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늦은 감상문이긴 하지만 여럿 글들을 읽고 있자니 갑자기 맘이 동해서요. ^^;
개인홈에 올렸던 글이라 이곳에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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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금까지도 뮤지컬을 좋아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하나 분명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우리집에 처음 전축이란 물건과 함께 [오페라의 유령] 오리지널 캐스팅 LP가 함께 들어왔고, 그것이 내가 태어나서 처음 들어본 뮤지컬이란 것이다. 마이클 크로포드의 깔끔하면서도 안정된 음색, 사라 브라이트만의 연약한 듯 하면서도 언뜻 고집스러움이 느껴지던 그 높은 목소리, 부드럽다가도 웅장하게 와닿던 선율. 음악 성적은 늘 우와 미를 오가는 데다 미묘하게 음치에 박치인 터라 막상 노래가 틀렸는지 어떤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할 정도로 음악적 소양이 바닥임에도 불구하고,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음악의 향연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계속 품어온 것은 아마도 [오페라의 유령] 덕분이 아니었을까. 비록 이번 브로드웨이 공연에 대한 좋은 평만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주머니 사정과 거리의 압박으로 늘 먼발치서 발만 동동 굴러야 했던 이 공연을, (비록 3층에서나마)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내게 있어서 상당히 의미있는 일이었다. 처음으로 뮤지컬이란 것을 알게 해주었고 지금까지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계속 눈길을 가게 했던 바로 그 작품이었으므로.
2. 이제껏 부산의 문화회관, 시민회관, KBS 부산홀만 경험한 내게 <예술의 전당>은 훌륭한 곳이었다.¹ 무엇보다 소리가 높이 올라가도 음이 뭉개지지 않고 그대로 울려온다!! (공연장이라면 마땅히 갖추어야 할 필수요소에 감격해한다는 점에서 부산의 낙후된 문화수준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무대도 크다!! (부산에 비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서울의 다른 공연장은 어떤지 전혀 모른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와아’하고 있다가 자리에 앉으니 그제야 조금 NG. 앞사람이 허리를 똑바로 세운 편한 자세로 앉아 있으면 무대가 가려서 안 보인다; 결국 서로서로를 배려하기 위해서는 허리를 조금 구부려 의자에 한껏 몸을 파묻은 상태로(그 자세로 3시간만 있으면 파스라도 몇 개 붙여야 했을걸) 공연을 관람해야만 했다. 계단 자체의 기울기는 나쁘지 않았는데 좌석이 너무 높았던 탓일까. 이왕이면 좀더 관객들의 편한 자세를 고려한 설계였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비닐로 씌운 스티로폼을 깔고 앉아야 할 정도의 부산 시민회관보다 백번 천번 낫기는 낫다;
3. 팬텀을 맡은 브래드 리틀에 대한 평은 꽤 좋았던 터라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들었을 때의 그 감격이란! 지금까지 들어본 버전이 오리지널 캐스팅 밖에 없었으니 비교하기엔 상당히 무리가 있지만, 마이클 크로포드의 경우 매끈하게 빠지는, 딱히 흠잡을 데 없는 음색이란 느낌이었는데 브래드 리틀의 목소리는 상당히 두텁고 면면이 겹쳐져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감정이 묻어나는 구석이 많다고나 할까. 아무래도 눈앞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공연을 보았다는 점에서 그런 느낌이 더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음반만 듣고 판단한다면 완벽에 가까운 마이클 크로포드의 노래에 더 끌리겠지만 막상 무대를 보고 있자니 감정의 굴곡이 드러나는 브래드 리틀의 표현도 나쁘지 않다 싶었다. 팬텀의 연기 또한 수준급. 음반만 들을 때는 팬텀의 노래에 크리스틴을 사랑하는 한편, 애제자를 좀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스승의 열망도 함께 들어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브래드 리틀의 노래를 들으니 The Music of the Night가 그렇게 사랑하는 감정이 뚝뚝 묻어나는 애틋한 곡일 줄은 몰랐다; 라울과 크리스틴의 이중창을 들으며 흐느끼듯 노래하는 팬텀 역시. All I ask of you-Reprise에서도 마이클 크로포드의 노래는 원한에 가깝다는 느낌이었는데 브래드 리틀은 밉지만 미워할 수만은 없는 애증의 느낌이랄까. 크리스틴이 팬텀에게 키스할 때 차마 그녀를 안지 못하고 애타게 파르르 떨던 그 손이라니!² 브래드 리틀의 노래 속에는 ‘남자’의 느낌이 진하게 묻어나서 묘하게 에로틱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특히 Turn your face away from the garish light of day라는 대목에서 살짝 목소리가 감길 때 어찌나 녹아나던지; (난 끝까지 그 장면이 둘의 러브신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그렇게 느낀 사람은 정녕 나 혼자뿐이란 말인가?)
크리스틴 역의 마니 랍의 경우, 악평에 비해 노래를 못한다는 느낌은 별로 안 들었다. 역시 문제는 크리스틴이라는 캐릭터와 마니 랍의 음색이 안 어울린다는 것이겠지. 여지껏 코러스걸 사이에 묻혀 전혀 두각을 못 나타내다가 우연한 기회에 노래를 하게 된 크리스틴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이미 완성된, 그것도 상당히 힘찬 목소리였다. 더 이상 팬텀의 가르침이 필요없이 하산해도 될 정도; 평소 1막의 크리스틴은 고음은 잘 처리하되 어딘가 끊어질 듯한 연약함, 2막은 1막의 목소리에 다소 힘과 고집이 더해지지만 전반적으로 리릭 소프라노의 이미지를 잃지 않는 목소리라고 생각해왔었는데 마니 랍은 1막부터 이미 힘이 들어갈 대로 다 들어간 듯한 목소리랄까. Think of Me를 부를 때에도 처음에 잠깐 머뭇거리는 부분마저 힘이 느껴졌고 마지막 고음 처리 때에도 디바로서의 첫 공연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그 자신감이라니. 굳이 따지자면 마니 랍의 목소리는 1막보다는 2막에(그것도 2막 후반), 그리고 크리스틴보다는 칼롯타에 더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Notes Ⅱ/Twisted Every Way에서 칼롯타와 언쟁을 주고받는 장면에서 분을 못 이기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크리스틴이 아니라 ‘어디 너 죽고 나 죽자’하며 당장에라도 칼롯타 목을 쥐고 흔들 수 있을 정도의 크리스틴이었다(실제로 칼롯타가 She's the one behind this! Christine Daae!라고 하자 크리스틴이 How dare you!라고 맞받아치는 장면에서 오히려 칼롯타 목소리가 크리스틴한테 눌렸다; 정말로 한 대 치는 줄 알았다니까;). 가냘프고 청아한 요정같은 목소리라기보다는 원숙한 전성기의 디바의 이미지에 가까운 음색이어서 실제 실력과는 별개로 역과의 괴리감을 좁히지 못하는 것 같아 다소 안타까웠다. 마니 랍이 칼롯타를 연기했다면 오히려 더 극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해보았다.
칼롯타는 특유의 R 발음과 함께 극중에서 재미를 더해주는 캐릭터인데, 이번 공연의 칼롯타 역시 그러했다. 풍부한 목소리와 감정표현, 활기찬 액션, 그야말로 프리마 돈나라는 느낌. 과장된 고음처리마저 상상했던 칼롯타의 이미지 그대로여서 굉장히 즐거웠다. 라울의 경우는 왜 자꾸만 [레 미제라블]의 마리우스 캐릭터와 겹치는 건지; 마리우스도 그렇고 라울도 그렇고 본인이 직접 일 벌이는 건 별로 없고 주위 사건에 휘말리다가 거의 어부지리 격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얻는 역이라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라울의 연기나 목소리는 무난한 편. 사실 팬텀의 임팩트가 워낙에 강해서 라울의 연기나 노래에서는 크게 느낌을 받은 게 없었다. 오히려 조연인 멕의 연기가 훨씬 눈에 띄었다. 3층에서 오페라글라스를 바짝 눈에 대고서 멕의 움직임을 계속 좇다보니, 멕이 댄서여서 그런지 극중에서 그냥 서 있을 때에도 발레 포지션을 취하고 서 있곤 하는데 그런 디테일한 부분이 공연의 깊이를 더하는데 알게 모르게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다. 멕을 연기한 노지현 씨는 실제로 발레리나 출신이라는데 사소한 발 포지션이나 손동작 등도 섬세하게 표현해서 인상깊었다. 멕에 딱 ‘어울릴 만한’ 귀여운 외모와 목소리에 연기력도 좋은 편이라 1, 2층에서 보았다면 멕의 표정연기를 보는 재미도 꽤나 쏠쏠했을 것 같다. 오페라글라스로 뚫어져라 바라본 끝에, 마지막에 팬텀의 가면을 집어드는 장면에서 멕의 얼굴은 팬텀의 행방에 대해 관객이 느끼는 의문과 당혹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마담 쥐리나 앙드레, 피르맹 등의 조연들도 무난한 편. 조연 중에서 멕과 함께 박수를 많이 받은 것은 피안지였는데 역시 피안지의 캐릭터 묘사가 코믹한 부분이 많았기에 관객들에게 더 어필했던 것 같다.
4. 소문의 샹들리에가 떨어지는 장면은 대실망이었다! 원래 그렇게 천천히 떨어지는 건가? 샹들리에 밑에 있던 관객들은 머리 위로 떨어지니까 나름대로 실감났을지도 모르지만 3층에서 보고 있으려니 팬텀이 ‘Go―!!’라고 외치는 첫 부분에서부터 ‘Oooo~’라고 울릴 때까지 아주 천천히, 깃털이라도 되는 것마냥 살풋 내려앉을 뿐이었다; (‘샹들리에가 너무 천천히 떨어져요!!’라고 울부짖는 내 문자를 받은 지인은 ‘떨어지는 게 아니라 날아와 착지하는 것’이라는 친절한 설명을 보내주셨다. ㅠ_ㅜ;)
하지만 그 외의 장면들은 정말 눈이 즐거웠다. 사실 부산에서 그 정도 스케일의 무대와 장치를 소화해낼 수 있는 공연장은 없으니까. Overture의 오페라 연습 때의 군무라든가 팬텀의 지하 아지트, Masquerade 등 이제껏 상상만 해오던 장면들이 무대 위에서 화려하게 펼쳐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는 공연 자체가 주는 감동보다 ‘공연장다운 공연장(비록 앞사람 머리에 무대가 가릴지언정 부산보다는 훨씬 나은 조건!!)’에서 처음으로, 그것도 상당한 규모와 퀄리티를 자랑하는 공연을 보고 있다는 감동에서 비롯되는 것이었으리라. 3층에서 무대를 좀더 제대로 보기 위해 2시간이 넘도록 오페라글라스를 눈에 바짝 대고 있느라(그것도 안경 위에 대고 있다보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공연이 끝나고서는 눈앞이 뱅글뱅글 돌 정도였지만―숱한 커튼콜 끝에 마지막으로 커튼이 내려지고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잦아들 때까지, 그저 벅찬 마음에 계속해서 박수를 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뮤지컬에 대해, [오페라의 유령]에 대해 호감 그 이상의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지 않는 평범한 사람으로, 이번 관람은 참으로 만족스러웠다. ‘영화는 극장에서, 공연은 공연장에서’라는 평소의 생각을 더욱 확신하게 한 계기였다고나 할까. 무대이기에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자잘한 실수와 그런 실수를 아무렇지 않은 듯 커버하는 배우들의 노련함³, 공연현장에서 연주되는 오케스트라의 박력, 배우들의 조그만 흐느낌 하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함께 숨을 죽인 채 몰입하는 관객들의 팽팽한 긴장감. 배우들의 노래와 연기를 좀더 세심하게 알아차리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내 자신에게는 한없이 안타깝지만, 그런 안타까움을 충분히 채우고도 남을 정도의 즐거움이 있었기에 나는 또 다시 [오페라의 유령]을, 또 다른 공연을 보러갈 기회를 꿈꾸게 된다. 부디 서울에서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이런 대규모의 공연을 시설좋은 공연장에서 마음편히 관람할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2005. 8. 18.
1) 얘기를 들으니 예술의 전당보다 LG아트센터가 훨씬 더 좋다고 한다. 아니, 대체 어느 정도길래!
2) PLUTO 님께 그 얘길 했더니 “3, 4층에서도 손 떠는 거 보이게 하려면 실제로 얼마나 많이 덜덜덜 떨었겠어.”라고 하는 바람에 나름대로 눈물났던 장면이 순식간에 코미디로 돌변해버렸다; 아니 하지만 그 장면 정말 슬펐다구요. ㅠ_ㅜ
3) 크리스틴이 팬텀의 가면을 벗기는 순간 한번에 잘 안 벗겨져서 손이 잠깐 머뭇거렸다. 그리고 팬텀이 크리스틴에게 면사포를 씌워주는데 그만 흘러서 크리스틴의 어깨 위에 걸쳐지자 크리스틴이 노래하는 새에 그녀의 머리에 면사포를 ‘푹’ 눌러 씌우는 팬텀. 꽤나 심각한 장면이었는데 덕분에 혼자 웃음 참느라 혼났다;
첫댓글 '뮤지컬에 대해, [오페라의 유령]에 대해 호감 그 이상의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지 않는 평범한 사람으로...'이 표현은 맞지 않는 것 같네요.
이제껏 내가 읽은 [오페라의 유령]에 대한 어떤 후기보다 자세하고 섬세했어요. 이 글을 읽으니, 정말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이 들게하네요~^^*
공연후기 잘 읽었습니다. *^^*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도 그때 생각이 절로 나네요
"그녀를 안지 못하고 애타게 파르르 떨던 그 손이라니"~~~이부분 정말 감동이었져...ㅠㅜ 샹들리에가 떨어지는 순간이 긴박하진 않았던것도 공감...ㅋ....근데 하필 공연내내 제 머리위에 매달려있는 바람에...혹시 떨어지면 어쩌나 쫄면서 공연봤습니다.....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