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구 중앙시험소 청사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86, 동숭동 169-1)
근대 공업 기술자의 훈련 및 양성소인 구 공업전습소 본관은 1907년에 지어 1909년에 완공했다
3년 후인 1912년에는 그 자리에 중앙시험소 청사가 들어섰고 해방 후에는 국립공업시험원을 거쳐 현재의 한국방송통신대학교로 이어졌다
(그동안 조선 최고의 공업 교육 기관이었던 구 공업전습소의 본관 건물로 알려져 왔으나, 이는 국가기록원의 ‘일제시기 고적·관사·박람회 등 건축도면 콘텐츠구축’사업 도중에 서울대학교 건축사연구실의 주상훈연구원이 중앙시험소 청사였음을 밝혀냈다)
현존하는 근대 시기의 유일한 목조 건축물로, 구조는 목조(木造) 2층으로 외벽은 나무 후판(厚板) 비늘판을 붙이고, 지붕은 기와 이음이며 양익부 (兩翼部) 파빌리온 부분 등을 채택하여 격식을 갖춘 르네상스 양식의 양옥 건축이다
평면은 ´H´자 모양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며 건물 중앙에 현관을 두고 지붕 위에는 탑을 세웠으며 탑 위에는 반원구의 돔을 얹었다
정면 벽을 정교하게 분할하고, 정면의 양쪽 돌출부 1, 2층 위에는 디오크레티안 창을 설치했다
공업전습소는 근대 공업 교육 기관으로 1907년에 토목 · 목공(건축) · 응용화학 · 금공(金工) · 염직 · 도기 등의 분야가 있었으며, 본과 2년과 전공과 1년의 교육 과정으로 편제되었다
1912년 4월 이후에는 중앙시험소 부설 공업전습소 로 개편했다가 1916년 전습소가 경성공업전문학교 (현 서울대 공과대학)와 경성공업학교(현 서울공업 고등학교)로 분리하면서 본관 건물은 중앙시험소가 쓰기 시작했다
해방 후 상공부 산하 국립공업연구소, 국립공업시험 원 본관으로 사용되었으며 지금은 한국방송통신 대학교 건물로 쓰이고 있다
중앙시험소는 각종 공업관련 연구와 시험을 목적으 로 설립한 기관으로 공업전습소의 기능을 포괄했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86, 동숭동 169-1)
대한민국 교육부 소속 4년제 국립 원격 대학교로 국립 한국방송통신대학교이다
배우고자 하는 모든 국민들에게 원격교육을 통하여 다양한 영역에 걸친 대학 수준의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함으로써 사회교육의 확대발전과 국가가 필요로 하는 분야별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1972년 3월 9일「한국방송통신대학설치령」에 의거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평생교육기관인 서울대학교 부설 한국방송통신대학으로 개교하였다
2년제 초급대학 과정의 가정학과 · 경영학과 · 농학과 · 초등교육과 · 행정학과 5개 학과에 입학 정원은 1만 2천명이었다
1981년 2월 학사과정의 5년제로 개편되었고, 1982년 2월 서울대학교에서 독립하면서 경제학과 · 법학과 · 영어과 · 유아교육과를 신설하였다
1991년 4년제로 개편하고, 1993년 3월 한국방송 통신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96년 방송통신대학TV가 개국하였으며, 1997년 5월 평생교육원을 설치하였다
2001년 평생대학원을 개원하고, 2003년 관광학과 · 문화교양학과, 2008년 대외협력과를 신설하였다
2009년 서울제1지역대학과 서울제2지역대학을 서울지역대학으로 통합하였다
수업연한은 4년이며 재학연한은 두지 않고 있다
교육과정은 교양과정과 전공과정으로 편성되어 있다
학사학위는 교과과정을 이수하고 졸업학력 평가시험 또는 졸업논문 심사에 합격한 자에게 주어진다
교육방법은 방송강의 · 녹음강의 · 보충강의 · 출석수업 등이 있으며, 이중 방송대학TV를 이용한 방송강의가 주를 이룬다
녹음강의는 녹음테이프를 이용한 강의이고, 보충강의는 PC통신이나 케이블TV 등을 이용한 강의이다
출석수업은 원격교육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대학본부나 시 · 군학습관에서 교수와 학생의 직접 대면으로 이루어지며 매 학년 6일 이상 실시해야 한다
(출석수업이 어려운 자는 출석수업 대체시험으로 대신할 수 있다)
또한 성적이 ‘F’가 나온 교과목을 대상으로 정규 학기와는 별도로 학점을 재취득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기 위하여 계절수업을 실시하고 있다
교과 이수의 단위는 학점으로 하고 방송교육, 통신교재교육, 출석수업 및 전자매체를 통한 수업을 종합하여 학기당 15시간 이상에 해당하는 이수를 1학점으로 한다
졸업에 필요한 학점은 소정의 교과를 이수하고 140학점 이상을 취득해야 한다
매학기 이수 학점은 18학점까지 취득함을 원칙으로 한다
이화장 (서울시 종로구 이화장1길 32, 이화동 2-1)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내외가 살던 본채와 1948년 7월 20일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이 이곳에 조각 본부를 두고 국무총리와 12부 장관의 초대 내각을 구상한 별채인 조각당, 그리고 여러 부속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1945년 10월 이승만은 미국에서 오랜 망명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국내에서 지낼 곳을 찾지 못하고 조선호텔에서 며칠을 머물렀으나 비용이 과중하여 곧 돈암장(성북구 동소문동 4가 103)으로 옮겼는 데, 그 곳은 조선타이어 사장이었던 장진영에게 빌린 집으로서 3채 중 1채를 장진영(張震英)이, 2채를 이승만과 비서진이 나눠쓰게 된 것이다
그러나 1946년 신탁통치 논쟁의 혼란 속에서 이승만은 장진영에게 집을 비워달라는 통고를 받고, 존 리드 하지 중장의 주선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 부 정무총감 다나카가 쓰던 마포장(용산구 청암동 164)을 얻어 이사하였다
그러나 이곳은 햇볕이 잘 들지않고 비가오면 축축한 곳이라 이승만은 불만이었다
그 후 실업가 권영일 등 30여 명의 독지가가 나서서 이승만돕기 운동을 전개했고, 이 모금으로 구입한 것이 이화장이다
1947년 말에 이승만이 공식 기거함에 따라 그의 소유지가 되었다
황해도 평산도호부 마산방 능내동(현 황해남도 봉천군 성기리)에 있는 이승만의 생가는 현재 북한 영토에 있고 현재 남아있는지조차 불명이므로, 이승만을 기리는 이들에게는 이화장이 이승만 생가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이승만이 정부 수립 문제로 김구, 김규식과 관계가 악화되면서 김구의 경교장, 김규식의 삼청장과 서로 경쟁 관계에 있었던 곳이기도 했으며, 경교장, 삼청장과 함께 건국 활동 3대 명소로 불리고 있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이 되고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에 취임함에 따라 경무대로 이사하게 되었지만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이승만이 가끔씩 들르기도 함에 따라 대통령의 개인 사저로 잘 알려 졌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고 이승만이 대통령직 에서 물러남에 따라 다시 기거하였지만 1960년 5월 29일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1965년 7월 19일 미국 하와이 마우날라니 요양원 에서 심장병으로 사망(90세)하면서 그의 시신이 국내로 운구(7월 23일)됨에 따라 이승만의 시신이 잠시 봉안(7월 27일 영결식)되기도 하였다
그 후 프란체스카 여사가 1970년 5월 16일 귀국하 여 1992년 3월 19일 별세(91세)할 때까지 거처가 되었다
1982년 서울시 기념물 6호로 지정되었다가, 2019 년 4월 28일 사적 제497호로 승격지정 되었다
삼일문 석조 정문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64, 이화동 149)
옛 파고다공원의 정문은 1910~1913년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의 정문은 1967년 민자사업으로 추진된 파고다공원 현대화 때 강릉소재 객사문(국보 제51호)을 딴 한식으로 세웠다
박정희 전대통령의 친필 글씨가 새겨진 삼일문 현판을 걸었으나,
2001년 11월 23일 민족정기소생회 대표 곽태영과 한국민족청년회 집행위원장 우경태에 의하여 현판 이 훼손되어 철거되었으며, 그 후 탑골공원(1992년 5월 28일 탑골공원으로 개칭)의 관리를 맡고 있는 종로구청에서 2003년 2월 독립선언문의 서체를 이용해 새로 제작한 현판을 걸었다
삼일문이 등장하기 전까지 파고다공원의 출입구였 던 석조 정문은 1967년 공원정비 때 동숭동 서울대 학교 법과대학에 기증(1969년도)되어 교문으로 쓰이다가 1975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이 서울시 관악구로 이전하면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 초등학교의 정문으로 이용되고 있다
경성의학전문학교 터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71, 연건동 128)
1916년 서울에 설립됐던 관립 의학전문학교로 그 전신은 1899년 관립으로 설립된 경성의학교로서 1926년 경성제국대학 학부 개설 이전까지 조선내 최고 의학교육 기관이었으나, 해방 후 1946년 사실상 폐교됐다
이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 흡수돼 대학기관으로 승격됐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됐다
한편 소격동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은 해방 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제2부속병원이 되고, 국군수도병원으로 변경 · 사용되다가 1971년 국군보안사령부(1991년 1월 기무사령부로 개칭)가 들어서면서 이 일대는 일반인이 접근하기 힘든 장소가 됐다
(1979년 10.26 사태 때 박정희 전대통령의 시신이 처음 안치된 곳이며, 전두환 보안사령관 주도로 12.12 쿠데타가 모의된 장소이기도 하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2013년 6월 국군기무 사령부, 국군서울지구병원 부지에 개관하였다
이곳은 조선시대 종친부와 규장각, 사간원, 소격서 등의 관청이 자리했던 곳이기도 하다
김소월 옛집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5길 13, 연건동 121)
시인 김소월(본명 김정식, 金廷湜)이 남한에 적은 유일한 주소지로, 김소월의 스승 김억의 출판사 매문사(賣文社)이기도 한데 이곳에 주소지를 둔 김소월이 함춘원 동산을 거닐며 시심을 가다듬고 <진달래 꽃> 초판을 펴낸 곳이기도 하다
김억은 김소월의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을 자비로 출판시켜 주기도 했고 김소월이 사망하자 그의 장례식을 치뤄주었다
더 이상 이곳에서 1920년대의 모습을 떠올리기는 어렵지만 김소월이 한 때 머물렀음을 알수 있는 의미 있는 장소이기에 종로문협에서는 2018년 3월 16일 건물주의 허락을 얻어 시인 김소월의 옛집 동판을 부착하였다
193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평안북도 구성군에서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33세)
유서나 유언은 없었으나 아내에게 죽기 이틀 전 "여보, 세상은 참 살기 힘든 것 같구려."라면서 쓴 웃음을 지으며 우울해했다고 한다
또한, 사망 당일 김소월이 시장에서 아편을 샀다는 기록이 있어 "김소월이 빈곤(빈곤 사유가 사업실패 라는 주장도 있다)에 시달리다 아편을 먹고 자살한 거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김소월은 노래로 불려진 시가 가장 많은 시인, 교과서에 맨 처음으로 시가 등재된 시인이기도 하지만 제대로 된 사진 하나 남기지 못한 불운한 인물이기도 하다
남이장군 집터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79-1, 연건동 72-24)
세조 때 북방 개척에 무공(武功)을 세워 이름을 떨쳤던 남이장군의 집터이다
남이 장군이 태어날 무렵 3년 동안이나 낙산에 풀이 나지 않았던 곳이 장군의 집터이며 남이 장군이 유자광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은 뒤 자손이 끊어지고 다른 사람이 살지 못하여 마침내 채소밭이 되었다
♤ 남이장군
1467년(세조13) 함경도에서 회령부사 등을 지낸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북장군(鎭北將軍) 강순(康純) 휘하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하여 북청(北靑)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그 공으로 부호군(副護軍)이 되었다
이시애의 난이 평정된 뒤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책록되고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졌으며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27세의 나이로 공조판서가 되었으며, 왕궁의 호위를 담당하는 사복장의 지위를 겸하였다
예종이 즉위하고 1달 정도 된 1468년 10월 그가 궁궐에서 숙직을 하고 있던 중 혜성(彗星)이 나타나자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다.” 라고 말했는데, 이를 엿들은 병조참지 유자광이 역모를 꾀한다고 모함 하였다
10월 27일 강순, 변영수, 변자의, 문효량 등과 함께 처형(능지처참)되었는데 이를 ‘남이의 옥(獄)’이라 고 한다
남이 장군 묘는 남이 장군과 부인이 함께 있는 쌍분묘로,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약 2.5㎞ 정도 떨어진 남전리 야산에 위치한다
1973년 7월 10일에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사당은 용산구 용문동 107번지에 있는 용문사(龍門祠)인데 용산에 남이장군 사당이 있는 이유는 이시애란을 토벌하기 위하여 출전하는 병력을 한강변에서 훈련시켰고 나중에 한강변 새남터에서 처형당했기 때문에 용산에 모신 것이라고 한다
첫댓글 옛 모습들을 사진으로나마 볼 수 있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