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대한의원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01, 연건동 28-21)
1907년 3월 기존의 국립 의료기관인 광제원(廣濟院)과 국립 의학교육기관인 의학교(醫學校) 및 그 부속병원 그리고 대한적십자병원을 통합하여 의정부(議政府) 직할로 설립되었다
과거 함춘원(含春苑)터에 자리 잡은 대한의원은 탁지부(度支部) 건축소가 설계하여 1906년 8월에 기공, 1908년 10월에 개원하였다
대한의원 본관이었던 이 건물은 1910년 일제 강점으로 인해 조선총독부의원 본관이 되었으며, 환자 수의 증가로 한때 1층을 외래진료소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1916년부터 1928년까지는 경성의학전문 학교 학생들의 임상교육 현장으로도 활용되었고,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의 출범으로 1928년부터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의 본관으로 사용되었다
해방 후에는 국립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제1병원 본관으로 그리고 한국전쟁 후에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 본관으로 사용하다 가 1978년 특수법인 서울대학교 병원으로 체제를 정비하고 본관을 신축 이전한 후 1992년부터 의학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1979년 국가문화재(사적 제248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중앙에 마늘 꽃 모양의 둥근 지붕(돔)을 얹은 네오 바로크풍의 시계탑과 르네상스 양식의 벽면, 노르만풍의 현관 등 다양한 근대 서양 건축양식이 아름답고 이채롭게 절충된 초창기 서양 건축물의 하나로 꼽힌다
1954년과 1982년 두 번에 걸쳐 전면적인 개 보수 작업을 실시했으며, 1999년 시계탑의 시계 원형을 복원하고 2001년 1월 동판 지붕 공사를 마침으로 써 대한의원 설립 당시의 모습을 복원하였다
1층에는 사무실 등도 사용되고 보이는 2층을 의학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2층 전시관으로 들어가면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 의료기관인 병원(광제원) 등을 시대별로 정리된 전시물이 자리하고 있다
♤ 시계탑
대한의원 본관 건물은 무엇보다 중심의 높은 시계탑이 강조된 건물이다
대한의원 시계탑은 건물 2층에 있는 좁고 가파른 나무계단을 통해 3층으로 나누어져 있다
1층은 바닥에서 천정까지 높이가 약 7.5m에 이르는 매우 높은 공간인 것은, 시계추가 오르내릴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여 보통 건물의 2~3층에 해당할 정도로 높게 지은 것이다
2층은 밖에서 보았을 때 시계 아래 유리문이 보이는 장소로 유리문을 열면 테라스가 있어 바깥 전망을 볼 수 있다
3층은 밖에서 보았을 때 시계가 있는 부분인데 2층에서 사다리를 타야 올라갈 수 있는 다락방이다
평상시에는 정기적으로 시계추를 감아주는 것 말고는 시계에 손을 댈(올라 갈) 일이 별로 없기에 계단을 따로 만들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바로 이 좁은 다락방 안에 대한의원 탑시계가 있다
♤ 병동 터
대한의원 병동은 감염 문제를 고려한 파빌리온 형태로 축조된 건물로서 본관 배후에서 환자 수용 역할을 하던 곳이다
병동 구역에는 1등 병실(1인실) 1개 동, 2등 병실 (6~8인실)로 구성된 병동 4개 동과 3등 병실 (16일실)로 구성된 병동 2개 동 등 총 7개 병동 (170병상)이 있었으며, 모두 2개의 회랑으로 본관과 연결되었다
각 병동은 벽돌로 벽체를 쌓은 단층 건물로 축조 하였으며, 지면과 건물 바닥 사이에 공간을 두고 띄워 통풍 및 방습, 방충 기능을 하도록 하였다
건물 축조에 사용된 벽돌은 대한제국 탁지부 건축소 산하의 연와 제조소(煉瓦製造所)에서 제작된 벽돌을 사용하였다
벽체 하부에는 깬 돌과 콘크리트를 소재로 줄기초를 마련하여 기초를 조성하였다
건립 당시 본관을 제외한 각 부문이 단층으로 축조되어 유지되다 1935년에 들어서 병실의 노후화를 해결하기 위해 기존의 서쪽 병동 일부와 동쪽 병동, 전염 병동을 전부 철거하고 동 간격을 넓게 하여 신축하였다
이곳에 보존한 서1병동 구역은 1935년 대규모 신축공사에서 제외되어 유지되어오다 1956년 증축이 이루어지면서 1935년 중축된 동1병동의 서쪽 부분과 연결되어 1병동으로 통합되었다
현재 병동의 상부 구조는 모두 멸실되었으나 대한제국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내부 공간의 변화를 추정할 수 있는 기초부가 남아있어서 근대 시기 병원 건축 양식과 기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유적이다
♤ 실험동물공양탑
실험실에서 죽은 동물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1923년 7월 15일 세운 탑이다
뒷면에는 '大正 十一年 七月 五日 建之'라 새겨져 있다
대한의원 뒷편에 있다
♤ 지석영 동상
지석영은 조선말에 종두법(種痘法)을 처음 도입 · 보급한 근대의학의 개척자이며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1899년 최초로 설립된 경성의학교(京城醫學校) 초대교장에 취임하여 이후 10년 간 의학교육 사업에 종사하는 한편,
의학적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1885년 ‘우두신설 (牛痘新說)’이라는 두 권의 책을 냈다
또한 그는 여러 외래도서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한글의 우수성과 중요성을 자각하여 한국어의 발전과 보급에도 노력하여 1909년에는 한자를 국어로 풀이한《자전석요》를 간행하여 한자 해석의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기도 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경술국치) 후에는 모든 공직을 버리고 진료생활에 전념하다가 1935년에 사망하였다
♤ 이석형 생가 터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01, 연건동 28-22)
조선 초 세종 ~ 성종 때 뛰어난 관리이며, 큰 학자인 이석형의 생가터로 계일정을 지어 교만과 분에 넘침을 경계한 계일정신(분수에 넘치는 것을 경계하라 - 즉, 다다익선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운 곳이다
이석형의 연지동 연못은 물이 차면 물마개를 열고, 부족하면 마개를 담아 항상 적정량의 수위를 유지하게 하였다
친구 김수온(金守溫)이 부족함이 없으면 넘치기 쉬운지라 이를 경계하고자 정자이름을 계일정(戒溢亭) 이라고 붙여주었다 어느 시기(?)인가 경기도 용인시에 이전하여 중건되었다
경모궁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103, 연건동 28-3)
조선시대에 창경궁의 후원인 함춘원(含春苑)이 있었던 곳으로1764년(영조 40)에 북부 순화방(順化坊)에 있던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사당인 수은묘(垂恩廟)를 이곳에 옮겨 지었고, 1776년(영조 52)에 정조가 즉위하자 수은묘를 경모궁으로 고쳐 불렀다
1898년(광무 3) 8월 사도세자를 장종(莊宗)으로 존호를 올리면서 경모궁에 있던 장종의 신위를 종묘(宗廟)로 옮기게 되자 경모궁은 그 기능을 잃게 되었다
1900년(광무 4)에는 경모궁 터에 태조 · 세조 · 성종 · 숙종 · 영조 · 순조의 6성조 어진을 봉안하던 곳인 영희전(永禧殿)을 옮겨 세웠다
영희전은 역대 임금의 어진을 모신 곳으로, 구한말 광무제(光武帝, 고종)는 대한제국의 권위를 세우고자 현 중부경찰서 자리에 있던 작은 규모의 영희전을 폐하고 이곳에 36칸의 영희전 본전(本殿) 을 새로 세웠다
그 뒤 일제강점기에 함춘원 옛 터, 즉 경모궁 일대에 경성제국대학이 세워지면서 원래의 모습을 대부분 잃어버렸고,
더욱이 한국전쟁으로 옛 건물이 불타 원 모습을 알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1973년 8월 14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37호 (함춘원지)에 지정되었다가 2011년 7월 28일 현재의 이름(경모궁지)으로 바뀌었다
♤ 경모궁지 내신문
경모궁의 세번 째 문으로 얼마 전까지도 함춘문으로 불렸었다
♤ 경모궁 정당 앞 삼계(三階)
삼계 중 가운데 태계(泰階)는 신(神)이 오르는 계단이고, 동쪽 계단 조계(阼階)는 주인이 오르는 계단(동계)이며, 서쪽 계단 서계(西階)는 손님이 오르는 계단이다
♤ 함춘원
1484년(성종 15) 창경궁을 창건하면서 풍수지리설 에 의해 궁궐 동편의 지세를 보강하기 위하여 이곳 에 나무를 심고 담을 둘러 잡인의 출입을 금하였던 것에서 시작하여 1493년(성종 24) 2월에 함춘원이 란 이름이 정식으로 붙여져 창경궁 부속 후원(後苑) 이 되었다
연산군 때에는 함춘원 담장 밖 높은 지역의 민가를 철거하여 구역을 확장하고, 기묘한 화초를 심어 더욱 심원하고 엄숙하게 하였다
담 밖에는 별정군(別定軍)을 배치하여 일반인의 통행을 금하고, 대문과 함께 함춘원 북쪽에 성을 쌓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당시 덕빈(德嬪)의 시신(屍身)이 임시로 매장되기도 하는 등 점차 함춘원의 관리가 소홀해졌으며, 인조 때에는 함춘원의 절반을 태복시 (太僕寺)에 나눠주면서 이후 140여년간 방마장(放馬場)으로 사용되었다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터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03, 연건동 28-2)
1926년 5월 1일에 4년제 의학부를 설립한 식민지 조선의 유일한 의과대학이다
총장도 내국인이 아니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었 다
1927년 의학부 별관과 의학부 본관을 준공하였다
의학부가 만들어진 후 총독부의원은 부속의원이 되었다의학부 교육은 미국이나 영국식 교육이 아니라 독일계 의술이 가르쳐졌다
황토색 빛을 내는 벽돌로 쌓여진 건물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황토색 벽돌을 쌓아 만든 것이 아니라 벽돌모양의 황토색 판을 붙인 것이다
빛살무늬 토기처럼 수직의 무늬를 넣기까지 했다
(벽돌을 쌓아서 만드는 것보다 더 힘든 작업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섬세하다)
해방 뒤 그 재산은 1946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창설되는 데 쓰였으며, ‘국립서울대학교 설치령’에 따라 한국인 학생들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편입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당시의 구조물로는 서울대학교 의과 대학의 정문, 본관(행정관), 수위실과 서울대학교 병원 시계탑 등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