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고산성지
■ 신촌에 서 있는 순교자현양비
▲서울대교구 노고산성지에 있는 성 앵베르 주교(맨 왼쪽)와 성 모방 신부(가운데),
성 샤스탕 신부의 현양비.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강대학교 캠퍼스 내 자리잡은 성지는
새남터에서 순교한 세 성인의 유해가 4년 동안 안장됐으며,
이밖에도 많은 순교자들의 유해가 묻혔던 곳이다.
젊은이들의 거리 신촌.
이곳에는 해발고도 106m의 그리 높지 않은 산,
노고산이 있다.
바로 서강대학교가 자리한 곳이다.
예수회가 설립한 서강대학교는
교회의 정신을 바탕으로 젊은이들을 양성해온 터전이다.
서강대가 이곳에 자리 잡은 지도 벌써 60년.
제법 오랜 기간 교회의 정신을 퍼뜨려온 땅이다.
서강대학교 입구에서 왼쪽 길을 들어서니 등하교하는 학생들 왼편으로
서강대 가브리엘관 앞의 작은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작은 정원처럼 보이는 이 공간에 서 있는
3개의 조각에는 성직자 3명의 얼굴이 새겨져있다.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 성 모방 베드로 신부,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
서강대가 예수회에서 설립한 학교이니
예수회 출신의 성직자인가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지만,
파리외방전교회 출신인 이 3명의 성직자들은
예수회와도, 서강대와도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들이다.
바로 170여년 전 우리나라 땅에 천주교 박해가 극심하던 시기,
우리나라의 신자들을 돌보고자 찾아온 선교사들이다.
■ 신자들을 사랑한 세 명의 선교사
서강대학교가 세워지기 120여 년 전,
노고산에 이 성인들이 묻혔다.
조선대목구 제2대 교구장으로서
우리 땅의 신자들이 처음으로 맞이한 앵베르 주교,
앵베르 주교보다 앞서 박해 중인
조선의 신자들을 돌보던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
우리가 103위 한국성인호칭기도 중에 범라우렌시오,
나 베드로, 정 야고보라고 부르며 전구를 청하는 성인들이다.
성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신자들을 돌보고
조선 땅에 하느님의 사랑을 전했다.
죽을 위험에 처한 어린이들 위해
세례를 주는 운동을 펼치기도 하고,
지방을 순회하면서 성사를 집전했다.
이런 성인들의 노력에 힘입어 박해 중임에도 불구하고
신자수가 9000명을 넘어섰다.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등 3명의 신학생을 선발해
마카오로 유학을 보낸 것도 이 성인들이다.
신자들을 향한 성인들의 사랑은 죽음을 무릅쓴 것이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고 곳곳에서 신자들이 체포되자
성인들은 더 열성적으로 신자들을 찾아가 성사를 집전했다.
박해가 더 심해지기 전에 더 많은 신자들에게
성사를 줘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박해자들에게 성인들의 활동이 알려지자,
신자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세 성인은 함께 관청을 찾아가 자수했다.
결국 온갖 신문과 고문 끝에 앵베르 주교는 43세,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5세의 나이로
새남터에서 참수를 당하고 말았다.
순교한 성인들의 시신은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었다.
신자들이 성인들의 시신을 수습하러 오리라 여긴
관헌들의 감시가 삼엄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몇몇 신자들이 성인들의 시신을 찾으려다 체포되기도 했다.
마침내 20여 일이 흘러서야
신자들은 성인들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그렇게 처음 안장한 곳이 바로 이 노고산이었다.
성인들의 유해는 4년 동안 노고산에 묻혀있다
성인들의 유해를 수습한 신자 중 한 명인
박 바오로가 자기 집안의 선산인 삼성산에 이장했다.
성인들의 유해는 1901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겼다가
명동 성당 지하 묘지에 안장됐고,
현재는 절두산순교성지 지하 성해실에 모셔져 있다.
■ 순교자를 품어온 산, 노고산
서강대학교는 이 성인들을 기리며 2
009년 6월 15일 교정에 세 성인의 순교 현양비를 세우고
정진석 추기경의 주례로 축복식을 열었다.
조각가 이춘만(크리스티나)씨가 제작한 3개의 순교 현양비는
각각 가로 1m, 세로 1.5~2m의 규모로,
앞면에 각 성인의 얼굴 동판과 약력이 기록 돼 있다.
또 비문은 김남조(마리아 막달레나) 시인이 썼다.
이렇게 서강대 내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의
순교현양비가 있는 이곳이 노고산 성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노고산에 묻힌 순교자는 이들 뿐만이 아니다.
서울의 여러 처형지에서 가까운 산이었던 노고산은
신자들이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하는데 용이한 곳이었다.
대표적인 처형지였던 절두산순교성지, 새남터순교성지,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이 세 곳과
이 노고산은 각각 약 3㎞가량 떨어져 있어,
어느 처형지에서도 비슷한 거리다.
기록에 따르면 1866년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정의배(마르코)와
1866년 3월 9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처형된
성 전장운(요한)도 노고산에 안장됐다고 전해진다.
또 1838년 11월 24일 형조옥에서 병사한 성 이호영(베드로)도,
1839년 9월 12일 포도청 옥에서 숨을 거둔
성 최경환(프란치스코)도 노고산에 안장됐다.
두 성인의 유해는 발굴돼 현재 절두산순교성지 성해실에 안치돼 있다.
노고산은 순교자들을 품었고,
여전히 순교자들의 진토를 품고 있는 산이다.
노고산성지는 이산 이곳저곳에 묻힌
순교자들을 기억하게 해주는 공간이다.
성지를 찾는 순례자들은 성지 옆길을 따라 100m 가량 더 가면 나오는
서강대학교 이냐시오관의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다.
미사는 주일은 오전 11시, 오후 5시30분, 오후 7시30분에 거행된다.
또 평일 학기 중에는 월~금요일 낮 12시에 미사가 봉헌된다.
학교 방학기간 중에는 평일미사가 운영되지 않는다.
토요일에는 미사전례가 없다.
※문의 02-705-8161 서강대학교 교목처
<가톨릭신문 2019-09-01 [제3160호, 9면]>
서울 국군중앙성당 (왜고개성지)
현재 군종교구청과 주교좌인 국군 중앙 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왜고개는
한자로 와현(瓦峴) 또는 와서현(瓦署峴)으로 불리던 곳으로,
원래 옛날부터 기와와 벽돌을 구워 공급하던 와서가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서울 명동 주교좌성당과 중림동약현 성당을 지을 때 사용했던 벽돌도
이곳에서 공급해 주었다고 전해진다.
한국 교회가 처음으로 맞이한 사제인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1752-1801년) 신부가
1801년 신유박해로 장렬하게 순교한 후
조선 교회는 또다시 목자 없는 양떼 신세가 되었다.
그 후 30년 만인 1831년 조선 교구는 중국 북경 교구로부터 독립해
명실 공히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와 함께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인
모방(Manbant, 1803-1839년) · 샤스탕(Chastan, 1803-1839년) 신부와
앵베르(Imbert,1796-1839년) 주교가 입국한다.
이들 성직자들은 외인과 포졸들의 눈을 피해
상복 차림으로 변장하고 먹을 것도 여의치 못한 채
험한 산길을 걸어 다니며 전국 각지의 신자들을 찾아 다녔다.
제한적인 활동을 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 전파에 힘쓴 결과
이들은 입국한 후 불과 1년 만에
신자가 9천여 명으로 늘어나는 성과를 얻었다.
방인 사제 양성을 위해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김대건 안드레아 등 세 소년을 뽑아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는 한편
정하상 바오로 등 네 명의 열심한 신자들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쳐
신부로 키우고자 했던 것도 모두 이때의 일이다.
앵베르 주교는 지방을 돌아다니던 중 외국 선교사들의 입국이 알려져
교우들에 대한 탄압이 가열되자
수원에서 가까운 어느 교우 집에 몸을 숨겼고,
여기서 그는 다른 두 신부에게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당부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단념하고 몸조심을 당부하고 임지로 돌려보냈다.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로 인해
이들의 거처가 알려지고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앵베르 주교는 화가 여러 교우들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잡힌 몸이 되는 동시에
동료 신부들에게도 스스로 자수해 순교할 것을 권했다.
이리하여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면서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새남터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이들이 곤장을 맞고 팔을 뒤로 결박당한 채
형장으로 끌려오는 모습은 참으로 참담한 모습이었다.
희광이들은 이들의 옷을 벗기고
겨드랑이 밑에 몽둥이를 끼워 처형 장소에 이르러서는
머리채를 모두 기둥에 매고 나서 목을 쳤다.
이 때 앵베르 주교의 나이 43세,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5세로 동갑이었다.
사흘 동안 한강변 모래톱에 버려져 있던 이들의 유해는
감시의 눈이 소홀해진 틈을 타
몇몇 교우들에 의해 스무 날 가량이 지나서야 겨우 수습되었다.
세 성직자의 유해를 거둔 교우들은 시체를 큰 궤에 넣어
일단 노고산(老姑山, 현 서강대학교 뒷산)에 암매장하였다.
그리고 4년 후, 당시 몰래 유해를 거둔 교우 중 하나인 박 바오로는
복잡한 서울 근교에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신 것이 불안해
자신의 선산인 삼성산(三聖山, 현 관악구 삼성동)으로
세 성직자들의 시체를 옮겨 안장하고
이 사실을 아들 박순집 베드로에게 알려 주었다.
박순집 또한 부친의 뜻을 이어가기로 결심하고
박순지 요한 등 몇몇 신자들과 함께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베르뇌 주교와 브르트니에르 · 볼리외 · 도리 · 프티니콜라 ·
푸르티에 신부, 우세영 알렉시오의 시신을 찾아
새남터 부근에 임시 매장한 후 다시 왜고개로 안장하였다.
그리고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남종삼 요한과 최형 베드로의 시신 또한 찾아내어 이곳에 모셨다.
박해가 끝난 후 제7대 조선 교구장 블랑(Blanc, 1844-1890년) 주교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하였고,
박순집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과 순교자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곳
그리고 자기 집안의 순교자들의 행적을 교회법정에서 증언하였다.
이 증언록이 “박순집 증언록”으로
총 3권에 153명의 순교자 행적이 기록되어
현재 절두산 순교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박순집의 도움으로 1899년 10월 30일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하여 왜고개에 묻혀있던 7명의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에 잠시 모셨다가
명동 주교좌성당 지하묘지에 안장하였다.
삼성산에 모셨던 세 성직자의 유해 또한
시복 수속이 진행되던 1901년 10월 21일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로 옮겼다가
같은 해 11월 2일 명동 성당 지하묘지로 모셨다.
1909년 5월 28일는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남종삼과 최형의 유해가 발굴되어
역시 명동 성당 지하묘지에 안장되었다.
시복을 앞둔 1924년 명동 성당 지하묘지가 개봉되어 유해 일부가
로마와 파리 외방전교회 등으로 분배되었고,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에 순교 기념성당이 건립되면서
명동 성당에 안장되었던 순교 복자들의 유해 대부분이
기념성당 지하 성해실로 옮겨졌다.
현재 절두산 순교성지 성해실에는 총 27위의 성인 유해와
성명 미상의 순교자 유해 1위가 모셔져 있다.
103위 순교 성인 중에서 현재까지 유해가 전해지는 분은 27위뿐이다.
이렇듯 왜고개는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7위의 순교자가 33년간,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2위의 순교자가
43년간 매장되었던 유서 깊은 교회의 성지이다.
또한 왜고개 성지는 1846년 9월 16일 병오박해 때 순교한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시신이 잠시 모셔졌다가
박해가 진정된 후 미리내로 이장된 역사도 지니고 있다.
이런 역사를 통해 왜고개 성지는 모두 10위의 순교자가 묻혔던 곳으로,
그 중 8위가 1984년 5월 6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시성식을 갖고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따라서 왜고개 성지는 순교성인들이 쉬어간 자리이면서 동시에
그들의 삶과 정신을 느끼기에 충분한 곳이다.
군종교구는 2013년 12월 15일 교회사적 의미를 살리고
순례자들이 좀 더 편안하게 순례하며 기도할 수 있도록
성지를 확장하여 새로 단장하고 축복식을 가졌다.
새로 단장된 성지에는 순교자 현양비와 대형 십자가상,
십자가의 길과 기도처 등이 마련되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20년 2월 19일)]
옛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성지
지금은 성심 여고 교정 안에 속하게 된 옛 용산 신학교 성당과
예수 성심 수녀회 관구 사무실로 쓰이고 있는 신학교 건물은
성소의 못자리였던 당시의 자취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4가에 위치한 옛 용산 신학교 성당은 1902년에 축성된 건물이다.
여기에는 한국 천주교회의 첫 방인 사제였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가
축성 당시부터 1958년까지 모셔져 있었고 조선 교구 초대 교구장이었던
소 브뤼기에르 주교와 제8대 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의 유해가 거쳐 갔던 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는
1855년 충청도 배론에 세워진 신학당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그 이전의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위한 노력은
이미 1830년대부터 시작되어 정하상에게 신학 교육을 시킨 바 있고
1836년에는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를 마카오에서 신학교육을 받게 했다.
배론 신학교는 1866년 병인박해로 폐교됐지만 신앙의 자유가 확보됨에 따라
1882년 21명을 페낭 신학교에 유학생으로 파견하기도 했다.
1885년에는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범골에 예수 성심 신학교가 문을 열고,
1887년에는 바로 이곳 서울 용산으로 이전한다.
1892년에는 신학교 교사를 신축했고, 성당은 그 10년 후인
1902년에 신학교 부속 성당으로 건립되어 축성되었다.
용산 신학교 성당은 1982년 교사와 함께
사적 제255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그 후 1914년 성 유스티노 신학교,
1927년에는 함경남도 덕원 신학교 등
여러 군데의 신학교가 생겨났고
서울, 대구, 광주, 부산, 수원, 대전에 이어
1996년에는 인천 가톨릭 대학이 개교하기에 이르렀다.
옛 용산 신학교 성당에 그 유해가 모셔져 있었던 조선 교구 초대 교구장
소 브뤼기에르 주교는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으로
1831년 조선 교구가 북경에서 독립하면서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됐다.
하지만 그는 갖은 고난과 질병을 이겨 내고 조선 땅으로 입국을 시도하다가
결국은 조선 땅을 눈앞에 두고 조선을 향해 떠난 지 4년 만에
4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비록 그는 조선에 입국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개척해 둔 입국 경로를 따라
곧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조선에 들어옴으로써
한국 교회는 완전하게 조직을 갖춘 명실상부한 교회가 된 것이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의 조선 교구 제8대 교구장 뮈텔 대주교는
1877년 한국에 입국해 1933년 서울에서 선종할 때까지
중간의 몇 년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이국땅인 한국에서 사목 활동을 했다.
박해 시대에 활동한 적이 있는 뮈텔 주교는 한불 조약 이후
지하 교회에서 해방된 교회의 모습을 좀 더 확고히 하기 위해
예수 성심 신학교, 종현 성당, 약현 성당을 짓는 한편
각 지방에서의 본당 창설에 많은 지원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순교자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한
순교자 현양과 한국 천주교회사의 정립
그리고 순교복자의 시복 등으로 꼽을 수 있다.
유명한 뮈텔 일기는
자신이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된 1890년 8월 4일부터
임종하기 직전인 1932년 12월 31일까지 써 둔 일기로
총 6천여 면의 분량에
주교 개인 사정과 재임 동안의 교회 사정을 기록한 것인데
우리 한국 교회로서는 아주 귀중한 자료이다.
그 외에도 그는 "뮈텔 문서", "기해 일기" 등을 저술하고
황사영 백서의 원본이 발견되자 이를 프랑스어로 번역해 학계에 배포하고
그 원본을 1925년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 때 교황 비오 11세에게 봉정했다.
현재 황사영 백서는 바티칸 박물관 내 선교민속 박물관에 소장, 전시되어 있다.
옛 용산 신학교 성당은 많은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치되었던 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조선교구 초대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2대 교구장 성 앵베르 주교, 3대 페레올 주교, 4대 성 베르뇌 주교,
5대 성 다블뤼 주교, 6대 리델 주교, 7대 블랑 주교,
8대 교구장이자 이 성당 봉헌식을 집전한 뮈텔 주교에 이르기까지
8명의 역대 조선 교구장 주교들의 유해가 모두 이 성당에 안치되었었고,
기해박해 순교자인 성 모방, 성 샤스탕 신부를 비롯해
배론 신학당을 세우고 병인박해 때 순교한 오메트르 신부, 성 위앵,
성 브르트니에르, 성 도리, 성 볼리외 신부 등의 유해도 이 성당을 거쳤다.
이곳에 안치되었던 순교자들의 유해는 그 후 혜화동 신학교 성당을 비롯해
명동 성당, 절두산 등지로 옮겨 모셨고,
역대 교구장들의 유해는 용산 성직자 묘지로 옮겨 안장했다.
2010년 노후화된 성당 외벽과 주변에 대한 보수공사를 시행하고,
2011년에는 성당 내부에 대한 보수공사를 진행중이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1년 11월 7일)]
삼성산 성지
삼성산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의 형을 받고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 · 샤스탕 신부가 1843년부터 1901년 11월 2일
명동 성당 지하 묘소로 모셔질 때까지 묻혀 있던 묏자리이다.
본래부터 삼성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던 이곳은 세 분의 순교성인이 묻힘으로써
명실 공히 삼성산(三聖山)의 품위를 갖추게 되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하다.
한국 천주교회사상 처음으로 이 땅에 발을 디딘 외국인 성직자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 후 30년만인
1831년 조선의 천주교회는 중국 북경 교구에서 독립해 '조선 교구'로 설정된다.
이어서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인 모방,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입국함으로써 조선의 교우들은 주문모 신부 이후
한 세대가 훨씬 지나서야 목자에 대한 갈증을 풀게 된다.
이들 세 성직자는 상복(喪服)으로 얼굴을 가리고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밤낮으로 험한 산길을 걸으며 복음 전파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불과 1년 사이에 신자수가 9천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던 중 외국 선교사의 입국 사실이 알려짐에 따라 교우들에 대한 탄압이 가열되고
가엾은 어린양들의 희생이 늘어나자 목자들은 가슴 깊이 피눈물을 흘린다.
앵베르 주교는 수원의 한 교우집에 피신하던 중 모방, 샤스탕 두 신부를 불러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단념하고
몸조심을 당부한 다음 각자 소임지로 돌려보냈다.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의 책략으로 인해 거처가 알려져 포졸들이 들이닥친다.
그는 화(禍)가 여러 교우들에게 미칠 것을 염려해 스스로 잡힌 몸이 되고
두 신부에게도 자헌치명(自獻致命),
곧 스스로 관헌에 나아가 신앙을 고백한 후 순교하기를 권했다.
기해박해(1839년)가 시작되고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38년 전,
주문모 신부가 그랬던 것처럼 새남터에서 희광이의 칼끝에 이슬이 되고 만다.
이 때 앵베르 주교의 나이 43세,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5세로 동갑이었다.
이들의 시체는 사흘 동안 버려져 있다가 한강변 모래톱에 묻힌다.
교우들이 유해를 거두고자 애쓴 지 나흘째 되는 날
세 명의 교우가 시체를 훔쳐내려다 그중 한 명이 붙잡혀 옥에 갇히고 만다.
그 후 스무 날 가량 지난 뒤 7-8명의 교우가
죽음을 무릅쓰고 감시의 눈을 피해 유해를 거두는 데 성공한다.
교우들은 유해를 큰 궤에 넣어 노고산(老姑山)에 임시로 매장했다.
그리고 4년 후, 당시 파수를 피해 유해를 훔쳐 낸 교우 중 하나인 박 바오로가
가문의 선산인 관악산 줄기 삼성산에 유해를 이장한다.
박 바오로는 이 사실을 아들인 박순집에게 알려 주고 그 자신도 일가들과 함께
병인박해의 와중에서 순교하게 되니 1868년 3월 절두산에서의 일이다.
이 때 가까스로 화를 면한 박순집은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이 묘소를 고증해
명동 성당 지하묘소로 옮길 수 있도록 하는 산 증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순교한 가족들의 시신을 찾고 베르뇌 주교를 비롯해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신부 등의 시신을 새남터에서 찾아내
용산 왜고개에 이장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부터 4년간 박순집의 가문은 16명의 순교자를 배출했고,
자신은 1911년 6월 27일 82세를 일기로 선종하기까지
인천 교회의 창설에 여생을 바쳤다.
16세 때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들어가 우리나라 최초의 수녀가 된
박 사베리오(1872-1966년)는 박순집의 막내딸이기도 하다.
한편 박순집 일가를 기념하기 위한 비가 절두산 순교 기념관 정원에 세워져 있어
순례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삼성산에 1843년부터 1901년까지 58년간 묻혀 있던 세 성직자는
1925년 7월 25일 시복되었다.
1970년 5월 김수환 추기경과 고(故) 노기남 대주교, 오기선 신부는
이곳에 세 분의 매장지임을 확인하고 이를 기념하는 소형 비석을 그 자리에 세웠다.
또 1981년 9월에는 신림동 본당 교우들에 의해
구상 시인의 헌시와 비문이 새겨진 현재의 비석이 세워졌다.
1984년에는 한국 천주교 2백주년을 기해 세 성직자가 시성의 영광에 오른다.
이를 기념해 사적지 부근의 땅 1만 6천여 평을 매입,
1989년에 그 유해를 다시 천묘해 축성식을 가졌다.
그리고 1992년에는 신림동(현 서원동) 본당에서 분리,
삼성산 본당이 신설됐다.
삼성산 본당은 성지 녹화사업을 추진하고 매주일 성지에서
순례객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2001년 11월 성지에 설치된 성모상이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해
다음해 3월에 새로운 성모상을 봉헌했고, 2001년 12월에는 성지 입구에 건립된
삼성산 성령수녀회 본원과 청소년 수련관 및 피정의 집 축복식을 가졌다.
2012년 10월 12일에는 삼성산 본당 설립 2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성지에 표지석을 설치하고 축복식을 거행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3년 3월 24일)]
■ 순교자
◆ 성 범 라우렌시오 앵베르(Imbert) 주교(1796∼1839)
한국 이름은 범세형(范世亨),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이며
주교로는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인 소 브뤼기에르 주교가 입국도 못한 채 병사하자
제2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37년 5월 주교 품을 받았으며
같은 해 말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그의 입국으로 조선 교구는 그보다 앞서 입국한
나 모방, 정 샤스탕 두 신부와 더불어
교구 설정 6년, 교회 설립 53년 만에 비로소 선교 체제를 갖추었으며,
1839년 초 신자 수는 9천 명을 넘게 되었다.
그는 또한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도 뜻을 두어
정하상 등 네 명의 열심한 신자들을 뽑아 사제로 키우고자 하였으나
때마침 불어닥친 박해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자신의 거처가 알려지게 되자
교우들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포졸들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다.
나, 정 두 신부에게도 인편으로 자수할 것을 권유하여
다같이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는 43세였으며 조선에 입국한 지 불과 2년 만이었다.
◆ 성 나 베드로 모방(Maubant) 신부(1804∼1839)
한국 이름은 나 백다록(羅伯多祿),
서양인으로는 최초로 조선에 입국하여 순교한 신부로
1836년 1월 입국하여 서울 정하상의 집에 머물며
제2대 교구장인 범 주교를 도와 경기 충청 등 지방까지 선교하였다.
그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마음을 두고
1836년 2월에 최양업을, 3월에는 최방제를,
7월에는 김대건을 서울로 불러 직접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가 되는 데 필요한 덕행을 쌓게 하다가, 때마침 귀국하는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함께 이들을 비밀리에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성직자가 3명이나 입국한 사실이 당국에 알려지게 되자
범 주교에 이어 자수하였다.
1839년 9월, 홍주에서 정(샤스탕)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모진 형벌을 받은 끝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는 35세, 한국에 입국한 지 3년 9개월 만이었다.
◆ 성 정 야고보 샤스탕(Chastan) 신부(1804∼1839)
한국 이름은 정 아각백(鄭牙各伯),
두 번째로 조선에 입국한 서양인 선교사이다.
1827년 1월 파리외방전교회 사제가 된 정 샤스탕 신부는
1836년 12월 조선 입국에 성공하여 곧 한국말을 배우는 한편
나 신부와 함께 각 지방에 퍼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거행하였다.
당시의 서양인 성직자들은 상제 옷으로 변장하고 험한 산길을 헤매야 했고,
소금에 절인 야채 따위로 주린 배를 채워야 했으며,
밤새도록 고해성사를 주고 미사를 드린 다음 날 새벽에는
또 다른 마을로 길을 재촉해야만 했다.
그들은 이러한 고난을 감수해 가며 오직 복음 전파에만 힘썼던 것이다.
1839년에 일어난 기해박해는 이 땅을 수많은 천주교인들의 피로 물들였고
정 신부도 범 주교, 나 신부와 함께
그 해 9월 새남터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그의 나이는 35세, 이 땅에 들어온 지 2년 9개월 만이었다.
○ 성 범 라우렌시오 앵베르, 성 나 베드로 모방,
성 정 야고보 샤스탕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범 라우렌시오 앵베르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나라의 모든 주교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나 베드로 모방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나라의 모든 외국인 성직자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정 야고보 샤스탕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나라의 모든 성직자들의 정결과 순명정신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첫댓글 새로운 정보에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이리 신앙을 격려 해주시니 고맙습니다.순교하기 위해 오신 서양의 신부님의 뜻을 잘 받들겠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