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1691
7월 6일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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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그네를 따뜻이 맞이합시다!>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일거수일투족은 그야말로 파격과 충격의 연속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겼던 율법, 특히 율법주의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미셨습니다.
어겼을 경우 현행범으로 몰리던 안식일 규정을 백주대낮에 보란듯이 ‘개무시’하였습니다. 당대 잘 나가던 유다 고관대작들, 뒷목이 뻣뻣하던 지도자들의 악행과 이중적 생활을 공개적으로 힐난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죄인들의 대명사였던 세리와 창녀들에게도 희망이 있으며, 그들에게도 구원에로의 문이 활짝 열려있다고 명백히 선포하셨습니다. 인간 존재로 취급받지 못하던 이방인들과 어린이들을 축복하시며 사랑해주셨습니다.
당대 인간들의 보편적인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엎어버린 예수님의 파격적인 행보와 언행에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으니, 나름 ‘한 공부’ 했다고 어깨에 힘 좀 주율법학자들이요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날도 예수님께서는 결코 상종해서는 안될 세리 마태오를 당신 제자단에 가입시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리 마태오의 송별연에 참석하셔서, 자연스럽게 세리들과 어울리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에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했던 바리사이들이 제자들을 향해 따졌습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오 복음 9장 11절)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사회 분위기 안에서 세리들은 죄인 중의 죄인으로 분류되었습니다. 그들은 유다인들의 삶의 중심이자 지주였던 모세의 율법을 준수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하느님과 무관한 존재, 율법이나 신앙생활, 더 나아가서 구원과는 전혀 무관한 짐승같은 존재로 치부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세리 마태오를 당신 제자단의 일원으로 떡 하니 뽑으셨을뿐만 아니라, 세리들의 잔치에 참석하셔서 그들과 포도주 잔을 함께 기울이시니, 예수님의 그런 모습을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점입가경이라고 예수님의 대응은 더욱 충격적이어서, 마치 시원한 사이다 한 컵 마시는 것과도 같습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오 복음 9장 12~13절)
파격적인 예수님의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또 다른 한 분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십니다. 80세 생신 때, 교황청 안팎의 고위성직자들이나 유력 정치인들은 내심 기대했을 것입니다. 교황님의 생신 만찬에 참석할 수 있는 초대장이 올거라고. 그러나 교황님께서는 당신 생신 만찬에 노숙자들을 초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취임 후 첫 공식 외부 방문 행사 장소로 이탈리아 남단에 위치한 람페두사 섬을 찾아가셨습니다. 물론 이동하실 때는 최고급 방탄이 되는 벤츠나 BMW가 아니라 20년 된 낡은 중고차를 이용하셨습니다.
교황님께서 지중해 상 ‘난민들의 섬’으로 유명한 람페두사를 첫 방문지로 선택하신 이유는 곤경에 처한 난민들을 만나고, 국제사회에 협조를 요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람페두사는 2011년 ‘아랍의 봄’ 혁명이 발발한 이후 수많은 난민들이 몰려든 섬이었습니다.
지금 제주도 역시 500여 명의 예멘 난민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 모르겠으나, 예멘 난민에 대한 지나치게 부정적 시각의 언론 보도와 그로 인한 국민들의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어디 한 군데 머리 둘 곳 조차 없는 이방인이셨던 예수님, 그리고 난민들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보시고 통탄하실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멘 난민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거부감, 다른 사람들 어떻게 생각하든 우리 그리스도인들만큼은 그래서는 안되겠습니다.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떠올려보면 절대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주었다.”(마태오 복음 25장 35~36절)
솔직히 이 땅 위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 나그네요 이방인입니다. 우리 것이라고 여기지만 솔직히 우리 것도 아닙니다.
그뿐인가요?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빼앗기고 힘겨울 때, 전쟁으로 모든 것이 풍비박산났을 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난민이 되어 정처없이 전 세계를 떠돌아다녔습니다.
예멘 난민들은 위험한 사람들, 혐오스런 대상들, 두려운 존재들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엄마 잃고 상처입은 어린 새 같은 존재들입니다. 오랜 전쟁으로 인한 극심한 고통, 죽음의 공포, 사랑하는 가족과의 생이별 등, 갖은 트라우마를 안고 우리를 찾아온 나그네들입니다.
지금 전 세계가 우리들의 처신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사방이 높은 벽으로 가로막힌 듯한 느낌 속에 불안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을 예멘 난민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따뜻한 환대의 손길을 내밀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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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죄인과 죄인임을 아는 이>
제가 아는 분이 얼마 전에 교통사고가 나서 갈비뼈 두 개에 금이 갔습니다. 폐차를 해야 할 정도로 큰 사고였습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상대 차가 옆을 박았는데 운전석 10cm 뒤에 박아서 그 정도만 다치셨습니다. 상대방 차가 운전석을 받았었다면 정말 큰일 날 뻔한 것입니다.
저도 군대 있을 때 교통사고를 냈습니다. 큰 군용트럭을 몰고 가는데, 길가로 지나가는 노란 옷을 입은 유치원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빨간 불이라 갑자기 정차를 하려했지만 네 바퀴 중에 한 바퀴만 브레이크가 작동되어 속도가 빠르지는 않았지만 꽤 긴 거리를 밀려가서 앞에서 나오는 프라이드 승용차를 박았습니다.
꺾는다고 꺾었지만 상대 앞바퀴 쪽을 쳤고 프라이드는 산산조각이 나며 인도로 떨어졌습니다.
처음 낸 사고다보니 어찌 대처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이게 현실이 아니기 만을 바랐습니다.
경찰은 상대 운전사의 뼈에 금이라도 가면 상당히 심각해진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그런 큰 사고였음에도 온 몸에 타박상만 들었지 뼈에 문제가 있지는 않았습니다.
상대방 타이어가 충격을 많이 흡수해 준 것 같습니다. 그분이 또 천주교 신자라 선처를 해 주셔서 병원비와 차 값만을 물어주고 합의할 수 있었습니다.
군용차는 보험이 되지 않습니다. 만약 개인이 합의금을 낼 수 없다면 영창을 살아야만 합니다. 만약 그 때 바퀴가 아니라 10cm 뒤쪽으로 사람을 쳤다면 저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었고 그러면 가난한 저희 집에서 합의를 할 수 없게 되어 저는 오랜 기간 영창을 살아서 지금의 저의 모습이 아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 뼘 차이로 살인자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죄인과 의인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죄인이 의인이 되고 의인이 죄인이 되는 것은 한 뼘 차이입니다. 그러니 죄인이라 실망할 것도 없고 의인이라 우쭐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의인이 없다는 것이 진실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죄인과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죄인 밖에는 없습니다.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죄인은 심판관이 되어 타인을 판단할 것이고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죄인은 모든 이를 자신보다 낫게 여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에 적당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일까요, 아니면 죄인임을 아는 의인일까요? 하느님 나라에서 서로 비난하고 질책하고 판단한다면 거기는 하늘나라가 아닐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가장 비천한 죄인도 안고 품어줄 수 있는 자비가 넘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의인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임을 아는 사람을 찾으실 수밖에 없습니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예수님은 세리인 마태오도 당신 사도 중 한 사람으로 뽑으셨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자비롭지 못한 이유는 자신도 죄인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라고 하면서 타인을 판단할 수 있을까요? 자신이 재를 묻히고 다니면서 똥을 묻히고 다니는 개를 나무랄 수 있을까요? 전쟁에서 50보 도망간 사람이 100보 도망간 사람을 나무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타인을 판단하고 심판하면 그것 자체가 자신은 의인의 자리에 서겠다는 뜻입니다.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선인지는 판단할 수 있어야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그 사람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간음한 여자 앞에서 그 여자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의인이었고 나머지는 죄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심판하지 않으셨다면 누구도 심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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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9,9-13: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께서는 세관에서 일하고 있던 마태오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다. 주님께서는 그가 세리였지만 기꺼이 부르셔서 한순간에 사도가 되게 하셨다. 그는 세상일에 파묻혀 있었지만 거짓 없는 신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마음속을 아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하다는 판단을 받는다. 주님께서 그에게 “나를 따라라.”하시자, 한 순간도 머뭇거리거나 미루지 않고 곧바로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9절)고 하기 때문이다.
마태오는 주님의 방문을 기해 자기 동료들을 불러 예수님과 그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된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그래서 세리들과 또 죄인들이라고 표현된 그 사람들과 식사를 하시게 되었다.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심으로써 예수님은 나쁜 평판도 얻게 된다.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마태 11,19 ; 루카 7,34) 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헐뜯게 된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로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아주 경멸하였고 상종하지 못할 사람들로 여겼기 때문에 그들과 거래는 물론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람들이 예수께서 세리인 마태오를 부르시고 또 그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으니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자신들은 스스로 율법을 잘 지키기 때문에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자처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3절) 이 말씀은 당신이 지금 당신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와 계시며, 그러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으며,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열심하고 착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자신이 모든 것을 잘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으로 이미 가득 찬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른 것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배워라.”(13절) 여기서 말하는 제사는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예식인데 그 제사에 마음이 담기지 않은 제사, 형식적으로만 드리는 제사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한다는 것이다.형식과 의식은 중요한 것이지만, 여기에 우리 마음이 함께 봉헌되는 제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과 자비를 통하여 우리가 실천하는 삶을 함께 봉헌할 때 참된 제사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자선이 바로 예수께서 오늘 복음에서 하시듯이 죄인들에게 가까이하시는 모습이다. 선입견과 편견에서 벗어나 진정한 사랑을 베풀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우리도 살아가도록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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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묵상
북 왕국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에 빠져 세상 탐욕에 집착하며 하느님을 저버렸을 때, 하느님께서는 아모스 예언자를 뽑아 그들에게 파견하시고 그들의 방탕과 만용을 징벌하십니다. “너희의 축제를 슬픔으로, 너희의 모든 노래를 애가로 바꾸리라.” 그들이 지금은 먹고 마실 것이 넘쳐 나고 가난한 이들의 것까지 빼앗아 자기 배를 채우지만, 그들이 곧 굶주리게 될 것이고, 양식과 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게 될 것이라고 아모스 예언자는 경고합니다.
세상살이가 넉넉하고 물질이 풍요로워지면, 더 잘 먹고, 잘 입고, 잘살려는 고민이 늘어납니다.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허세를 부리고, 상대적 빈곤감에 싸여 충분히 가지고도 만족하는 법이 없습니다. 돈은 모든 근심과 죄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돈이 쌓이는 곳에는 영적인 가치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세리였던 마태오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주저 없이 따라나서는 장면은 인상적입니다. 먹고사는 데 큰 문제가 없던 세리가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설 수 있었던 것은, 돈과 재물을 관리하면서 본 인간의 탐욕의 결과를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돈 때문에 울고, 재산 때문에 분쟁을 겪고, 친구를 잃고 나면 비로소 깨닫습니다.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쌓아야 하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가진 재물이 아니라, 남에게 베푼 사랑으로 우리를 평가하시기 때문입니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사무국장/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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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밤송이 김기현 요한 신부님]
<기초에 충실한 신앙인이 됩시다.>
강론을 쓸 때 그냥 쓰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작업(?)이 병행됩니다. 곧 말씀을 읽는 작업, 묵상하는 작업, 기도하는 작업, 그리고 여러 가지 참고서적을 읽어보는 작업 등이 병행됩니다.
그런데 어떤 날은 아무리 애를 써도 글이 써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묵상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쓰면 되겠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써 보면 말이 안 됩니다.
참고서적을 뒤져보지만, 그 날 주제와 관련된 글이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시간은 흐르고 마음은 답답한데, 글은 써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고민하다가 나름대로 찾은 답은 기초에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이 써지지 않는 경우를 보면, 대부분 복음 말씀을 충분히 읽지 않았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복음 말씀을 읽고 또 읽어서 주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제대로 들은 다음, 묵상을 하고 기도를 하고 참고서적을 뒤적여야 하는데, 빨리 써야 하는 상황이라고 또 익숙한 복음을 만났다고 대충 읽고 지나가면, 여지없이 글이 안 써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글이 안 써지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기초적인 작업으로 돌아와 다시 말씀을 읽고 또 읽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 작업들, 묵상하고 기도하고 글을 쓰는 작업들이 의외로 쉽게 풀리는 것 같습니다. 다른 일들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산에서 길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골짜기를 헤매지 말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기초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래야 높은 곳에 올라가 지형을 파악하고 안전하게 내려올 수 있습니다.
또 방향을 잃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북극성을 보고 길을 찾아야 한다.’는 기초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가야할 방향을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믿는 이들도 어려움과 시련이 닥쳤을 때, 기초적인 것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초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 기초가 무엇입니까?
오늘 화답송의 시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제 마음 다하여 당신을 찾나이다. 당신 계명 떠나 헤매지 않게 하소서."
말씀대로 주님을 찾고 주님의 계명을 따라 사는 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기초입니다. 어려움이 있고 시련이 있고 혼란이 있을 때,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주님을 찾고 주님의 계명을 따라 살라는 겁니다.
그러면 방황하지 않고 헤매지 않을 거라는 말씀입니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베트남의 반 투안 주교님이 계셨는데, 그분은 1975년 사이공의 주교가 되었지만, 공산주의 정부에 체포되어 13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게 됩니다.
당시 주교님은 젊은 주교였고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런 주교님이 감옥에서 지내야 한다는 것은 정말 괴롭고 절망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위해 시작한 많은 사업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상념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을 거고, 자신의 모든 것이 뒤엎어지는 느낌이었을 겁니다. 그런 가운데 주교님의 마음에는 이러한 목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너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일을 구분해야 한다. 사목방문과 신학생, 수도자, 평신도, 젊은이 양성, 학생들을 위한 학교와 휴게실 건설, 믿지 않는 이들의 복음화 사명은 훌륭한 하느님의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아니다. 하느님께서 네가 이 모든 것을 포기하길 바라신다면 즉시 그렇게 하여라. 그리고 하느님을 믿어라! ... 너는 하느님을 선택했지 하느님의 일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 목소리는 주교님의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주교님은 자신이 암기하는 300여개의 말씀을 종이에 적어 말씀으로 매일 기도하고 묵상을 실천했으며, 포도주 세 방울과 물 한 방울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함께 감옥에 갇힌 신자들을 위로하고, 자신을 감시하고 감옥에 가둔 간수들에게 다른 나라 언어를 가르쳐주며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실천합니다.
그리고 흩어진 교회 공동체를 만날 수는 없었지만, 사도 바오로처럼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주교님이 주님을 찾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을 때, 감옥은 더 이상 절망의 장소가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희망의 장소가 된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기초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을 찾고 주님의 계명에 따라 사는 일에 충실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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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마태오가 세관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그의 직업이 ‘세리’였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당시 세리들은 세금을 징수해서 로마 정부에 바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정해져 있는 세금보다 더 많이 징수해서 그 돈을 자기들의 수입으로 삼았습니다. 백성들은 세리들이 로마 정부를 위해서 일한다는 점 때문에, 또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공금을 횡령하고, 뇌물을 받는 등의 부정한 일을 일삼아서 했기 때문에 그들을 민족의 배신자로, 그리고 도둑으로 취급하면서 미워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시고, 또 그를 사도로 뽑으신 것은, 그가 죄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도로 뽑을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세리들이 대체로 도둑이었지만, 모든 세리들이 다 도둑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를 사도로 뽑으실 때 그의 직업을 보지 않으시고, 그의 믿음, 열성, 헌신 같은 성덕만 보셨습니다.
“나를 따라라.”라는 말씀은, “나의 제자가 되어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에는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9).”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너희는 지금까지 물고기를 잡아서 먹고사는 인생을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인생을 살아라.”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마태오를 부르실 때에는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아마도 “너는 지금까지 세금을 거두어서 정부에 바치는 일을 하면서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사람들을 구원해서 하느님께 바치는 일을 하면서 살아라.”라고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곧바로 하던 일을 멈추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마태오가 전에 만난 일이 있었는지, 마태오가 어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어떻든 부르심을 받자마자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다는 점에서는 어부 출신 제자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부들보다 더 큰 포기를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부’ 라는 직업은 언제든지 되돌아갈 수 있는 직업이지만, ‘세리’는 한 번 그만두면 되돌아가기가 어려운 직업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0-13)
루카복음 5장을 보면, 레위(마태오)가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푼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루카 5,29). (하늘나라는 바로 이렇게 모든 사람이 함께 모여서 기쁨을 나누는 잔치입니다.) 여기서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라는 바리사이들의 말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을 보니 당신네 스승도 죄인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을 말리는 말이 아니라, “예수는 죄인이다.”라고 헐뜯는 말입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또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는 말씀은,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와 목적을 밝히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병들어 있기 때문에 고쳐주시려고, 또 죄 속에 있기 때문에 회개시켜서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 말씀에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유다인들이나 그리스인들이나 다 같이 죄의 지배 아래 있다고 고발하였습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깨닫는 이 없고, 하느님을 찾는 이 없다. 모두 빗나가 다 함께 쓸모없이 되어 버렸다. 호의를 베푸는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 그들이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만이 있다.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눈에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로마 3,9-18)
(“나는 예수님이 필요 없다. 나 혼자 힘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의인은 없습니다. 만일에 정말로 그런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이 죄인이니, 다른 사람을 죄인이라고 비난하면 안 되고, 또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다고 비난해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회적으로 ‘죄인들’이라고 낙인찍힌 사람들만 만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아무런 차별 없이 똑같이 사랑하신 분입니다.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라는 말씀은, “외적으로만 신앙생활을 하지 말고, 정말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신앙생활을 하여라.”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하느님의 뜻은)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을 죄인이라고 낙인찍고 소외시키는 것은, 사랑을, 즉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마르코복음 2장을 보면,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한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는 말이 나옵니다.(마르 2,15) 이 말은, 그들이 이미 회개했고, 예수님을 믿고 있음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전에는 죄 속에서 살았더라도 회개했다면 이제는 죄인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을 죄인이라고 판단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느님만의 권한입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처지에 있는 형제이고, 우리에게는 ‘사랑의 의무’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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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고흥 도화성당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베풀고, 더 받고...>
매일 덜렁대고 건망증이 심한 엄마가 있었습니다. 설거지를 하다가 그릇을 깨는 것이 일수였고, 또한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리고 하지 못할 때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아들은 이러한 엄마를 우습게 보곤 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엄마는 냉장고에 반찬 그릇을 넣다가 김치 통을 엎었습니다. 아들은 이러한 엄마를 보면서 말했습니다.
“엄마! 엄마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어. 제대로 좀 해 봐.”
그러자 엄마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제대로 한 일도 있어. 엄마는 널 낳았잖아.”
그렇습니다. 엄마가 없다면 아들이 있을 수 있을까요? 제대로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그 아들은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자비란, 무엇일까요? 자비는 히브리말 ‘레헴’으로 "여인의 자궁"을 뜻합니다. 생명의 뿌리입니다. 생명이 거기서 나오고, 생명을 보호하고, 생명체를 키워주는 것입니다.
또한 어미 새가 모이를 주워 먹고 돌아와서 새끼에게 그것을 토해내어 먹이는 것을 봅니다. 그럴 때 보면, 어미 새는 막 자기 몸을 비비꼬면서 토해 먹입니다. 또 꽤 큰 새끼는 아예 주둥이를 어미의 목구멍 속에 집어 넣어가지고 꺼내 먹습니다. 이렇게 해 가면서 새끼를 키우는 어미 새의 모습, 그 사랑이 “자비”라고 합니다.
그래서 희생제물은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입니다. 그러나 자비는 우리가 하느님께 아무 것도 드리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자비는 우리의 가슴으로 하느님의 그 크신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비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헨리 나우웬 신부님이 쓰신 “돌봄의 영성” 이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사제의 삶을 살면서 가장 위로와 격려가 되었던 때는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해주었을 때라고 고백합니다.
“나는 당신의 고통을 없애줄 수 없습니다. 문제의 해답을 내놓을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약속할 수 있습니다. 당신을 혼자 두지 않고 최대한 끝까지 붙들어 주겠습니다.”
우리 삶에도 슬픔과 고통이 많이 있지만, 슬픔과 고통을 혼자서 당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축복입니까? 이것이 바로 “자비”라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자비란? 자비를 베푸는 사람과 자비를 받는 사람 모두의 몸과 마음이 치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루카 복음 6장 36절에 보면...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카 복음 6장 38절에 보면...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기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영적일기를 마무리 하면서...
자비는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비를 마음으로 느껴보십시오. 그러면 자비를 베풀 수 있습니다. 오늘 고운님들에게 하느님의 자비가 충만하여 몸과 마음의 치유가 일어나는 복된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 성자와 성령께서는 고운님들께 강복하시어 길이 머물게 하소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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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상일 다두 신부님]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새날을 맞아 새 힘을 얻어 잘 지내고 계십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은 서로가 자신을 내어놓을 때 자신의 생명력을 잘 유지한다고 보아집니다.
흙은 모든 동식물에게 자신을 잘 내어놓아 그들의 살길을 열어주고 꽃을 피우며 동식물은 결국 죽어 거름으로 돌아감으로써 흙을 비옥하게 하고 있습니다.
또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부모는 자신을 내어놓음으로써 자녀에게 생명력을 주어 아름답고 귀하게 가꿔줍니다. 자녀는 부모님께 자녀로서의 도리를 다함으로써 부모님의 마음을 편하게하고 기쁘게 해드립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인관관계도 그러하다고 봅니다. 다양한 경우의 만남이 있을 때 그 만남의 의미는 서로서로가 자신의 입장에서 상대방에게 거름이 되도록 내어 놓을 때 각자의 생명력과 만남의 의미가 유지되고 성장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사실 요즘 세상을 보면 인간의 부족함과 이기심으로 인해서 자연과 세상이 많이 파괴되었습니다. 인간이 우선 눈에 보이는 자신의 이익 때문에 자연을 잘 보호하고 관리하지 못해서 자연이 많이 파괴되어 결국 그 영향은 사람에게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자신의 이익만 챙기려 하다 보니 서로에 대한 불신이 만연해져서 인간성이 결여되고 아름다움이 많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사실상 문제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도 사람 때문에 많이 멀어지고 파괴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세상을 만드시고 특히 우리 인간에게는 당신의 모습을 많이 내어놓으셔서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닮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다른 피조물에게는 없는 자유의지와 지력을 하느님께 다시 내어드리지 않고 이기적으로 사용하여 하느님과 멀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져간 죄인인 우리를 오늘 예수님께서는 부르러 오십니다. 다시 새로운 생명력을 주시고자 부르시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세리인 마태오와 죄인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음식을 나누십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져서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력을 잃어가는 죄인인 우리에게 다시 생명력을 주시기 위해서 불러 모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결국 죄인인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 완전히 당신 자신을 자선하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바치는 형식적인 제사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셨던 그 자선을 이웃에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서 세리 마태오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우리가 응답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잘 응답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열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때 우리는 풍요로워져서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력이 새롭게 살아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잘 응답하지 않으면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놓지 못하며 이웃에게도 참된 자선을 할 수 없습니다. 자선을 하지 않으려는 자애심적인 우리 마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면 우리존재는 결국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과도 같아집니다. 독서에 나와 있듯이 자선은커녕 남을 속이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봐도 그렇습니다.
“양식이 없어 배고픈 것이 아니요,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어 굶주린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자선이 무엇인지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자선은 세상적으로 볼 때 나에게 뭔가 있어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자선은 물질적이기에 앞서 마음입니다. 우리 존재자체가 이미 자선을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져 있는 하루24시간과 나의 생각, 마음, 의지들이 자선을 할 수 있는 전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송두리째 자선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제 더욱 더 마음을 모아서 이웃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잘 자선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자선의 응답을 통하여 이 세상이 다시 풍요롭게 회복되도록 노력하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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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송동림 레오 신부님]
<병자와 범법자>
지난해 교통사고로 1년 가까이 투병 생활을 하시던 어머니를 종종 찾아뵈었습니다. 다리를 다쳐 거동이 많이 불편하셨는데 혹시나 나중에 걷는 데 장애가 있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이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입니다. 환자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누구든지 두려움을 느낀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첫째, 헤어짐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안전을 느끼게 해주는 집을 떠나 낯선 장소에서 때로는 혼자 지내야 한다는 두려움입니다.
둘째, 의존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달리 거의 전적으로 의사·간호사·영양사 등에 의존해야 하는 현실에서 불안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셋째, 통제 상실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지정된 병실에 입원해야 하고, 환자복을 입어야 하고, 병원에서 제공하는 음식만 먹어야 하는 데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넷째, 통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병에서 오는 통증과 그로 인한 고통, 경우에 따라서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환자를 사로잡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를 상실한 환자들은 근심·걱정·염려·두려움 등으로 불면의 밤을 보내기도 합니다.
결국 투병 생활에서 의사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특이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병든 사람으로 바라보신다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처럼 죄인들을 범법자로 보지 않고 영혼의 병자로 바라보십니다. 흔히 사람들은 죄인을 범법자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처벌받아야 할 나쁜 사람이 아니라 치료받아야 할 환자로 보십니다.
죄인을 범법자로 바라볼 때는 차가운 시선·선입견·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병든 사람, 앓는 사람, 환자로 보셨습니다. 그들을 멸시하거나 냉대하지 않고 불쌍한 마음으로 대하십니다.
그러기에 누구보다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우리가 그들을 바라볼 때 불쌍한 마음을 갖는다면 상대방에 대한 마음이 조금은 너그러워질 것입니다. 나아가 그들을 아픈 사람으로 인정한다면 오히려 고쳐주고 돌봐주거나 배려할 수 있습니다.
사회에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심리적·정신적·영적인 환자로 바라본다면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 것입니다.
나아가 죄인이 병자라면 누군가에게 진정한 도움을 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그러기에 죄인을 수감하는 교도소가 감옥이 아닌 죄인(병자)들을 치료하는 병원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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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서울 평창동 성 안토니오수도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필요한 사람이 된다 함은?>
우리는 누구나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만일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너무도 비참할 것이고 내가 불필요한 사람이라고 누가 얘기한다면 아마 대단히 자존심 상해하며 팔팔 뛸 것입니다.
반면 저 사람은 누구나 필요로 하는 사람이야 하면 최고의 칭찬으로 여기며 으쓱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필요한 사람은 능력이 있고 그래서 소중한 사람이고, 불필요한 사람은 쓸 데 없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는 통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누구에게나 필요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꽤 오래 전의 이야기지만 누구라고 하면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명망이 있는 분에게 어떤 책임을 맡아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부탁을 하면서도 사람들이 보기에는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있는 일이니 맡기를 꺼려하거나 맡더라도 저와의 친분 관계 때문에 억지로 맡을 것이라는 예상은 했습니다. 역시 정중하게 사양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 후 정치권의 제의를 받았고 그리로 가셨습니다.
이런 일이 그 후에도 몇 번 있었기에 그때부터 저는 위치나 능력을 보고 부탁치 않고 자기를 내어줄 수 있는 사랑이 있는지 보고
부탁케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저의 경우입니다. 얼마 전 할머니 한 분에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당신이 누구신지, 왜 전화하셨는지는 말씀하시지 않고 저의 직책이 무엇이고 나이는 얼마나 되는지 등등을 계속해서 예의 없이 묻는 것이었습니다.
기분이 슬며시 상하여 왜 그렇게 꼬치꼬치 묻느냐고 짜증을 최대한 숨기고 제가 여쭈었습니다. 그랬더니 그제야 자식들 문제로 면담하고 싶은데 면담해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면담할 뜻이 있는지 저의 의사를 알아보기 전에 면담할 만한 자격이 제게 있는지 알아본 것이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니 기분이 더 상했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의지를 발동하여 친절하게 약속을 한 다음 기분 나빠하는 저 자신을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정말 누가 나를 필요로 해도 내어줄 수 있는가? 아주 가난한 사람이 나를 필요로 해도 내어줄 수 있는가? 아주 하찮은 일로 나를 필요로 해도 내어줄 수 있는가? 겸손하지 않은 태도로 부탁을 해도 내어줄 수 있는가?
진정 사랑이 동기일 경우는 오늘 복음의 주님처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중심입니다. ㅣㅣ1귀찮기만 하고 얻는 것이 별로 없을 지라도 인정과 칭찬이 되기는커녕 비판이 될 지라도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한다면 그 필요에 응답합니다. 그리고 누가 나를 더 필요로 하느냐에 따라 응답합니다.
유력한 사람이 아니라 아주 하찮은 사람이 필요로 하면 하찮은 사람이 나를 더 필요로 하기에 그 필요에 응답하고 그 반대로 내가 돕고 싶은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유력한 사람이 나를 필요로 하면 오늘 복음의 마태오처럼 그 또한 다른 차원의 가난한 사람으로 나를 더 필요로 하기에 그 필요에 응답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능력 때문에 필요한 사람이 되려 하기보다는 사랑 때문에 필요한 사람이 되려 합니다.
그리하여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전서 13장에서 노래하듯 있는 능력마저 아무 소용이 없는 사랑 없는 능력자가 되기보다는 없는 능력까지 다 발휘하여 필요에 응답하는 능력 없는 사랑이 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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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
마태오 9,9-13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사랑>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이를
곱게 바라보는 것
아무도 손 내밀지 않는 이에게
따스한 온기 전하는 것
아무도 말 건네지 않는 이와
정겹게 이야기 나누는 것
아무도 곁에 두지 않는 이에게
살며시 다가가 함께 하는 것
아무도 함께 식사하지 않는 이와
즐거이 어울려 먹고 마시는 것
아무도 인정하지 하지 않는 이에게
참으로 소중하다 어깨 다독이는 것
아무도 편들어 주지 않는 이를
기꺼이 격려하여 주는 것
아무도 사람답게 보아주지 않는 이에게
당신은 참으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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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평소 조용하고 신사처럼 매너가 늘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형제님이 계십니다. 화도 잘 내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이해를 해주는 멋진 분이지요. 따라서 사람들에게 늘 좋은 인상을 남기셨고 많은 이들이 이 분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운전 중에 자기 차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며 위험하게 운전하는 차를 만난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이제까지 볼 수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글쎄 크게 화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모습을 매스컴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엄마가 차를 번쩍 들어 올렸다는 이야기, 중병으로 도저히 치유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초인적인 의지력을 발휘해서 이겨냈다는 이야기 등을 말이지요.
즉, 평소와는 다른 모습, 이제까지 하지 못했던 행동을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을 뛰어넘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형제님 역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 것이 아닐까 싶네요. 사실 그냥 웃고 넘기면 되는데 순간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서 쓸데없는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초인적인 힘을 사소한 곳에서 발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정말로 중요한 곳에서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주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는데 초인적인 힘을 사용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그 모습이야 말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간절하게 원하는 모습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오를 “나를 따라라.”라고 부르십니다. 당시에 세리는 큰 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같은 민족의 사람들에게 세금을 걷어서 로마에 바치는 사람이어서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사람을 괴롭히는 죄인이고, 또한 그들이 만지는 돈에는 황제의 얼굴이 그려져 있기 때문에 늘 우상숭배에 빠져있는 큰 죄인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을 당시의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앞서 말씀드렸던 사랑이라는 초인적인 힘을 하느님을 위해 쓸 수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즉,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은 지금 모습이 그대로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주님께서는 분명히 변화될 수 있음을 아신 것입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의로운 사람은 어떻게 변화될 수 있을까요? 의로운 사람은 지금 상태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죄인은 어떻게 변화될까요?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죄인인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이 땅에 오셨고 계속해서 당신께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 각자를 똑같이 부르십니다. 이제까지 가지고 있었던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라고 부르십니다.
쓸데없는데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것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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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는 지혜}
노벨상 수상식에서 중국 소설가 모옌이 연설했다. 그중 인상 깊은 이야기는 그의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에 관한 것이었다.
모옌이 소년이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추수가 끝난 밭에 밀 이삭을 주우러 갔다가 밭을 지키는 사람에게 흠씬 얻어맞았다. 상대는 어머니를 때리고, 입에서 피를 흘리는 그녀를 남겨 둔 채 휘파람까지 불며 의기양양하게 사라졌다.
십수 년이 흐른 뒤, 모자는 길을 가다가 우연히 그때 밭을 지키던 사람과 마주 쳤다. 상대는 백발성성한 노인이, 소년 모옌은 건장한 청년이 되었다. 모옌은 당장 달려가 그의 멱살을 잡고 어머니의 복수를 하려 했다.
그때 어머니가 그를 막으며 침착하게 말했다.
“아들아, 그때 나를 때린 사람과 지금의 저 노인은 같은 사람이 아니란다.”
어머니는 눈앞의 백발노인을 이미 용서했다고 했다. 이왕 용서한 마당에 다 큰 아들이 자신의 복수를 하겠다고 또 다른 죄를 짓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비록 자신 역시 그 일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한다 해도 말이다.
사실 용서의 핵심은 과거의 나 자신과 화해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내 감정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용서에는 타인을 향한 측은지심도 있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자기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선량한 지혜가 필요하다. (무옌거, ‘착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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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다들 바쁘게 걷고 있었습니다. 저는 사제가 된 후에 아침 출근을 한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사제관과 성당이 같은 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구청에서도 출근 때문에 바쁜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숙소와 사무실이 가까이에 있기 때문입니다. 새삼 세상 사람들이 바쁘게 살고 있으며, 치열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딱 2년 아침에 지하철을 타고 학교에 다닌 적이 있습니다. 2005년 캐나다에서 공부할 때입니다. 아침을 준비하고, 치우고 학교에 가는 길이 무척 바빴던 기억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열심히 출근하는 그 시간만큼 저도 주어진 일에 더욱 충실하도록 하려고 합니다.
조지 캠벨은 신화가 가지는 4가지 특징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학과 자본으로는 알기 어려운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신화가 가지는 4가지 특징은 바쁘게 사는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길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신화가 주는 첫 번째 특징은 ‘신비함’입니다. 무지개는 단순히 빛의 프리즘이 아니라, 하느님과 맺는 새로운 계약의 표징이 된다는 신비로움입니다. 수선화는 예쁜 꽃이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꽃말이 있습니다. 탄생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죽음은 또 다른 세상으로 건너간다는 것 또한 신비로움입니다. 신비로움을 잊어버린 현대인들은 풍요 속에서도 빈곤함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신화가 주는 두 번째 특징은 ‘우주적 힘’입니다. 신들의 세계에서 보면 지구는 아주 작은 별에 불과합니다. 우주에서 보면 지구는 국경이 없는 둥근 별입니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한마음, 한 몸과 같습니다. 내가 나의 몸을 돌보듯이, 우리는 같은 지구별에서 사는 이웃들을 사랑하고 돌보아야 합니다. 왼손과 오른손이 서로 싸우는 일이 없듯이, 내 몸의 지체들은 한 방향을 향해서 나가듯이 지구별에 사는 우리는 모두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신화가 주는 세 번째 특징은 ‘사회적 합의’입니다. 신화는 모두 ‘권선징악’을 이야기합니다. 신화는 윤리와 도덕을 이야기합니다. 세상의 문화와 제도는 신화의 틀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계명과 법전은 신화의 토대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문화와 문명을 존중해야 합니다. 모든 문화와 문명은 사회적 합의에 따라서 발전하였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달라도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신화가 주는 네 번째 특징은 ‘생명의 존중’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지구를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과 조화를 이루고 살아야 합니다. 인간의 탐욕은 많은 생명의 멸종을 가져왔습니다. 생명의 멸종은 결국 인간 역시 지구에서 살 수 없도록 할 것입니다. 꽃, 나비, 새, 물, 바다, 하늘을 존중해야 합니다. 인간은 어쩌면 이 지구에 아주 짧게 머물다 가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하여 지구의 환경과 생명을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제1 독서는 신화가 가지는 특징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양식이 없어서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찾아,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헤매고, 북쪽에서 동쪽으로 떠돌아다녀도 찾아내지 못하리라.” 자신만을 위하면서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이웃의 것을 빼앗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 역시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재물이 아니라 자비입니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화가 주는 특징을 가르침을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들의 꽃도 아름답게 입혀주시고, 하늘의 새도 먹이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가장 가난하고, 아픈 이들에게 해 준 것이, 지금 가장 헐벗고, 굶주린 이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하느님께 해 드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모든 이들이 바로 형제요 자매라고 이야기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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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가장 중요한 일>
-중심 관리, 얼굴 관리-
어제의 새삼스런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겠나?’ 하는 것입니다. 두 말할 것 없이 중심 관리와 얼굴 관리입니다. 삶의 중심이 확고하여 삶의 기초를 다지는 일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것이 안되면 하는 모든 일이 불안하고 위태합니다. 모래 위에 집짓기요, 밑빠진 독에 물붓기입니다. 참으로 교육의 우선 순위도 삶의 중심 관리에, 기초를 단단히 다지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또 하나 얼굴 관리입니다. 어떤 환경, 어떤 처지에서도 얼굴 관리가 우선입니다. 아무도 탓 할 수 있는 순전한 내 책임의 얼굴 관리입니다.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라 합니다. 성형이나 화장에 의한 외적 관리가 아닌 내면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그대로 드러내는 각자 고유의 얼굴을 뜻합니다. 하여 제가 선호하는 바, 고백성사 보속으로 써드리는 ‘말씀 처방전’과 더불어 찍어 드리는 ‘웃어요’ 라는 스탬프입니다. 말씀의 효능이 중심 관리와 얼굴 관리에는 제일이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면담 성사차 찾았던 어느 신심깊고 지혜로운 자매를 꼭 소개 드리고 싶습니다. 아마 수도원을 찾기 20년은 됐을 것입니다. 늘 어려운 삶 중에도 하느님 중심의 믿음으로 하느님과 아들 하나에 희망을 두고 기쁘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실히 살아가는 자매입니다. 바로 그 아들이 마침내 산전수전 고생 끝에 제주도에서 자리잡아 좋은 여자도 만나 결혼하여 며느리에 손주도 하나 두었고 또 손주 하나를 임신중이라 합니다.
아들은 식당일을 하며 제주도 관광 가이드 시험에 합격하여 열심히 일하며 얼굴이 까맣게 탈 정도로 온 힘을 다해 가정을 돌본다 합니다. 이제 곧 손자가 둘일 텐데 다음 며느리의 말이 참 신통하다 했습니다.
“어머니, 막동이로 딸을 하나 더 두려합니다. 아들만 둘 있는 것보다는 막동이로 딸을 하나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사는 것이 힘들어 하나도 두려하지 않는 데, 무려 셋까지 생각하는 며느리가 참 기특하다 했습니다. 그 자매의 아들에 대한 다음 말도 잊지 못합니다.
“탈선의 유혹이 들어, 막 살려는 생각이 들 때 마다 저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눈물겨운 어머니 모습을 생각하며 마음을 잡았습니다.”
참으로 자매의 하느님 중심의 기도와 믿음의 열매임을 깨닫습니다. 자매의 하느님 중심의 삶이 그대로 아들-며느리의 삶으로 전달된 것입니다. 보여준 사진이 너무 아름답고 감동적이고 따뜻하고 재미있어 카톡으로 전송해 받았습니다. 산책중 뒷짐 진 아들을 따르는 세 살 짜리 뒷짐 진 손자의 부자父子 사진입니다.
아, 이 모두가 하느님 중심의 확고한 삶에 기초를 단단히 다진 결과입니다. 이래야 모래위에 집짓기 인생이, 밑빠진 독에 물붓기 인생이 되지 않습니다. 절로 얼굴도 성실한 삶으로 주님을 닮은 고유의 아름다운 얼굴로 형성됩니다. 주님 앞에 갔을 때 주님이 무엇을 검사하는 지 아십니까?
얼굴입니다. 주님을 닮았나 안 닮았나 얼굴을 봅니다. 사랑하면 닮습니다. 정말 주님을 한결같이 사랑하여 성실히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갈 때 저절로 주님을 닮아가는 얼굴입니다. 하루이틀이 아닌 평생 꼴잡아 가는 얼굴, 바로 천국입장 때 주님께서 확인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복음의 세리 마태오를 부르시는 주님의 은총이 인상적입니다. 세관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마태오의 내적갈망을 한 눈에 알아채신 주님이심이 분명합니다.
“나를 따라라!”
얼마나 감동적인 부르심인지요.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마침내 마태오는 ‘삶의 중심’을 찾았고 ‘삶의 기초’ 다지기가 시작됐음을 뜻합니다. 주님을 충실히 항구히 사랑하고 따르면서 주님을 닮아가는 얼굴입니다.
마태오가 주님을 만났듯이 제1독서의 아모스 예언자 역시 주님을 만나 완전히 주님을 닮은 모습입니다. 몸의 아픈 곳이 중심이 되듯, 세상 아픈 곳이 하느님께는 중심이 됩니다. 하느님이 아파하시는 곳에 바로 아모스의 마음도 있습니다. 세관에 앉아 소외된 아파하는 마태오를 부르신 주님이십니다.
제1독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빈곤한 이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착취에 열화같이 분노하시는 아모스 예언자의 마음은 그대로 하느님 마음을 반영합니다.
“너희의 축제를 슬픔으로, 너희의 모든 노래를 애가로 바꾸리라.”
아파하는 하느님 자비에 동참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심판의 선고이자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아모스 예언자의 말씀도 충격적이나 좋은 깨달음을 줍니다.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땅에 굶주림을 보내리라.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
참으로 오늘날 하느님을 잊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영적 굶주림과 목마름에 대한 근원적 해결은 주님 말씀 뿐임을 깨닫습니다. 끊임없는 말씀 섭취와 기도를 통한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 매일미사은총이 얼마나 귀한지 깨닫습니다. 화답송 후렴도 이와 일치합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육신의 영양실조보다 더 시급한 것이 영혼의 영양실조입니다. 하여 우리 모두 병자들이요 죄인들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우리를 부르시어 당신을 닮게 하십니다. 다음 예수 성심의 사랑은 그대로 하느님 사랑을 반영합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주님의 자비를 배우는 시간이자, 주님의 은총으로 병은 치유받고 죄는 용서받는 복된 시간입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심으로 주님과 사랑의 일치로 날로 주님 얼굴을 닮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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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 품 안에 모두가 잘난 사람>
우리는 기왕이면 깔끔하고 멋있어 보이는 사람과 만나고 싶어합니다. 얼굴도 잘 생기고 돈도 있어 보이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입니다. 호감이 가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은총이요 복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매력이 흘러넘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갈수록 밥맛인 사람도 있습니다. 겉보기와는 너무도 달라서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보지 않으려 해도 자꾸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힘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도 참 소중한 사람인데 담을 쌓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다가 세금 징수원으로 천대를 받는 사회계급에 속해 있는 마태오라는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길을 가시다가 부르셨다는 것은 하루하루 삶이 펼쳐지는 현장에서 부르셨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삶의 현장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길이란 목적지가 아니라 목적지에 이르는 통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현장인 이세상은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니라 지나가는 곳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 세상은 간이역입니다. 종착역은 하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필이면 악명 높은 사기꾼이나 탐욕이 가득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공개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던 세리 마태오를 부르시고 그 집의 식탁에 앉아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자리를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식탁에는 죄인과 의인의 구별이 없습니다.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세리는 부정한 수단과 방법으로 돈을 버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주위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혐오의 대상이 되었으며 자기가 번 돈을 가치 있게 쓸 줄을 몰랐던 인색한 사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당시 사회에서 가장 천대 받고 따돌림 당하던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과 자리를 함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렇게도 안목이 없었다는 말씀입니까?
그 반대입니다. 우리가 안목이 없다고 생각하는 만큼 예수님의 품이 넓다는 것입니다. 그 품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거부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리 문을 크게 열어도 스스로 들어가지 않는 자는 받아들일 수 없는 법입니다. 바리사이들이 꼭 그러했습니다. 마태오가 세관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바로 영적성장이 멈춘 상태를 말하기도 합니다. 세상에 안주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따돌림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것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고 그곳을 떠나는 것이 두려웠고, 그곳을 떠나면 죽는 줄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돈을 생각하면 떠날 수 없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은총의 날, 진정한 행복의 날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여전히 옛 생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우리는 안주를 탈피하여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에 안주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큰 품을 우리의 마음으로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내가 원하는 것은 자비이지 희생제사가 아니다”고 하셨습니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할 때,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게 될 때 거기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자비로운 사람, 연민을 지닌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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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파주분원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대체 우리의 어떤 모습을 보고 부르셨을까? 우리의 잘난 모습, 우리의 능력, 혹은 우리의 선함, 봉사정신, 아니면 당신께 대한 충성이나 믿음을 보고 부르셨을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 13)
이는 우리가 죄인인 까닭에 부르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짓지 않은 이들인 것이 아니라,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그냥 죄인인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용서해야 하는 일을 해야 하는 이들입니다.
<신명기> 저자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너희에게 마음을 주시고 너희를 선택하신 것은, 너희가 어느 민족보다 수가 많아서가 아니라, 너희를 사랑하시어 구해내셨다”(신명 7, 7-8)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자애와 호의를 입어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토록 사랑과 호의를 입은 이들이기에, 그렇게 사랑과 호의를 베푸는 일을 소명으로 받은 이들입니다. 그토록 자비와 용서를 입었기에, 그렇게 자비와 용서하는 일을 소명으로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 하심은 우리도 죄인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께 받은 그 용서와 사랑, 그 자애와 호의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9, 13)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 실행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나약하고 부족함이 많은 죄인들인 내 형제들을 단죄하기보다 하느님의 자비의 마음, 호의의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다른 곳에서 말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았더라면, 무죄한 사람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 12, 7)
<팡세>를 쓴 파스칼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며, 하나는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죄인이다.”
오늘, 나는 죄인인가? 의인인가? 만약 죄인이라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들의 친구인 그분을 친구로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당신은 죄인인 까닭에 저를 부르셨습니다.
찾기도 전에 먼저 부르시고,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용서받았으니 용서하게 하소서.
먼저 찾아가고 먼저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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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예수님께서 죄인 취급을 받고 있었던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십니다. 이에 바리사이들이 불만을 드러내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2-13)
우리가 믿고 하느님의 모습이고, 이것이 우리의 큰 복이고, 기쁨입니다.
유대교나 이슬람교는 구약에 머물러 있는 종교입니다. 그들은 율법과 코란이라는 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심판하고 단죄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선인과 악인으로 갈라놓습니다.
그러나 가톨릭은 구약과 신약에 함께 머물러 있는 종교입니다.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을 믿습니다. 신약은 구약의 완성입니다. 구약의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를 통해서 완성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이 하느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부르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그리고 이 사랑과 자비에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우리는 죄인입니다. '보다 더'를 하지 못한 죄인입니다. 보다 더 믿지 못하고, 보다 더 희망하지 못하고, 보다 더 사랑하지 못한 죄인입니다. 이것에 대한 인정이 구원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입니다.
오늘도 죄인인 나를 부르러 오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나도 너에게 사랑과 자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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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
오늘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함께 머물며 음식을 드시는데, 바리새이들 눈에 못마땅하죠.
어떻게든 트집을 잡으려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자비의 마음'을 지니라고 쏘십니다.
우는 아기에게 젖을 주고, 아픈이에게 의사가 필요하듯 처지에 맞게 눈높이를 맞추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 사람의 상황, 그 심정이 되어 줄때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첫 단추가 채워집니다.
그 다음은 신뢰 가운데 진정한 동반자가 되어 속대화가 가능해지고 참 친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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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 13)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아끼십니다.
죄인에게도
문을 열어주시는
특별한 사랑입니다.
죄인이기에
엉엉 울며 애절히
통곡하게 됩니다.
우리모두는
회개할 자격이
있는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들이기에
손가락질이 아니라
오히려 용서와 기도가
필요한 우리들 삶입니다.
의인도 죄인도
함께 가야할
사람들이며
함께 살아야 할
우리의 모습입니다.
심판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사랑의 치유입니다.
다시금
살아간다는 것이
무언지를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에게서
희망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시간은 의인이라
자만하는 착각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에
감사하는 회개입니다.
죄인의 슬픔이 아니라
죄인의 기쁨을 다시
우리에게 안겨주십니다.
딱 잘라 단정짓는
판단에서 벗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죄인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진실한
사랑 앞에서 처음으로
우리 자신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다시
아름다운 사람이
됩니다.
회개할 아름다운
권리를 다시
되찾게 됩니다.
축하드립니다.
예수님의 아름다운
회개의 주인공이
되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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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정리/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눠드립니다■
[이름, 본명, 지역(본당), 축일, 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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