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일 오늘의 역사
2021년 해병대 항공단 48년만에 다시 부활 부대 창설식
2021년 코로나 바이러스19의 변이 오미크론 첫 확진자 발생
2015년 해군제주기기전대 및 제9해병여단 창설
2014년 사조산업 원양어선 501오룡호 러시아 서베링 해에서 침몰
오룡호 침몰 사고는 러시아 베링 해에서 한국 시각으로 2014년 12월 1일 오후 2시경에 사조산업 501오룡호가 좌초 및 침몰한 사건이다. 침몰 당시 오룡호에는 한국인 11명, 인도네시아인 35명, 필리핀인 13명, 러시아 감독관 1명. 이렇게 총 60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2012년 러시아 모스크바 폭설 겨울전체 강설량의 6분의 1, -40℃의 추위 사망 123명
2009년 북한, 화폐 개혁 단행
2009년 12월 1일 북한이 17년 만에 화폐 개혁을 전격 단행했다. 교환 비율은 100대 1로, 기존 화폐 100원을 새 화폐 1원으로 바꾸는 개혁이다. 북한은 정권 수립 이후 1947년 12월 기존 화폐를 새 화폐와 1대 1 교환을 실시하는 등 지금까지 모두 한 차례의 화폐 개혁과 4 차례의 화폐 교환을 단행했는데 모두 체제 변혁기나 체제 단속을 강화할 필요가 있을 때 실시했다.
이번 화폐 개혁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로 거론되는 3남 정은(26)으로의 3대 권력 세습을 앞두고 체제 단속을 강화하는 한편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목적과 북한 주민들의 은닉 재산을 끌어내려는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
북한 당국은 외화 확보를 위해 해외에서 일하는 무역 일꾼과 주재원들이 정해진 ’충성 자금’만 성실히 상납하면 귀국할 때 얼마를 챙겨 어디에 사용하든 묵인해 왔다.
이 때문에 해외에서 근무한 주재원과 무역 일꾼들이 귀국하면서 챙겨온 막대한 자금이 당국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 지하에서 은밀하게 유통돼왔다. 이들 자금이 부동산 시장에 몰리면서 평양의 최고급 아파트 가격이 1-2년 사이 배 이상 폭등하는 등 과열 양상을 빚기도 했다.
한편 화폐 개혁 조치를 앞두고 은닉 재산이 드러날 것을 우려한 북한 주민들이 위안화나 달러로 환전하기 위해 암거래 시장으로 몰리면서 위안화와 달러가 폭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009년 12월 1일 214급 잠수함 ‘안중근함’ 취역식
부산작전기지에 입항하고 있는 안중근함. 2009년 12월 1일 부산작전기지에서 세 번째 214(1천800t. KSS-Ⅱ)급 잠수함인 안중근함의 취역식을 가졌다.
안중근함이 해군 함정이 됐음을 정식 선포하는 행사인 이날 취역식은 2008년 6월 4일 현대중공업에서 진수한 이후 1년6개월간의 인수평가를 마치고 이뤄지는 것이다. 안중근함은 함정 성능 확인, 분야별 작전능력 평가, 전력화 종합평가 등 전력화 훈련 과정을 거쳐 2010년 9월 실전배치된다.
안중근함은 1번 손원일함, 2번 정지함에 이은 3번째 214급 잠수함으로, 대함전, 대공전, 대잠전, 적 기지봉쇄 및 공격기뢰부설 임무 등을 수행할 수 있고 수중에서 300개의 표적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길이 65.3m, 폭 6.3m, 최고 속력 20노트(37㎞)의 안중근함은 승조원 40여명을 태우고 미국 하와이까지 연료 재충전 없이 왕복 항해할 수 있다.
한 단계 아래급인 209급 잠수함과는 달리 공기불요장치(AIP·Air Independent Propulsion)를 탑재하고 있어 수면에 올라오지 않고도 2주간 수중에서 작전수행이 가능해 디젤 잠수함으로는 세계 최고수준으로 평가되고 있다.
2005년 국군방송 TV 개국
2005년 지상파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 첫 전파. KBS MBC SBS 방송3사 낮방송 시작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설립
2004년 동해선 남북연결도로 남쪽구간 4.2km 임시 개통
2004년 미국 ‘인디언 보스턴 출입금지’ 규정 329년 만에 폐지
미국 보스턴의 사실상 사문화된 ‘인디언 출입 금지’ 규정이 329년 만에 정식으로 폐지될 예정이다.
토머스 메니노 보스턴 시장이 1675년 제정된 ‘인디언 수감법’의 폐지 청원에 24일 서명해 의회로 넘겼으며, 미트 롬니 매사추세츠 주지사가 법안에 서명, 이 법은 공식 폐지되었다.
보스턴시 법원은 영국 식민지 시대인 1675년 매사추세츠주 인디언 부족인 왐파노아그족과 인근 플라이마우스시 백인 정착민 사이의 전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 인디언들이 시내에 나타나 시민들을 괴롭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 법을 제정했다.
300년 이상이 흐르면서 이 법은 사실상 사문화됐지만 폐지 절차를 밟지 않아 형식적으로는 여전히 유효한 법률이었다.
2001년 2002월드컵 본선 조 추첨
2002월드컵 축구대회 본선 조 추첨이 2001년 12월 1일 오후 7시5분부터 90분간 부산전시컨벤션센터(BEXCO)에서 열렸다.
공동 개최국인 한국·일본과 전 대회 우승팀 프랑스를 포함한 32개 팀은 펠레, 요한 크루이프,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회장 등 13명의 추첨자에 의해 1회전을 치를 8개조로 편성됐다. 한국을 포함한 출전국들의 16강 진출 여부에 중요 변수가 될 본선 조추첨은 50여개국에 생중계됐다.
월드컵 본선 조추첨 결과 A조에 프랑스 세네갈 우루과이 덴마크, B조에 파라과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스페인 슬러베니아, C조에 브라질 터키 중국 코스타리카, D조에 한국 폴란드 미국 포르투칼, E조에 아일랜드 카메룬 독일 사우디아라비아, F조에 잉글랜드 스웨덴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 G조에 크로아티아 멕시코 이탈리아 에콰도르, H조에 일본 벨기에 러시아 튀니지로 결정됐다
2001년 해군 1200톤급잠수함 이억기함 취역
2001년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자살 폭탄테러
1999년 영조가 사도세자를 위해 쓴 묘지문, 250년 만에 공개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둬 질식사하게 한 영조가 아들의 죽음을 비통해하며 참혹한 심경을 토로한 묘지문이 2백50년 만에 공개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은 1999년 12월 ‘이달의 문화재’ 전시품목 중 하나로 1968년 서울 휘경동 거주 이종만씨가 기증해 보관해오고 있던 영조의 ‘어제사도세자묘지문(御製思悼世子墓誌文)’을 공개했다.
가로 16.7㎝·세로 21.8㎝·두께 2.0㎝ 사각형 청화백자 5장에 씌어 있는 이 묘지문의 작성일자는 영조 38년(1762) 7월로 기록돼 있다. 임금이 쓴 묘지문은 통상 문장이 뛰어난 학자가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묘지문은 “이것은 신하가 대신 쓰는 것이 아니며 내가 누워서 받아적게 하여 짐의 30년 마음을 밝힌 것이니…”라며 영조가 직접 작성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너는 무슨 마음으로 칠십의 아비로 하여금 이런 경우를 당하게 하는고”로 시작하는 이 묘지문에서 영조는 “그래서 난잡하고 방종한 짓을 타일렀으나 제멋대로 군소배들과 어울리니 장차는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노라”면서 아들을 뒤주에 가둔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어 아들의 죽음이 뜻밖의 일이라며 “여러날 (뒤주를) 지키게 한 것은 종묘와 사직을 위함이었는데… 진실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랐으나 9일째에 이르러 네가 죽었다는 망극한 비보를 들었노라”며 원통해 하고 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사도세자가 노소당인(老少黨人) 간의 정쟁으로 노론에 의해 사도세자가 희생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으나 영조 자신이 아들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훈육하기 위해 뒤주에 가두었다고 쓴 글이 나옴으로써 그 배경을 둘러싼 새로운 논쟁 거리를 제공하게 되었다
1998년 영화 `닥터 지바고` 촬영감독 프레디 영 사망
1998년 시사만화의 개척자 ‘코주부’ 김용환씨 별세
한국 시사만화의 새 장을 연 ‘코주부’ 김용환 화백이 1998년 12월 1일 미국 로스앤젤레스근교 토렌스시의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86세였다.
주먹보다 큰 호박코, 그 코 못지 않게 널름 벌리며 언제나 웃는 입, 촌스럽게 눌러 쓴 중절모. 김용환 화백의 ‘코주부’ 캐릭터는 오십 넘어 나이 먹은 세대에게 친숙한 얼굴이다. ‘코주부’는 한국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도 주어진 삶의 조건을 회피하지 않고 묵묵히 살아온 서민을 대표하는 캐릭터로 1997년에는 만화 캐릭터 가운데 처음으로 우표로 제작되기도 했다.
경남 김해에서 태어난 김씨는 원래 일본 도쿄제국미술대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화가 지망생이었다. 그러나 1945년말 네칸 만화 ‘박첨지’(중앙신문)와 ‘코주부’(서울타임스)를 선보이며 만화가로 입신했다. ‘코주부’는 특히 멋스러우면서도 통쾌한 세태 풍자와 해학으로 선풍적 인기를 모았다. 그는 같은 시기 어린이신문에 ‘복만이의 모험’ 연작을 내며 어린이 만화가로도 최고 작가로 각광받았다. 그는 1959년 돌연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국내 활동을 중단했다
1998년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인수
1996년 이봉주, 제50회 후쿠오카마라톤대회에서 우승
애틀랜타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인 이봉주가 제50회 후쿠오카 국제마라톤대회 에서 2시간10분48초를 마크, 스페인의 알베르토 후스타도(2시간10분50초)를 2초차로 따돌리고 1위로 골인했다. 1996년 12월1일 일본 후쿠오카 평화대운동장에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최고의 마라톤 드라마가 펼쳐졌다.
백리길을 달려온 두 마라토너가 초인적인 의지력 싸움을 벌인 것이다. 알베르토 후스타도(스페인)와의 스퍼트 싸움은 10여차례나 반복됐다. 결국 이봉주 선수가 후스타도에 2초차 앞서 우승했다. 12개국 1백97명의 세계 건각들이 참가한 이날 레이스서 3위는 지난 대회 우승자 루이스 안토니오 도스 산토스(브라질·2시간11분24초)에게 돌아갔으며 애틀랜타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조시아 투과니(남아공)는 추위를 견디지 못한 채 28㎞지점에서 레이스를 포기했다.
이봉주는 이로써 살인적 혹서속에 치러진 애틀랜타올림픽과 진눈깨비가 휘날리는 한파속에서 벌어진 이번 대회 등에서 모두 정상권 실력을 발휘, `세계 최고의 전천후 마라토너`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이번 대회 우승으로 이봉주는 5만달러의 우승상금을 받았다.
1995년 전국경제인연합, 기업윤리헌장 제정
1995년 한국 경제학자 고승제 사망
1994년 국군평시작전통제권, 유엔군사령부로부터 환수
한국군이 1994년 12월 1일 유엔군사령로부터 평시작전통제권을 환수받았다. 1950년 7월 이승만 전대통령이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에게 보낸 서한에서 `한반도에서 적대행위가 없어질 때까지 유엔군 사령관에게 작전지휘권을 위임한다`며 국군통수권을 넘겨준지 44년만의 일이었다.
평시작전통제권은 유엔군이 갖고 있던 평시, 전시 작전통제권중 하나였다. 노태우 대통령은 우리 군이 평시작전지휘권을 가져야 전시작전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판단하에 작전권 환수에 소극적인 군수뇌부를 설득했다. 결국 김종휘 외교안보수석이 리스카시 미8군 사령관과 그레그 주한미대사를 만나 이날 발표에까지 이르렀다
1992년 한국-남아공 국교 수립
1991년 POS(점포판매시스템)제도 도입
1991년 12월 1일 POS(point of sales management)제도 도입으로 물건의 가격표를 볼 필요가 없어졌다. 어느 제품이 얼마나 팔렸는지를 장부에 일일이 적지 않아도 된다. 슈퍼마켓의 주인이나 백화점 카운터의 종업원은 그저 고객이 진열대에서 골라온 상품마다 한 귀퉁이에 붙어 있는 바코드(bar code)를 컴퓨터가 읽도록 하면 된다.
바코드란 가느다란 검은 막대모양의 기호에 상품과 관계된 정보를 입력시킨 것이다. 바코드를 읽을 수 있는 장치를 갖춰놓고 바코드가 부착된 상품만을 취급하면 계산이 정확하고 빨라 많은 종업원이 필요없다. 뿐만 아니라 재고상태는 물론 어느 상품이 어느 시간대에 잘 팔리는지 등 다양한 정보까지 알아 볼 수 있다.
1991년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 실시
1991년 미국의 경제학자 조지 스티글러 사망
1991년 우크라이나 첫 대통령에 크라프추크 당선
1991년 12월 1일,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독립 여부를 묻는 투표와 함께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레오니드 크라프추크 우크라이나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57)이 당선됐다. 그는 지난 1990년 7월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으로 선출된 공산당 최고위 지도자 출신으로 하얀 머리에 위엄을 갖춘 인물이다.
크라프추크는 지난 30년 동안 공산당원으로 활동했으며 공화국에서 공산당에 대한 반대 움직임이 고조됨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에 대한 우호적인 자세를 유지해 왔었다.
그러나 1991년 8월 소련에서 쿠데타가 실패한 이후 그는 공화국 공산당 정치국원 자리를 사임하고 과거 명목상으로 지지해왔던 공화국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공화국 독립운동에 전념한 이후 쿠데타 실패 전까지 충성을 다했던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으며 대중연설의 대상을 러시아인에서 우크라이나인으로 바꿨다
1991년 도서에 ISSN(국제표준도서번호)제도 도입
1990년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도버해협 터널 관통
금세기 최대의 토목공사인 이 해저터널은 세계 첨단기술이 총동원된 기술혁신의 상징이자 지금까지 항공편이나 배편으로만 건널 수 있던 도버해협을 사상 처음으로 육로로 연결한 것이었다. 공식명칭은 영불해협의 공식명칭인 '채널(Channel)'에서 나온 '채널 터널(Channel Tunnel)'이며 채널과 터널을 합성한 '처널(Chunnel)'로도 부른다.
영-불해저터널은 지난 1986년 미테랑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전 영국총리가 서명한 건설협정에 따라 총공사비 1백50억달러(약 12조원)를 투입, 약 6년 만에 완공한 것으로, 도버해협의 최단거리인 프랑스 칼레와 영국 폭스톤 사이의 해저 약 50㎞를 3개의 지하터널로 연결하고 있다. 총길이 49.94㎞ 중 해저구간은 38㎞이다. 양국의 주행방향은 프랑스는 우측통행을 영국은 좌측통행을 하도록 했다.
철도전용의 이 해저터널은 영-불합작 그룹인 유로터널사가 오는 2052년까지 운영하며 `르 셔틀` 이라고 불리는 관광객 및 화물용 왕복열차와 파리~런던과 런던~브뤼셀 노선을 왕래하는 초고속열차 유로스타가 운행된다. 이 터널의 개통으로 지금까지 배편으로 최소한 2시간 걸리던 것이 35분으로 단축되며, 유로스타는 파리~런던 3시간 런던~브뤼셀을 3시간15분에 주파할 수 있게 됐다.
1989년 필리핀 쿠데타 기도, 실패
1986년 미국 레이건 대통령, 이란-콘트라 사건을 규명하기 위한 특별검사 설치 결정
레이건 대통령이 이란-콘트라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특별검사 설치를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란-콘트라 사건은 이 해 11월 미국 언론들이 `미국 정부가 1년반전부터 이란에 무기를 제공하며 대가로 인질석방을 위한 비밀교섭을 진행해왔다`고 기사화하면서부터 세상에 알려졌다.
이란에 제공된 무기는 F4 팬텀전투기, 전투기 탑재용 미사일, C130 수송기 부품, 레이다 등으로 밝혀졌고 이에 대해 이란이 지불한 대금가운데 1천만달러에서 3천만달러 가량이 의회 몰래 니카라과 우익 반군(콘트라) 원조자금으로 유용된 것으로 판명됐다.
1984년 KBS 흑백TV 시청료 폐지
1983년 이원경 외무장관,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회담
1983년 일해재단 발족
전두환 대통령의 아호 `일해(日海)`를 따온 일해재단이 1983년 12월 1일 발족됐다. 일해재단은 1983년 10월 9일 버마 아웅산묘소 폭발사건으로 순직한 희생자들의 유족에 대한 지원과 장학사업을 목표로 설립됐다.
1983년 10월 미얀마 랑군 사태 후 한민족의 고통과 시련이 궁극적으로는 남북한의 분단과 긴장에서 기인하고 있으며, 겨레의 염원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이 문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기관이 필요하다는 정·재계 지도급 인사들의 공통 인식을 바탕으로 설립됐다.
재단은 1985년 말 경기도 성남시 시흥동 230번지에 건물을 완공했으며 1986년 1월 일해연구소를 이 곳에 개소했다. 그러나 13대 총선후 5공비리와 관련, 5공비리특위의 조사대상이 되었으며 일해연구소는 1988년 세종연구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83년 삼성반도체 64KD램 반도체칩 국내개발 양산돌입
반도체의 첨단기술 제품인 64KD램 반도체가 국내에서 처음 개발, 1983년 12월 1일부터 본격 생산에 들어갔다. 삼성반도체통신 (현 삼성전자)은 첨단 반도체 제품인 64KD램의 자체 생산에 성공,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양산체제를 갖추었다고 이날 발표했다.
이 반도체의 칩 디자인 기술은 미국 마이크로사로부터 도입했지만, 칩의 생산, 조립, 검사까지는 자체 기술로 일괄생산함으로 국내 반도체기술이 최대규모 집적회로(VSLI)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발표했다.
삼성반도체통신은 경기도 용인에 2천7백억원을 투입, 반도체 생산 전용 대규모 공장을 건설해 1984년 1월부터 월 1백만개씩, 1985년부터는 월 4백만개씩 생산, 80%를 수출해왔다. 64KD램은 2.5 X 5.7mm의 칩에 6만4천개의 트랜지스터 등 모두 15만개의 소자를 심어 8천개의 글자를 기억, 판독해내는 반도체이다.
1982년 세계최초로 인공심장 이식수술 성공
세계최초로 영구형 인공심장 이식수술이 1982년 12월 2일 낮11시27분 미국 유타대학 의료센터 윌리엄 데브리스 박사 집도하에 시작돼 7시간 만에 성공적으로 끝났다. 수술을 받은 사람은 심부전증을 앓고 있는 61세의 치과의사 바니 클라크였다.
영구형 인공심장은 아직 동물실험단계에 머물러 있었지만 인류를 위해서 클라크는 수술에 동의했다. 그는 심장이식이 가능한 상한연령 50세를 11세나 넘어섰지만 살고자 하는 의욕이 강했고 정신적으로도 안정되어 있어 데브리스박사는 수술에 들어갔다. 클라크는 수술후 112일동안 생존했다.
이식한 인공심장은 로버트 자르빅 박사가 개발한 `자르빅7`이었다. 이 장치는 플라스틱과 금속으로 만들어졌으며 혈액을 폐와 몸전체로 공급해주는 심장내 두개의 심실기능을 대신하고 있다.
1982년 마이클 잭슨 앨범 `스릴러` 발매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앨범 `스릴러`가 1982년 12월 1일 출시됐다. 수록곡중 7곡이 Top 10에 올라 1984년까지 무려 4천만장이 팔려 이 부문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
불황에 허덕이던 팝계는 `스릴러` 열풍을 업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고 `빌리 진(Billie Jean)`과 `비트 잇(Beat It)`는 1983년 미국 MTV를 도배했다. 전세계 젊은이들은 환상적인 `뒷걸음질 춤`을 흉내내느라 열을 올렸다. 잭슨은 스릴러로 세계각국에서 골드 레코드상을 1백50여개나 받았으며 1983년 그래미상에서는 주요상 7개 부문을 휩쓸었다. 잭슨의 등장은 팝계의 오랜 `백인음악 통치`에 조종을 울렸다.
1981년 유고 여객기. 프랑스 공항서 추락. 178명 사망
1980년 새마을운동 중앙본부 발족
1980년 경남 남해도 침투 간첩선 격침사건
레이더가 남해 목도 남방 7㎞ 해상에서 괴선박 포착, 육·해·공군 합동작전으로 간첩선 격침, 9명 사살 피해(전사 3명, 부상 3명)
1980년 대구매일, 부산일보, 경남매일, 광주일보 창간
1980년 KBS-TV, 첫 컬러 방영
1980년 12월 1일 오전 10시30분 제17회 수출의 날 기념식 실황중계를 시작으로 우리나라에도 컬러TV시대의 막이 열렸다. 이날 중계에 앞서 색상조정을 위한 시험전파가 컬러로 나오자 텔레비전 상점 앞에는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신기한 듯 들여다보기도 했다.
컬러방영 첫날 KBS 제1TV는 오후 5시20분부터 정규방송으로 `프로그램안내`를 비롯하여 `아기들차지` `어린이중계차출동` `이주일의 동요` 등 어린이프로와 `컬러의 세계`, 3차례의 뉴스와 킹스컵축구 한국 대 태국B팀과의 준결승 실황을 위성중계했다. 12월 22일부터는 KBS 제2TV와 MBC-TV에서도 컬러시험방영을 시작, 우리나라 모든 TV방송이 컬러방송을 하게 됐다.
1978년 루마니아, 탈소련 선언
1978년 황룡사 터에서 사상최대 크기의 치미 발굴
1977년 해태그룹의 창업자 박병규 사망
1977년 버스 토큰제 실시
1977년 12월 1일부터 서울시내에 버스토큰제가 전면실시됐다. 버스토큰제 실시의 중요핵심은 승하차시간 단축과 안내양들을 삥땅시비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취지가 있었다.
이날 실시된 토큰제는 새벽4시부터 오전7시 사이에는 현금승차를 인정하나 오전7시 이후 버스표를 갖지 않고 탈 경우 10원씩의 할증료를 내도록 했다.
토큰제 전면실시 하루 전날인 11월 30일, 서울시내 버스표판매소는 표를 사려는 사람들로 크게 붐볐는데 일부 판매소는 오후2∼3시경에 모두 매진되기도 했다. 특히 대부분의 매표소에 국민학생용 할인버스표가 일찍부터 동나 부모들이 도심까지 나와 버스표를 사기도 했다. 교통당국자는 시내 일부 매표소에서 승차표가 매진되는 현상은 해당매표소에서 여유있게 준비하지 않은 때문이라고 밝히고 그때까지 확보된 1억95만개로도 충분하나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추가로 5천만개를 제작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버스토큰제 실시이후에도 크고 작은 여러 가지 문제가 많이 발생했다.
1976년 KBS 여의도 새 방송종합청사 준공식
1975년 미국-중국, 정상회담
1975년 국산승용차 1호 ‘포니’ 생산 개시
1975년 12월1일 우리나라 최초의 고유모델 자동차 ‘포니’의 생산이 시작되었다
미제 지프차를 개조한 ‘시발택시’와 일본 닛산과 제휴해 만든 ‘새나라택시’에 이은 본격 국산 제품이다
당대 이탈리아 최고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빚어낸 포니는 뒷모양이 날렵한 패스트백 스타일을 자랑했다
이듬해에는 국산 승용차 중 에콰도르에 첫 수출되는 성과를 거두었고 후속 모델인 ‘포니2’가 탄생하면서 한국이 자동차 생산국으로 성장하는 디딤돌이 되었다
1973년 이스라엘 초대 총리 벤구리온 사망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이자 '건국의 아버지'로 불린 데이비드 벤구리온은 1886년 폴란드에서 태어나 20세 때 팔레스타인으로 이주, 이민 초기 수년 동안 농부로 일하며 향후 약속의 땅으로 돌아올 유대인들을 위한 터전 마련에 전념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만투르크제국으로부터 위험분자로 지목돼 미국으로 추방됐으나 1917년 밸푸어선언이 발표되자 영국군 산하의 유대인 부대에 입대하여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왔다.
1948년 5월 14일, 유엔이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결정하고 4개월반이 지난 이날 정각 오후 4시 벤구리온이 라디오로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했다.
1972년 동서독관계 정상화 기본조약 조인
1972년 전국대학 81개교 계엄선포로 휴교한지 1개월 12일 만에 개교
1971년 영동고속도로, 서울~원주 구간 개통
영동고속도로로 1차 구간이 착공 8개월만에 개통되었다.
신갈과 새말 사이의 104킬로미터 구간으로 모두 92억여원이 투입외었다.
이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4시간 20분이 걸리던 서울 원주사이의 주행시간이 한시간 20분으로 단축되었다.
새말에서 강릉구간은 1975년 10월 14일 개통되었다.
1968년 영화배우 김승호씨 별세
털털한 목소리와 구수한 서민의 맛을 짙게 풍기는 독특한 개성으로 그는 국내뿐 아니라 ‘아시아의 김승호’로서 이름을 떨쳤다. 영화제작 실패로 근 40년을 살아온 청진동 집을 빚에 몰려 남의 손에 넘기고 전셋집으로 옮긴 뒤에도 재기에의 용기로 가득찼던 그였다.
1918년 말띠생인 그는 스무살 때 극단 ‘청춘좌(靑春座)’에 들어가 ‘임자없는 자식’에서 창경원을 지나가는 행인역으로 연예계에 발을 내디뎠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그의 영화출연작 제1호로 원래 동시녹음으로 촬영했는데 막상 돌려보니 소리가 나지 않아 김승호 본인이 직접 변사 역까지 소화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로맨스 빠빠’(1960년·제7회 아시아영화제 주연상), ‘박서방’(1961년·제8회 아시아영화제 주연상), ‘로맨스 그레이’(1963년 제10회 아시아영화제 주연상), ‘역마’(1967년·제14회 아시아영화제 조연상) 등 네 차례에 걸쳐 아시아 스타로 발돋움했다. 한편, 그는 김수용 감독의 ‘혈맥(1963)’에서 복덕방 영감으로 분해 제1회 청룡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데 이어 1967년 ‘만선(滿船)’에서 어부역으로 또 한 번의 청룡상을 거머쥐었다. 호탕한 웃음의 그가 살아생전 출연한 작품 수만 총 300여 편에 이른다.
1966년 빌리 브란트 서독 외상에 취임. 동방정책 시작
1962년 소련, 라오스 경제원조협정 조인
1962년 T-6 훈련기 퇴역식
1961년 연호에 관한 법률 공포 1962년부터 서기 채택
1960년 한일정기해상항로(부산~하카다) 종전후 처음 취항
해방 뒤 처음으로 우리나라와 일본을 오가는 정기여객선이 1960년 12월1일 취항했다.
일본의 하카타 항에서 떠난 유다카마루호가 우리나라의 부산항에 도착했다.
유타카마루호는 재일동포 6명을 태우고 우리나라에 왔으며 우리나라가 생산한 상품의 견본을 싣고 하카타항으로 되돌아갔다.
1959년 세계 12개국, 워싱턴서 남극에서 군사활동 금지하는 남극조약 조인
1959년 12월 1일 워싱턴에서 세계 12개국 대표가 남극조약에 조인했다. 조약은 남극지역이 평화목적으로만 이용되는 것을 원칙으로 군사시설 설치, 군사연습, 무기실험 등 소위 군사적 조치를 전면적으로 금지하고 핵폭발과 방사능폐기물 처리도 이후의 국제협정에 의해 새로이 인정되어지지 않는 한 금지토록 했다. 또 영토청구권의 동결, 과학적 조사의 자유와 지속적인 국제협력도 구체화했다.
조약이 성립하게 된 계기는 1958년 5월 미국정부가 `국제지구관측년`(1957년 7월~1958년 12월) 회의에 참가한 12개국 대표에게 남극관련 국제회의를 제안했기 때문이다. 이 제안에 12개국 대표가 6월1일 워싱턴에 모여 최초의 예비회담을 열었고 1년여동안 58회의 예비회담을 거쳐 마침내 이날 12개국 대표들이 남극조약에 조인했다.
1959년 프랑스-소련, 무역협정 조인
1959년 서울은행 개점
1957년 이스라엘-요르단 교전
1955년 한국-독일, 국교 수립
1955년 극장 지정좌석제 실시
1955년 서독, 대한민국을 승인
1953년 소련, 외국인과의 혼인금지령 폐지
1953년 삼남지방에 비상계엄령
1951년 대구 부산을 제외한 남한전역에 비상계엄령 선포
1950년 유엔총회 한국재건단(UNKRA)설치 결의안 채택
1950년 중국군, 티베트의 수도 라사에 진주
1950년 10월 11일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300만 티베트 인민을 해방시키고 중국의 서부 변경에 대한 방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인민해방군의 진군을 지시했다’는 중국의 발표가 있은지 두달도 안된 1950년 12월 1일 중국군 2~3만명이 티베트의 수도 라사에 진주했다. 그들은 필요한 토지와 식량을 요구했고, 이에 항의하는 티베트 각료들은 파직시켰다.
이듬해 5월에는 티베트의 평화해방을 발표하며 티베트를 중국의 자치구로 편입시키기도 했다. 이어 중국은 장차 있을 무력충돌에 대비 중국과 티베트를 잇는 2000km가 넘는 장거리 도로를 건설하고 라사 부근에 비행장도 건설했다. 티베트에 대한 실질적 장악력을 확보한 중국은 1954년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를 북경 전인대(全人大)에 초대해 티베트가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중국 내 소수민족 지구에 불과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1958년 티베트인들의 무력을 통한 저항운동이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해 1959년에는 티베트 남부 거의 전역과 동부 지역의 상당부분이 게릴라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에 위협을 느낀 중국은 달라이 라마를 이용, 저항운동을 무마하려 했으나 달라이 라마는 오히려 신변불안을 이유로 1959년 4월 측근들을 대동하고 인도로 망명했다.
1949년 사회부 신설
1948년 국가보안법 공포
정부수립 직후인 1948.10.19. 발발한 여순반란사건이 불과 8일 후인 10. 27.경까지 진압된 직후 국회에서는 11. 20. 전문 5개조항의 국가보안법이 상당수 의원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졸속 통과되었다.
당시의 법무부장관이나 검찰총장까지도 국가보안법이 제정될 경우 그것이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시적으로 좌익세력을 척결할 필요가 긴급하다는 제정 찬성론자들의 주장이 득세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국가보안법은 1948.12.1. 법률 제10호로 공포되었다.
국가보안법이 시행된 이듬해인 1949년 한해동안 이 법에 의해 검거 또는 입건된 자가 무려 118,621명에 이르렀다.
그해 9월에서 10월 사이에 132개 정당과 산하단체가 해산되었다. 방첩대 및 군수사기관에서 이 법에 의해 입건 또는 구속되거나 숙청된 군인이 무려 8천명에서 9천명에 이르렀다.
국가보안법의 제정은 한마디로 일제시대에 독립투사들을 투옥, 처벌하는데에 이용되었던 악명높은 "치안유지법"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제정된 당초의 국가보안법은 그 후에도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정권이 바뀔때마다 정권의 유지,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오히려 더욱 개악되었다.
그리고 1948년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무려 50여년동안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가장 대표적인 악법으로서 위력을 떨쳐왔다.
또한 국가보안법은 당초 제정반대론자들이 우려하였던 대로 남북분단을 법제화하여 통일운동에 심대한 장애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1947년 북한 화폐개혁 발표
1945년 일본, 전범 53명에 체포령
1945년 동아일보 강제폐간 5년 만에 복간
1945년 역사학회 창립(대표 이상백)
1943년 카이로선언 발표(11.27 서명)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3년 11월 27일 연합국측의 루스벨트, 처칠, 장제스가 카이로 회담의 결과로 채택한 대일전의 기본목적에 대한 공동커뮤니케를 12월 1일에 발표했다. 일본의 영토 기본방침을 처음으로 공식성명한 것으로 한국에 대한 특별조항이 명시되어 한국의 독립이 처음으로 국제적으로 보장받은 것에 의의를 가지고 있다.
주요내용은 첫번째, 3국은 일본에 대한 장래의 군사행동을 협정하였다. 두번째, 3국은 `야만적인 적국에는 가차 없는 압력을 가할 결의를 표명하였다. 세번째, 일본의 침략을 저지, 응징하나 3국 모두 영토확장의 의도는 없다. 네번째, 제1차 세계대전 후 일본이 탈취한 태평양제도 등을 중국에 반환하고 일본이 약취한 모든 지역에서 일본세력을 구축한다.
한국에 대한 특별조항의 내용은 `현재 한국민이 노예상태 아래 놓여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한국을 자유독립국가로 할 결의를 가진다`로 명시되어 있다. 선언은 이상의 목적으로 3국은 일본의 무조건항복을 촉진하기 위해 계속 싸울 것을 천명했는데, 1945년 포츠담선언에서 조항이 재확인됐다.
1942년 전국에서 청년특별연성소 입소식
1937년 일본, 재만(在滿)한국인의 치외법권 철폐
1932년 중국정부 낙양서 남경으로 천도
1927년 한강철교 복선 운행 시작
1927년 조선일보, 한국 최초의 신춘문예 도입
한국 문단의 독특한 신인 등용문 신춘문예 제도가 1927년 12월 1일 시작됐다. 신춘문예 공모는 1927년 12월 1일자부터 신문에 네 번에 걸쳐 4단 크기로 나갔다. 4단이라면 당시 전체 지면(12단)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큰 지면이었다.
당시의 모집 요강은 요즘과 같지 않았다. 오늘날에는 시, 소설 등 장르 구분만 있고, 제목을 정해주지는 않지만 당시에는 2개의 소재를 주면서 이에 대해 소설체, 일기체, 시체로 써서 응모토록 했다. 제1회의 지정 소재는 `한 사람 이상을 위하야 싸워본 이야기`, `용의 이야기`였다. 1928년이 용의 해였으므로 용을 소재로 삼는 것과 함께, `개인적인 싸움이 아니라 민족을 위한 싸움`에 관한 글을 간접적으로 요구함으로써, 일제하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려 한 셈이다. 모집 요령에 "흰옷 입은 동무들이 힘찬 형세로 싸움터에 나아갈 수 있는 데 도움이 되게 쓰라"고 밝혔고, "될 수 있는 대로 풍자적으로 쓰십시오"라고 당부한 것도 의미있는 것이다.
당선작은 역시 `한 사람 이상을 위하야 싸워 본 이야기`에서 나왔다. 그러나 1928년 1월 1일자 신년특집 기이 2면에 발표된 당선작은 제목은 보이지만 도대체 내용을 알 수 없을 만큼 일제가 삭제했다. 당선자의 이름까지 지워버려 작자가 누구인지도 보이지 않았다. 고작 남아 있는 것은 `싸움은 진보 발전의 어머니다…`로 시작된 편집자 주뿐이었다. 신춘문예 역시 일제하 독립운동의 한 확장이었던 것이다.
1925년 로카르노조약 조인(독일국경문제)
1923년 진주선(마산~진주간)철도 개통
1921년 우측통행(1906년 실시)을 좌측통행으로 변경
우리나라의 통행원칙은 20세기 이래 우왕(右往)으로 시작해 좌왕(左往)을 거쳐 광복 후부터는 우왕과 좌왕을 병행했다.
근대적인 교통질서를 확립한 것은 1906년 12월 1일 경성인사청이 우측통행령을 내린것이 그 시초다. 1905년 가로관리규칙(街路管理規則)에서 차량이나 우마가 마주치면 서로 우측으로 피하라고 규정하면서 우측통행이 시작됐다는 설도 있다.
우왕이 좌왕으로 바뀐 것은 1921년 9월 조선총독부가 12월 1일부터 좌측통행을 시행하라고 통행령을 개정하면서부터였다.
좌측통행을 실시하는 일본에서 온 사람들이 불편을 호소했기 때문이다.
광복 후에는 미군정에 의해 1946년 4월 1일부터 주행은 우측통행, 보행은 좌측통행하도록 하는 교통규칙이 발표된다. 전차와 자동차는 미국식으로 우측통행하면서 보행은 일제 때 방식으로 좌측통행하는 우왕좌왕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남과 북의 도로교통 방식도 이때부터 달라져 남한은 좌측통행, 북한은 우측통행을 하고 있다.
광복을 거치면서 달라진 교통체계는 서울 지하철 운영에도 영향을 끼쳐 일제 때 부설된 철도와 연결되는 지하철 1호선은 좌측통행으로 운행되고 있고, 2호선 이후부터는 우측통행으로 운행되고 있다. 예외적으로 4호선은 당고개~남태령 구간은 우측으로, 선바위~오이도 구간은 좌측으로 한개의 노선이 다른 방식으로 운행되고 있다.
한편, 정부는 보행과 주행의 방향을 일치시켜야 보행성도 빨라지고 동선도 안겹친다는 지적이 잇따르면서 2009년 10월에는 지하철, 공항, 항만 등의 보행시설물을 우측보행으로 전환한뒤 2010년 7월부터 전면적으로 우측보행을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1920년 장덕수 등 조선청년연합회 조직
1918년 잡지 `유심` 폐간
1915년 총독부 박물관 경복궁내 개관
1913년 국제 전신 개통(서울~도쿄)
1911년 헤이그 국제아편회의
1910년 덕수궁 석조전 준공
서울 중구 정동 덕수궁 안에 있는 석조건물.
기본설계는 영국인 G.D.하딩,
내부설계는 영국인 로벨이 하였으며, 1900년에 착공하여 10년에 완공되었다.
3층 석조건물로 정면 54.2 m, 측면 31 m이며, 1층은 거실, 2층은 접견실 및 홀, 3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거실․욕실 등으로 사용되었다.
기단 위에 장중한 도리스식 오더(Doric order)로 기둥을 설치하고 앞면과 옆면에 현관을 만들었다.
이 건물은 앞에 있는 정원과 함께 18세기 신고전주의 유럽의 궁전건축양식을 본뜬 것이며, 당시에 건축된 서양식 건물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건물이다.
이 곳에서 45년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으며, 6․25전쟁 이후 86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었고, 현재는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사용하고 있다.
1900년 12월에 영국인 브라운의 설계로 석조전이 기공되어 11년 뒤인 1910년 12월 1일에 준공되면서 그와 함께 그 앞 뜰에 분수와 연못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식 정형정원이 꾸며졌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정원이다.
석조전 앞 마당의 중정식 정원에는 중앙에 분수대가 있으며 사방주위에는 관목이나 초화류만 심은 정형식 정원이 만들어 졌다
1905년 전(前)의정(義政) 조병세, 전(前)참판 이명재 자결
1905년 동학 3대 교주 손병희, 동학을 천도교로 이름 바꿈
1894년 일본군 전신국, 공중전신 개시
1895(조선 고종 31) 동래 일신여학교 설립
1886년 독립운동가 이범석 출생
1878년 미 백악관, 처음으로 전화 설치
1864(조선 고종 1) 태백산 사고 보존 사찰 각화사 중수
1825년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1세 사망
1814년 프랑스 작가 사드(1740-1814) 세상 떠남
1792년 러시아 수학자 로바체프스키 출생
1783년 샤르루, 최초 수소기구 샤를리엘 개발
1430년 아악보 완성(세종12년)
우리 나라의 고전 음악인 아악을 다듬고 닦아 국악을 발전시키는데 공이 많았던 박연이 세종 대왕의 명을 받들어 아악의 악보를 편찬한 것.
아악은 옛 중국의 음악으로서 우리 나라에 들어와 궁중에서 널리 쓰이던 음악이다. 처음으로 들여온 사람은 고려 예종 때의 안직승이라는 사람.
1114년 안직승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새로운 악보와 악기를 가지고 옴으로써 우리 나라에 아악이 전하게 된 것이다.
1413년 중외인민에 호패 사용(태종 13년)
930(고려 태조 11) 서경에 학교 설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