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서는 지금까지 영과 육이라는 이원론을 가지고 삶과 죽음을 설명했네. 소크라테스도 다르지 않아. 하지만 나는 육체와 마음과 영혼, 삼원론으로 삶과 죽음을 설명할 참이야."
그가 유리컵을 가져다 내 앞에 두고 결기 어린 표정을 지었다. 죽음에 관한 느슨한 아포리즘을 기대했던 나는 당황했다. 선생은 마치 새로운 물리법칙을 발견한 후 실험 도구를 앞에 두고 흥분한 과학자처럼 보였다.
"이 유리컵을 사람의 몸이라고 가정해보게나. 컵은 무언가를 담기 위해 존재하지? 그러니 원칙적으로는 비어 있어야겠지. 빈 컵이 아니면 제구실을 못 할 테니. 비어 있는 것, 그게 void(빈 공간, 허무함)라네. 그런데 비어 있으면 그 뚫린 바깥 면이 어디까지 이어지겠나? 끝도 없어. 우주까지 닿아. 그게 영혼이라네. 그릇이라는 물질은 비어 있고, 빈채로 우주에 넣은 것이 영혼이야. 그런데 빈 집에 몸을 따랐어." 보이차를 따르는 소리가 청량하게 들렸다.
"여기 유리컵에 보이차가 들어갔지? 이 액체가 들어가서 비운 면을 채웠잖아. 이게 마인드라네. 우리 마음은 항상 욕망에 따라 바뀌지? 그래서 보이차도 되고 와인도 돼. 똑같은 육체인데도 한 번도 같지 않아. 우리 마음이 늘 그러잖아.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르지."
"네. 날씨처럼 변하는 게 감정이지요."
"그런데 이것 보게. 그 마인드를 무엇이 지탱해주고 있나? 컵이지. 컵 없으면 쏟아지고 흩어질 뿐이지. 나는 죽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내 몸은 액체로 채워져 있어. 마인드로 채워져 있는 거야. 그러니 화도 나고 환희도 느낀다네. 저 사람 왜 화났어? 뜨거운 물이 담겼거든. 저 사람 왜저렇게 쌀쌀맞아? 차가운 물이야. 죽으면 어떻게 되나? 컵이 깨지면 차갑고 뜨겁던 물은 다 사라지지. 컵도 원래의 흙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러나 마인드로 채워지기 이전에 있던 컵 안의 void는 사라지지 않아. 공허를 채웠던 영혼은 빅뱅과 통했던 그 모습 그대로 있는 거라네. 알겠나?"
컵 하나로 바디와 마인드와 스피릿. 현존과 영원을 설명하는 이어령 선생님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토록 심오한 이야기를 이렇게 간단하게 풀어버리다니! 스승은 풀피리 불 듯 말을 이었다.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유리컵 안의 빈 공간을 인정하지 않는 거라고.
*“마음을 비우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 알겠습니다.”
"그렇지. 그건 실제로 유리컵 안의 공간의 문제라네"
"빈 공간이 많을수록 영적인 공간이 커지는 거겠지요?”
만원버스를 생각해보게 사람이 꽉 차서 번 데가 하나도 없는 게 바로 영혼 없는 육체라네. 유명한 일화가 있어, 스님을 찾아온 사람이 입으로는 '한 수 배우고 싶다"고 하고는 한참을 제 얘기만 쏟아 냈지. 듣고 있던 스님이 찻주전자를 들어 산에 들이붓는 거야. 화들짝 놀라 “스님, 차가 넘칩니다” 했더니 스님이 그랬어. "맞네, 자네가 비우지 못하니 찻물이 넘치지, 나보고 인생을 가르쳐달라고? 비워야 가르쳐주지. 네가 차 있어서 말이 들어가질 못해, 마음을 비워야 영혼이 들어갈 수 있다네."
"아! 마인드로만 채우고 살았는지 영혼으로 채우고 살았는지 어떻게 압니까?"
"깨지고 나면 알겠지. 미안한 얘기네만, 대체로 정치가들의 바디에는 마인드만 꽉 차 있어, 깨지면 남는 게 없어, 빵, 돈 이런 것들만 남겠지, 시인, 화가. 종교인····…… 비어 있는 영혼의 세계를 이야기한 사람들은 영원히 가. 우주와도 통하니까."
"문득 윤동주와 고흐가 떠오릅니다.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과 고흐의 그림 <별이 빛나는 밤에》, 그들의 눈은 비어 있음으로 무엇을 본 걸까요?"
"(눈을 빛내며) 과학적으로 설명해주겠네. 태초에 빅뱅이 있었어. 물질과 반물질이 있었지. 이것들이 합치면 빛이야. 엄청난 에너지지. 그런데 반물질보다 물질이 더 많으면? 빛이 되다 만 물질의 찌
꺼기가 있을 것 아닌가. 그게 바로 우리야. 자네와 나지. 이 책상이고 안경이지. 이건 과학이네. 상상력이 아니야. 우리는 빛이 되지 못한 물질의 찌꺼기, 그 몸을 가지고 사는 거라네. 그런 우리가 반물질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 빛이 되는 거야."
이보다 더 명쾌한 시를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나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선생님, 태조와 나의 거리를 그렇게 쉽게 설명하시면 어떡합니까?"
"우리가 쓰는 에너지는 모두 빅뱅 때 만들어진 그 빛이라네. 반물질을 못 만나 물질로 남은 것들은 끝없이 뭐가 되고 싶겠나? 빛이 되고 싶을 거야. 빅뱅이 내가 태어난 고향이거든. 그런데 빅뱅 이전에 존재했던, 빛도 물질도 아닌 이 void. 공허의 공간이 바로 신의 영역이라네. 거기에 빛이 들어가 창조가 되는 거지."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요."
“하나님의 영과 공허가 섞여 우주가 창조되는 순간이야."
*"천국은 뭐라고 설명하시겠어요?"
“물질과 마인드가 있었던 기억과 그것을 담을 수 있게 했던 void
그 자체, 기독교에서는 천국이라고 하고 소크라테스는 이데아 라고 했네. 영원불멸이야. 공허는 죽지 않아. 빅뱅 이전에 있었으니까."
…
나는 가만히 선생 앞의 빈 잔을 바라보았다. 컵 하나에 굳은 몸과 컵 하나에 조석지변하는 마음과 컵 하나에 담긴 태초의 공허를 가득 찬 술잔으로 찰랑대며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들과 비어 있는 찻잔으로 우주의 공허와 맞닿은 영적인 사람들이 뒤엉켜 돌아가는 세상, 서로의 술잔을 부딪히며, 가끔 우주를 향해 제 각자의 언어로 건배사를 하며 정신없이 살던 어느 날, 이어령이라는 어른을 만나 그가 어둠과의 씨름으로 값을 치른' 달고 깊은 공허를 나눠 마시고 있는 것이다.
*"공포는 없으신지요?"
"자신은 없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라는 사람은 최초로 죽음학을 했고 학습에 대한 강의를 그렇게 많이 했는데도 정작 자기가 암에 걸리고 감당을 못 했어. 그것을 본 한 기자가 물었지.
"당신은 임종하는 사람을 지켜보며 그렇게 많은 희망을 줬는데 왜 정작 당신의 죽음 앞에서 화를 내고 있느냐?"
로스가 이렇게 답했다네.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은 타인의 죽음이었어. 동물원 철창 속에 있는 호랑이였지. 지금은 아니야. 절창을 나온 호랑이가 나한테 덤벼들어, 바깥에 있던 죽음이 내 살갗을 뚫고 오지. 전혀 다른 거야.”
“전두엽으로 생각하는 죽음과 척추 신경으로 감각하는 죽음은 이토록 거리가 멀다네."
시한부 삶을 선고받을 때 인간은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가르쳤던 정신과 의사 퀴블러 로스, 그토록 오래 죽음에 훈련된 사람도 보통의 인간들처럼 부정과 분노로 출발해서 똑같은 절차를 거쳐갔다니. 철창 속의 호랑이와 철창 밖의 호랑이라는 말에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죽음 앞에 인간은 얼마나 몸서리치게 작은가
"죽음 앞에서는 연습도 오만이라고 이근호 정신의학자도 그러더군요. 살아서 하는 임종 연습조차 어릿광대 같은 놀음이라고요."
"테레사 수녀도 다르지 않았다네. 로스처럼 죽음을 저주하진 않았지만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었다고 탄식했지. 성처녀였으나 고통스럽게 죽었어. 암환자였던 신부 이야기도 있어. 암환자인 신부가 고해소에 앉아 다른 신부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네.
"나 암이야."
“안됐군. 그런데 나도 암이라네. 그런데 자네는 내게 무슨 고해하려고 왔나?"
“…여태껏 나는 신의 부르심이 없었어.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았다네."
“…자네, 정말 몰랐나? 지금 자네가 나한테 고해성사를 하고 있잖나. 그게 콜링이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지."
“자, 이 대화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드나?”
"고통 속의 의심. 진정 토로………… 그 자체가 신의 부르심이라는 말씀인가요?"
"맞아. 그게 신의 응답이지, 로스도 그 신부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고통 없는 죽음이 콜링인 줄 알았나? 아니야. 고통의 극에서 만나는 거라네. 그래서 내가 누누이 이야기했지. 니체가 신을 제일 잘 알았다고 말일세. 신이 없다고 한 놈이 신을 보는 거라네.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작 신을 못 봐. 니체 이야기를 더 해볼까?
*“니체가 어떻게 죽은 줄 아나?“
"미쳐서 죽었지요. 광인으로 떠나지 않았습니까?"
"사건이 있었어. 토리노 광장에서, 우체국으로 편지부치러 가다가 늙은 말이 채찍질을 당하는 걸 본 거야. 무거운 짐을 지고 끌고 가려는데 길이 미끄러우니 계속 미끄러지지 마부에게 채찍질을 당하는 늙은 말을 보고, 니체가 달려가서 말 목을 끌어안고 울었다네. 자기가 대신 맞으면서 때리지 마 때리지 마 하고 울다가 미쳤지. “어머니 저는 바보였어요"라고 마지막 말을 웅얼거리고는 십 년간 식물인간처럼 살다 죽은 거야. 그게 그 유명한 '토리노의 말'이지. 그게 바로 니체에게 다가온 신의 콜링이라네."
"무슨 말씀인지요?"
“토리노 광장에서 얻어맞는 말이 예수야. 채찍질 당하고 허적대는 늙은 말 그게 십자가를 메고 가는 지저스 크라이스트 Jesus Christ지. 그러니까 가서 말의 목을 끌어안고 엉엉 울었던 걸세. 자기가 늙은 말하고 무슨 관계가 있겠나? 가까우면 마부하고 가까워야지 그런데 니체는 그때 인간의 대열에 끼는 게 창피해서 인간을 거절했다네. 인간에서 벗어나려고 한 게 초인이거든.
이 토리노의 말' 사건을 흑백영화로 다룬 유럽 영화가 있어. 146
분 동안 마부와 딸이 광야에서 늙은 말 하나만 키우는 이야기야. 제목이 <토리노의 말>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이 지루한 영화야. 자네가 보면 반할 수밖에 없는 아주 기가 막히게 지루한 이야기라네."
"어떤 부분이 그토록 드라마틱하게 지루한가요?"
“예를 들면 말이 늪에 빠진 수레를 끌고 가려는 장면, 진흙은 바퀴를 붙들고 바퀴는 진흙에서 빠져나오려고 해, 진흙은 튀고 바퀴는 헛돌지. 그걸 긴 시간 동안 찍어서 보여줘.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감독이 그걸 찍고 있는 거야."
"진흙과 바퀴의 싸움을 두 시간 동안?"
"두 시간이 넘지 영화에서 인간은 팔 한쪽이 없는 마부와 그의 딸만 나와 먹을 것은 감자뿐이야. 혹, 불, 바람, 물..... 이런 것들이 하나씩 사라져, 나부끼던 바람이 사라지고 고여 있던 우물물도 말라버려, 우주가 사라져가는 이야기야. 천지창조를 거꾸로 돌리는 이야기지. 혼돈의 물이 가장 먼저 없어지고 폭풍 같던 바람이 없어진다네."
*“매사 귀를 쫑긋하고 들어야겠습니다. 이치를 거스르는 말에 예
민하게 반응하면서요."
"그렇지. 귀를 정확하게 세워서 그런데 그거 아나? 이목구비 중에서 귀가 가장 복잡하고 특이하다네. 눈 코 입은 성형수술하면 다똑같아지잖아. 귀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 1억 명이 다 모양이 달라. 평소엔 잘 안 보이고 거저 달려 있는 것 같지만, 귀야말로 얼굴의 지문이라고 나는 생각해. 그래서 고흐도 귀를 잘랐지. 귀의 형태는 들락날락이 비정형이고 랜덤해. 일종의 카오스 소용돌이야. 사람의 인체는 모든 게 정돈되어 있는데, 귀와 배꼽만 정돈이 안 돼 있어.“
"쓸모없어 보이는 배꼽도 그런 신비가 있었군요!"
"재미있지. 배꼽을 만져보게 몸의 중심에 있어. 그런데 비어 있는 중심이거든. 배꼽은 내가 타인의 몸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유일한 증거물이지. 지금은 막혀 있지만 과거엔 뚫려 있었지 않나. 타인의 몸과 내가 하나였다는 것. 이 거대한 우주에서 같은 튜브를 타고 있었다는 것. 배꼽은 그 진실의 흔적이라네.
혹 배꼽이 아무 쓸모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누워서 몸 위에 찻잔을 놓아보게. 어디에 놓을 텐가? 이마? 코? 아냐, 배꼽밖에는 없어. 비어 있는 중심이거든. 가장 중요한 것은 비어 있다네. 생명의 중심은 비어 있지. 다른 기관들은 바쁘게 일하지만 오직 배꼽만이 태연하게 비어 있어. 비어서 웃고 있지."
내 배꼽이 모나리자의 미소처럼 가만히 웃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어머니와 나의 몸이 두둥실 한 배가 되어 무한한 검은 우주를 걱정 없이 떠다니던 연기하고 집요한 시절을 시체가 될 때까지 뽑히지 않을 아름다운 기억의 칩을.
"(미소 지으며) 모든 게 풀어져도 마지막까지 안 풀리는 것을 배꼽의 수수께끼라고 한다네. 프로이트도 ⌜꿈의 해석⌟에서 해석 안 되는 것을 배꼽이라고 했어.
*"왜 매번 눈물 한방응입니까"
“늙으면 한 방울 이상의 눈물을 흘리 수 없다네. 노인은 점점 가겨워져서 많은 것을 담을 수 없어. 눈물도 한 방울이고, 분노도 성냥불의 긋듯 획 한 번이야.그게 늙은이의 스픔이고 분노야.
엉엉 소리 내 울고 피눈물을 올리는 것도 행복이라네. 늙은이는 기막힌 비극 앞에서도 딱 눈물 한방울이야."
“그러나 80년을 살아야 나올 수 있는 한 방울이죠."
“웃기는 이야기해 줄까? 만년필, 볼펜 같을 거 처음 쓸 때 시험 삼
아 아무 글자나 써보잖아. 그때 뭐라고 쓸 것 같나. 시인이고 소설가고 거창한 말 쓸 거 같지? 삶의 무게. 시간의 절정...…… 이런 것? 아니야. 볼펜 안 나올 때 써보라고 해봐. 대한민국, 출생 주소, 이런거 써, 사람, 도로, 신발………………이런 일상어 쓴다고. 절대로 심각한 내용 쓰지 않네. 한 방울도 그래."
"그래도 오래도록 마르지 않을 한 방울일 테지요."
"자네는 나에게 '진리'를 원하고 '정수'를 원하지. 그러나 역사는 많이 알려진 것만 기억한다네. 진실보다 거짓이 생존할 때가 많아. 진실은 묻히고 덮이기 쉬워, 하이데거가 그랬지. 일상적 존재는 묻혀 있는 존재라고. 내가 여러 번 얘기하지 않았나. 덮어놓고 살지 말라고. 왜냐면 우리 모두 덮어놓고 살거든. 덮어놓은 것을 들추는게 철학이고 진리고 예술이야. 그런데 지금 우리 시대가 가장 감쪽같이 덮어놓고 있는 게 무엇일 것 같나?”
"눈물은 아닐 테고요.“
"우리가 감쪽같이 덮어둔 것. 그건 죽음이라네. 모두가 죽네. 나도 자네도.“
*"우리가 진짜 살고자 한다면 죽음을 다시 우리 곁으로 불러와야 한다네. 눈동자의 빛이 꺼지고 입이 벌어지고 썩고, 시체 냄새가 나고.… 그게 죽음이야. 옛날엔 묘지도 집 가까이 있었어. 귀신이 어슬렁거렸지. 역설적으로 죽음이 우리 일상 속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 있었던 거야. 신기하지 않나? 죽음의 흔적을 없애면 생명의 감각도 희미해져."
“그런데도 우리는 죽음을 삶에서 내쫓았지요."
“죽음을 죽여버렸지. 깨끗이 포장해서 태우고, 추도 미사 드리고, 서둘러 도망쳤어. 『죽음 앞의 인간』을 쓴 필립 아리에스가 쓴 글에도 나오지만, 현대는 죽음이 죽어버린 시대라네. 그래서 코로나가 대단한 일을 했다는 거야. 팬데믹 앞에서 깨달은 거지. 죽음이 코앞에 있다는 걸."
“한때 뉴욕 거리에 시체 안치소가 들어서고 시신을 실은 냉동트럭이 즐비했습니다. 서늘한 광경이었어요."
"비로소 지구의 인간들이 생명이 뭐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거야. 오늘 있던 사람이 내일 없어질 수도 있구나. 요즘은 젊은 사람들, 아니 어린아이들도 생명을 하찮게 말할 때가 많아. 야단 한번 쳐도 '누가 낳아달랬어? 공연히 낳아서 고생만 시키잖아 쏘아붙이기 일쑤지.
그런데 길에서 강도 만나봐. 코로나라도 걸려보게. 코로나가 처음 들어왔을 때를 생각해보게. 언제 우리가 마스크 한장 사려고 그렇게 길게 줄을 서본 적이 있나?
마스크 한 장. 그게 생명이었어 신인류가 죽음을 잊고 돈 놀이, 관능적인 감각에만 빠져 있다가 정신이 든 거야. 자기 호주머니 속에 덮여 있던 유리그릇 같던 죽음을 발견한 거야, 주머니에 유리그릇 넣고 다녀봐 깨질 것 같아서 불안하지? 그게 죽음이라네.
코로나는 바로 그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을 안고 있는 우리 모습을 들춰냈어. 진실의 반대말이 뭔 줄 아나?"
"진실의 반대말은 망각이라고 그러셨지요. 잊지 않고 있습니다."
"맞아, 우리가 잊고 있던 것 속에 진실이 있어. 경계할 것은 거짓이 아니라 망각이라네. 덮어버리고 잊어버리는 것.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어. 은폐가 곧 거짓이야. 그러니 자네는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떠오르는 것, 들춰지는 것들을 그때그때 잘 스냅하게나.“
*"결정된 운이 7이면 내 몫의 3이 있다네. 그 3이 바로 자유의지야. 모든 것이 갖춰진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는 행위, 그게 설사 어리석음일지라도 그게 인간이 행사한 자유의지라네. 아버지 집에서 지냈으면 편하게 살았을 텐데, 굳이 집을 떠나 고생하고 돌아온 탕자처럼.… 어차피 집으로 돌아올 운명일지라도, 떠나기 전의 탕자와 돌아온 후의 탕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네. 그렇게 제 몸을 던져 깨달아야, 잘났거나 못났거나 진짜 자기가 되는 거지. 알겠나?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수만 가지 희비극을 다 겪어야 만족하는 존재라네.”
"선생님! 그런데 그런 자유의지의 일환으로 열심히 노력했는데 매번 운이 따라주지 않아서 낙심하는 사람도 많이 봤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노력과 운의 부조화를 견디기 힘들어합니다. 나는 실력이 있는데도 왜 일이 잘 안 풀리냐는 거죠.“
"가위바위보에서 진 사람은 화는 나겠지만 '난 실력이 없어'라고 생각하지 않아. 반면 달리기 선수가 백 미터 달리기를 할 때마다 꼴찌 한다면 창피함을 느끼겠지. 여기서 미묘한 이슈가 생겨, '모든 것이 정해진 운명'이라고 해버리면 패자는 변명거리가 생겨. '내가 지는 건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운이 없어서'라고, 숙명론, 팔자론으로 풀어버리면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났어'로 모든 걸 덮을 수 있어'로 모든 걸 덮을 수 있네, 가난해도 실패해도 '팔자' 핑계 대면 그만이거든. 그런데 인생의 마디마다 자기가 책임지지 않고 운명에 책임을 전가하는 건, 고약한 버릇이라네.
마라톤 경주를 하다 갑자기 하늘에서 돌멩이가 날아와서 넘어진 사람은 '운이 나빴다'는 위로를 받을 만해. 그러나 인간이 노력할 수 있는 세계에 운을 끌어들이면 안 돼. 커트라인 1점 차로 누군가는 시험에 붙고 떨어지지만, 그것도 근접한 수준의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경쟁이야. 세상은 대체로 실력대로 가고 있어. 그래서 나는 금수저 흙수저 논쟁을 좋아하지 않아. '노력해봐야 소용없다'는 자조를 경계해야 하네.“
*"알렉산더가 통 속에 사는 거지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찾아갔을
때 일화도 그 예야. 아주 유명한 얘기지. 대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더가 조그만 통 속에 들어앉아 햇빛을 쬐는 디오게네스에게 그랬어.
'나는 정복자니, 왕국의 일부를 너에게 줄 수 있다. 소원을 말해 보라.'
'비키시오. 당신이 햇빛을 가리고 있으니 비켜주시오.'
디오게네스는 알고 있었어. 알렉산더가 지배한 건 법계의 세계였다네.
'왕국은 네가 지배하지만 햇빛은 지배하지 못해. 왕국은 네 것이라도 태양은 자연의 것이다. 그러니 비켜나 지금햇빛 쬐고 있는거야. 네 권력 쬐고 있는 거 아냐. 난 이 통속에서 살아. 네 왕국이 아니라.‘
디오게네스에게 통은 생각의 세계야. 그래서 권력자 앞에서 단호할 수 있는 거지. 네가 지배하는 세계로 나를 지배할 수 없다고 내 생각을, 태양빛을 너는 지배할 수 없다고. 너는 그저 말 타고 땅 따먹는 권력을 갖고 있을 뿐이라고 그런데 독재자들이 그건 몰라,자기가 하늘도 움직이고 바다도 때리고 햇빛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그런 '비리'에 저항할 수 있어야 '자유인'이라고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둥글둥글, '누이 좋고 매부 좋고'의 세계에선 관습에 의한 움직임은 있지만, 적어도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자가 발전의 동력은 얻을 수 없어. 타성에 의한 움직임은 언젠가는 멈출 수밖에 없다고, 작더라도 바람개비처럼 자기가 움직일 수 있는 자기만의 동력을 가지도록 하게."
"자기만의 동력이요?"
“백번을 말해도 부족하지 않아. 생각이 곧 동력이라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중력 속의 세상이야. 바깥으로부터 무지막지한 중력을 받고 살아. 억압과 관습의 압력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생각하는 자는 지속적으로 중력을 거슬러야 해. 가벼워지면서 떠올라야 하지 떠오르면 시야가 넓어져."
“생각이 많으면 무거워지는 게 아니라 가벼워진다고요?"
"생각이 날개를 달아주거든. 그래비티, 중력에 반대되는 힘, 경력이 생기지. 가벼워지는 힘이야. 그런 세계에서는 사실 '사회성'이라는 건 중요하지 않아.“
"(반색하며) 사회성 떨어지는 저 같은 사람도 희망이 있겠네요."
"하하, 사회성 좋은 사람이 위대한 철학자가 되고 예술가가 된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철학자 헤겔도 훌륭한 성품은 아니었어. 하숙집 딸과 결혼하겠다고 공짜로 머물다가 나중엔 그 모녀를 낮선 동네에 데려다 놓고 몰래 도망간 이력이 있어. 나중에 자식과 친권 소송을 벌이기도 해 '나는 네 애비가 아니다'라고 부정했고, 그 아이는 결국 군대에 가서 죽었지. 헤겔은 역사철학을 만들어서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미치고 전 세계의 정세계를 지배했는데, 그 자신은 정작 상식적인 사회생활, 가정생활을 못 했다고.
성공한 사람들・・ 뒤집어보면 다 실패자들이야. 양면이 있는 거야.
* 아흔아홉 마리 양을 버려두고 한 마리 양을 구하러 간다는 예수의 말을 생각해보라고 왜 그랬을까? 아흔아홉 마리가 한마리보다 귀한 것 같지? 경중이 다를 것 같지? 아니야, 아흔아홉 마리도 다 한 마리씩이야."
"선생님! 아흔아홉 마리 양을 두고 길 잃은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예수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옵니까? 우리가 숫자의 논리에 현혹
되어 있다는 말씀인가요?"
"이보게!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면 다른 아흔아홉 마리도 길을 잃을 수 있어. 왜 그 생각을 못하나? 길 잃은 한 마리가 아흔아홉 마리와 다른 게 아니야. 똑같아. 똑같다네. 어려운 얘기가 아니야. 한 명의 죽음은 모두의 죽음을 예표하는 거야.“ …
백만 명이 죽었다'고 하면 그건 통계 백만 명이 죽어도 그건 다한 사람의 사적 죽음이거든. 그걸 있으면 안 돼. 이 세상에 백만명이라는 건 없어 국가에서, 사회에서 볼 때 백만 명인 거야. 서부전선도 독일 병사의 시각에서 보니까 '서부전선'인 거잖나. 그게 인식론의 문제야. 철학자들이 말하는 타자성의 철학이 거기서 나오지. “타자를 나의 것으로 만들지 말고 그가 있는 그대로 있게 하라. 타자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게 사랑이고, 그 자리가 윤리의 출발점이라네. 타자를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위해 왜곡해선 안 돼. 일례로 우리는 내가 아플 때 남이 그걸 아는 줄 알아. 아프냐? 나도 아프다! 그런데 그 아픔은 자기 아픔을 거기다 투영한 것뿐이네."
"나는 타인의 아픔을 모른다고요?".
"몰라. 모른다네. '지금 저 사람이 피를 흘려서 얼마나 아플까?" 그건 자기가 아픈 거야. 자기 마음이 아픈 거지. 우리는 영원히 타인을 모르는 거야. 안다고 착각할 뿐. 내가 어머니를 아무리 사랑해도 어머니와 나 사이에는 엷은 막이 있어. 절대로 어머니는 내가 될 수 없고 나는 어머니가 될 수 없어. 목숨보다 더 사랑해도 어머니와 나의 고통은 별개라네. 존재와 존재 사이에 쳐진 얇은 막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위선을 떨지. '내가 너일 수 있는 것'처럼.
*"내가 타인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건 '떼'로 사는 거라네. 떼 지어 몰려다니는 거지. 그게 어떻게 인간인가? 그냥 무리 지어 사는거지 인간이면 언어를 가졌고, 이름을 가졌고, 지문을 가졌어. 그게 바로 onlyone이야. 무리 중의 '그놈이 그놈’이 아니라 유일한 한 놈이라는 거지. 그렇게 내가 유일한 존재가 되었을 때 비로소 남을 사랑하고 끌어안고 눈물도 흘릴 줄 아는 거야. 내가 없는데 어떻게 남을 끌어안겠나? 내가 없는데 어떻게 우리가 있어? 그런데 '나’ 없는 우리? 아니될 말씀이야 큰 일리지 그래서 내가 사이를 강조했잖아. 나와 너 사이. 그 사이에 나도 있고 있다는 거지. 자네와 나사이에 incerview가 있는 것처럼”
"갈수록 inter가 중요하죠.”
"중요해 앞으로 점점 더 interface 접속장치가 중요해. (컵을 가리키며) 이 컵을 보게 컵은 것이고 나는 나지. 달라, 서로 타자야. 그런데 이 컵에 손잡이가 생겨봐. 관계가 생기잖아 손잡이가 뭔가? 잡으라고 있는 거잖아 손 내미는 거지. 그러면 손잡이는 컵의 것일까? 나의 것일까?
"서로의 것이죠."
“컵에 달렸으니 컵의 것이겠지만, 또 컵의 것만은 아니잖아. 나 잡아주세요"라는 신호거든. 손잡이 달린 인간으로 사느냐. 손잡이 없는 인간으로 사느냐. 그게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그런데 또 한편 컵에 손잡이가 아니라 자기 이름이 쓰여 있다고 생각해봐. 갑작스럽게 내 것이 되잖아. 같은 사물인데도 달라지는 거야. 유일해지는 거지. 이런 생활 속의 생각이 시가 되고 에세이가 되고 소설이 되고 철학이 되는 거라네.”
*"내가 어디 가서 춤을 추겠나? 춤출 데가 없잖아, 댄스홀이나 마당같은 데 사람 몰려 있는 걸 싫어해, 거기 끼어 춤출 이유가 없었어."
"춤추고 싶은 마음이 든 적도 없으세요?"
"없어. 대신 춤에 대해서 썼지. 막춤에 대해서도 얘기했고."
"춤을 춘 적은 없지만, 춤을 쓴 적은 있으시죠. 한때 '인생은 마라톤'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더 나아가 '인생은 춤'이라고들 해요. 자기만의 바이브, 리듬으로 살자는 거죠."
“목적이 있으면 걷는 게 되고 목적이 없으면 춤이 되는 거라네. 걷는 것은 산문이고 춤추는 것은 시지. 인생을 춤으로 보면 자족할
수 있어. 목적이 자기 안에 있거든. 일상이 수단이 아니고 일상이 목적이 되는 것, 그게 춤이라네. 그런 의미에서 글을 쓰고 사는 것이 바로 나에게는 춤이 된다네.“
“지금 이 순간의 불꽃인 거죠. 선생님과의 대화가 저는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라스트 댄스………… 라고나 할까요."
그렇게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라는 황홀에 취해, 나는 대놓고 ‘웃픈’ 얼굴이 되어버렸다.
*"선생님, 럭셔리한 삶이 뭘까요?" "
"럭셔리한 삶……… 나는 소유로 럭셔리를 판단하지 않아. 가장 부유한 삶은 이야기가 있는 삶이라네. '스토리텔링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럭셔리지."
“값비싼 물건이 아니고요?",
"(놀라며) 아니야. 똑같은 시간을 살아도 이야깃거리가 없는 사람은 산게 아니야. 스토리텔링이 럭셔리한 인생을 만들어. '세일해서 싸게 산' 다이아몬드와 첫 아이 낳았을 때 남편이 선물해준 루비 반지중 어느 것이 더 럭셔리한가? 남들이 보기엔 철지난 구식 스카프라도 어머니가 물려준 것은 귀하잖아 하나뿐이니까. 우리는 겉으로 번쩍거리는 걸 럭셔리하다고 착각하지만, 내면의 빛은 그렇게 번쩍거리지 않아. 거꾸로 빛을 감추고 있지. 스토리텔링에는 광택이 없다네. 하지만 그 자체가 고유한 금광이지"
*"어떤 대화였습니까?"
"그것도 죽음에 대한 이야기였네. 내가 그랬지. 죽음은 신나게 놀고 있는데 엄마가 '얘야, 밥 먹어라' 하는 것과 같은 거라고 웃겨주려고 한 이야기였는데, 농담 속에 진실을 말해버렸어. 죽음이라는게 거창한 것 같지? 아니야. 내가 신나게 글 쓰고 있는데, 신나게 애들이랑 놀고 있는데 불쑥 부르는 소리를 듣는 거야.
'그만 놀고 들어와 밥 먹어!'
이쪽으로, 엄마의 세계로 건너오라는 명령이지. 어릴 때 엄마는 밥이고 품이고 생명이잖아. 이제 그만 놀고 생명으로 오라는 부름이야...… 그렇게 보면 죽음이 또 하나의 생명이지. 어머니 곁, 원래 있던 모태로의 귀환이니까."
"어머니 곁으로....."
"그래. 인간이 태어나서 사는 과정이 그래. 아기 때는 어머니 치자락 붙잡고 떨어지면 죽는 줄 알지. 그러다 대문 밖으로 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친구들하고 정신 빼놓고 놀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지. 그러다 부르면 화들짝 놀라서 원위치로 가는 거야.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거라네.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하잖아. 탄생의 그자리로 가는 거라네. 그래서 내가 일관되게 얘기하는 것은 죽음은 어둠의 골짜기가 아니라는 거야. 까마귀 소리나 깜깜한 어둠이나 세계의 끝, 어스름 황혼이 아니지."
"눈부시게 환한 대낮이지요."
"5월에 핀 장미처럼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대낮이지. 장미 밭 한복판에 죽음이 있어. 세계의 한복판에. 생의 가장 화려한 한가운데 죽음의 자리는 낭떠러지가 아니야. 고향이지."
"그 말이 왜 이토록 아름다울까요."
"어둠이 아니라 빛이라서, 밤이 아니라 대낮이라 그렇지."
"그 모든 이치를 관심, 관찰, 관계의 맥락으로 깨달으셨다는 거죠?“
*"젊었을 때는 관심이 최우선이었어. 사오십대 되니 관찰을 알겠더군. 늙어지니 관계가 남아 관계가 생기려면 여러 대상에 한꺼번에 기웃거리면 안 돼. 데이트하는 곳에 가봐. 열 명 있어도 한 명만 보이잖아. 그 한 명만 관찰하는 거잖아. 사진찍을때 전체 풍경이 잡혀도 내 눈이 가는 한 곳에 초점 맞추듯. 어차피 우리는 전체를 찍을 수 없어."
"죽기 직전, 눈앞에는 인생이 파노라마 필름처럼 펼쳐진다는 얘기를 들었는데요."
"아닐세. 인생은 파노라마가 아니야 커트의 프레임이야. 한 커트 한 커트 소중한 장면을 연결해보니 파노라마처럼 보이는 거지 한 커트의 프레임에서 한 관계가 이뤄져 찍지 못한 것, 버렸던 것들이 나중에 다시 연결돼서 돌아오기도 해."
인생이 파노라마가 아니라 한 커트, 커드의 연결이라는 말이 새로웠다. 3D 영화가 아니라 마치 흑백 무성영화처럼,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기억의 극장에 저장되고 있겠지. 그리고 어느 날, 가장 환한 대낮에, 가장 눈부신 순간에 편집되어 펼쳐질 테지.
"대화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다 여기까지 왔어요. 혼자 쓴 글인 줄 알았지만, 글도 말도 함께 남은 것이었다는 깨달음이요..."
“젊을 때도 그걸 알았지만, 안다는 것과 깨닫고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른 거였어. 천지 차이야. 지금은 몸으로 그 사실을 느끼고 있다네. 특히 나처럼 환자가 되면 그 느낌이 더 강렬해, 건강했을 때는 혼자 걸어다녔는데, 요즘엔 가끔 부축을 받거든. 평생 혼자 걸을 줄 알았는데 지팡이의 도움을 받고, 부축해주는 이가 나타나더라고. 그렇다고 몰락하고 완전히 의존하는 사람이 됐을까? 아냐. 반만 의존하잖아. 업혀가는 게 아니니까. 마지막 업혀가는 건 죽음이지. 완전한 의존은 내가 존재하지 않는 거야. 그렇게 나라는 사람이 없어지는 과정에서 '상호성'을 느끼고 있다네. 지팡이에 무게를 실으면서 중얼거리는 거야.
“완전히 독자적인 힘이라는 게 없구나.”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은 선생님에게 얼마나 새로운 사랑인
가요?"
"(눈을 빛내며) 성경은 참 새로워. 정말 새로워."
“성경의 어떤 면이 그렇게 새롭다는 거지요?"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거든. 성경처럼 우리의 상식을 통째로 뒤집는 책은 없어. 아흔아홉 마리 양을 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가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나. 그런데 생각해보면 기가 막힌 얘기야 자식 키워본 사람은 알지. 성한 자식보다 학교도 안 다니고 말썽 피운 놈이 더 눈에 밟히거든. 그게 사랑이잖아. 회사에서는 무능한 놈 해고하면 돼. 그런데 어머니는 자식을 못 바꿔 다른 애하고 바꿀 수 있어? 못 바꾸잖아. 그게 한 마리 양을 버리지 못하는 예수님 얘기야. 숫자로 따질 수 없다는 거지."
“하지만 양으로 장사하는 주인 입장에서 보면 아흔아홉 마리 버려두고 한 마리 찾기 쉽지 않습니다. 한 마리 찾으러 갔다가 늑대가 아흔아홉 마리 다 먹어버리면 어쩝니까?"
"이보게 성경의 '탕자' 이야기를 생각해보게나. 자기한테 효도하는 큰아들 놔두고, 집 떠났던 작은아들이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오니 반가워하잖아. 탕자이기 때문에 집을 나갔기 때문에, 그 한 마리 양이 아흔아홉 마리보다 뛰어날 거라는 생각은 왜 못 하나?
아흔아홉 마리 양은 제자리에서 풀이나 뜯어 먹었지. 그런데 호기심 많은 한 놈은 늑대가 오나 안 오나 살피고, 저 멀리 낯선 꽃향기도 맡으면서 지 멋대로 놀다가 길 잃은 거잖아. 저 홀로 낯선 세상과 대면하는 놈이야. 탁월한 놈이지. 떼로 몰려다니는 것들. 그 아흔아홉 마리는 제 눈앞의 풀만 뜯었지. 목자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닌 거야. 존재했어?"
허공에 날아든 단도처럼, "존재했어?"라는 스승의 말에 뒷골이 서늘해졌다.
"너 존재했어?"
"너답게 세상에 존재했어?"
"너만의 이야기로 존재했어?“
*“예술에 한정시키지 않더라도 재능은 타고나는 것이라고 생각하
세요?"
"타고나 모든 아이들이 나타나 천재로 태어나서 둔재로 성장할 뿐이지. 하나님이 주신 것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갖고 사는 사람들이 천재라네. 그 재능을 어머니가 줬겠어? 아버지가 줬겠어? 학교 선생님이 줬겠어? 하늘이 준 거지. 태아는 하늘이 준 재능으로 엄마 배 속에서 10개월을 살아. 그리고 태어날 시간을 스스로 정해서 나온다네. 제왕절개 수술을 하지 않는 한 그래. 아이는 스스로 태어나는 거야, 엄마의 의지로 낳은 게 아니야. 아이가 아이의 의지로 나온 거지, 생일날이 그 의지와 힘이 가장 만개한 날이야. 출생일만은 하나님이 주신 날짜 중에 내가 골라서 나온 것이거든. 그 이후로는 전부 남의 간섭과 보호를 받고 산다네."
"이미 이전 세대가 정해준 코스를 달리게 되죠."
"그러다 보니 '짜장면 먹을래? 짬뽕 먹을래?"도 잘 못 고르잖아. 선택의 자유를 못 누리는 거지."
“정해주는 대로 따라가면 책임도 남에게 전가할 수 있거든요. 선택은 에너지가 드는 일이니까요. 선택하고 책임지는 것도 인간답게 사는 재능인 것 같습니다."
“제 머리로 선택한다면 그렇지. 그런데 요즘엔 생각도 좌우로 진영 나눠서 정해주더구만. 저건 좌니까 빨갱이! 저건 우니까 꼴통”
"정의나 불의냐도 진영에 따라 답을 내죠."
“(혀을 차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일세. 지금 내가 자네와 이 정도 대화를 하는 것도 내가 자판기가 아니기 때문이라네. 답이 정해져 있으면 대화해서 뭘 하겠나? 자네가 만약 내일 같은 질문을 한다면 내 대답은 달라져 있을지도 몰라. 그래서 오늘의 대화가 중요한 거야. 우리가 내일이 대화를 나눴더라면 오늘 같지 않았을 걸세. 그래서 오늘이 제일 아름다워. 지금 여기. 나는 오늘도 내일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신념을 가진 사람을 신뢰하지 않아. 신념 가진 사람을 주의하게나, 큰일 나, 목숨 내건 사람들이거든."
"신념이 위험한가요?"
"위험해. 신념처럼 위험한 게 어디 있나?”
"왜 위험하죠?"
"육탄 테러하는 자들이 다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네. 나치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8백만 명 유대인을 죽였어. 관점에 따라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게 인간사인데 '예스'와 '노우'만으로 세상을 판단하거든, 메이비maybe를 허용해야 하네. 메이비maybe가 가장 아름답다고 포크너가 그랬잖아. '메이비maybe" 덕분에 우리는 오늘을 살고 내일을 기다리는 거야..
오늘도 내일도 똑같으면 뭐하러 살 텐가, 진리를 다 깨우치고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더 이상 살 필요가 없네. 이제 다 끝났잖아. 서울이 목표인 사람은 서울 오면 끝난 거야. "인생은 나그네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경유지, 반환지가 있을지언정 목표는 없네. 평생을 모험하고 방황하는 거지, 그 위에서 계속 새 인생이 일어나는 거야. 원래 길의 본질이 그래, 끝이 없어. 이어지고 펼쳐진 뿐.
*“길 위의 인생은 안식이 없지 않습니까? 신념은 거짓 안식일지언정 비빌 언덕이라도 되는데 말입니다."
"신념에 기대 사는 건 시간 낭비라네. 만 그대로 거짓이야. 신념 속에 빠져 거짓 휴식을 취하지 말고, 변화무쌍한 진짜 세계로 나와야하네."
"평생 안식이 없더라도요?"
"여행자가 될 텐가, 승객이 될 텐가? 그것부터 결정해야지, 승객은 프로세스가 생략돼 있어, 비행기 타고 한숨 자고 나면 뉴욕이지. 신념을 가진 사람은 인생 프로세스를 생략한 사람이야. 목표만 완성하면 끝이지. 돈이 신념이다. 백만장자 되고 나면 어떻게 살 거야? 집 한 채 갖는 게 목표다? 집들이 하고 나면 허무해서 어떻게 살아?"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집에 안주하면 안 되나요?”
“프로세스! 집이 아니라 길 자체를 목적으로 삼게나. 나는 멈추지 않았네. 집에 정주하지 않고 끝없이 방황하고 떠돌아다녔어. 꿈이라고 하는 것은 꿈 자체에 있는 거라네. 역설적이지만, 꿈이 이루어지면 꿈에서 깨어나는 일밖에는 남지 않아. 그래서 돈키호테는 미쳐서 살았고 깨어나서 죽었다고 하잖나. 상식적인 사고로는 이해가 안 되는 헛소리일 수도 있어. 하하"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기어이 유언의 레토릭으로.....”
"이런 역설을 모르면 인생 헛산 거라니까. 꿈이라는 건. 빨리 이루고 끝내는 게 아니야. 그걸 지속하는 거야. 꿈 깨면 죽는 거야. 내가 왜 남은 시간을 이렇게 쓰고 있겠나? 죽고 나서도 할 말을 남기는 사람과 죽기 전부터 할 말을 잃는 사람 중 어느 사람이 먼저 죽은 사람인가? 유언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거라네.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네."
10년 전에 할 말 다하고 동어반복 하는 사람은 유언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죽음 전에 이미 죽어버린 사람이라고, 스승은 일갈했다.
*"그게 마스크와 똑같은 얘기라네. 마스크는 나를 위해 쓰지만 남을 위해서도 쓰잖아. 부탁도 그래, 나를 위해 하는 거지만, 그게 남에게도 유익이거든. 나는 남에게 부탁할 수도 부탁받을 수도 있어. 그걸 알기에 도와주는 거야. 반대로 남한테 부탁 안 하는 사람은 남의 부탁도 잘 들어주지 않아."
"맞습니다. 빈자들은 늘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에 이웃의 부탁을 선선하게 들어주는 한편, 부자들은 타인의 도움이 필요 없기에 이웃을 신뢰하지도 부탁을 들어주지도 않는다고, 데이비드 데스테노David DeSteno라는 사회심리학자가 그러더군요." "
"어려운 얘기가 아니야. 보통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남의 부탁을 받으면 쉽게 거절 못 해. 돕는 게 생존에 유리하거든. 살아남으려는 이기적 유전자가 이타성으로 프로그래밍이 돼 있어. 타인의 부탁을 거절 못 하는 게 딱 그 얘기야~
"사회적 생물의 특성이죠"
"사람들이 다 자기만 아는 것 같잖아? 실제로는 안 그래. 길가는데 어린애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잖아? 그러면 백이면 백, 다 뛰어들어서 그 어린애부터 꺼내 버스가 진흙탕에 빠져 헛바퀴 돌리고 있으면 지나가던 사람이 차에서 내려서 함께 민다고. 그래서 그 유명한 소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파 뿌리 이야기가 나오는 거야. 심오한 이야기지.
살면서 선행을 베른 적 없는 인색한 노파가 지옥에 갔어. 지옥불에 빠져 허우적거리는데 수호천사가 그 노인을 가엽게 보고 하나님께 간청을 하지, 생전에 저 노파가 거지에게 파 한 뿌리를 준 적이 있으니 선처해달라고,
하나님은 그 노파가 파 한 뿌리를 붙잡고 천국으로 오는 것을 허락해, "평생 인색했지만 그래도 파 한 뿌리의 작은 선행이라도 했으니 그것을 기억한다"고. 노파가 신이 나서 파 뿌리를 붙잡고 지옥불을 빠져나오려는데, 그걸 본 다른 놈들도 '살려달라"고 그 파뿌리에 우루루 아귀처럼 달라붙는 거야!!
노파가 달라붙는 손길을 밀쳐내며 소리쳤지.
"이거 내 파 뿌리야!"
그 순간, 후드득 파뿌리는 끊어지고 모두 지옥불에 떨어졌다네."
"스스로 파뿌리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조차 모르는 인간의 이기심에 뼈가 저렸다.
"어쨌든 파뿌리 하나의 선행이라도 신에게 구제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네요."
"끝까지 이기적일 것 같은 사람도 타인을 위해 파뿌리 하나 정도는 나눠준다네. 그 정도의 양심은 꺼지지 않는 존재가 인간이거든 남을 위해 뭔가를 해주려는 마음이 인간에게는 있어.
*"과학의 실수요?"
"그래, 진짜 인간을 뺀 거야. 인간은 변덕스럽고 어디로 튈지몰라. 보편성이 없어. 사실 모든 생물이 다 그래, 개구리가 어디로 뛸지 모르는 것처럼, 그런데 생명 아닌 것은 안 그래 0도에서 얼고 100도에서 끓지, 과학으로 일반화하려면 그 대상이 정물이어야 하는 거야. 생명이 없어야 하는 거지. 나비 관찰할 때 보라고 날아다니는 나비를 관찰할 수 있나? 죽여서 포르말린 적셔 핀으로 꼿고 보잖아. 과학은 인간이 살지 않는 달나라 인간이 살지 않는 우주를 기준으로 해서 만들어진 거야. 거기에는 인간이 없어. 그러니까 인간을 표준으로 하지 않는 것이 과학이야. 인간을 배제해야 성립되는 것이 과학이지."
"과학자들은 그것을 자부심으로 여기고 있더군요. 지구에서도 달에서도 화성에서도 동일한 수식으로 힘과 속도를 풀 수 있으니, 과
학만이 유일하게 믿을 만하다는 거죠.”
"과학은 유니버설 우주적인 것을 기준으로 하고 있으니까. 만물의 척도를 인간으로 하면 비과학이 돼버려, 왜? 우주 공간에는 인간이 없으니까. 인간을 배제해야 통하는 게 과학이야. 그래서 과학은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걸 인정 안 해, 과학의 눈으로 보면 인간이라는 표준은 가짜야. 인간을 기준으로 하면 제멋대로가 되거든..
사람은 몹시 제멋대로야. 어디로 튈지 모르지. 개는 훌륭하고 벼룩은 나쁘고 까마귀는 흉악하고 꽃은 아름다워! 그런 저마다의 개별적인 주관이 과학의 시야에서는 이물질이야. 인간을 없야 과학이 선명해져, 그게 수학이라네. 수학은 인간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거든 그래서 구구단은 무조건 외울 수밖에 없는 거야. 6×7=42는 인간의 바깥에서 이미 정해진 논리야. 그래서 한국에서도 통하고 영국에서도 통하고 달나라에서도 통해 수리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실제 경험과 관계없어. 어쩌면 신에 가까운 거지. 그런데 말이지…."
스승의 말끝에 맑은 기운이 돌았다.
"그런데요?"
"문학예술은 그렇지 않아, 인간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네. 동물을 이야기해도 인간이 돼. 이솝우화처럼. 과학과 예술이 대립하는 이유는 분명해 과학은 모든 것을 비인간으로 가정하고, 예술은 모든 것을 '인간'으로 상상하기 때문이라네. 물론 예술 중에서도 추상예술이 있지. 그런데 그 또한 인간 경험을 바탕으로 한 거야. 인간의 시각 경험으로 미술이 청각 경험으로 음악이 언어 경험으로 문학이 탄생한다네. 인간의 경험, 그 자체는 구상이 될 수 없거든.“
*“정상에 머무르지 않는 진짜 이유가…”
“갈증이 사라질까 두려워서야 내겐 갈증이 필요하다네. 나는 그것을 두레박 같은 갈증이라고 불러. 두레박은 물을 푸면 비워야 해. 그래서 영원히 물을 풀 수 있어. 독은 차면 그만이잖나. 채우는게 목적이니까. 반면 두레박은 물의 갈증을 만들지."
"그게 그 물질의 속성이니까요.
"두레박의 속성이지, 영원히 채울 수 없다는 것. 나는 사람들 지나가는 거 보면 딱 감이 와.
"저 사람은 두레박이 구나. 저 사람은 독이구나!"
물독들은 제 인생을 남은만큼 물로 채우겠다고 아웅다웅하며 살아 반면 두레박들은 눈이 반짝반짝해, 좀 까칠하고 불만도 많고 빨리 걷지, 딱 두레박이야 두레박들은 원하는 거 줘도 금방 딴 거 할 사람들이야. 붙들려고 하면 떠나버려, 지적 보헤미안인 거라. 내가 늘 말하는 우물 파는 사람들이라네."
"나 자신이 물독인가 두레박인가. 아는 것도 중요하겠습니다."
"그렇지, 두레박 스타일은 한곳에 안주하지 못하고 직업도 이것 저것 여러 가지야. 인생이 변화무쌍해서 '나는 왜 이럴까' 곧잘 후회는 해도 자살은 안 해. 다음이 또 있으니까. 그런데 물독은 다 채우면 허무해진다네. 예를 들어 부부가 인생 올인하고 빚내서 아파트 한 칸 마련했어. 이사하면 그다음에 뭘 할 거야?"
“남들처럼 새 가구 넣어야죠 욕망은 매일매일 새살처럼 자라나니까요.”
“남 쫓아가는 욕망은 물독도 두레박도 아니고 돌멩이라네. 아름답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 그 갈증을 자기 안에서 만들어내지 못하면 돌멩이처럼 되는 거야. 문제 하나 내지. 자네 앞에 열두 개의 문이 있다고 상상해보게나 한 개는 행복의 문이고 나머지는 지옥의 문이야. 하나의 문을 선택해서 들어가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나?”
"어렵네요. 우물쭈물하며 시간만 보낼 것 같습니다."
"행복의 돈이 저 앞에 있지만, 잘못 열었다가는 떨어져 죽을 테니 그냥 그 자리에 앉아 있겠다는 거지? 행복을 추구하지만 행복의 문 바깥만 서성거리는 사람. 모험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보수주의자의 태도지.
그런데 정반대가 있어.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행복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죽어라 올라가. 거기 가면 또 행복은 다른 산꼭대기에 있다고 해, 이 사람은 계속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거야. 사람은 그렇게 두 종류야. 가만히 앉아 어딘가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부산하게 행복의 뒤꽁무니를 쫓아 뛰어다니는 사람"
"선생님은 어느 쪽이신가요?"
"나는 산도 올라가고 호수도 건너가지."
"거기에 행복이 있었나요?“
"나에게 행복은 완벽한 하나를 쓰는거야. 그런데 그게 안되는 거지. 그러니까 계속 쓰는 것이고 그런데 알고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글은 실패한 글이라네. 지금까지 완성된 성인들 중에 글을 쓴 사람은 없어. 예수님이 글을 썼나? 공자가 글을 썼나? 다 그 제자들이 쓴 거지. 역설적으로 말하면 쓰여진 글은 완성되지 못한 글이야. 성경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인간이 쓴 글이고, 세상의 모든 경전, 문자로 쓰여진 것은 결국 완성되지 못한 그림자의 흔적일 뿐이네. 나 또한 완성할 수 없으니 행복에 닿을 수 없어. 그저 끝없이 쓰는 것이 행복인 동시에 갈증이고 쾌락이고 고통이야. 어찌 보면 고통이 목적이 돼버린 셈이지.“
*“신도 그렇게 갑자기 우리에게 온다네. 준비해도 안 올 수 있고, 준비 안 해도 올 수 있어. 하나님은 우리를 갑작스럽게 방문하시지. 마치 재앙이 예고 없이 덮치듯. 신의 구제도 그렇게 오는 거야. 사랑도 행복도 영성도 그렇게 갑작스럽게 우리를 덮치는거라고 나는 느껴."
"영성은 바깥에서 오는 것이군요?"
"그렇다네. 다만 흡수할 수 있는 반사판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겠지. 필름의 감광지 같은거야. 빛을 받아서 반응할 수 있는가. 나는 하나님을 믿기 전에도 그런 체험들을 했던 거야. 생과 사의 엷은 막을 어릴 때 느꼈고, 그래서 어머니 코밑에 손을 대어보았고, 대낮에 굴렁쇠를 굴리며 눈물을 흘린거라네. 어린애들은 다 영성을 가지고 태어나, 어른이 되면 무뎌질 뿐이지. 어린애의 슬픔, 어린애의 두려움, 어린애의 그리움은 모르지만 다 알고 있는 상태라네.”
*"고난이 내 그릇의 넓이와 깊이를 재는 저울일까요?"
"고난은 나, 너, 우리, 인류 모두의 저울이지. 나치 수용소의 체험을 기록한 빅터 프랭클의 '밤과 안개를 보면 극단적 고난에 반응하는 인간의 양극단이 드러난다네. 두 종류의 인간으로 나눠져. 나치의 앞잡이가 되어 개처럼 동족을 물어 죽이는 놈들. 반대편엔 아주 보통의 이기적일 것 같은 사람들이 숭고한 모습을 보여주었어. 생명이 꺼져가는 사람들에게 자기 빵을 나눠주는 거야. 그런 행동을 하는 자기 모습을 보고 스스로도 놀라. 초인적인 성장을 이뤄내는 거지.
손에 물 한번 묻혀본 적이 없는 상류층 부인이 그 참혹한 캠프에서 씩씩하게 살아서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헌신했을 때 빅터 프랭클이 물어.
"고생 한번 못 해본 사람이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나느냐?'
그 부인이 기쁜 얼굴로 고백했네. 자기는 평생 남들 도움만 받고 살아서 진짜 인생을 모르고 살았노라고 하마터면 인간이 어떻게 밥 먹고 어떻게 싸우고 살아가는지 모르고 죽을 뻔했다고. 가장 밑바닥에서 그걸 알게 해준 신에게 감사한다는 거지. 인간은 고난을 통해서만 자기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 그 모습이 비참이든 숭고든 고난이라는 실전을 통해서만.
"암 선고 받기 이전의 선생님과 이후의 선생님도 그런 과정을 거치셨나요?"
"나도 마찬가지네 이전의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내가 되었지. 어떻게 이렇게 태연하고 관대해질 수 있을까 싶어. 뒤늦게 생의 진실을 깨닫게 된다네. 모든 게 선물이었다는 걸. 마이 라이프는 기프트였다는 말은 목사님 같은 소리가 아니야. 내 집도 내 자녀도 내 책도, 내 지성도… 분명히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다 기프트였어. 내가 벌어서 내 돈으로 산 것이 아니었어. 우주에서 선물로 받은 이 생명처럼, 내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더라고"
올림픽 굴렁쇠도 디지로그도… 그전엔 다 혼자 한 줄 알았는데 병들어 누워보니 다 선물로 받은 것들이라고 했다.
* 선생님이 성경에서 감정이입을 하는 인물은 누구인가요?"
"예수 욥 그리고 예언자들이지."
"욥의 어떤 면이 선생님의 마음을 움직였나요?"
“욥은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 신까지 저주하잖나. 내가 그렇게 열심히 믿었는데 왜 불행해야 하냐는 거지. 전 생애를 믿었는데 부정을 하지 않나. 부정의 극치까지 가니 하나님이 내려와 구제를 해주었네. 다른 사람들은 어떤가. 그저 덮어놓고 믿지. 욥은 고통을 통과하면서 신을 보니, 신이 원망스러운 거야. 마지막에 입을 열어 신을 저주하니, 그때 비로소 신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지."
욥에게 이르는 신의 호통이 너무 크고 두렵고 아름다워 말문이 막혔습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바다의 근원에 들어가보았느냐? 그 밑바닥을 걸어보았느냐? 이슬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얼음과 서리의 어미는 누구냐? 너는 암사슴이 새끼 낳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느냐? 독수리가 높은 곳에 집을 짓는 것이 네 명령이냐? 네가 아직도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네가 내 뜻을 알겠느냐, 고 호통을 친 거지. 욥은 신을 보았네. 그제야 자신이 '죄 없다'고 선언한 교만을 깨닫고 구제를 받는 거라네. 다른 사람은 그런 과정 없이 덮어놓고 믿으니, 그 믿음이 헛것이지, 탕자도 떠났다 고생하고 돌아와서야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어. 만약 형처럼 주변에서 서성였다면 유산 상속자가 됐을지언정 아버지와 깊은 관계로 들어가지 못했을 거야.'
*“개구리이야기로 돌아가면 정적에 반하셨다는 게 무슨 말인가요?"
"합창하는 개구리에게 돌을 던지면 순식간에 고요해지거든. 그때 적막을 들었다네. 시골의 하늘은 맑고 밤의 모판에는 별빛이 내려 앉아, 논두렁 물에 하늘의 별이 비치는 거야. 별빛 뒤에 숨어서 울던 개구리들이 돌을 던지면 일제히 딱 멈추면서 귀가 멍멍할 정도의 침묵이 생겨났어. 평소에는 침묵이 안들려. 그런데 개구리 울음소리와 소리 사이에 생기는 그 침묵 그 침묵만큼은 들을 수가 있어, 개골개골 울다가 돌을 던지면 면도날로 자르듯 생겨난 그 침묵은 참으로 신비로웠다네."
그때의 경험이 굴렁쇠의 침묵으로 되살아났다고 했다.
"제 기억으로는 88올림픽 때 굴렁쇠 소년이 반바지를 입고 굴렁쇠를 굴리며 갈 때, 사이렌이 올렸던 것 같습니다."
"그 제목이 silence였지. 내가 올림픽에서 수십억 지구인들에게 들려준 것도 바로 그 침묵의 소리치고 수천 명이 돌아다니던 운동장에 모든 소리가 딱 끊어지고 어린애 하나가 나올 때, 사람들은 듣고 본거야. 귀가 멍멍한 침묵과 휑뎅그레한 빈 광장나 강력한 이미지였으면 그 많은 돈 들여서 한 공연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고 시끄럽던 운동장이 조용해지고 소년이 달리던 굴렁쇠만 기억들을 하겠나. 그게 어린 시절 미나리강에서 돌 던지며 듣던 정적에서 나온 이미지라네."
침묵의 힘이 엄청나군요. 그러니까 살아 있다고 질러대는 집단의 아우성이 일시에 소거될 때, 시간이 잠시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 그런 느낌이지요!
"맞아. 우리가 죽음을 의식한다는 것도 바로 그런 거라네. 시끄럽게 뛰어다니고 바쁘게 무리지어 다니다 어느 순간 딱 필름이 끊기듯 정지되는 순간, 죽음을 느끼는 거야. 정적이 바로 작은 죽음이지, 우리가 매일 자는 잠도 작은 죽음이거든. 우리가 침묵의 소리를 들을 때, 그걸 잡아채야 해. 시끄러운 사무실에서 일하다가도 어느 순간 조용해질 때가 있지? 필름 끊기듯 내 사고가 확 정지될 때도 있잖아?“ …
"그런데 일상 속에서 죽음을 흉내 낸 임상 체험이 침묵이네. 나는 요즘도 가끔 어릴 때 하던 운동회가 생각이 나."
"어린 날의 운동회는 생의 모든 밝은 소란이 다 들어 있는 것 같
았지요."
햇빛이 있고 만국기가 날리고 시끄럽고, 그런 축제 분위기만 기억난다면 그립지 않을 거야. 내 코끝을 찡하게 하는 건 다른 이미지라네. 그런 운동회 날은 언제나 교실이 텅 비어 있어. 자네도 생각날 테지? 전교생들이 다 바깥에 나와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환호하는데, 교실을 완전히 비어 있잖나. 평소엔 그 반대거든 교실에서 팀 비고 조용한 운동장을 바라보곤 했지. 빈 철봉대에 햇빛이 고여 있고 새들이 날아다니고, 포플러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 운동장이 공백의 공간이지. 그런데 운동회는 거꾸로 된 거야. 침묵하던 운동장에 온갖 사람들, 소리들이 죄다 몰려온다네.
참 이상하지? 나는 왜 그 즐거운 운동회 날 아무도 없는 교실이 그리웠는지 몰라.“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네. 나도 이렇게 외로운데 신은 얼마나 더 외로울까? 자네가 하나님 입장이라고 가정해보게. 얼마나 외롭겠나.”
"그런 생각은 안 해봤습니다.”
"인간의 외로움과는 비교할 수 없지. 그래서 '하나님, 동무해드릴까요? 외로운 시간에 등이라도 긁어드릴까요? 옷자락이라도 들어 드릴까요?" 이렇게 물어본다네. 허허. 내가 느끼는 하나님은 위대하고 힘센 구제의 신이 아니야. 하나님의 존재는 절대 고독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피조 세계 위에 홀로 서 계시잖나. 그와 비교하면 희랍신은 동네 친구들이지. 죽지만 않지 인간하고 똑같잖아. 기독교의 하나님은 창조주야. 저 풀을, 저 하늘을, 나를 있게 한, 내가 듣고 보고 느끼고 소유하는 저 바깥의 존재. 그분은 얼마나 정직하고 얼마나 크고 얼마나 외로울까. 피조 세계는 강물도 있고 새도 날아다니지만, 하나님은 그 세계를 공허. 카오스 위에서 지었다는 거 아닌가. 창세기 1장을 보게. 어둑어둑한 물 위에서 영이 움직였다고 돼 있거든. 그게 하나님이야 우주조차 당신이 만들었으니, 신은 그 바깥에 있는 거거든. 내가 책상 만들었다고 책상이 나는 아니잖아. 만드는 사람에게 친구는 정적밖에 없어.”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있지 않습니까?"
“보시기에 좋았더라…… 혼자 그런 마음을 먹었는데 혼자 하면 뭘 하겠나? 그래서 인간을 만든 거지 '네가 보기에 어떠냐? 좋지? 중간자를 만들어놓은 거야. 아담에게 당신이 만든 것들의 이름을 지어보라고 하잖아. 하나님도 외로워서 분신이 필요했던 거라고 나는 생각해. 그런데 그렇게 만든 인간이 말썽을 좀 피웠나? 다른 피조물은 다 그대로 사는데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께 대들어."
“신을 본따서 만든 분신이기 때문이겠지요."
"그게 바로 지혜를 가진 죽는 자라네."
"지혜를 가진 죽는 자라………."
"지혜를 갖는다는 게 얼마나 슬픈 말이야. 다른 생명체는 죽어도 자기 죽음이 갖는 의미를 몰라. 신은 안 죽지. 그런데 인간은 죽는 것의 의미를 아는 동물이야 신과 동물이 함께 있으니, 비극이지. 지혜가 있으면 죽지 말아야지. 지혜가 없으면 죽음을 모르니 그냥 살아 그냥 살면 무슨 슬픔이 있고 눈물이 있겠어? 포유류 중에 눈물 흘리는 건 코끼리와 사람밖에는 없다고 하지. 아무리 영특해도 주인 죽었다고 우는 개는 없어 슬퍼할 줄은 알아도 눈물은 못 흘려 눈물은 인간의 것이거든.
신과 생물의 중간자로 인간이 있기에, 인간은 슬픈 존재고 교만한 존재지, 양극을 갖고 있기에 모순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어.”
*"인간이 발견한 것 가운데 가장 기가 막힌 것이 돈이라네. 인간은 절대 혼자 살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교환을 하며 살아가지. 우리가 숨쉬는 것도 식물과의 교환이야. 우리는 탄소를 내뱉고 식물은 산소를 내뱉지. 모든 생명 가치는 교환인데, 핵심 교환은 세 가지야.
첫 번째는 피의 교환이라네. 그게 사랑이고 섹스지. 사랑은 생식이라는 목적을 벗어나지 않아 교환가치가 없다면 인종은 멸종되겠지. 그다음은 언어 교환. 그리고 돈의 교환이라네. 돈의 교환을 통해 생산과 소비시장이 만들어지는 거지. 세상이 복잡해 보여도 피, 언어, 돈이 세 가지가 교환 기축을 이루며 돌아가고 있어. 돈이 없으면 시장이 성립이 안 되고 피가 없으면 더 이상 어린아이가 생길 수 없고 언어가 없으면 사상이나 정의선 가지는 다룰 수 없겠지. 내 말이 아니라네. 레비스트로스가 문화인류학에서 설명한 인류사의 3대 교환 구조지.
피 언어 돈을 기억하게 그렇다면 돈이란 무엇인가? 아주 간단해 내가 돈의 주인이 되면 돈은 나의 최고의 협력자고, 하인이 되면 나는 최악의 인간이 되는걸세.”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살면서 돈의 하인 노릇을 하신 적은 없다는 거군요!"
"여러 번 말했지만, 돈 때문에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한 적은 없었어. 오히려 올림픽 행사처럼 돈 안 받고 할 때 가장 신이 나서 했지. 돈에 무관심하란 말은 아니야 돈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아야 하네. 애들한테 가르칠 때 황금은 황금으로 보고 돈은 돈으로 보도록 가르쳐야 하네,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면 비극이 생겨. 사실 생명과 돈처럼 먼 게 없다네."
"생명과 자본을 붙여놓은 것이 선생님이 말씀하신 생명자본인데요?”
"그건 물질자본과 대비되는 자본을 얘기한 걸세. 그러나 교환 구조로 보면 피의 자유로운 교환을 막고 있는 게 돈이야. 그래서 이수일과 심순애가 생기는 거지. 나는 애를 좋아하는데 돈 때문에 다른 놈한테 팔려가는 일이 생기는 거야."
“로열패밀리들 재벌가들은 피와 돈을 섞어 더 큰 부를 만들지 않
습니까?"
"그래서 불행해지는 거야. 돈은 돈의 교환을 해야지. 피의 교환을 하면 안 되는 거거든. 자기는 첫사랑하고 결혼하고 싶은데, 부모는 부잣집에 시집보내려고 하잖아 드라마에서 맨날 그런 얘기하더구만. 하하, 피의 교환과 돈의 교환은 경계가 다른 건데, 돈의 교환으로 피의 교환을 하고 언어의 교환을 하려 들면 비극이 생겨. 3대 교환은 서로 제 갈 길이 있는 거야.
황금은 황금의 길. 피는 피의 길, 언어는 언어의 길. 제 각자의 길을 열어줘야 하네. 언어 교환도 돈이 명령하면 서글퍼져 나는 이렇게 쓰고 싶은데 출판사는 저렇게 쓰라고 하면 작가는 의욕을 잃어버리거든. 출판사나 영화사에서 저거 자르시오. 안팔려요 하면 작
가나 감독은 어쩔 수없이 잘라야지. 그러니까 감독판이 따로 나오잖나."
"피, 돈, 언어가 각자 제 갈 길을 가야 하는데, 현대사회는 돈이 가장 큰 힘으로 모든 길을 빨아들이니 큰일입니다."
“돈의 비극이 딴 게 아니야. 돈의 교환가치가 언어의 교환가치. 피의 교환가치를 침입할 때 이 3대 평행선이 부딪혀 충돌할 때 비극이 생기는 거야.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노래를 가르치지 말고 '황금은 황금으로 보고, 돈은 돈으로 보고, 사람은 사람으로 보라고 가르쳐야지. 우리나라 말처럼 좋은 게 없어. 돌고 돌아 돈이라고 하잖나. 엊그제 재벌 회장에게 충성을 바치던 돈이 그다음 날은 거지에게 갈 수도 있어. 돈에게는 주인이 없거든. 그날 들어간 주머니의 명령을 따를 뿐 특강 않아 중요한 건 다 단순해, 눈, 귀, 코……… 다 단음절인 것처럼 돈도 단음절이야. 복잡할수록 천한거라네.
*"사랑과 용서는 동의어라네. 나는 성경에서 「고린도전서」가 최고라고 생각하네. 사도 바울은 예수님과 맞먹을 정도의 엄청난 지혜의 편지를 썼어. 참으로 아름답지.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고 성내지않는 것이며… 불구덩이에 뛰어들어갈 용기가 있어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그래서 나는 성경 앞에서 모자를 벗을 수 밖에 없어. 사도 바울은 사랑을 하면 백 번이 아니라 천 번을 용서하라고 했어. 기독교의 교리는 사랑의 교리지만 그 사랑은 용서와 통하는 걸세.."
"사랑은 쉽지만 용서는 어렵습니다. 사랑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베풀 수 있지만, 용서는 다릅니다. 죄지은 자들끼리 그 분량을 놓고 다투는 일이니. 용서만큼 어려운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을 용서하려면 커야 되고 높아야 되고 힘이 있어야 하지. 용서하는 사람이 진정한 강자라네. 가장 큰 용서의 존재가 누구겠나? 신이야 하나님이 주기도문에도 나오잖아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그게 기독교야. 기독교는 하나님이 끝없이 인간을 용서하는 종교일세. 하나님만이 인간을 용서할 수 있어. 교황이 그걸 해줄 수 있나? 안돼. 면죄부 팔다 딱 걸렸잖아. 구교라는 게 별것 아니야. 교황청에서 용서해준다고 면죄부를 돈 받고 팔다가 루터한테 걸린 게 구교야, 용서를 돈으로 팔다 천년성이 무너진 거야. 하나님만이 인간을 용서 할 수 있어. 누가 인간을 용서할 수 있나. 다 용서받을 사람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 혹시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나는 용서라는 말을 잘 쓰지 않아. 나는 용서받을 사람이지 용서를 해줄 사람이 아니야. 백번 생각해도 다르지 않아.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고, 저 사람이 나를 용서해야지...... 무슨말인 줄 알겠나? 나는 말이네. 용서받고 싶은 게 너무 많아. 인간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죄짓는 일이라네. 인간이 얼마나 죄가 많으면 코로나 때 다섯 사람 모이면 안 된다고 하겠나. 숫자가 많으면 안 되는 거야 죄가 다섯 배나 되잖나."
'나는 용서할 사람이 아니라 용서받을 사람'이라는 선생의 말이 칼날처럼 머리에 박혔다. 피조물이라는 커다란 카테고리 속에 자신을 던져넣고 보는 당신의 선험적 겸손에 나는 또 한 번 할 말을 잃었다.
*“손과 팔을 잇는 손목, 발과 다리를 잇는 발목, 모든 국가, 모든 개인은 이 '목'이 가장 중요해. 사람 꼼짝 못하게 할 때 어떻게 하나? 목에 칼 씌우고, 손목에 수갑 채우고, 발목에 쇠고랑을 채우지. 인터체인지를 묶는 거야. 우리 어릴 때 놀 때 어른들이 사이좋게 놀아라" 그러잖아. 그 사이가 '목'이야. 디지로그와 생명자본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목이 막히지 않고, 사이가 편안한 상태야. 반면 코로나는 문명과 자연의 사이가 나빠서 왔지. 이 나쁜 사이. 뭉친 목을 풀어줘야 세계가 잘 굴러간다는 얘길세."
"이쪽과 저쪽의 사이를 좋게 하는 사람이 필요하겠군요?"
"그런 사람이 바로 21세기의 리더고 인재라네. 어느 조직이든 이쪽과 저쪽의 사이를 좋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조직은 망하지 않
아, 개발부와 영업부, 두 부서를 오가며 서로의 요구와 불만을 살살 풀어주며 다리 놓는 사람. 그 사람이 인재고 리더야. 리더라면 그런 '사잇꾼'이 되어야 하네. 큰 소리 치고 이간질하는 '사기꾼'이 아니라 여기저기 오가며 함께 뛰는 '사잇꾼'이 돼야 해."
"한때 선생님은 양치기 리더십을 말씀하셨어요. 목자가 양떼를 살피듯......"
"그건 리더와 팔로워의 관계를 이야기한 거라네. 목자는 양의 앞도 뒤도 아닌, 양떼 한복판으로 들어가서 양을 지켜낸다네. 진정한 목자는 양가죽을 쓰고서라도 스스로 양이 되어 그들의 삶에 동참하는 거야. 리더지만 플레이어지. 한니발이 그랬잖아. 부하와 똑같은 밥 먹고 똑같은 잠자리에 들고 똑같이 싸웠지.
그런 조직에서는 한 마리 양이나 아흔아홉 마리 양이나 똑같아. 경중이 없지. 아흔아홉 마리 양 버리고 한 마리 찾는다는 이야기는 기업에 적용해도 다르지 않아. 아흔아홉 마리는 이 세상에 없어. 오직 한 마리 양만 있지. 천 명 다니는 대기업도 한 사람이고, 열명 다니는 벤처기업도 한 사람이야. 스스로 일어설 줄 아는 한 마리 양이 자기 인생. 자기 조직의 리더가 되는 거라네.“
*디지로그와 생명자본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뱀과 도마뱀을 거쳐 목자와 한 마리 양으로 나아갔다. 생각해보면 목자는 신과 인간의 벌어진 사이를 화해시킨 존재. 죄와 벌의 길목에서 어리석은 인과율을 끊어버린 존재. 그리하여 신이 보낸 인류 최고의 생명자본이 아니었을지.
피를 토하듯 말을 토한 후 선생은 오래도록 기침을 했다. 낯빛이 창백한 채로도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이제 곧 나는 아프러 들어가겠다'고 농담을 했다. 마이크를 빼면서 혼잣말하듯 허공을 향해 나즈막히 말씀하셨다.
"죽음 앞에서 당당하게 홀로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역사적으로 예수 한 분뿐이었다네. 그래서 나는 기독교인이 됐어. 다른 이들은 죽기 전에 제자들이라도 찾아와 울고불고했지. 예수 돌아가실 땐 제자들은 다 도망갔어. 죽고 나서 돌무덤으로 가서 부활한 예수를 발견한 사람은 여자였어. 죽은 예수가 불쌍해서 찾아간 힘없는 여자지. 잘난 남자들은 다 어디 가고 왜 여자였을까? 생명자본..... 그
의미를 생각해보게. 여자들은 끝없이 생명을 낳고 일으킨다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축복을 떠올려보게나. 끝없이 어린아이를 낳아서 지상을 무엇으로 덮으라고 했나? 생명으로 덮으라고 했어. 눈물 나는 이야기야. 모든 게 죽어가고 사그러드는데, 이 지구를 초록색으로 덮듯 생명으로 가득 덮으라고 했네. 생육하고 번성하라. 목적 같은 것 없어. 생명, 살아 있는 것. 그게 이 세상이라네. 눈물 나는 세상이라네."
조명은 꺼졌고, 선생은 땀에 젖은 흰 옷을 입은 채 오래도록 눈을 감고 계셨다.
*"선생님.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당신의 삶과 죽음을 우리가 어떻
게 기억하면 좋겠습니까?"
“(미소 지으며) 바다에 일어나는 파도를 보게. 파도는 아무리 높게 일어나도 항상 수평으로 돌아가지. 아무리 거세도 바다에는 수평이라는 게 있어. 항상 움직이기에 바다는 한 번도 그 수평이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다네. 하지만 파도는 돌아가야 할 수평이 분명 존재해. 나의 죽음도 같은 거야. 끝없이 움직이는 파도였으나, 모두가 평등한 수평으로 돌아간다네. 본 적은 없으나 내 안에 분명히 있어. 내가 돌아갈 곳이니까.
촛불도 마찬가지야. 촛불이 수직으로 타는 걸 본 적이 있나? 없어. 항상 좌우로 흔들려. 파도가 늘 움직이듯 촛불도 흔들린다네. 왜 흔들리겠나? 중심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야. 나무들이 흔들리는 것도 원래의 자세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네 바람이 없는 날에도 수직의 중심으로 가기 위해 파동을 만들지. 그게 살아 있는 것들의 힘이야"
"당신의 인생은 촛불과 파도 사이에 있었군요. 정오의 분수가 왜 슬픈지 알겠습니다."
“촛불은 끝없이 위로 불타오르고 도는 솟았다가도 끝없이 하락하지. 하나는 올라가려고 하고 하나는 참살하려고 한다네. 인간은 우주선을 만들어서 높이 오르려고도 하고, 심해의 바닥으로 내가려고도 하지. 그러나 살아서는 그곳에 닿을 수 없네. 촛불과 앞에 서면 항상 삶과 죽음을 기억하게나. 수의 중심점이 생이고, 수평의 중심점이 죽음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