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 1
김용택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 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히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나고 물어 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시집 『21인 신작 시집』, 1982)
[작품해설]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은 우리 시대의 가장 소중한 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시 세계는 현대인들이 잊고 지내는 농초느 풀 한 포기, 어머니의 머릿기름 냄새 등에서 출발점을 이룬다. 그가 쏟아 넣는 애정의 대상은 어떤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주변 사람들이거나 지나치기 쉬운 주위의 흔한 사물들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도시인들에게는 더욱 소중한 것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러나 그의 시기 갖는 소중함은 농촌에 대한 친근감 넘치는 섬세한 묘사가 단지 현상 파악에 그치지 않고, 매서운 비판의 시선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리고도 투명한 정서 속에 숨어 있는 당당함이 그의 시를 그의 시로 존재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 농촌 실정을 왜곡하는 도시의 위정자나 정책 당국에 대한 강한 외침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로부터 비롯된다. 그와 함께 그의 시에는 오랜 옛날부터 전해 오는 공동체에 대한 소박한 소망이 깔려 있다. 그 소박함이야말로 화려한 논리가 난무하고 가치가 왜곡된 현실 상황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깨닫게 해 줄 뿐 아니라, ‘우리’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임을 고려할 때, 그의 시는 더욱 존재 가치를 얻게 된다. 거기에다 전라도 사투리로 진행되는 가사체, 타령조, 판소리체 가락과 형식은 그의 시를 옹골찬 비판의 맛이 잘 드러나게 하는 동시에, 농촌 공동테적 유대감을 더욱 강화시킨다.
김용택의 등단작이다, 첫 시집이면서 대표 시집인 『섬진강』의 표제시이기도 한 이 시는 오늘의 김용택을 있게 한 작품으로, 같은 제목의 연작 시편이 30편 가까이 된다. 이 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김용택 시의 가장 큰 특징은 섬진강같이 맑고 투명하면서도 진한 서정성이다. 이 서정성은 섬진강 강변 마을의 아름답고 서럽고 한 맺힌 삶의 실상을 어루만져 끌어안는 r의 적절한 언어 구사를 통해 이루어진다. 시인은 이 시에서 섬진강을 어머니의 젖줄로 하여 절박한 공동체적 삶을 살아가는 남도 사람들의 가슴 속 상처가 된 응어리진 한과 설움을 보여 주는 한편, 그들의 설움을 위무해 주는 포용력을 제시한다. 그러기에 ‘전라도 실핏줄 같은 /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는 섬진강은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에 피어난 ‘토끼풀꽃’과 ‘자운영꽃’같이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온갖 서러운 ‘어둠을 끌어다 죽이는 젖줄로 흐를 뿐 아니라, ’그을린 이마‘로 제시된 남도의 깊은 한을 달래며 ’훤하게 꽃등도 달아주‘기까지 한다. 그렇게 흘러가는 섬진강은 지역에 따라서는 영산강을 가까이 불러내기도 하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한편, 지리산과 무등산 사이를 굽이치며 흘러가면서 남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두 산을 교통 · 결합시키기도 한다.
이렇듯 어느 한구석도 빼놓지 않고 남도 전체를 푸근히 얼싸안고 흘러가는 섬진강이기에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로 제시된 위정자 내지 정책 당국이 아무리 남도 사람들의 삶을 위협한다 해도 그들은 결코 위축되거나 굴복되지 않을 것임을 몇 번씩이나 강조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시는 남도의 지극한 한과 설움의 세계로까지 심화, 확대되어 마침내 폭넓은 민중성을 획득하게 된다.
[작가소개]
김용택(金龍澤)
1948년 전라북도 임실 출생
순창농림고등학교 졸업
1982년 『21인 신작 시집』에 시 「꺼지지 않은 횃불」, 「섬진강·1」 등을 발표하며 등단
1986년 제6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1997년 제12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시집 : 『섬진강』(1985), 『맑은 날』(1986), 『누이야 날이 저문다』(1988), 『꽃산 가는 길』(1988), 『그리운 꽃편지』(1989), 『그대, 거침없는 사랑』(1993), 『강 같은 세월』(1995), 『마당은 비뚤』졌어도 장구는 바로 치자(1996), 『그 여자네 집』(1998), 『콩, 너는 죽었다』(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