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학림다방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19, 명륜4가 94-2)
1956년에 개업하였으며 2022년 기준으로 66년을 이어오고 있는 가게로 개업 당시에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건너편에 있었다
(문리대의 옛 축제명 ‘학림제(學林祭)’가 ‘학림다방’ 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대학로에서 가장 오래된 가게로 알려졌으며 1956년 개업 이후 66년 동안 대학로를 지켜왔던 곳으로 서울대학교가 관악산 캠퍼스로 이전하기 전까지는 당시 서울대생들의 휴식처이자 아지트이기도 하였다
별칭이 '서울대학교 문리대 제25강의실'일 정도였다
서울대학교가 관악산으로 이전하게 된 이후에도 대학로에 그대로 남아있으며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가게 분위기는 1960년대풍의 오래되고 빈티지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으며 요즘의 카페들과는 다르게 고풍적이고 오래된 분위기라 엣 추억을 느끼려는 중노년층과 옛날 분위기에 관심이 있는 젊은층들이 들리기도 하였다
(최근 들어서는 줄서서 기다리기도 할 정도로 상당히 유명해진 상태이다 - 우리도 이날 탐방 끝나고 차 한잔 하려 했으나 대기 줄이 길어 포기했다는거 ....)
내부가 1.5층 형태로 되어 있어서, 한창 흡연구역 분리가 시작되던 시기에는 윗층만 흡연구역으로 남겨 두다가, 결국 다른 모든 가게들처럼 실내 전체 금연이 되었다
건물은 1983년에 신축한 건물로 원래 건물은 노후화 문제 등으로 철거된 것으로 알려져있으나 건립시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1980년대 초반 지하철 4호선 공사 당시 개착식 공사와 더불어 왕복 4차로였던 대학로를 인접한 대학천(하천)을 복개하여 왕복 7차로로 확장하는데 이 과정에서 도로확장으로 인한 필연적인 철거가 있었고, 철거를 안해도 되는 구역도 인접한 곳 새 건물 분위기에 맞추던가, 아니면 지하철 공사의 진동으로 인한 균열 때문으로 철거 후 재건축을 하는 사례가 많았다
학림다방이 위치한 곳은 철거를 안해도 되는 곳이지만 분위기에 맞춘 것으로 추정한다
2014년 서울시특별시로부터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되어 건물 전체가 영구 보존구역으로 지정되었 다
1981년에 일어났던 '학림사건'이 바로 이 다방과 관련된 사건이다
♤ 학림사건
1981년 군사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이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학생운동조직 등을 반국가단체로 몰아 처벌한 사건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측 명칭은 '전국민주학생 연맹·전국민주노동자연맹 사건')
당시 전민학련이라는 대학생 단체가 첫 모임을 가진 대학로의 '학림다방'에서 유래한 말로 경찰이 숲처럼 무성한 학생운동 조직을 일망타진했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이태복 등 24명이 전국민주학생연맹과 전국민주 노동자연맹을 결성한 혐의로 1981년 6월부터 남영동 대공분실로 강제 연행되어 19일에서 길게는 78일동안 불법 구금, 변호사 및 가족의 접견이 차단된 채 '고문 기술자'로 악명 높았던 이근안 경감을 비롯한 수사진으로부터 물고문과 전기 고문, 여성 피의자에 대한 강간 위협 등의 가혹행위로 자백을 받아내는 등의 불법행위가 자행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법정에서 폭로되었으나, 재판부는 이를 배척, 유죄를 인정하고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이태복에게 무기징역, 이선근에게 7년, 박문식에게 5년 등을 무더기로 선고를 내렸고, 1982년 판결이 최종 확정되었다
이들 중 이태복은 1986년 국제앰네스티에 의해 '한국의 양심수'로 인정받았고, 김수환 추기경 등의 탄원으로 1988년 개천절 특사에 따라 가석방되었다
(인민혁명당 사건이 박정희 유신 통치기간중의 대표적인 사법살인이었다면, 이 사건은 신군부 세력의 정권 안정을 위해 날조된 대표적인 공안사건 으로 비교된다
이때 2심 재판에 배석판사가 박근혜 정부의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다)
2000년 국무총리 직속기구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위위원회'는 이 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했고, 2009년 '진실과화해를 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 사건을 '공안조작 사건'으로 규정하고 '장기간의 불법 구금과 고문을 통해 사건이 조작됐다'며 국가로 하여금 피해자 및 가족에 대한 사과와 재심 등의 조치를 취하도록 권고했다
이에 따라 이태복 등 피해자 24명이 서울고법에 재심을 청구하여 2010년 12월 서울고법 형사 5부는 무죄 및 면소 판결을 내리고(2009재노81 및 2010재노21) 사법부의 과오에 대해 사과했다
재심판결은 2012년 6월 대법원에서 확정(2011도 730)됐다
학림다방이 특별한 이유는 그저 오래된 다방이기 때문이 아니라 지성주의 대학문화가 1980년대 민주화 시기와 저항문화운동을 거쳐 대중문화로 확산된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문화사가 진하게 응축된 곳이며, 단절되어 박제가 된 역사가 아니고 지금도 여전히 살아 숨쉬며 진행되고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통일문제연구소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9길 27, 명륜4가 133)
우리나의 민주화와 통일에 관련된 내용들을 연구하고 책을 발간하여, 많은 사람들이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던 곳으로 1984년 백기완이 설립하였다
이곳을 세운 백기완은 1932년 황해도에서 태어나 학업을 위해 아버지와 서울에 내려왔다가 분단으로 인해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게 되었고,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전쟁의 고초를 겪었다
이후, 1974년 장준하와 함께 유신헌법 개헌청원을 주장하다가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징역 12년, 자격정지 12년 형을 받고 복역 중 1975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장준하는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형을 받고 복역 중 1974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하였으나, 1975년 7월 17일 포천시 이동면 소재 약사봉에서 추락사신으로 발견되었다)
장준하가 사망(1975년 8월 17일)한 이후에도 수 많은 민주항쟁과 촛불시위 등 민주화, 통일, 노동운동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앞장서서 나섰다
폐질환 투병 도중 2021년 2월 15일 새벽 4시 향년 88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랫말은 백기완의 미발표 장시「묏비나리」(1980)의 한 부분을 차용하여 소설가 황석영이 가사를 짓고, 전남대 출신으로 대학가요제에서 수상한 바 있는 김종률이 곡을 지었다
진아춘 (서울 종로구 대명1길 18, 명륜4가 66-2)
1925년 학림다방 옆 2층 건물에 처음 자리를 잡았다
곧 백년가게가 되는 이 중국요리집은 서울미래유산 으로 지정된 오래된 가게이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집은 1948년에 창업한 을지로 '안동장'이라는 것이 정설인데, 진아춘은 안동장보다 오래된 1925년을 주장하고 있다
자신들이 만든 휴지에는 창업년도를 1925년을 인쇄해서 영업하지만, 한때 1933년으로 적어 영업하던 때도 있었으니, 창업연도 주장에 이미 신뢰성이 떨어진다
또한 진아춘의 역사는 길지만 없어졌다가 다시 생기고 자리도 여기저기로 옮겨다녔다
1970년 창업주(중국인 이진산)가 타계한 뒤 창업주의 양자인 2대 운영주 송혁국이 대를 이어 가게를 운영하다 미국으로 이주하고, 1983년 2대 운영주 송혁국의 부인과 의남매 사이였던 현 대표의 아버지 형덕의가 가게 운영을 이어갔다
1984년 형덕의의 아들 형원호가 실질적인 운영을 이어가다가 1993년 2대 대표 송혁국의 아들이 <진아춘>을 인수하여 1995년 <진아춘>을 함흥 냉면집으로 바꾸면서 일시적으로 맥이 끊어졌다
2000년 형원호가 귀국하여 광화문에서 <중화(구 진아춘)>라는 이름으로 재운영하다가 2001년 명륜동2가 26번지에 <진아춘>을 다시 열었고 2010년 현 위치로 이전하여 현재까지 운영해오고 있다
1950년대부터 70년대 서울대 문리대와 의대생들이 시계, 학생증을 맡기고 외상으로 짜장면을 먹던 추억의 장소인 진아춘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 시절 향수를 가지고 방문한다
진아춘의 원래 주인은 이민가기 직전, 1950~ 70년대 당시 서울대생들이 외상을 하면서 맡겨놓은 손목시계들 중 찾아가지 않은 손목시계 100개를 서울대 박물관에 기증했다
(현재 이 시계들은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
다만 서울대학교 박물관은 인근의 연건캠퍼스가 아닌 관악캠퍼스에 있다)
현재 진아춘이 재개장한 장소는, 옛날에는 명륜동 대중목욕탕 이었었고, 나중에 여인숙이 되어 영업을 하던 장소다
김창숙 집터 (서울시 종로구 창경궁로27길 66-4, 명륜3가 87)
독립운동가이자 유학자인 심산(心山) 김창숙이 해방 후 살던 집터이다
♤ 김창숙
성균관대학교의 창립자이며 경상북도 성주(星州) 출신으로 본관은 의성(義城), 자(字)는 문좌(文佐) 이며 호(號)는 직강(直岡), 심산(心山), 벽옹(躄翁) 이다
일찍이 유학을 배워 조예가 깊었고, 1909년 성명 (星明)학교를 창립하였으나 '을사5원흉 매국성토 사건(乙巳五元凶賣國聲討事件)'으로 피체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유림 대표들이 서명한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진정서를 가지고 중국 장쑤 성의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우송한 후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1919년 광복운동모금중 체포되었다
그 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 임정의정원(臨政義政院) 등에 관계하다가 1927년 상하이 일본 영사관에 체포되어 만주국 펑톈성의 다롄(大連) 에서 복역중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곧 유도회를 조직하였고, 1946년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을 창립하여 초대학장으로 교육에 힘썼으나,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여 수난을 겪으면서 유도회의 분쟁에 말려들어 1955년 재단분규로 사임한 뒤 궁핍하게 살다가 1962년 5월 10일 82세로 병사하였다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사경을 헤매는 독립투사 심산 김창숙을 병문안했다
아래 사진을 가리켜 김창숙이 박정희를 외면한 모습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김창숙 관련 추모 단체에서도 대체로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이는 편이다
반면, 당시 김창숙은 인사불성 상태로 병문안으로 찾아온 박정희를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김창숙은 해당 병문안 5일 뒤에 사망했다
김창숙이 타계하고 하루 뒤인 1962년 5월 11일, 박정희는 그의 빈소 또한 방문을 했다
성균관대학교 교정에 세워진 심산 김창숙의 상 (조각가 심정수 작품)
유학자인 심산 김창숙의 정적인 이미지와 달리 춤을 추는듯한 역동적인 모습이다
1962년 3.1절에 군사정권은 심산에게 건국공로훈 장 중장을 수여했다
해방 후 생존한 독립운동가가 받은 유일한 건국훈장 이다
온통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으로 구성된 쿠데타 세력 이 평생을 항일투쟁으로 일관한 김창숙에게 건국 훈장을 준 것은 한 편의 희극인가???
이가원 가옥 (서울시 종로구 성균관로5길 83, 명륜 3가 59-1)
입구에 커다란 돌에 한자가 새겨져 있고,
옆에는 비문이 서있고,
하얀 옥빛 문패에 이가원이라 적혀 있으며,
집에는 여러 가지 문구가 한자로 적혔 있다
2000년 사망 후 가옥은 단국대학교에 기증하였는 데 관리가 되지 않아 흉가처럼 되었다
(동네 주민들의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한다)
♤ 이가원
본관은 진보이고 본명은 이참연(李慙淵)이며, 호는 가원(家源)· 연민(淵民)· 설관(雪館)으로 사용하였 다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어려서부터 내려오는 가학 으로 한학을 공부하였다
명륜동 빨래터 (서울시 종로구 성균관로5길 83-10, 명륜3가 57-8)
창덕궁 후원의 옥류천에서 흘러나온 물줄기와 만나서 창경궁 집춘문 아래로 흐르는 물길이 빨래터이다
원서동의 경우 제법 정비도 잘 되어 있고, 안내판도 설치 되어 있어 답사자들도 꽤 있는 반면,
명륜동의 것은 그냥 방치 되어 있다
궁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것이야 와보면 물이 흐르는 것이 보이니 알 수 있지만, 이 곳이 빨래터였다는 사실은 제대로 알려주고 있지 않다
♤ 궁궐에서 궁궐밖으로 흐르는 물길에는 궁궐에서 쌀 씻고 버린 물이 흘러나온다
지금과 같은 성능 좋은 세제가 없던 때이니 그 쌀뜨물이 섞인 물이 빨래에 아주 요긴했다
그래서 궁궐에서 흘러나오는 물길이 있는 그 궁궐 담벼락 밖에는 예외 없이 빨래터가 있었다
그러나 몇십 년 동안의 도시 개발로 인해 많은 물길들이 사라졌고, 지금은 몇개의 빨래터만 남아 있다
성균관 우물터 (서울시 종로구 성균관로5길 101, 명륜3가 55-5)
성균관 우물은 마을의 식수 공급원으로 사랑받았다 는데 수도가 들어오면서 우물터만 남았다
높은 옹벽 사이에 위치하여 오랜시간 유휴공간으로 방치되어 있다가 명륜동 안심마을 조성 사업을 통하여 주민들이 쉬어 갈 수 있는 공간(명륜동 커뮤니티쉼터)으로 모습을 갖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