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화재사랑 제목유서 깊은‘PLAY’의 전통 그래, 우린 게임의 민족이었어작성일2020-10-06작성자문화재청조회수44한류의 또 다른 아이콘, 게임외국인이 보는 한국의 이미지는 무엇일까? 1990년대까지만 해도 김치, 한복 같은 전통적인 무언가를 아이콘으로 생각하곤 했지만, 적어도 2020년 시점에서 외국인이 보는 한국의 아이콘은 매우 현대적이다. BTS, 블랙핑크, 봉준호 같은 대중문화 콘텐츠는 외국인들이 한국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들이다. 여기에 빠지기 힘든 또 하나의 콘텐츠가 게임과 e스포츠이다. ‘스타크래프트’의 임요환·홍진호 이래 ‘리그 오브 레전드’의 살아있는 전설, 최고의 미드 라이너 ‘페이커(SKT T1 Faker)’ 이상혁에 이르기까지 한국 게이머들은 세계 게임리그를 주름잡으며 마치 축구에서 브라질 같은 위상을 게임계에서 공고히 하고 있다. 폭증하는 글로벌 e스포츠 시청자 인구와 함께 게임을 통해 한국의 이미지도 새롭게 자리 잡는 중이다. 20세기 후반에야 시작된 디지털 게임이 반만년 한반도 역사가 만든 문화를 대표할 수 있을까? 현재의 게임만을 생각한다면 이해가 어려울 수 있지만, 정해진 규칙 안에서 참여자가 자유롭게 자신의 의지를 구사한다는 플레이(Play)의 개념으로 게임을 바라본다면 한반도의 게임 역사 또한 결코 짧은 것은 아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게임의 민족’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수준이기도 하다.
고대의 글로벌 트렌드 - 바둑, 장기, 쌍륙디지털 게임 이전의 게임은 보드게임, 카드게임 형태였다. 근대 이전 한반도에도 동아시아 전반에 폭넓게 전파된 기본적인 보드게임이 들어와 있었다. 바둑, 장기, 저포(주사위) 같은 게임이 일상적으로 플레이되었고, 현대에 과도한 게임 이용이 문제라도 되는 양 여겨지는 것처럼, 당시에도 ‘밥 먹고 게임만 하는’ 사람들을 우려하고 탄식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간관(諫官)이 유운, 정용수 등을 탄핵하였으니, 이들이 도흥, 김승, 이인수, 조화, 신효창, 송전 등과 더불어 도당에 앉았다가 가만히 옆방으로 나가서 바둑을 두어 희롱하였기 때문이었다. - 『태조실록』 13권 태조 7년 1월 15일 계해 3번째 기사내관 송지도, 의원 이헌을 순금사(巡禁司)에 내렸다가 3일 만에 석방하니, 송지도와 이헌이 창덕궁에서 장기・바둑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 『태종실록』 25권 태종 13년 6월 7일 갑인 2번째 기사 바둑과 장기가 주로 양반층에서 인기 좋은 게임이었다면, 서민층으로부터 사랑받았던 보드게임에는 ‘쌍륙’이 있었다. 한국 전통 게임이지만 정작 오늘날의 한국인에겐 생소한 이름인데, 의외로 이 게임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즈 기본 게임으로 한동안 널리 알려진 바 있다. ‘백개먼’이라는 이름의 보드 게임과 거의 유사한 양식을 취한다. 흑과 백을 잡은 두 사람이 주사위를 굴려 자신의 말을 상대편 진영까지 이동시키는 것을 기본 규칙으로 하되, 사이에 놓인 흑집과 백집을 통해 전략적 움직임을 가능케 하는‘백개먼’은 기원전 3000년경부터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발견되는 유서 깊은 보드게임이었다. 한국에서는 주사위 두 개의 가장 높은 수를 일컫는 이름인 ‘쌍륙(雙六)’으로 알려지며 여성과 서민층 사이에서도 널리 이용된 바 있다.
한반도의 유니크 게임 - 승경도, 투전, 윷놀이지속적인 교류가 이어졌던 한, 중, 일 삼국의 관계상 완전히 독립되어 발전한 보드게임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타문화권과는 뚜렷한 차별점을 보이는 게임도 존재한다. 가장 대표적이고 또 최근 들어 널리 알려진 것이 ‘승경도’이다. 일찍 중앙집권 관료화를 이룬 조선시대의 관직 품계를 두고 승진과 파직을 주사위로 결정하는 보드게임인 ‘승경도’는 불교 버전인 ‘성불도’, 비슷한 형식을 팔도 유람으로 스핀오프한 ‘승람도’ 등 다채로운 배리에이션을 자랑할 정도로 인기 있는 게임이었다. ‘승경도’가 이제는 꽤 유명해진 반면, 현대 이래 늘 함께 해왔으면서도 전통 놀이라고 하면 생소하게 여기는 게임도 있다. ‘섯다’의 원형인 ‘투전(鬪)’이 대표적이다. 오늘날 일상 언어에도 들어와 있는 ‘땡잡았다’, ‘한 끗 차이’에 들어가는 ‘땡’과 ‘끗’은 투전의 플레이 용어이다. 보드게임보다는 플레잉 카드게임에 가까운 투전은 청나라에서 유행했던 ‘마조(馬弔)’라는 카드게임이 조선에 들어와 현지화한 형태이다. 카드라기보다는 길쭉하고 두꺼운 기름종이 막대 같은 형태의 도구로 ‘플레이’했다. 비록 주로 도박에 사용되어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는 바람에 사라졌지만, 도박 요소를 뺀 순수한 놀이도구로서의 ‘투전’은 빠른 두뇌 회전과 심리전을 통한 짜릿한 승부를 만들 수 있는 게임이었다. 놀이학자 카이와가 다룬 게임의 주요한 요소인 아곤(Agon, 경쟁)과 알레아(Alea, 운)가 적절하게 배합된 ‘투전’의 실전은 전통 놀이문화 보존이라는 측면에선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한반도에만 존재하면서도 아곤과 알레아가 적절하게 얽혀 역동적인 승패를 만들어 내는 가장 대표적인 게임은 사실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전통 보드게임 ‘윷놀이’이다. 네 개의 윷가락이 만드는 경우의 수로 우연의 결과가 쏟아지고, 말판 위에 윷의 결과를 토대로 네 개의 말을 돌리는 과정은 이른바 ‘업어가기’와 ‘말 잡기’를 통해 극적인 뒤집기로 지금도 명절에 환호와 울분을 극명하게 나뉘게 만드는 게임이다. 운과 실력이 절묘한 교차점을 이루는 윷놀이 판은 전략적 판단의 의미를 살려내면서 동시에 운에 따른 한방 승부가 동시에 나타나는 게임이었다. 이런 장점은 후대에도 인정받아 몇몇 온라인 게임사에서 온라인 윷놀이를 서비스하거나, TV 예능프로에서 두뇌게임의 하나로 변형된 윷놀이를 제시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게임 강국 한국, 새로운 생각으로 놀이 전통을 되돌아봐야코로나19 시대를 맞아 디지털 게임 주목도가 다시금 올라간 상태이다. 디지털 게임은 비록 컴퓨터라는 기술 문명의 결과물이라는 점 때문에 다소 한반도의 전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운과 경쟁의 적절한 배합이라는 게임의 본질에서 본다면, 한반도의 전통문화 속에도 꽤나 의미 있는 게임의 기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게임 강국이자 e스포츠 종주국으로 오늘날 이름을 알리는 한국의 관점에서, 전통문화 속에 이름을 남긴 여러 게임을 디지털로 현대화하는 것도 꽤나 뜻깊은 일이 아닐까? 단지 뜻깊음의 문제만도 아니다. 늘 새로운 아이디어가 요구되는 현대 게임 제작 환경에서, 전통 게임이 주는 새로운 생각과 시각 그리고 아이디어가, 어쩌면 완전히 새로운 또 하나의 게임 트렌드를 만드는 밑바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글. 이경혁(게임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