ 1982년 8월 29일)은 스웨덴과 미국의 배우이다. 버그먼은 여러 미국와 유럽에서 촬영한 영화에 출연하였으며, 아카데미상을 3회 수상하였고 골든 글로브 상을 4회, 에미상을 2회, 토니상을 1회 수상하였으며, 미국 영화 연구소는 버그먼을 가장 위대한 여자 배우 중 4위로 선정하였다. 버그먼은 《카사블랑카》에서 맡은 일자 란드와 앨프리드 히치콕이 감독한 《오명》에서 케리 그랜트의 상대역인 앨리시아 후버먼으로 유명하다.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에 버그먼은 스웨덴에서 여러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였다. 1939년에 버그먼은 《인터메조》의 할리우드 리메이크 작을 통해 처음으로 미국의 관객들과 마주하였다. 미국에서 버그먼은 미와 지성으로 '북유럽의 신선함과 활력'이라는 평판을 가지게 되었으며, 곧 '할리우드 여자 배우들의 우상'이라는 평가를 얻게 되었다.
1941년에 빅터 플레밍 감독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에 출연한 후,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은 버그먼을 '가장 완벽하게 양심적인 배우'라고 말한 후 버그먼과 같이 여러 작업을 하였다. 셀즈닉은 버그먼에게 영화에서 상대역을 돋보게 해주는 역할을 자주 맡겼고, 이런 역할을 통해 버그먼은 자신의 경력을 이어갔다. 《카사블랑카》 이외에도 버그먼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가스등》, 《성 메리 성당의 종》, 히치콕과 함께 한 《스펠바운드》, 《오명》, 《남회귀선》, 그리고 독립영화인 《성녀 잔 다르크》에 출연하였다.
할리우드 영화에 데뷔한 지 10년 쯤 된 1950년에 버그먼은 원래 남편인 페터 린다스트롬을 버리고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의 거장인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결혼해버렸다. 둘이 결혼하는 동안 버그먼은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하지 못하였고, 둘이 같이 만든 《스트롬볼리》와 《유로파 51》 등은 흥행에 실패하였다. 그와 이혼한 후 버그먼은 1957년에 다시 할리우드로 복귀하여 《아나스타시아》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하였다. 버그먼은 자국에서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가을 소나타》에서 마지막으로 영화에 출연하였고, 1982년에 찍은 TV 영화인 《골다라는 이름의 여자》에 출연한 후 죽었다. 버그먼의 영화에 대한 회고 기록이나 개인적인 삶에 대한 기록 등은 웨슬리언 대학교의 영화 기록소에 보관되어 있다.
5. 그레타 가르보(Greta Garbo, 1905년~1990년)
그레타 가르보(스웨덴어: Greta Garbo, 1905년 9월 18일~1990년 4월 15일)는 스웨덴 출신 미국의 배우이며, 영화계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비극으로 인생이 끝난 이해할 수 없는 여성에 대한 묘사로 알려졌다. 또한 무성과 음성 영화들에서 동등한 성공을 거둔 스타들 중의 하나였다.
그레타 로비사 구스타프손(스웨덴어: Greta Lovisa Gustafsson)이란 본명으로 스톡홀름에서 출생하였다. 1924년 스웨덴 영화 <예스타 베를링의 이야기>에 데뷔하였다가, 1925년 미국으로 건너간다. 거기서 <살과 악마> (1926), <사랑> (1927), <사건의 여성> (1928) 같은 무성 영화들에 출연하였다.
그의 최고 음성 영화들은 <로맨스> (1930), <애나 크리스티>와 <마타 하리> (1931), <그랜드 호텔> (1932), <크리스티나 여왕> (1933), <안나 카레니나> (1935)와 <카밀> (1937) 등이 있다. 그의 첫 코미디 영화는 <니노치카> (1939)였다. 가르보는 자신의 사생활에 대한 격렬한 욕망으로 널리 알려졌다.
자신의 전성기에 설명도 없이 배우 생활을 접었으며, 조용한 은퇴 생활을 보냈다. 1941년 "마나님은 얼굴이 둘"이라는 영화를 최후로 은퇴 후, 전 세계에서 빗발같이 쏟아지는 출연교섭을 완강히 거절하여 유유자적하였다. 한때는 헐리우드로 그를 끌어들인 모리스 스테라 감독, 미남 배우 죤 길바트, 명지휘자 스토코프스키 등과도 로맨스에 대한 소문이 퍼졌기도 하였으나 끝내 독신주의의 신비로운 베일 속에 파묻혀 그 누구에게도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스테라 감독이나 길바트를 자살시킨 원인도 이러한 가르보의 냉엄한 매력이었다는 소문도 많다. 가르보는 그가 헐리우드에서 번 막대한 수입을 셋트와 함께 모국 스웨덴에 보내어 유리한 투자를 하며 살았다. 55세였던 1960년에도 아직 스크린에서 활약할만한 육체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1990년 4월 15일 뉴욕에서 사망하였다.
6.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1926년~1962년)
마릴린 먼로(영어: Marilyn Monroe 메릴린 먼로[*], 1926년 6월 1일 ~ 1962년 8월 5일)는 미국의 배우, 모델, 가수로 본명은 노마 진 모턴슨(Norma Jeane Mortenson)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초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 많은 영화에 출연하면서 섹스 심벌의 상징이 되었다.
양부모 가정에서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이후 모델 활동을 하다가 1946년 20세기 폭스 영화 출연 계약을 하면서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초기 출연작 《아스팔트 정글》, 《이브의 모든 것》 (1950)에 단역으로 출연했지만 주목을 받았다. 1952년 《돈 보더 투 낙》에서 처음으로 주연을 맡았고 1953년 《나이아가라》의 성공을 이끌었다. 이후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1953),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 (1953), 《7년만의 외출》 (1955)과 같은 다음 영화에서 코믹한 모습을 보여주며 "백치 금발 미인"의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자신의 이미지로 고정된 배역을 벗어나 더욱 넓은 연기를 펼치기 위해 먼로는 액터스 스튜디오에서 연기를 배웠다. 그 결과 《버스 정류장》 (1956)에서 인상깊은 연기를 보여줘 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으며, 골든글로브상 후보에도 올랐다. 또한 자신의 영화 제작 회사 마릴린 먼로 프로덕션에서 개봉한 《왕자와 무희》 (1957)에 출연해 영화 아카데미 영화상 후보지명과 다비드 디 도나텔로상 수상을 거뒀다. 1959년에는 《뜨거운 것이 좋아》에 출연해 골든글로브상 수상을 했다. 먼로가 마지막으로 남긴 영화는 클라크 게이블과 공동 주연으로 출연한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 (1961)로, 당시 남편이던 아서 밀러가 각본을 썼다.
먼로의 말년 삶은 질병, 사적인 문제, 명성의 추락 등으로 어렵게 살아갔다. 1962년 8월 5일 신경안정제인 바비튜레이트의 과다 복용으로 죽었지만, 그녀의 정확한 죽음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많은 추측이 이루어지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가능성있는 자살"로 분류되고 있지만 우연적인 과다복용 또는 살인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1999년 미국 영화 연구소에서 선장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자 배우 순위 중 6위에 올랐다. 2009년 TV 가이드 네크워크에서 선정한 역사상 가장 섹시한 여자 배우 순위에서 1위를 했다. 먼로의 죽음 이후에도 수 십년 동안 대중 문화와 전형적인 미국의 섹스 심벌의 상징이 되고 있다.
7. 엘리자베스 테일러(Dame Elizabeth Taylor, 1932년~2011년)
엘리자베스 테일러 여사(영어: Dame Elizabeth Taylor, DBE, 1932년 2월 27일~2011년 3월 23일)는 영국과 미국의 국적을 가진 배우이다. 리즈 테일러(Liz Taylor)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아역 배우로 시작하여 성인기까지, 그녀는 연기력과 글래머, 아름다움, 그리고 보라빛 눈동자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여덟 번에 걸친 결혼과 목숨을 잃을 뻔한 병마와 수십년동안 활동해 온 사회사업가로서, AIDS 홍보와 연구, 치료의 전문가로서 수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테일러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2회 수상했으며, 할리우드 황금기의 가장 위대한 영화스타로 손꼽히고 있다. 아메리카 필름 연구소는 여성 레전드 목록 일곱 번째에 그녀를 이름을 올렸다.
1999년 대영 제국 훈장 2등급(DBE, 작위급 훈장)을 받았고, 2011년 3월 23일 네 명의 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80세에 세상을 떠났다.
8. 주디 갈런드(Judy Garland, 1922년~1969년)
주디 갈런드는 미네소타 주의 그랜드 래피즈에서 출생하였다. 45년에서 47년간에 걸친 경력을 통해 주디 갈런드는 뮤지컬과 드라마 역에서는 여자 배우로서, 콘서트 무대에서는 가수로 국제적인 스타의 자리를 얻었다. 그녀의 다재다능함으로 영화계에서 그녀는 쥬버나일 아카데미 상과, 골든 글러브 상 그리고 세실 B. 드마일 상(Cecil B. DeMille Award)을, 음악에서는 그래미 상과 스페셜 토니 상도 수상했다. 그녀는 최저음의 음역(콘트랄토)을 가졌다.
10대에 Vaudevile에서 친자매들과 함께 데뷔한 후, 주디 갈런드는 MGM과 계약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미키 루니와 함께한 9개의 영화와 그녀를 가장 유명하게 해준 《오즈의 마법사》를 포함한 24개 이상의 영화들을 만들었다. 15년 후, 갈런드는 MGM과의 계약이 끝났지만, 그 후로도 평론적으로 갈채를 받는 카네기 홀 콘서트를 포함 신기록갱신의 콘서트 활동, 좋은 평을 받았지만 금세 중단되었던 텔레비전 시리즈들, 그리고 A Star Is Born(1954)을 시작으로 영화배우로의 복귀를 통해 새로운 성공들을 이뤄냈다.
프로페셔널한 성공들과는 반대로 주디 갤런드는 사생활에서는 개인적인 문제들과 싸워 왔다. 자신의 외모에 만족하지 못했고, 매력적이지 않고 몸무게가 많이 나간다고 말하던 영화계의 간부들에의해 그녀는 더 혼란스러워했다. 몸무게를 조절하고, 효율성을 높이기위한 중독 물질들에 쌓여서, 수십 년에 걸친 약물 중독에 시달려야 했다. 주디 갈런드는 몇십만불 가량의 세금을 체납하면서 경제적 불안정으로도 고통받았으며, 그녀의 다섯번의 결혼 생활 중 네 번은 이혼으로 끝났다. 그녀는 몇번에 걸쳐 자살을 시도하였다. 주디 갈런드는 47세에, 리자 미넬리, 노라 루프트 그리고 조이 루프트의 세 아이를 남겨둔 채 약물 과다 투여로 사고사하였다.
1997년 사후에, 주디 갈런드는 그래미 라이프 타임 공로 상을 받았다. 몇 개의 그녀의 노래들은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선정되었다. 1999년에 미국 영화 협회는 그녀를 미국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10대 여성 스타 중 하나로 지정했다(8번째).
어릴 때부터 세 자매가 어린이 극단에 참가하여 노래와 춤으로 갈채를 받았다. 1939년에 제작된 영화《오즈의 마법사》에서 가련한 연기와 노래로 영광의 아카데미상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그 때의 노래 "Over the Rainbow" (무지개 저편에)는 그녀의 주제가가 되었다. 여자 알 존슨이라고 불릴 정도로 재능이 뛰어난 예능인으로 《새싹의 노래》, 《춤추는 해적》, 《이스터 퍼레이드》, 《스타 탄생》 등의 영화가 모두 호평을 받았다. 그녀의 매력은 《주디 갈랜드의 전부》, 《카네기 홀의 주디》 등의 음반에 담겨 있다.
9. 마를레네 디트리히(Marlene Dietrich, 1901년~1991년)
마를레네 디트리히(독일어: Marlene Dietrich, IPA: [maɐˈleːnə ˈdiːtrɪç]; (1901년 12월 27일 – 1992년 5월 6일)는 독일에서 태어난 미국의 영화 배우, 가수이자 엔터테이너이다. 그 여인은 독일 출신으로는 할리우드에서 처음으로 성공한 배우였다.
베를린에서 출생하여 캬바레의 가수, 합창단원과 영화의 엑스트라를 거쳐 1920년대 베를린에서 유성영화 초기의 작품 《슬픔의 천사》로 각광받아 영화감독 스탠버그를 따라 미국으로 갔다. 1930년대에는 할리우드에서 《모로코》, 《간첩 X27》 등으로 배우로서 명성을 떨쳤고 제2차 세계대전 시에는 전선에서 공연하는 공연자로 활동하였다. 1950년대에서 70년대까지는 국제 무대에서 활동하였다. 히트한 작품으로 〈릴리 마를렌〉 등 다수가 있다.
그 여인은 그 자신을 끊임없이 새로 개발하여 마침내는 20세기의 엔터테인먼트 아이콘이 되었다. 미국 영화 연구소는 디트리히를 역대 여인 영화 스타 제9 위로 선정한 적이 있다.
10. 조앤 크로퍼드(Joan Crawford, 1905년~1977년)
존 크로퍼드(Joan Crawford, 1904년 3월 23일 ~ 1977년 3월 10일)은 미국의 영화, 텔레비전, 극장 배우이다. 브로드웨이에 데뷔하기 전에 극장 회사에서 댄서로 시작한 크로퍼드는 1925년에 메트로-골드윈-메이어와 영화 계약에 서명하였다.
초년에는 1920년대 재즈 시대의 쾌활한 왈가닥 소녀로 강한 인상을 주었으며 후기에는 심리적 멜로드라마의 스타로 발돋움했다. 그는 육체파 배우로 성장했으며, 호화로운 드레스에 모피를 두른 직업적으로 성공한 여인 역으로 종종 등장했다.
크로퍼드는 빌리 캐신이라는 이름으로 나이트클럽에서 춤을 추다가, 1924년에는 브로드웨이의 뮤지컬에 무용수로 출연했다. 1925년부터는 영화에 출연하여 〈춤추는 딸들 Our Dancing Daughters〉(1928)·〈춤·바보·춤 Dance, Fools, Dance〉(1931)·〈춤추는 숙녀Dancing Lady〉(1933) 등의 인기 있는 영화에서 춤 솜씨를 보여주었다. 그가 인상적인 배우로 성공한 초기 작품으로는 〈여인들 The Women〉(1939)·〈수잔과 하느님 Susan and God〉(1940)·〈이상한 짐 Strange Cargo〉(1940)·〈여자의 얼굴 A Woman's Face〉(1941) 등이 있다.
크로퍼드의 연기생활에 전환점은 그가 아카데미상을 받은 〈밀드레드 피어스 Mildred Pierce〉(1945)였다. 이 영화는 감정적이며 야심 있는 여인이 여급에서 레스토랑 체인점의 주인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를 다루었으며, 이 작품 뒤에 그는 〈유모레스크 Humoresque〉(1947)·〈서든 피어 Sudden Fear〉(1952)·〈에스더 코스텔로의 이야기 The Story of Esther Costello〉(1957) 등의 수준높은 영화에 출연했다.
후기에 훌륭한 연기를 보인 영화로는 〈베이비 제인에게 무슨일이 생겼나? Whatever Happened to Baby Jane?〉(1962)·〈관리인 The Caretakers〉(1963)이 있다.
크로퍼드는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주니어, 프랑수아 톤(Francoise Tone, 1935~39), 필립 테리(Phillip Terry, 1942~46) 등의 배우와 펩시콜라의 전 회장인 앨프리드 스틸(Alfred Steele)과 결혼생활을 했다. 1959년 스틸이 죽자 그는 회사의 이사가 되었다.
하지만 1973년에 나이가 많고 더이상 영화 출연제의가 들어오지 않자 퇴임당했다.
크로퍼드의 양녀 크리스티나는 남동생과 자신이 어머니에게서 유산을 받지 못하자(그러나 소송을 걸어서 유산을 조금은 받았다) 자신과 양자였던 동생이 어머니 밑에서 엄하게 자란 어린시절을 기록한 〈친애하는 어머니 Mommie Dearest〉를 1978년 출판했으며, 이 이야기는 1981년 영화화되었다.
그때까지 스타의 사생활이 그토록 자세히 드러난 적은 없었고 어린 아이의 관점에서 가정 폭력을 고발한 것도 처음이었으며, 가정 폭력이 가난한 집안에서 일어난다는 통념은 깨졌다.
<친애하는 어머니 Mommie Dearest>는 컬트영화가 되긴 했지만, 제2회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1982)에서 최악의 각본상, 최악의 여우조연상, 최악의 남우조연상, 최악의 여우주연상 ,최악의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친애하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스타들의 입양절차가 까다로워졌고, 빈부격차의 관계없이 사회적으로 아동의 복지의 관심이 높아졌다.
<친애하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존 크로퍼드는 무섭고 괴팍한 엄마의 이미지가 씌워진다.
이 영화의 영감을 얻어 블루 오이스터 컬트의 Joan Crawford 노래가 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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