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 진시황제와 만리장성 압정수단이 되고 만 만리장성 축성(BC 214년)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2. 14. 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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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진시황제와 만리장성
압정수단이 되고 만 만리장성 축성(BC 214년)
요약 진시황제는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장군 몽염에게 장성을 쌓게 해 10년이 넘는 기간을 들여 만리장성을 쌓았다. 만리장성은 군사적 가치보다 백성들이 국경 밖으로 탈출하는 것을 막고 그들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만리장성, 세계인의 호기심을 자아내다
만리장성
중국본토와 몽골과의 사이에 축조된 방어용 성벽으로, 길이는 약 5,000㎞에 이른다.
중국을 방문하는 외국인이 가장 먼저 보고 싶어하는 것은 만리장성이라고 한다. 1972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북경방문을 준비할 때 모택동에게 '아폴로 우주비행사들이 달에서부터 식별할 수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조형물은 만리장성이라고 하더라'는 말을 할까 고려했었다고 한다. 물론 그 말은 사실이 아니어서 그만두었으나 닉슨은 역사 깊은 유적지 만리장성에 대하여 대단한 호기심을 가졌음에 틀림없었다.
현재의 만리장성, 시황제가 아닌 명나라의 유산
그런데 현재의 만리장성은 17세기 초 명나라 때에 쌓은 성이며, 이는 기원전 3세기에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쌓은 만리장성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축성을 하는 데 100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는 진시황제 때의 만리장성은 이미 매몰된 지 오래되었으며, 그 위치도 지금의 만리장성과는 다르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의 만리장성을 진나라 시대의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만리장성 하면 그들 머릿속에 먼저 진시황제가 떠오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만리장성
진시황제 때 유목 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든 거대한 성곽.
중국의 국가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장성을 쌓다
중국에서는 자국의 영토를 지키고 적국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국경을 따라 성벽을 쌓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전국시대 연(燕) · 제(齊) · 조(趙) 나라 등은 장성(長城)을 쌓았다. 기원전 221년 천하를 통일하고 최초의 황제가 된 진시황제는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옛 장성을 보수 · 연결시키고 새 장성을 쌓아서 대장성을 만들었는데, 그 장대함으로 '만리장성'이라 불렀다. 이 성의 실제 길이는 서쪽 감숙지방으로부터 동쪽 요동지방까지 2,400km에 달했다. 이보다 남쪽에 위치한 현재의 만리장성의 총 길이는 5,000km다. 이 장성이 현재의 규모로 된 것은 명나라 때로서,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만리장성 축조도
중국이 주장하는 만리장성 축조도. 그러나 한국과는 입장이 다르다.
진시황제의 장성 축성, 압정의 수단이 되다
진시황제는 장군 몽염에게 북방의 흉노를 내몰고 장성을 쌓게 했는데, 완성될 때까지 10년이 넘는 공사를 벌였다. 만리장성은 그 군사적 가치보다는 오히려 축성하면서 진시황제가 보인 압정으로 더 유명해졌다.
본래 축성작업은 처음에는 흉노 침입을 막는 변방 수비병들이 맡았다. 그러나 진시황제는 죄수들을 보내서 공사에 투입하고 드디어는 정부에 불만을 품은 자까지 모두 공사장에 몰아넣었다.
지독한 독재와 폭정으로 백성을 탄압하다
진시황제는 지독한 독재자로 백성들을 탄압했다. 그는 언론을 통제하고, 승상 이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제자백가의 책들을 모두 불태우게 하고 유생들을 생매장하는 이른바 분서갱유를 저질렀다. 분서령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만리장성을 축조하는 공사장으로 유형을 보냈다. 통상 이들은 형기가 4년인데, 살아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 자가 드물고 대개는 공사장에서 죽어 이른바 장성 귀신이 되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범죄자, 불평불만자뿐만 아니라 소상인과 일반시민 등 무고한 백성까지 적당한 죄명을 씌워 장성을 쌓게 했다.
산동여도
대명여지도에 그려진 명장성.
외적을 막기 위한 만리장성이 백성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쓰이다
당시 민요 가운데 '장성가'라는 것이 전해지고 있는데, 만리장성의 한을 표현하는 대표적 타령이다.
"사내아이라면 낳지를 마라. 계집아이라면 소중히 길러라. 보지 않았는가, 장성 아래 징용되어 죽은 남자들의 해골이 겹겹이 서로 의지하고 있음을."
외적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기 시작한 만리장성은 오히려 백성들이 국경 밖으로 탈출하는 것을 막고 그들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진시황제가 죽은 다음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기원전 206년 진나라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만리장성,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의 치열한 각축을 상징하다
세계의 역사는 남쪽의 농경민족에 대한 북쪽 유목민족들의 끊임없는 침공과 방어의 전쟁으로 점철되었고, 이 양대 세력의 순차적인 흥망과 성쇠에 따라 대륙의 판도와 왕권의 교체가 이루어져왔다. 이렇게 볼 때 만리장성이야말로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의 양대 세력이 맞부딪치며 치열한 각축전을 벌여온 것에 대한 최대의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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