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개혁은 이런 방식으로는 안 된다.--
지금 정부의 의대증원과 필수의료 패키지에는 시민이 빠져 있다.
모든 개혁은 시민을 위한 길을 찾기 위한 것이니, 시민이 그 주체에서 배제되어선 안 된다. 그런데 지금 이슈엔 시민의 자리가 없고 오로지 정부 당국자와 의사들만 있다. 이런 건 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대화와 소통과 조정이지 명령과 복종이 아니다. 의료에 대해 전문적인 역량과 지식을 갖춘 시민 단체들, 우리나라에 대단히 많다. 근데 그들의 목소리는 한 마디도 들리지 않는다.
북한이나 전근대 왕조 사회에서 이렇게 한다. 너희들 이렇게 해. 안 해? 그럼 쟤 목에 칼 씌워. 이건 민주주의 방식이 아니다. 정부 국회 시민단체 학계 의료인 다 들어가서 하나 하나 고쳐나가는 게 민주주의적인 개혁이 아닌가. 그게 오래 걸린다 해도 그래야 된다. 맨날 법에 따라 고발하고 압수수색하고 영장 치겠다 면허 박탈한다 이렇게 협박하는 것은 전근대적이다.
그리고 공화국에서 사법과 행정은 다른 것이다. 정부(보건복지부)는 행정권을 가진 곳이지 사법권을 가진 곳이 아니지 않나. 사법권과 행정권을 다 휘둘렀던 건 전근대국가의 왕들이었을 뿐이다.
근데 한국에선 언제부터 3권 분립이라는 걸 헌법에서 지웠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왕조 시대로 돌아가 있다.
지금 필수의료 붕괴 노령화, 건강보험재정 악화, 저출산, 도농 의료수준 격차 등은 그 중 단 하나도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굉장히 복잡하다. 그렇게 된 이유는 이게 오래된 병이기 때문이다.
오래된 병일수록 단 하나의 약으로 고칠 수 없는 것 아닌가. 수술, 투약, 비침습적 치료, 병리검사, 방사선 검사, 중재적 치료, 면담, 정신적 치료, 간병, 홈케어, 영양, 재활, 물리치료 등등이 다 들어가야 비로소 환자를 더 나아지게 만들 수 있을 뿐이다.
지금 정부 당국의 태도는 오래된 당뇨 환자의 썩어들어가는 발에 도끼를 들이대면서 그거 지금 바로 잘라내기만 하면 끝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같다. 혹은 그런 쇼를 하면서 결단력 있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어하는 것같다.
이 병은 원인이 있고 환자가 지금껏 치료를 제대로 못 받아 왔다면 그것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약도 필요하고 수술도 필요하고 식단도 다 바꿔야 하고 또 환자를 설득하고 치료를 따라오도록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분명히 돈이 들어간다. 이게 간단해 보이는가? 하나도 간단하지 않다. 무식하게 도끼 들고 내리치면 끝나는 일이 아니다.
오래된 병을 낫게 하는데 있어 가장 어려운 일은, 환자가 그 병을 낫겠다는 의지를 갖게 만드는 것이다. 환자 본인이 의지가 없으면 치료 과정을 견뎌내지 못한다. 그리고 희한한 짓을 자꾸 하다가 결국 반드시 실패로 끝난다.
필수 의료 패키지라고 내놓은 것도 탁상행정 냄새가 풀풀 난다. "지역의료 강화" 하나만 해도, 첫째 지방에 사는 시민들이 ktx SRT 타고 서울 빅5 병원에 못 가게 만들어야 이게 된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생각하던 걸 앞으론 못 한다는 데 대해 시민들을 설득하는 작업이 필수이다. 이거 누가 하겠다는 건가? 총선 표 하나에 벌벌 떨면서.
지금껏 마음만 먹으면 부산 사람도 목포 사람도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서 진료를 받아 왔는데 하루아침에 그걸 못하게 하면 사람들이 어찌 그걸 받아들이겠나? 이게 정권 5년에 되는 일이 아니고 시범 사업부터 해서 정권을 관통하며 차근차근 연속성을 갖고 추진해야 될까말까하는 일이다. 표 떨어지는 소리가 나도 말이다.
보건복지부는 2028년까지 10조원을 투입해서 필수의료 보상체계 개편하겠다고 하는데, 이건 건강보험이 아닌 새로운 재정을 의료에 투입하겠다는 소리로 들린다. 자, 어떤 재정말인가? RnD 예산조차 돈 없다고 깎아 놓고선 필수 의료 예산 10조를 갑자기 어디서 나서 쓰겠단 말인가? 국방비를 허물 건가? 아니면 서민 주택 공급 예산을 깎을 건가? 필수의료 패키지라고 당국에서 내놓은 글자 몇 개는 탁상 행정의 전형이자 공식일 뿐이다. 총선이 끝나면 완전히 캐비넷 속에 묻힐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의료 문제와 건강보험 문제, 국민연금 문제, 저출산 노령화의 문제 이런 거 해결하는 일들은 광나는 일이 아니다. 우직하게 물밑에서 꾸준히 하나 하나 허들을 넘으면서 마라톤처럼 할 일이고 끝도 없이 이해 당사자들을 만나서 대화하고 시민들의 말을 듣고 설득하면서 차근차근 할 일이다.
의사 수는 늘려야 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 지금 정부가 하는 이런 방식으로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그 가장 큰 피해는 10년 20년 후에 사회 주역이 될 지금의 mz세대들이 받도록 예약돼 있다. 묻고 싶다. 이 모든 난리통은 시민을 위해 벌인 건가, 아니면 정권의 안정을 위한 거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