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원(李大源, 1921∼2005), '농원', 캔버스에 유채, 30×32.3cm, 1980', 케이옥션
어느 ‘82년 개띠’의 일하는 스타일
요즘 창업하는 벤처회사 중에는 마구 튀는 이름을 가진 곳이 적잖습니다. 디지털기술과 세계화에 푹 빠진 밀레니엄 세대(millennial generation:1981~1999년생)가 이제 20대와 30대를 차지하면서 전혀 다른 직장 문화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아는 젊은 벤처 창업자는 회사 이름을 ‘하우스 오브 레인메이커스’(House Of Rainmakers)라고 작명했습니다. 레인메이커의 어원은 말 그대로 비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옛날 미국 남서부 사막 지역의 호피 인디언들은 가뭄이 심할 때 주술사(呪術師)를 불러 춤을 추며 기우제를 올렸는데, 그 주술사가 바로 레인메이커였습니다.
레인메이커는 현대 사회에서 그 뜻이 변해서, 회사에서 돈벌이 잘 되는 사업을 개발하거나, 변호사 회사에서 돈 되는 의뢰인을 끌어오는 사람을 일컫는다고 합니다. 하여간 조직에서 대박을 터뜨리는 사람이 레인메이커인 셈입니다.
2년 전 ‘하우스 오브 레인메이커스’를 창업한 김성균 씨는 밀레니엄 세대의 거의 꼭대기에 해당하는 ‘82년 개띠’입니다. 그는 회사 사업을 소개하며 “스마트시티 컨설팅인데 앞으로 ‘플라잉 택시’(Flying Taxi) 사업도 한국에 펼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20세기 사고방식에 머물고 있는 나에겐 그의 설명을 듣는게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입니다.
그를 알게 된 것은 6년 전쯤 제주도에서 열린 국제전기자동차엑스포(IEVE)에서였습니다. 나는 엑스포의 조직위원의 한 사람이었고, 김 씨는 주한 덴마크 대사관 상무관으로 참가했습니다. 그는 엑스포에서 덴마크 대사관이 주관한 행사를 챙기고 대사를 보좌하는 데 기민성과 소통 능력이 돋보였습니다. 자기 할 일에 선을 긋는 게 아니라 여기저기 일을 챙겨주는 부지런 떠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이젠 덴마크 대사관 일에서 손을 떼고 회사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일주일 전쯤 IEVE 일로 강남의 한 카페에서 그와 커피 타임을 가졌습니다. 얘기를 나누던 중 그가 급히 전화를 받더니 갑자기 “캬~” 하고 소리를 지르며 환호작약했습니다. 그의 설명인즉 ‘세종스마트시티 국가사업’ 입찰에서 그가 컨설팅하는 컨소시엄이 우선협상자로 선정됐다고 흥분했습니다. 그의 회사가 스마트시티 건설과 관련해서 컨설팅 수익을 얻을 기회가 왔다는 겁니다. 내가 “레인메이커가 됐네요?”라고 했더니 그는 엄지손가락을 세웠습니다. 자율주행차가 돌아다니고 병원이 원격 치료를 하고 사물인터넷(IOT)기반에서 도시가 움직이는 게 스마트시티의 골격이라니 그가 언급한 날아다니는 비행 택시 사업도 언젠가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우스 오브 레인메커스는 종업원이 10명이라고 합니다. 프로젝트 단위로 일을 하며 출퇴근도 마음대로라고 합니다. 프로젝트 단위 일은 맡은 업무와 타임테이블이 정해져 있어 스스로 일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출결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답니다. 회사는 10명을 넘기면 비효율적이라는 게 그의 생각입니다. 일이 커지면 분사해서 일을 쪼개서 하는 게 창의적이고 효율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창업할 때 가졌던 대표 자리도 다른 이사에게 넘겼습니다. 스마트시티 컨설팅에서 중요한 것이 외국의 전문가들을 국내 기업이나 도시에 연결시켜주는 것이어서 그런 일에 전념하겠다는 겁니다.
그는 유학파입니다. 중학교 때 대학교수인 아버지가 교환교수로 영국에 갔을 때 한 달 동안 유럽 여행을 했던 게 자극이 되어 영국 대학에 유학했습니다. 대학 다닐 때부터 외국 친구들과 사업하는 얘기를 많이 했다고 합니다.
졸업 후 사업을 찾아 방황하다가 주한 덴마크 대사관에 취직했고 그곳에서 자신의 사업과 관련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사업은 자기가 실력이 있다고 혼자 독점적으로 하면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입니다. 여럿이 저마다의 장점을 갖고 협업하면서 이익을 공유하는 것이 그의 사업관입니다. 미국 사람들과 달리 유럽 사람들은 동업을 잘 하며 그게 지혜인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특히 덴마크는 주요 국가 대사관에 이노베이터(innovator)를 채용하는데, 김 씨도 대사관에서 그 일을 맡아서 기업 간 교류의 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회사든 기업이든 다른 사회 조직이든 일을 혁신하는 이노베이터와 일이 되게 하는 촉진자(facilitator)가 필요하다며 자신은 어디서든 그 역할을 하고 싶다고 합니다.
김 씨에 의하면 미국 유학파가 엄청 쏟아져 들어오지만 유럽 유학파도 만만치 않게 많아지고 있답니다. 밀레니엄 세대의 해외 유학파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직장 문화에 영향을 준다고 말합니다. 그는 밀레니엄 세대는 그들의 부모인 베이비붐 세대가 보기에는 아주 다른 인생관, 직업관, 소비 성향을 보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즘 밀레니엄 세대 청년들은 평생직장은 없으며 100세까지 긴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철밥통인 공무원과 공기업 시험에 매달리는 청년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일자리를 무한정 만들 수가 없잖아요. 비정규직 일자리와 100세 인생이 그들 앞에 놓인 환경이라는 걸 느끼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소비 패턴도 바뀌고 여가 활용 패턴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베이비붐 세대처럼 저축하려 하지 않고 좋다 싶으면 씁니다. 요즘 비행기가 착륙지를 정하지 않고 특정 지역 상공을 한 바퀴 돌고 되돌아오는 여행 상품이 잘 팔린다지 않습니까? 베이비붐 세대는 이해할 수 없지만 밀레니엄 세대는 그런 대안을 흥미 있게 받아들입니다.”
그가 말하는 밀레니엄 세대의 삶의 방식에서 사회의 변화를 실감합니다. 농업과 제조업에 몸을 담그고 살았던 베이비붐 세대의 사회가 이미 아득히 떠났음을 느낍니다.
[옮겨온 글] / 출처: 2020년 10월 16일 (금)에 받은 자유칼럼그룹의 e메일 / 필자소개; 김수종(‘뉴스1’고문과 ‘내일신문’ 칼럼니스트로 기고하고 있다. 한국일보에서 32년간 기자생활을 했으며 주필을 역임했다. ‘0.6도’ 등 4권의 책을 썼다)
피동형의 심리
[정희모의 창의적 글쓰기]
주어가 동작의 주체가 아닌 동작의 대상이 될 때 피동형이라고 부른다. 영어에서는 수동형이라고 하고 한국어에서는 피동형이라고 부르고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이 둘을 같은 용어라고 규정하고 있다. 글을 쓰다 보면 불가피하게 피동형을 써야 할 때가 있다. “날씨가 풀렸다”는 피동형밖에 쓸 수가 없다. “오빠가 난처한 입장에 놓였다”도 피동형인데 능동형으로 쓰기는 어렵다. “누군가 오빠를 난처한 입장에 놓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양이든 동양이든 피동형에 대해서는 그렇게 호의적이지가 않다. 피동형에 대해 필자의 심리적 상황을 빗대어 비판하는 것이 그런 경우이다.
유명한 추리작가 스티븐 킹은 필자가 피동형을 좋아하는 이유는 소심한 사람들이 피동적인 애인을 좋아하는 이유와 같다고 주장한다. 필자가 상대방에게 맡기면 되지 스스로 나서서 골치 아픈 행동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필자들은 확신이 들지 않거나 뭔가 불안할 때 피동형을 사용한다. 필자의 입장에서 피동형은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고 안전하다.
‘언어와 권력’을 쓴 언어학자 페어클러프도 파동형이 주체의 행위자를 감춤으로써 행동의 책임 유무를 회피하고자 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고 말을 한다. 예를 들어 ‘흑인 마을이 남아프리카 경찰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는 문장은 피동형을 사용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사건에 책임 질 행위 주체를 숨기고 사건의 초점을 흐린다. 어떤 언어를 사용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권력을 가진 자의 특권으로 흔히 피동형이 이들을 위해 사용된다.
다행스럽게도 한국어는 피동형과 능동형의 구분이 영어만큼 뚜렷하지가 않다. “우리에게 어떻게 이해될 수 있단 말인가?”란 표현은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와 같은 의미이다. 한국어는 사람을 주어로 사용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에 사물이나 대상을 억지로 주어로 내세워 피동형을 만드는 것이 어색하게 여겨질 때가 많다. 영어에서는 자연스럽게 수동 구문으로 표현되는 것도 한국어로 바꾸면 이상한 표현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영어의 수동 구문 약 60%는 한국어로 번역될 때 능동형으로 바뀐다. 불가피한 일이 아니라면 한국어는 능동 구문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옮겨온 글] / 출처: 세계일보 / 정희모(연세대 교수・국문학) / 2020-10-15 23:33:14
숨어 있는 안전의 파수꾼 조속기
[기계 탐구생활]
엘리베이터의 케이블이 끊어지면 어떻게 될까? 영화에서 보면 사람이 타는 카(car)는 밑으로 떨어지고 승객들은 패닉에 빠진다. 다행히도 실제로 그럴 염려는 없다. 조속기, 즉 거버너(governor)가 엘리베이터의 속도를 감지하여 과속하게 되면 멈춰주기 때문이다.
이제는 생필품이 돼버린 엘리베이터가 안전하지 않다면 일상생활이 불안해진다. 그러나 조속기 덕분에 아무도 엘리베이터가 추락할 것을 염려하지 않는다.
한때는 일본식 발음을 따라 가바나라고 부르던 조속기, 즉 속도조절기의 원리는 아주 간단하다. 엘리베이터의 케이블 하나는 원형 바퀴에 매달려 있어 엘리베이터가 오르내리면 바퀴도 같이 회전한다. 바퀴의 안쪽에는 쇠로 된 추가 있다. 사고로 엘리베이터가 과속으로 내려가면 추는 원심력에 의해 바깥으로 벌어지게 된다. 그 추가 걸쇠를 작동시키면 걸쇠가 덜컥하고 잠기고 그러는 동안 브레이크를 작동시켜 엘리베이터를 세운다.
조속기는 기관의 회전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해 주는 장치이다.
이런 메커니즘은 별도의 동력을 쓰지 않으며 쇠로 된 추의 원심력을 사용하기 때문에 매우 안정적이며 고장 날 위험이 거의 없다. 시스템이 고장 날 때 바로 그 고장 때문에 더 큰 위험을 방지하는 이런 장치를 페일 세이프(fail safe)라고 한다. 즉 고장을 막기 위해 별도의 장치를 해놓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의 특성상 고장 나면 저절로 서게 돼 있는 것이다.
안전에 관계된 장치 중에는 페일 세이프 시스템을 갖춘 것들이 많다. 거창한 것으로는 원자력발전소가 있는데 우라늄 제어봉이 전자석으로 매달려 있어, 전력이 모두 소실될 경우 전자석은 작동을 멈추고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제어봉이 노심으로 내려와 핵반응을 멈추게 한다. 조속기는 보이지 않는 여러 곳에서 우리 삶의 안전을 지켜주고 있다.
[옮겨온 글] / 출처: 경향신문 / 이영준(기계비평가) / 2020.10.14 03:01
龍頭蛇尾
[유광종의 차이나 別曲]
성어(成語) 중에는 알고 보면 제법 심각한 내용이 많다. 사느냐, 죽느냐를 다투는 전쟁터에서 길러진 말이기 때문이다. 글 쓰는 법을 익히는 이에게 선생 등이 자주 일깨우는 수미상응(首尾相應)이 우선 그렇다.
이 성어는 글을 쓸 때 앞부분[首]과 뒷부분[尾]이 서로 잘 호응해야[相應]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은 군대가 전투를 수행할 때 대열 전체를 유기적으로 잘 이끌어 싸워야 한다는 싸움터 경험에서 유래했다.
적과 싸워 이기려면 겉만 잘나서도 곤란하다. 말단의 세밀한 부분까지 잘 거둬야 한다. 앞만 번지르르하고 뒤는 흐지부지한 일은 그래서 경계 대상이다. 우리는 보통 이런 현상을 용두사미(龍頭蛇尾)라고 적는다.
그래서 일의 시작도 중요하지만, 끝맺음 또한 깔끔해야 한다는 충고(忠告)가 퍽 많다. 유시유종(有始有終)이 대표적이다. 머리를 드는 ‘기두(起頭)’와 함께 꼬리를 거두는 ‘수미(收尾)’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러지 못하면 시작은 있되 마감이 없는 유시무종(有始無終)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라는 철두철미(徹頭徹尾) 또한 같은 맥락이다. 시종여일(始終如一)이라는 성어도 그렇고, 마지막까지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라는 메시지의 철저(徹底)라는 단어도 그렇다.
현대 중국의 뉴스를 자주 장식하는 유행어 하나는 난미(爛尾)다. 꼬리 부분이 썩어 문드러진 상태를 일컫는 단어다. 가리키는 대상은 짓다가 만 아파트, 세우다가 멈춘 ‘귀신 도시(鬼城)’ 등이다. 상업적 투기(投機)와 개발 차익을 노린 지방 관료의 부패가 그 배경이라는 분석이다.
이 말은 또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는 문화적 현상 전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많은 충고가 쏟아졌음에도 ‘시작과 끝’의 유기적 호응이 아직도 잘 이뤄지지 않으니 이 또한 중국의 특별한 현상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옮겨온 글] / 출처: 조선일보 / 유광종(소장) / 2020.10.16 05:00
모듬전・모둠전 말고…
[양해원의 말글 탐험]
모듬전・모둠전 말고….
북녘 권력자가 눈물을 보였대서 그랬나. 자디잔 길거리 광고 문구가 눈길을 잡았다. ‘울면 안 됩니다.’ 뜬금없기는…. 이어지는 글귀에 아차 했다. ‘쫄면 안 됩니다. 냉모밀 됩니다.’ 성탄 축하 번안곡 슬쩍 끌어온 재치가 직업의식에 묻혔다. ‘메밀’이라 했다면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주셨으려나.
‘메밀꽃 필 무렵’(이효석)이 아무리 이름난 소설이기로, 비표준어 ‘모밀’을 어쩌진 못하나 보다. 돼지고기 튀김도 ‘돈가스’ 대신 ‘돈까스’라 늠름히 쓴 곳이 숱하다. 육개장은 어떤가. ‘개장’에 본래 주재료 개고기 대신 소고기를 넣어서 ‘육(肉)개장’인데, 더러 ‘육계장’으로 잘못 적는다.
이런 음식은 표준말이라도 있지. 산행 뒤 막걸리 한잔의 참된 벗은 ‘모듬전’일까 ‘모둠전’일까. ‘모듬’은 ‘모임’의 잘못이므로 제쳐놓자. ‘모둠’ 또한 ‘학생들을 작은 규모로 묶은 모임’이라니 무시할거나. 간단치가 않다. 한글학회 사전이 특별나게 ‘모두다’를 ‘모으다’로 풀이한다. 다른 사전에도 두루 올라있는 ‘모두뜀’(두 발을 한데 모아 뛰는 뜀) ‘모둠발’(가지런히 모아 붙인 두 발)이 그 흔적이다.
그럼 모둠전 해도 될까? 이 말은 ‘볶음밥’과 구조가 같다. ‘볶은밥’ 또는 ‘밥볶음’이라 해야 자연스럽건만 우리 말버릇이 어디 꼭 그런가. 다행히 이 말고 조어법 거스른 것은 ‘비빔밥’ ‘비빔국수’ 정도. ‘묵무침’을 ‘무침묵’이라 않고 ‘두부조림’은 ‘조림두부’라 아니 한다. ‘찜달걀’ 아닌 ‘달걀찜’이라 하지 않는가.
해서 ‘모둠전’보다는 ‘전모둠’이, ‘전모둠’보다는 ‘전모음’이 타당하다. ‘모두다’가 표준어 아니라 하니. 아니면 ‘골고루, 여러 가지’라는 뜻을 담아 ‘갖은전’ 해도 될법하다. ‘갖은것’(가지가지의 것) ‘갖은양념’(갖가지 재료의 양념) 하듯이.
궁금한 게 있다. 혹시 ‘김치찌개’보다 유사품 ‘김치찌게’를 더 맛나게들 먹진 않았을까? 제대로 쓴 ‘아귀찜’이 과연 ‘아구찜’보다 많이 팔렸을까?
[옮겨온 글] / 출처: 조선일보 / 양해원(글지기 대표) / 2020.10.16 05:00
‘국보 1호’는 성적순이 아니다
국감에 등장한 ‘국보 1호 교체’ 주장 / 잊을 만하면 나오는 해묵은 논란
‘국보 1호=금메달’로 오해하기 때문 / 국보 번호는 가치 서열 아닌 관리 번호
지난 12일 문화재청 국정감사를 하루 종일 지켜봤다. 21대 국회의 첫 국감인 만큼 어떤 의원들이 매서운 질책과 비판을 쏟아낼지 궁금했다. 결론은 ‘역시나 맹탕’. 예년처럼 윽박지르거나 호통치지 않고 차분히 질의하는 의원들 모습은 일단 신선해 보였다. 하지만 몇몇 의원들은 ‘해외 문화재 환수’나 ‘목조 문화재 화재보험 가입’ 같은 단골 레퍼토리를 게으르게 재탕했다. 정책 질의를 해야 할 국감에서 버젓이 지역구 민원을 제기하는 의원들도 있었다.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국보 1호 교체’ 주장도 또 나왔다. 전용기 의원은 앞서 8일 시민단체와 함께 ‘훈민정음 해례본 국보 1호 지정’ 청원을 냈고, 이날 국감에서도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해묵은 논란이다. 1996년 국보 1호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처음 나왔다.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 프로젝트가 한창일 때였다.
숭례문과 국보 1호의 인연은 8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4년 일제가 조선의 보물을 지정하면서 숭례문에 보물 1호를 부여했다. 일제가 숭례문의 가치를 평가했던 것이라기보다 편의상 1호를 붙인 것이라고 알려져왔다. 해방 후 우리 전문가들의 논의를 거쳐 1962년 시행된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숭례문은 국보 1호가 됐다.
1996년 국보 1호를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의견은 이랬다. “국보 1호는 우리 문화재의 상징인데 숭례문으로는 약하다.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 없는 문화재로 1호를 바꿔야 한다.” 반면 반대하는 이들은 “국보 번호는 가치의 우열 순서가 아니라 단순 관리 번호”라고 반박했다. 양측 주장이 팽팽히 맞서자 당시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은 설문조사를 실시했고, 조사 결과 ‘반대’가 높아 국보 1호를 그대로 두기로 결정했다.
2005년 또 한 번 논란이 점화된다. 감사원이 ‘상징성 부족’이라는 이유를 들어 문화재청에 국보 1호 교체 문제를 제기했고, 당시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새로운 국보 1호로는 훈민정음이 적합하다”고 발언하면서 논란에 불을 지폈다. 하지만 이때도 국보 1호는 바뀌지 않았다. 문화재위원회가 ‘현행 유지’로 결론 내렸기 때문이다. 그 뒤 숭례문이 화재로 불탔을 때도, 숭례문 부실 복원 논란이 벌어졌을 때도, 잊을 만하면 누군가가 ‘1호 교체’를 들고나왔다.
왜 이런 논란이 반복될까. ‘국보 1호’를 금메달이라고 오해하기 때문이다. 숭례문은 국보 24호인 석굴암이나 국보 70호인 훈민정음 해례본보다 가치가 뛰어나서 1호인 것이 아니다. 문화재의 지정 번호는 가치 서열에 따라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지정된 시간 순서에 따른 관리 번호일 뿐이다. 이날 전 의원은 “그럼에도 1호의 상징성은 사라지지 않는다”며 “교육 현장에선 1호만 기억한다”고 했다. 문화재를 서열화하는 이 발상이 위험한 것이다.
전 의원 주장대로 국보 1호를 훈민정음 해례본으로 바꾼다고 치자. 간송 전형필이 수집한 이 해례본은 맨 앞 두 장이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만약 앞의 두 장이 모두 붙어있는 더 온전한 해례본이 발견된다면, 국보 1호를 또 바꿀 것인가. 종목과 성격이 각기 다른 국보 340여 점을 어떻게 줄 세우기 한다는 말인가.
이 해묵은 논란을 끝내는 방법이 있다. 국보의 지정 번호를 아예 없애는 것이다. 국보 1호 숭례문, 국보 70호 훈민정음 해례본이 아니라 국보 숭례문, 국보 훈민정음 해례본이라고 부르면 된다. 실제 우리처럼 지정 문화재에 번호를 매기는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다. 일본도 국보 번호는 정부의 관리용 번호일 뿐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다. 언제까지 국감에서 이 소모적인 논란을 지켜봐야 하나.
[옮겨온 글] / 출처: 조선일보 / 허윤희(조선일보 문화부 차장) / 2020.10.16 05:00
평양 사람들
북한의 수도 평양은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다. 선사시대 고조선에 이어 고구려・고려의 수도였던 평양은 30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평양의 넓이는 광복 당시 275㎢에서 2000년대 중반 1300㎢(서울 605.52㎢)로 늘었으며, 인구도 300만 명을 넘기도 했으나, 2010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면적과 인구 모두 약간 줄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정확한 통계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6・25전쟁 뒤 재건설된 평양은 대형 상징물이 많은 소련식 사회주의 건축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도시 전문가들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키예프와 가장 비슷하다고 한다.
평양은 북한의 정치・군사・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노동당과 국무위원회・내각 등 정부 기관과 연구소들이 모여 있으며, 시민들도 대부분 그곳에서 일하는 핵심 계층이다. 평양은 통행증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특권층의 도시이고, 다른 지역 주민들은 평양에 사는 것은 고사하고 출입도 쉽지 않다. 평양 시민은 제1순위로 생필품과 수도・전기를 공급받으며, 인트라넷 수준이지만 인터넷도 접속할 수 있다. 자동차도 많이 늘어 출퇴근 시간에는 교통 체증도 있다. 개성공단이 가동되고, 북・중 교역이 늘어나고 북한의 철광석 등 수출이 제법 활발했던 2000년대에는 놀새떼라고 하는 평양판 오렌지족까지 생겼고, 북한 당국은 세련된 차림의 북한 여성들을 적극 홍보하기도 했다.
지난 10일 0시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 열병식이 열렸다. 북한의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초대형 방사포, 북한판 이스칸데르・에이태큼스 단거리 미사일 등 전략・전술 무기와 김정은의 ‘눈물 연설’이 국제적인 관심을 끌었지만, 한편으로는 화면 속에 비친 평양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낀 한국인도 많았다. 김정은의 연설을 들으며 따라 우는, 정치적으로 이질적인 모습 때문이 아니다. 평양에 사는 특권층일 텐데도, 남성이건 여성이건, 나이가 많아 보이건, 적어 보이건 대부분 얼굴이 마르고 검었다. 극심한 경제난 때문에 잘 먹지 못하고, 자외선차단제 같은 화장품도 챙겨 바를 수 없었을 것이다. 같은 유전자인데도, 서울 사람들과 너무나 다른 모습에서 정치와 역사와 이데올로기가 만든 서글픈 차이점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됐다.
[옮겨온 글] / 출처: 문화일보 / 이도운(문화일보 논설위원) / 2020년 10월 15일(木)
파파고는 집단지성의 산물.. 번역가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슈&탐사]
[AI를 위해 일한다, 데이터 노동의 등장] 전문 영역으로 확장 중
유엔은 2016년 ‘미래 보고서 2045’에서 2045년 이후 사라질 직업으로 번역가를 지목했다. 한국고용정보원의 2018년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신 직업연구’ 보고서는 “인공지능(AI) 번역 기술이 정교해져 번역 일자리가 위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일본어 전문번역가 박모(31)씨가 일하는 모습을 보면 이런 전망은 들어맞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8년 번역 경력의 박씨는 요즘 하루 3~4시간씩 ‘플리토’ 서버에 접속한다. 플리토는 언어 데이터로 AI를 학습시켜 전문 번역기를 개발하는 업체다. 박씨는 이곳에서 다른 사람들이 번역한 문장을 마지막으로 검수하는 일을 한다. 플리토의 회원 등급은 4단계로 구성된다. 박씨는 4단계 중 가장 높은 ‘유창’ 등급이다. 그 아래 단계 회원들이 번역한 문장을 박씨가 최종 검토하는 것이다.
박씨는 지난달 29일에도 검수 작업을 했다. 번역된 문장에 오류가 있는지, 더 세련된 표현으로 대체할 수 있는지를 살폈다. 번역 수준이 높을수록 일본어 지명이나 인물명 같은 고유명사를 정확하게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박씨는 이런 부분을 중점적으로 보고 ‘괜찮은 문장’임을 표시하는 이모티콘을 체크한 뒤 ‘제출’ 버튼을 눌렀다. 이렇게 검수를 하면 문장당 책정된 금액의 포인트를 받게 되는데 시급으로 환산하면 박씨는 1만~1만5000원을 받는다. 정부에서 수주한 사업의 데이터 검수여서 일반 번역보다는 금액이 높게 책정되는 편이다. 일반 번역의 경우 초급 문장당 단가는 최소 30포인트(30원)다. 박씨는 “기존 번역 일은 문서 하나를 계속 들여다봐야 해서 소요되는 시간이 길었는데 번역 데이터 업무는 원하는 시간・장소에서 간편하게 할 수 있는 것이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사람이 번역한 말뭉치가 필수
박씨 같은 번역가가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지금의 AI 번역 모델이 인간의 능력을 반드시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과거 기계 번역은 ‘나는 학교에 갑니다’라는 문장을 단어로 쪼개 데이터를 입력했다. 나는(I), 학교에(to school), 갑니다(go) 단어를 한글과 영어로 짝지어 입력하는 방식이었다. 한국어-일본어처럼 문장 구조가 비슷한 언어의 번역은 비교적 수월했지만 주어와 서술어(동사) 위치가 다른 한국어-영어로의 번역은 정확도가 떨어졌다.
지금은 사람이 번역한 ‘말뭉치(corpus)’의 쌍으로 AI를 학습시킨다. 말뭉치는 컴퓨터가 읽을 수 있는 형태로 처리된 언어 자료다. 한국정보화진흥원 AI 말뭉치 데이터 사업의 경우 15어절 정도로 구성된 한 문장을 한 개의 말뭉치로 계산한다. 현재 기계 번역은 한글 말뭉치와 이를 번역한 영어 말뭉치를 ‘문제’와 ‘정답’으로 묶어 AI에 투입한다. 기계는 수많은 번역 말뭉치 데이터를 통해 번역 규칙과 경향을 스스로 학습하게 된다. 사람이 번역 경력이 쌓이면 능숙해지는 것처럼 AI도 말뭉치 데이터가 많을수록 번역이 자연스러워진다.
번역기의 품질을 좌우하는 건 정확히 번역된 말뭉치다. AI 데이터 업체들은 ‘정확한 번역’ 업무를 사람에게 맡긴다. 이른바 ‘크라우드소싱’(대중 참여・crowd sourcing) 방식으로 번역 말뭉치 데이터를 모은다. 크라우드소싱 번역에는 많은 사람이 참여한다. 업체가 서버에 일감을 띄워놓으면 원하는 사람 누구나 일을 할 수 있다. 한 문장만 번역해도 되고 여러 문장을 해도 된다. 서버에 접속할 수만 있으면 집, 카페, 버스정류장 어디서나 일할 수 있다. 업무시간도 자유롭다.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함께 일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다른 사람의 작업량이 어떤지 알 수 없다.
문장 한 개의 번역을 한 사람이 완성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첫 번역을 하면 그 다음 사람이 수정하고, 또 다른 사람이 보완한다. 마지막 검수 단계에서 박씨처럼 등급이 가장 높은 사람이 자연스러운 번역 말뭉치를 채택한다. 즉 지금 우리가 이용하는 번역기 서비스는 ‘집단지성’의 산물이다. 이정수 플리토 대표는 “집단지성 방식으로 데이터를 수집, 가공하면 빠른 시간 내에 훨씬 더 정확하고 많은 양의 말뭉치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집단지성을 이용한 번역은 일상 분야에서 전문 분야로 옮겨가고 있다. 정부는 올해 AI 학습용 데이터 구축 과제로 ‘전문분야 한영 말뭉치’를 지정했다. 제시한 전문 분야는 의료・보건, 금융・증시, 가정통신문, 대법원 판례 등이다. 영어 ‘client’는 일상에서는 ‘손님’으로 번역되지만 법률 분야에서는 ‘의뢰인’으로 주로 번역된다. 의학 분야에서는 ‘환자’로 해석돼야 자연스럽다. 이런 차이를 기계는 처음부터 구분하지 못한다. 사람이 집단지성으로 해당 분야에 맞는 말뭉치를 구축해야 자연스러운 번역이 가능하다.
가공 단계마다 사람이 있다
AI 학습용 데이터는 수집과 라벨링, 검수 단계를 거친다. ‘수집’은 데이터 노동의 가장 첫 단계로 프로젝트 성격에 맞는 데이터를 생산해내는 걸 말한다. 예를 들어 이미지에서 글씨를 추출해 입력하는 작업을 하려면 우선 이미지 자체가 필요하다. 번역 역시 원문이 필요하다. 저작권 시비가 없어야 하고 데이터 자체의 오류가 없어야 한다.
AI 데이터 업체들은 음식 사진을 찍어 올리거나 부모, 자식 간 대화를 녹음해 올리는 것만으로도 보수를 지급한다. 올해 정부의 ‘데이터 댐’ 사업 가운데는 ‘한국인 방언 발화 데이터(강원・경상・전라・제주・충청도)’가 있다. 사투리로 말한 것만을 녹음해 올려도 일로 인정받고 보수를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지역별로 ‘조용한 환경에서 2000명 이상의 화자가 말한 3000시간 이상의 음성 데이터셋’을 모을 예정이다.
‘라벨링’은 수집, 생산한 데이터를 기계가 읽을 수 있도록 가공하는 작업이다. 데이터는 날것 그대로의 상태이기 때문에 AI가 어떤 것을 학습해야 하는지 일러주는 일종의 ‘가이드 작업’이 필요하다. 여기에 투입되는 사람들이 바로 ‘라벨러(labeler)’다. 사람 얼굴 사진에서 AI가 학습할 수 있게 ‘눈’ ‘코’ ‘입’을 정해주고 문장을 번역한 말뭉치를 만들어낸다.
라벨링 작업 이후에는 ‘검수’ 단계를 거친다. 오타가 있는지, 누락된 데이터가 있는지 체크한다. 마지막 검수 단계는 전문성이 있고 숙련도가 높은 사람들이 필요하다. 윤화묵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책임연구원은 “AI 연구는 ‘정제된 데이터의 싸움’이라고 이야기한다”며 “정제된 데이터를 ‘누가 더 많이 갖고 있는가’가 ‘어떻게 기술로 잘 만들 것인가’만큼이나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주목할 점은 라벨링 작업에 사람의 판단이 개입한다는 것이다. 화질이 선명하지 않은 이미지 데이터 라벨링을 할 경우에는 희미한 물체를 어디까지 식별해야 하는지 기준을 세우기 어렵다. 알쏭달쏭한 상황들이 생길 때마다 라벨러는 스스로 고민해 결론을 내리거나 상급자와 협의하는 과정을 거친다. 노형주 한국자동차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일정 부분은 주관적인 판단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 판단이 잘못되면 열심히 작업해도 AI에 학습시킬 수 없는, 써먹지 못하는 데이터가 되기 때문에 이해도와 숙련도가 중요한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업체들은 데이터의 정확도를 올리기 위해 검수 시스템을 정교하게 짜 놓는다. 검수를 통과하지 못한 데이터에는 보수를 지급하지 않는다. 과거 실수가 많았던 작업자의 작업물은 한 번 더 검수한다. 업체 내부에는 전문 검수 인력을 둔다.
신진섭 KISTI 선임연구원은 “(논문 데이터를 입력하는 과학기술 기계학습 데이터 구축 사업의 경우) 한 사람의 작업이 끝날 때마다 다음 사람이 검토를 하는데 이때 ‘반려’를 누르게 되면 처음 단계의 사람에게 (재작업 요청이) 가는 게 아니라 바로 전 단계 검토자가 책임지고 재작업을 해야 한다”며 “마치 거미줄처럼 서로 검토하고 책임지도록 설계해 여러 단계 검수를 거치면 (정확도가) 좋아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 필요한 영역 증가 중
AI가 여러 분야로 확산되면서 데이터 노동은 단순・반복 작업의 영역을 넘어서고 있다. 의료나 법률 분야에서 데이터 식별 업무는 해당 분야 전문 지식이 있는 사람만 가능한 경우가 많다. 현재 정부 예산으로 진행 중인 ‘K패션 이미지 데이터 구축 사업’이 그런 사례다.
이 사업은 실시간 패션 트렌드를 파악하거나 단기 패션 트렌드를 예측하기 위해 120만건 분량의 패션 이미지 데이터 세트를 구축하고 있다. 모두 두 차례 라벨링 작업을 거치는데 1차 라벨링은 수도권 지역 마이스터고 학생과 경력단절 여성 등 200여 명이 수행했다. 이들은 사진 속 이미지를 보고 해당 옷의 카테고리를 ‘상의’ ‘하의’ ‘외투’ 등으로 구분하고 색상을 입력했다. 대표 수행 기관인 오피니언라이브 조인호 대표는 “이미지를 데이터화하는 기초 작업은 숙련도가 크게 필요하지 않아 사회적 약자로 인식되는 이들을 우선 고용했다”고 말했다.
2차 라벨링은 ‘전문가’들이 맡았다. 이화여대 신산업융합대학원 교수진과 대학원생 50여명은 ‘상의’ ‘하의’ 등 라벨이 붙은 의류 사진을 토대로 스타일을 분석하고 있다. 이들은 셔츠의 색상이나 소재, 패턴 등 디자인 정보를 토대로 ‘로맨틱’ ‘젠더리스’ 등 22개 스타일로 분류한다.
홍콩중문대가 지난해 의류 이미지 80만장을 담아 공개한 데이터셋(Data set) ‘딥패션’의 일부. 상의나 하의, 원피스 등 의류 형태에 맞게 이미지 영역을 세밀하게 지정하고 촬영 각도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 데이터를 구축한 것이 특징이다. 이 데이터셋은 개인에게 어울리는 의상을 추천해주는 AI 기술 개발 등에 활용될 수 있다. 한국정보화진흥원 AI Hub 사이트
올해 정부의 ‘데이터 댐’ 사업 과제 중 헬스케어 분야의 데이터 상당수는 전문의의 참여를 필요로 한다. ‘뇌혈관 질환 진단을 위한 의료영상 데이터’ 구축 과제는 전문의가 판독한 영상 데이터 2만건 이상에 대한 라벨을 생성할 예정이다. ‘수면장애 진단을 위한 데이터’와 ‘구강 질환 영상 데이터’도 전문의의 판독을 요구한다. 박정은 한국정보화진흥원 AI데이터추진단장은 “데이터 가공・검수하는 작업에서 전문 지식을 보유한 이들이 작업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인형 눈알 붙이기’ 업무가 전부는 아니다”고 말했다.
얼굴 공개하고 하루 100만 원도
데이터 노동의 보상은 작업 성격에 따라 격차가 크다. 보통 이미지 속 글씨를 입력하는 단순 작업은 한 장당 40원, 많게는 80원이 지급된다. 정부가 ‘데이터 댐’ 구축을 목표로 현재 진행하는 170개 과제에서는 시간당 최저임금 수준의 보상이 주어진다. 일반 기업의 라벨링 업무보다 높게 책정됐다.
까다로운 데이터는 수집 자체가 ‘돈’이 된다. 자신의 얼굴을 노출하는 조건으로 영상을 촬영하는 경우에는 단가가 비싸다. 딥페이크 영상을 탐지하는 AI 기술 개발을 위해서는 얼굴이 들어간 영상이 필수적이다. 한 참여자는 취재팀과의 인터뷰에서 “12시간 가까이 75개 스크립트를 읽고 질문에 대답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고 하루 100만 원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참여자는 얼굴과 목소리가 모두 노출되고 이를 AI 학습용 데이터로 활용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였다. AI 데이터 업체 테스트웍스에서 진행하는 ‘아기 피부 사진’ 수집 업무의 경우 1장당 1500원을 지급한다. 실제 아기를 촬영해야 하고 다른 조건도 까다로워 보상이 비교적 높은 편이다.
말뭉치 번역의 경우에도 언어 능력에 따라, 기존 작업량에 따라 단가가 다르게 지급된다. 정보화진흥원 박정은 단장은 “AI 기술이 발전할수록 요구하는 데이터 라벨링 수준도 함께 높아진다”며 “전문성을 활용할 수 있는 작업도 있으므로 숙련성과 전문성이 함께 가는 일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옮겨온 글] / 출처: 국민일보 / 국민일보 이슈&탐사2팀 권기석 김유나 권중혁 방극렬 기자 / 2020.10.16. 04:04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 멕시코)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