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2일
안중식, 그의 붓끝에서 한반도는 호랑이가 됐다.
그의 붓끝에서 한반도는 호랑이가 됐다.
<아무튼, 주말> <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 그림으로 망국의 자존심 지킨 한국 근대미술사 대부 안중식.
김인혜 미술사가 조선일보 입력 2024.03,02. 03:00업데이트 2024. 03.02. 06:14
한반도 지형은 무엇을 닮았는가. 노인? 토끼? 호랑이?
원래 조선인은 한반도가 노인처럼 생겼다고 생각했다. 허리 굽히고 팔짱 낀 채 중국에 인사하는 형상, 이 생각이 중국을 향한 사대주의가
마땅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했다. 이후 조선의 지형이 토끼를 닮았다는 주장이 일본인 학자 고토 분지로에 의해 제기됐다.
1903년 '조선산맥론'에서 전라도는 토끼 뒷다리, 충청도는 앞다리, 황해도, 평안도는 머리, 함경도는 귀,
황해도, 평안도는 머리, 함경도는 귀, 강원도, 경상도는 어깨에 해당한다고 했다.
하지만 고작 노인이나 토끼라니? 이에 분개한 최남선(1890~1957)은 호랑이 형상을 주창했다.
일본에는 없는 호랑이, 그것도 중국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포효하는 호랑이 말이다. 조선의 '3대 천재'로 통했던 그는 14세에
국비유학생으로 일본에 갔다가 하루빨리 세계 신문물을 조선인에게 전파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인쇄기와 일본인 기술자를 들여와
18세에 '신문관'이라는 출판사 겸 인쇄소를 차렸다. 첫 사업이 우리나라 최초의 월간지 '소년' 발간이었다.
그리고 그 잡지에 '태백범'이라는 시와 함께 호랑이 모양 한반도를 처음 그려 넣었다.
호랑이 털 주름이 태백산맥에서 파생된 여러 작은 산맥과 닮아 있다.
화가 안중식이 1909년 11월 잡지 '소년'에 호랑이처럼 그린 한반도 / 개인 소장.
그런데 이 호랑이 그림을 그린 이는 누구일까? 구전에 의하면, 심전 안중식(1861~1919)이다.
최남선은 안중식이 그려준 삽화를 몇 번이나 퇴짜 놓고 주문하기를 반복해 그를 화나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안중식 입장에서는 자기보다 스물아홉 살이나 어린 새파란 젊은이가 조그만 호랑이 그림 하나 가지고 어지간히 까다롭게 군다고
여겼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후 한반도 호랑이설은 20세기를 지배한 새로운 개념이 됐다.
누구나 한 번쯤은 호랑이 모양 한반도 지도를 본 적 있을 것이다.
안중식이 누구인가. 20세기 한국 근대미술사의 대부(代父) 같은 존재, 고희동, 이상범, 노수현, 변관식 등 한국 최고 근대 한국 화가들이
모두 그의 제자였다. 그러나 안중식이 호랑이 삽화를 그리고, 화업에 매진하며 제자들을 키운 것은 그의 생애 후반기에 해당한다.
40대 이전까지는 격동기 개화파 일원으로 활동하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1861년 서울 청진동에서 태어났다. 무관을 많이 배출한 전형적인 중인 집안이었다. 일찍 부친을 여의고 친척인 화원화가 안건영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재주가 많고 총명해 1881년 개화기 최초의 중국 유학생단인 '영선사'에 선발됐다.
약 2년간의 유학에서 그가 배운 것은 자주국방을 위한 신식 무기 제조법, 귀국하면서 기기 도면 몇 장을 그려왔다고는 하나
조선 최초의 신식 무기 제조국인 기기창(機器廠) 사업은 오래가지 못했고 성공하지도 못했다. 근대적 체신 업무를 위해 세워진
우정국의 사사(司事)로도 채용됐지만 갑신정변이 일어나 실패했고, 안중식도 한동안 잠적해야 했다. -중략 -
안중식은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숨을 거뒀다. 민족 대표 33인 중 오세창, 권동진 등이 그의 절친으로,
자주 안중식의 집에서 화합한 탓에 그도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자기 재산을 오세창에게 건네 운동자금으로 쓰게 했다는 회고도
남아 있다. 인촌 김성수는 민족 대표가 33인이 아니라 안중식을 포함해 34인이 돼야 했다고 말했을 정도로 그의 역할을 높이 샀다.
안중식은 감옥에서 풀려난 후 고문 후유증으로 그해 10월 타계했다. 유족으로는 손자 안병소(1908~1974)가 있었다.
다리를 절룩거리는 장애를 극복하고, 1930년 대 베를린에서 유학했던 1세대 천재 바이올니스트였다.
첫댓글 잘 봤습니다!
애국자 들 덕분에
오늘의 우리가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