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 때 : 2022년 11월 26일(토)
○ 탐방구간
마로니에 공원(서울대학교 터, 윤선도 생가터, 김상옥 동상, 구 경성제국대학 본관, 구 중앙시험소 청사) ➡ 이화장, 삼일문 석조 기둥, 경성의학전문 학교 터, 김소월 옛집, 남이장군 집터 ➡ 대한의원 터(이덕형 생가 터, 경모궁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터) ➡ 학림다방, 통일문제연구소, 진아춘, 김창숙 집터 ➡ 서울 문묘(탕평비각, 대성전, 명륜당, 진사 식당, 하연대) ➡ 숭보사, 양현고 터, 노무현 살던 곳 ➡ 흥덕사 터(송시열 집터, 북묘 터, 중앙학 림 터, 보성 옛터) ➡ 임화 집터, 혜화초등학교, 장면 가옥, 정무묵 집터,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터, 여운형 서거지, ➡ 동성고등학교(대한조국주권수호일념비, 4.19 의거지), 흥사단
○ 탐방소요시간
약 6시간 20분(09시 ~ 15시 20분, 점심식사시간 포함)
흥덕동천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 좌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로 혜화문과 낙산의 서울성곽 안쪽을 흘러 청계천으로 합류하는 하천이다
상류의 두 물줄기를 동반수,서반수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지명인 흥덕동에서 유래된 이름이며, 근래에 대학천으로 불리었으며 현재는 모두 복개되었다
일제시대에 학교와 종교 시설이 들어서고 전차가 생겨나 도로가 확정되면서 많은 변화를 갖게 된다
♤ 센 강과 미라보 다리
서울대 학생들은 동숭동 캠퍼스 정문 앞을 흐르는 작은 개천(흥덕동천)을 '센 강'이라고 불렀고 정문 앞 다리를 '미라보 다리'라고 불렀다
당시 서울대 정문 사진을 보면 '센 강'의 폭이 약 6~7m 정도, '미라보 다리'는 약 10m 이상 될 정도로 꽤 넓어 보인다
♤ 복원
서울 사대부초 부근부터 시작하여 마로니에공원 까지 이어지는 이 개울은 흥덕동천 복원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36억원을 들여 만든 개울이다
이 개울 길이가 공사시에 1km 정도였다는데 실제 재보면 500m도 될까말까하다
상류(동성고등학교 앞)까지 합하면 그럴 수 있겠다
(가짜 흥덕동천을 보다 보니 땅속에 숨겨져있는 진짜 흥덕동천이 그립다)
마로니에 공원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04, 동숭동 1-124)
1975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과 법과대학이 관악 캠퍼스로 이전하면서 대학본부를 제외한 모든 건물이 철거되었고, 그 자리를 대한주택공사(현 토지주택공사, LH)가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서울대가 관악산 기슭으로 옮겨갈 때 양택식 서울시장은 이 자리에 시민아파트를 세우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김재순(월간 샘터 창간자이며 전 국회의장 - 2016년 사망)이 김수근(건축가 - 1986년 사망)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 설득한 끝에 문화공간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해서 샘터사옥, 문예회관(아르코예술극장), 아르코미술관 등 대학로를 상징하는 붉은 벽돌 건물들이 이 주변에 들어섰다
캠퍼스에 마로니에 나무가 세 그루 있던 것을 유래로 ‘마로니에 공원’이라 이름 붙여졌다 (현재는 한 그루만 살아있다)
여기에 있는 마로니에는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 시절(1929년 4월 5일) 일본인 교수가 심은 일본칠엽수라는 나무이다
한국에서 가장 확실한 마로니에 나무가 있는 곳은 덕수궁으로, 네델란드 공사가 1912년 고종의 환갑기념으로 선물한 묘목이 자란 한국 1호 마로니에 나무가 심어져 있다
덕수궁 석조전 뒤에 있는 거목들이 이 나무들로 1913년에 선물했기 때문에 확인된 수령이 100년을 넘은 노목들이다
공원 내부에 서울대학교 연건캠퍼스 시절 모습을 묘사한 조형물이 있다
이 공원에는 문예회관 대극장과 소극장을 비롯해 대학로극장, 바탕골소극장, 연우무대, 샘터파랑새 극장, 학전, 코미디어트홀 등 많은 문화시설이 자리하고 있으며,
아마추어 가수들의 신선한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공원내에서 야외무대, 골목 여기 저기서 춤과 노래를 연습하는 젊은이들을 볼 수 있다
윤선도 생가 터
1587년(선조 20) 6월 22일 한성 동부 연화방 (종로구 연지동)에서 아버지 윤유심(尹惟深)과 어머니 순흥 안씨 (順興 安氏)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의 본가가 해남에 있었기에 보통 해남 출신으로 여긴다)
노년에 예송논쟁이 일어나자 송시열이 효종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서인세력과 함께 복제문제로 효종을 서자 취급하는데에 격분하여 논례소(論禮疎)와 예설(禮說) 2편을 상소했다가 험난한 유배생활을 마치고, (유배지는 함경도 경원, 삼수 경상도 기장, 영덕 그리고 마지막 유배지가 전남 광양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윤선도는 의병을 모아 강화도로 가다가 길이 막혀 해남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인조(仁祖)가 청에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실망하여 이듬해 1637년 2월 제주도로 가다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보길도(甫吉島)에 잠시 내렸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섬에 눌러앉았다
♤ 보길도 (전남 완도군 보길면)
윤선도는 자신이 머물던 마을 일대를 ‘부용동(芙蓉洞)’ 이라 하고 격자봉 아래에 집을 지어 낙서재(樂書齋)라는 이름을 붙였다
윤선도는 자연 속에서 한가로운 생활을 즐기면서 많은 시가들을 지었다
- 세연정
국내 3대 전통 민간정원 중 하나이다
세연지와 회수담(回水潭) 사이 단을 조성해 세워진 정자로, 3칸으로 이루어졌으며, 정자 가운데는 세연정(洗然亭), 동쪽에는 호광루(呼光樓), 서쪽에는 동하각(同何閣), 남쪽에는 낙가란(樂飢欄)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 동천석실
석문 안의 두어칸 되는 반석(盤石)에는 다도(茶道) 를 즐기던 흔적이 있고 그 주위로는 건물터가 있다
윤선도는 이곳을 부용동 제일의 절승이라 하였다
- 곡수당
윤선도의 아들 학관이 골짜기에서 내려온 물이 굽이굽이 휘돌아 흐르는 곳에 조성한 거처다
곡수당에는 상연지, 하연지 두 개의 연못도 있다
수로 끝에서 물은 돌로 만든 큰 그릇에 담기고, 물이 차면 맞은편 상연지로 떨어지게 된다
- 낙서재
1637년(현조 15)에 들어와 1671(현종 12)년 죽을 때까지 살던 집이다
낙서재에 주로 거주하며 어부사시사, 오우가등 극문학사에 길이 빛날 걸작을 남겼다
♤ 어부사시사
1651년(효종 2년)에 보길도 부용동에 들어가 은거할 무렵에 지은 것으로, 봄·여름·가을·겨울을 각각 10수씩 읊었다
이 작품은 계절마다 펼쳐지는 어촌의 아름다운 경치와 어부 생활의 흥취를 출항에서 귀항까지 어부의 하루 일과를 시간 순서로 읊은 것인데, 세속을 벗어나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삶의 경지를 격조 높고 아름답게 표현하였다
♤ 윤선도 집터 (서울시 중구 명동길 73, 명동1가 1-3)
1587년(선조 20) 6월 22일 한성부 동부 연화방 (蓮花坊 - 동숭동 인근)에서 태어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가사문학의 대가인 고산(孤山) 윤선도가 8살 때 작은아버지인 윤유기(尹唯幾)의 양자로 들어가 살았던 숙부의 집이 있던 곳이다
<동국여지비고>에 ‘윤선도의 집은 명례방 종현(鐘峴)에 있다. 주춧돌에 먹으로 쓴 ‘여산부동(如山不動)’이라는 네 글자가 있어, 바람과 비에 씻기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명례방이란 지금의 서울 명동이고, 종현은 명동성당 고갯길을 말한다)
♤ 윤선도 고택 (전남 해남군 해남읍 녹우당길 135, 해남읍 연동리 82)
고산 윤선도는 42세때 봉림대군(후에 효종)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었는데, 효종은 즉위 후 윤선도를 위해 수원에 집을 지어 주었다
효종이 죽자 1668년 수원 집의 일부를 뜯어 옮겨온 것이 현 고택의 사랑채로, 원래는 이 사랑채의 이름이 '녹우당'이나 지금은 해남 윤씨 종가 전체를 통틀어 그렇게 부른다
1671년 7월 16일 85세의 나이로 보길도 부용동 낙서재에서 생을 마감했는데 유훈에 따라 그가 생전에 점지해 놓았던 전남 해남 구시리 문소동터에 안장(安葬)되었다
김상옥 의사 동상
마로니에 공원 한켠에 자리잡고 있다
근데 왜 동상이 여기에 있는걸까?
일부 자료에는 동상이 있는 이곳이 최후 순국터라고 잘못알려져 있다
의사와 열사의 사전적 의미를 떠나 국가보훈처는
의사 : 무력으로 항거하여 의롭게 죽은 사람,
열사 : 맨몸으로 저항하여 자신의 지조를 나타낸 사람으로 정의하였다
그럼 김상옥은 열사가 아니라 의사로 칭해야 한다
보다시피 열사로 표시된것은 의사로 수정되어야 한다
(물론 을지로 2가 하나금융그룹 빌딩 옆에 있는 나석주의사 상에 있는 '열사'도 '의사'로 수정되어야 한다)
♤ 김상옥 의거 터 (서울 종로구 종로 65, 종로2가 8-4)
1920년 상해로 망명하여 김구, 이동휘, 조소앙 등을 만났고, 자신의 성격에 맞는 무력항일단체인 의열단 에 가입한다
그리고 1922년 10월 권총 3정과 실탄 800발 및 폭탄을 지원받아 서울에 잠입, 1923년 1월 12일 독립운동가를 비롯한 조선인 탄압으로 악명 높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피신한다
김상옥을 추적하던 일경은 그가 삼판통(현 후암동) 의 매부 고봉근 집에 은신해 있음을 탐지하고 종로경찰서 우메다(梅田), 이마세(今瀨) 두 경부의 지휘 아래 20여 명의 무장경찰로 은신처를 포위했다
1923년 1월 17일 새벽 3시였고, 일경과 대치하다 가 김상옥은 은신처를 탈출한다
절(금호동 장안사)에서 승복과 짚신을 빌려 변장하 고 하산한 김상옥은 18일은 무내미[수유리(水踰里)] 이모 집에서 잤고, 19일 새벽에는 삼엄한 일경의 경계망을 피해 효제동 이혜수의 집으로 옮겨 은신에 들어갔다
그러나 1923년 1월 22일 새벽, 최후의 은신처도 일경에게 탐지되고 말았다
동대문서 고등계 주임 구리다(栗田) 경부가 이끄는 결사대 맞서 3시간 반에 걸친 총격전을 벌였다
중과부족인 상태에서 마지막 탄환이 재인 권총을 머리에 대고 김상옥은 방아쇠를 당겼다
10시 30분, 7시부터 시작된 총격전은 그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
김상옥 의거는 두 달 후가 되어서야 <동아일보> 에서 호외로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보통 여타 독립투사들의 경우 의거를 기리는 행사를 할때 '의거 기념식'이라는 표현을 쓰고 사망자들의 경우 '순국 추모식'이라는 단어를 쓰지만 김상옥 의사의 경우 사망일이 1월 22일임에도 '순국 추모식'이라는 말 대신 '시가전 승리 기념식' 또는 '독립활동 기념식'이라는 단어를 쓴다
비록 일본 경찰과의 서울시내 총격전을 벌이고 마지막 한 발로 순국했으나 '시가전'이라고 칭송될만큼 혁혁한 공로를 세웠고 당시 일제에 준 충격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구 경성제국대학 본관 (서울시 종로구 동숭길 3, 동숭동 1-130)
한국인 건축가 박길룡이 설계를 하였고, 일본인 미야가와 구미(宮川祖)가 시공을 담당하였는데, 1930년 8월에 착공하여 1931년 10월 준공되었다
이 건물은 장방형의 평면에 구조는 철근콘크리트가 주가 되면서 벽돌과 목재를 겸용하였다
지하는 1층이고, 지상의 일부분은 2층, 일부는 3층으로 설계되었으며, 외부는 옅은 갈색의 타일로 마감했으며, 평지붕과 장식 없는 외관은 1930년 유행하던 모더니즘 건축 경향을 따랐다
집 전면의 모습에서 덕수궁 언덕에 자리한 경성재판소(현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가 연상된다
똑같이 정북향으로 벽면 마감도 비슷한 색의 타일이다
중앙 출입구 포치 형태도 유사하며, 그 뒤로 돌출된 전면의 입면이나 3개 아치창으로 마감한 모양 등등이 흡사 경성재판소를 떠올리게 한다
마치 경성재판소를 축소하고, 일부에 변화를 주어 앉혀 놓은 모양새다
아치창을 곳곳에 두어 단조로움에 변화를 주었고, 2층과 3층을 적절히 구분한 높이 변화로 입면에 리듬감을 주려 의도했다
중앙 출입구 포치(Porch) 3면에는 각각 커다란 아치형 출입구를, 출입구 주변 벽면은 부드러운 곡면으로 처리해 세련되고 우아한 인상을 풍긴다
1945년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본관으로 사용되다가 1972년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옮기면서 문화예술진흥원 청사였다가, 2010년부터 '예술가의 집'으로 사용 중이다
첫댓글 예전 즐겨 찾아가던 대학로, 대학로에 무슨일들이 있을까? 벌써부터 궁금합니다.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