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6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루카 12,49-53
성령의 불은 새로운 시스템을 창조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는
‘불’을 주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있다면 세 사람이 두 사람과 갈라지고 두 사람이 세 사람과 갈라지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불’은 성령님이고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세례를 받으실 때 내려주실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혼자 서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체제와 맞서는 새로운 체제를 갖춘 공동체가 형성될 것이란 뜻입니다.
이집트의 성 안토니오는 사막의 교부로 알려져 있으며, 그는 그리스도교 수도회의 창시자로 기억됩니다.
많은 은수자와 수도자들이 있었지만, 그가 수도회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이유는 자신의 카리스마를 실현할 수도회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젊은 안토니오는 약 251년에 이집트에서 태어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고 일찍 부모를 여의었습니다.
어느 날 성당에 들어갔을 때 부자 청년의 복음이 낭독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청년에게 당신을 따르려거든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이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알아듣고는 그대로 실천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친척들과 문제가 없었을까요?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다 팔고 사막으로 들어갔고 20여 년을 수련한 후에 거기에서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교 은둔 수도회의 초창기 형태가 형성된 것입니다.
안토니오에게 떨어졌던 것은 성령의 불입니다. 이는 혼자만 타라는 말이 아니라 많은 이들과 함께
불타도록 만들라는 명령과 같았습니다.
불은 붙어 있는 것들을 함께 태우는 본성이 있습니다.
성령도 그러하십니다.
혼자만 타게 만드는 불은 없는 것입니다.
동방의 수도회 시초가 성 안토니오라면 서방은 성 베네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분은 연대상으로 2백 년 정도 차이가 납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청년 때 로마에서 교육받다 도시의 부도덕한 생활에 실망하여 수비아코라는 곳의 바위 동굴에서 약 3년 동안 은둔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깨달은 것을 전파하기 위해 수도회를 창설하고 “일하고 기도하라”라는 깨달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체제는 진실보다 강합니다.
공동체는 진리보다 강합니다.
전에도 설명했듯이 바보 마을에서 해시계는 박물관의 전시품으로 전락할 뿐입니다.
진리도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수준의 공동체에게 합당합니다.
성령은 진리이십니다.
성령의 불이 붙으면 그 불을 유지하기 위해 그 진리에 합당한 체계가 필요합니다.
체제를 변혁시키지 않고서는 성령의 감도가 숨을 쉴 수 없고 실현될 수 없습니다.
헬리코박터 파일로리(H. pylori)라는 박테리아가 소화성 궤양과 위염을 일으킬 수 있다는 발견은
의학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발견 중 하나였습니다.
이 발견은 궤양이 주로 스트레스, 매운 음식 또는
과도한 위산에 의해 발생한다는 오랜 믿음에 도전했습니다.
이 발견을 한 호주의 두 과학자인 배리 마샬과 로빈 워렌 박사는 수년 동안 의료계에서 거부당해왔습니다.
이에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마샬 박사는 헬리코박터균 배양액을 마셨습니다.
며칠 내에 그는 위염이 발생하여 박테리아가 위염을 유발할 수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이 자체 실험은 위험했지만, 가설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를 제공했습니다.
그렇다고 경직화된 의학계가 바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연구하는 집단을 세우고 끊임없는 반복 실험과 결과를 제공하자 어쩔 수 없이 의학계가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노력이 10년 뒤에 결실을 거둬 둘은 노벨 의학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가난을 기본 정신으로 하는 수도회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쫓겨났고 교회에서도 쫓겨났습니다.
나중에야 교황이 회개하여 탁발수도회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자신만 타는 게 아니라 체제의 변화를 이끄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 이전의 공동체와 분열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만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혼자만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 쇄신을 일으킬 생각을 해야 성령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나만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성령을 어떻게 나의 공동체에 시스템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성령을 받기에
더 합당한 사람이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26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루카 12,49-53
아버지들은 자녀들을 더 큰 아버지, 영원불멸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로 안내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봉독하고 묵상할 때 유의할 사항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행간에 감추어져 있는 진정한 의미, 영적 의미를 파악하는 노력입니다. 어떤 부분은 있는 그대로 수용해서는 절대 안 되는 구절도 있습니다.
전후 맥락도 살펴보고 말씀이 의도하고 강조하려는 요지가 무엇인지도 따져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루카복음 12장 51~53절)
예수님께서는 평소 하느님 공경에 이어 이웃 사랑 역시 아주 중요한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함께 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복음 10장 27절)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 말씀의 진의를 정확히 파악하고자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분께서는 가족끼리 서로 등지고 갈라서라는 의도에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절대 아닙니다.
불효자나 패륜아가 되라고 하신 말씀도 아닙니다.
해결책은 아주 간단합니다. 세상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놓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 최 우선권을 드리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이웃 사랑 앞에 배치시키라는 요청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부모 사랑이나 자식 사랑을 금지당한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대상, 모든 인연 위에 하느님을 모시라는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자녀는 실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복입니다.
그러나 복을 내리시고 지켜주시는 하느님보다 복을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자녀들을 더 큰 아버지, 영원불멸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로
안내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아버지의 기도(조이수 詩人)
주님 제가 아이들 곁에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보내도록 하소서.
지난날은 아버지 없는 아이들로
거리를 헤매도록 했습니다.
이제, 눈 내리는 겨울 창가를 보며
말씀의 벽난로에 둘러앉아
아버지의 사랑을 가르치도록 도와주소서.
눈이 멎고 찬미가가 울리는 날 제 아이들이
마지막 절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는 아이들이 되게 하소서.
아이들에게 참된 아버지는 제가 아니라
하늘 아버지란 걸 뼈져리게 가르치고
훨훨 떠나도록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0월26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루카 12,49-53
<불, 평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
이 구절의 '불'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다는 말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선포하러 오셨다는 뜻이기도 하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인간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불을 지른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타오르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점화'이고, 불이 붙어서 타오르는 것은 인간들이 각자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인간들이 각자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고 거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사막에서 갈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생명수가 가득한 오아시스로 인도한 일과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고마워하면서 그 물을 마시고
어떤 사람은 맹물은 맛이 없어서 싫다면서 다른 음료수를 달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 행복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참 행복을 얻는 길을 가르쳐 주셨는데, 어떤 사람은 그 가르침대로 실천해서 참 행복을 얻고, 어떤 사람은 그런 행복은 싫다면서 자기가 바라는 세속적인 쾌락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을 가르쳐 주셨는데, 어떤 사람은 그 길을 걸어가고, 어떤 사람은 그 길이 너무 좁고 험해서 싫다고 하면서 다른 길로 갑니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라는 말씀은 복음을 거부하는 인간들의 모습에 대한 예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나타냅니다.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어도 그 길로 가지 않고
'죽게 되는 길'로만 가려고 하는 인간들에 대한 슬픔과 안타까움입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50)"
이 구절의 '세례'는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와 죽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정말로 고통스럽게 한 것은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아니라 그렇게까지 당신이 희생하고 헌신해도 하느님께 반역하면서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인간들의 고집스러운 모습입니다.
자녀가 잘되기만을 바라면서 온갖 고생을 하는 부모를 정말로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그런 고생 자체가 아니라, 그렇게까지 고생을 해도 정신을 못 차리고 빗나가기만 하는 자식들의 모습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이 말씀은 반어법을 사용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의 뜻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건만 인간들은 평화를 얻기는커녕 오히려 분열만 일으키고 있다."입니다.
이 구절의 '평화'는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영원한 생명, 구원, 행복' 등을 총체적으로 표현한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분열'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사람과 얻지 못하는 사람 사이의 분열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참 평화를 주시는데, 어떤 사람은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참 평화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그런데 자기 혼자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참 평화를 얻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박해합니다.
그리고 그런 미움과 박해는 식구들마저 분열시킵니다.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루카 12,52)"
식구들이 예수님 때문에 갈라지게 될 것이라는 이 구절의 말씀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가족이 분열되어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심한 박해를 각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통치자들의 박해보다 식구들의 박해가 더 고통스러운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루카 6,27-28)." 라고 하셨는데, 미워하고 저주하고 학대하는 사람이 바로 자기의 식구라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더욱더 사랑을 실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그 식구를 위해서 기도하고 축복하면서
그에게 계속 잘해 주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원수도 사랑해야 하는데, 식구라면 더욱더 사랑해야 합니다.)
미움과 학대를 참고 견디면서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면, 언젠가는 그 식구도 신앙인이 될 때가 올 것이라는 희망 속에서.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