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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9;1-8, 시각과 관점을 바꾸면 모든 것이 보이고 할 수가 있습니다. 5. 2015.10.11.
시각과 관점에 대하여 5주 째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만큼 시각과 관점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는데 아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시각과 관점에 따라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결과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믿음과 신앙도 시각과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 현상이 나타나고 결과가 확연하게 다릅니다. 신학의 내용도 그렇습니다. 어떤 시각과 관점이냐에 따라 영지주의가 나타나고 이단이 나타나고 사이비가 생깁니다. 그런가 하면 정통 신학의 복음주의가 나타나고 율법주의가 나타납니다. 믿음의 사람마다 받는 시각과 관점에 따라 은혜가 다 다릅니다. 한 성경을 가지고도 시각과 관점에 따라 다신론이 생기고 유일신이 있습니다. 이성으로 보느냐? 감성으로 보느냐? 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이성의 시각과 관점이면 논리적, 합리적, 이해가 필요 하지만 감성의 시각과 관점이면 긍휼이고 사랑이면 답이 나옵니다.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세상도 그렇습니다. 요사이 노르웨이에서 한창 노벨상 수상자를 발표합니다. 세계의 모든 나라의 사람들이 여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은 올해도 노벨 생리 의학상과 노벨 물리학상을 탔습니다. 참으로 역시 일본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발간되는 신문이 칼럼으로 여기에 대하여 중요한 표현을 하고 기초과학 분야에 대하여 일본과 한국을 분석을 했습니다. 그 기사의 타이틀이 멋집니다. 노벨 과학상 21대0… 일본은 “실력” 한국은 “간판” ‘3無’ …정치 간섭 없고, 스펙이 필요 없고, 자리 욕심이 없다. 여러분, 제목이 노벨 과학상, 21대0, 일본은 실력, 한국은 간판이라고 합니다. 잘 표현했지요? 그런데 이렇게 된 이유를 간단하게 밝히는데 그 이유를 3가지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일본은 과학을 연구 하는 데에는 정치적 간섭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펙이 필요 없습니다. 자리 욕심이 없이 연구에만 몰두를 하는 일본인의 생각을 말씀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요? 일본인들이 보는 과학에 대한 시각과 관점을 잘 말해 줍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를 21명이나 배출한 ‘기초과학 일본’의 저력이 자리한 배경입니다. 1949년 유카와 히데키를 필두로 지난 6일 물리학상 수상까지 20명이 넘는 수상자가 배출된 것은 고유의 사회·문화적 풍토 속에 연륜 깊은 연구가 쌓인 결과였습니다. 연구자들은 한눈팔지 않고 수 십 년 동안 한 연구 테마를 송곳처럼 파고들며 사회가 그런 환경을 만들어 줍니다. 명망 높은 과학자들이 장관, 기관장 자리를 탐하거나 꿰차는 일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실험실에서 시료를 뒤집어쓴 백발의 과학자가 젊은 학생들과 머리를 맞댄 모습은 이곳에선 상식입니다. 일본인들이 입에 달고 사는 “열심히 하겠다”라는 ‘잇쇼켄메이’(一生懸命)는 “목숨 걸고 하겠다”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지금 일을 천직으로 삼아 모든 힘을 다한다는 결의가 그들의 DNA 속에 면면합니다. 그 대신 정치가와 관료도 과학자의 영역을 존중하고 간섭하지 않습니다. 이 같은 금도가 지켜지는 가운데 과학기술자들의 자율과 진검 승부에 의해 대학, 연구소, 학계가 움직입니다. 21명의 수상자 가운데 교토대(6명), 도쿄대(4명) 등 ‘빅2’를 뺀 절반 이상은 ‘무명 대학’ 등에 골고루 퍼져 있습니다.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가 아니라 “뭘 할 수 있느냐”를 따지고 실력으로 평가하는 진검 승부의 전통이 과학계를 건강하게 전진시킵니다. 이름 없는 대학을 나와도 노벨상을 받도록 키워 줍니다. 이번 생리의학상 수상자 오무라 사토시는 비교적 무명인 야마나시 대를 나왔고 물리학상의 가지타 다카아키도 사이타마 대를 나와 도쿄대 교수로 있습니다. 한국은 만능 인재를 요구하지만 일본은 한 곳을 파고드는 ‘오타쿠’도 꽃피울 수 있게 합니다.
반면 함께 나누는 협동과 팀워크 중시 전통은 융합연구를 가능하게 하고 스승의 발상을 제자들이 함께 연구 결실로 이어 나갑니다. 오랜 봉건체제 속의 분권적 지방 간 사활을 건 경쟁의 역사는 간판이나 명분보다는 기술과 생산력, 실질과 진검 승부 등을 일본인들의 뼛속 깊이 새겨 놓았습니다. 기본과 기초, 원칙과 협력 중시의 초·중등교육도 기초과학의 강국을 만든 또 다른 축입니다. 초등학교 교사들은 학생의 숙제를 일일이 검사해 고쳐 주고 부모들의 사인과 확인을 받습니다. 한국 학생들이 입시용 문제에 매달릴 때 일본 아이들은 원리를 찾으려고 긴 시간을 골똘히 ‘허비’하며 보냅니다. 허비가 낱말의 표현대로 허비가 아닙니다. 창의성을 위한 허비입니다. 일본 학교는 학생들이 하고 싶은 일을 찾도록 다양한 체험 기회를 주고 취미 생활과 동아리 활동을 통해 가능성을 탐색하게 합니다. 여기까지가 한국의 신문기사 내용입니다. 여러분, 한국과 일본에서 동 시대를 살아가면서 미래를 향하는 사람들이 과학을 보는 시각과 관점이 전혀 다릅니다. 태도가 다릅니다. 시각과 관점에 따라서 21대 0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어떻게 해야 우리의 삶을 윤택하고 회복을 시킬 수가 있는가? 라는 것은 이미 많은 시간 설교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주님의 시각과 관점이 중요한데 그런 면에서 주님께서 오늘 본문의 사건을 어떻게 해석을 하셨는가? 를 깨닫고 오늘 우리도 주님의 시각과 관점에 맞출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서 참된 회복과 부요와 윤택을 가져오는 복된 주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1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가 본 동네 가버나움에 이르십니다. 왜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건너가신 것입니까? 가다라 지방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떠나 달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소문은 이미 퍼져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오는 이유는 자기들의 필요와 소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기다렸던 메시아가 오시면 자기들의 소원이 성취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5장의 산상수훈을 말씀하시고 나서 마태복음 8장부터 이어지는 말씀들을 하십니다. 그런데 8장부터 예수님의 기적과 축복과 회복의 말씀이고 사역인데 실제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8장부터 기록된 내용들을 다시 요약하면, 산상수훈 후에 제일 먼저 고쳐주신 병자가 한센씨병, 나병환자입니다. 산상수훈을 통하여 율법을 지켜 의롭다고 여기는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전적인 죄인으로 드러날 때에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믿게 됩니다. 한센씨병에 걸려서 공동체에서 함께 살 수가 없는 자신이 전적으로 죄인임을 알고, 예수님이 전적으로 필요한 것을 알면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습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가능성이 1 퍼센트라도 있다면 그 있는 것만큼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백부장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신지 보여줍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예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세 번째는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시고, 수많은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와 병자를 데리고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의 필요를 채우고, 고쳐주셨습니다. 왜 치료해 주십니까? 이렇게 치료하시고 회복하심을 통하여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셨다는 이사야 53장의 말씀을 예수님이 이루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치유사역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실 때에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시면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시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따라오라고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모든 일들을 이미 죽은 자들의 세상으로 보셨습니다. 그래서 죽은 자들은 죽은 자들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시각과 관점을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 신앙인에게 요구하셨습니다. 따르려고 하는 무리들을 물리치시고 배를 타고 건너가십니다. 이때 풍랑이 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그 배에서 주무시고 계시는데 제자들은 두려워서 죽겠다고 예수님을 깨웁니다. 일어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서워하는 것은 믿음이 적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두렵고 무서운 것은 사실인데, 모든 사건을 예수님은 믿음으로 연결을 시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적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을 나타냅니까? 예수님이 그 배에 타고 계시는데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데 무서워하는 이 것을 믿음이 적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두려워하는 풍랑,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물결이 아주 잔잔하게 됩니다. 이 때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도대체 이 분이 누구시냐며 놀랍니다. 8장에서 연속되는 사건들을 보고서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릅니다. 이방인과, 백부장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는데 제자들은 모릅니다. 풍랑 이는 바다를 말씀으로 꾸짖어 잠잠하게 하신 예수님께서 가다라 지방에 가셔서 사람들이 제어할 수 없는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십니다. 그러나 그 귀신의 떼들이 돼지 떼에게 들어가서 돼지들이 비탈로 내려가서 바다에 빠져 몰살을 합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워합니다. 놀라워하는 것은 괜찮은데, 가다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 지방에서 떠나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오셔서 함께 하시는 것이 참된 생명을 얻는 길인데도 그들은 그 생명의 주를 생존에 방해되는 사람으로 여기고 떠나가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이 세상의 공중 권세 잡은 자, 곧 마귀 사탄 옛 뱀이라고 하는 대적의 권세아래 갇혀 있는 모습입니다. 어두움만 가득한 곳에 빛이 오니 어두움이 빛을 몰아내어 버렸다는 것이 요한복음의 증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이 생각하는 예수님이 아니라 성경에서 증언하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시각과 관점에서의 예수님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십니까? 사람들이 왜 이렇게 합니까? 예수님께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원하는 대로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입니다. 2절,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옵니다. 마가복음 2장에서는 사람들이 많아서 지붕을 뜯고 침상채로 예수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합니다. 오늘 이 말씀이 핵심내용이고 전체적인 내용입니다. 오늘도 예배를 드리고 우리의 소원을 말할 때에 그 믿음을 보시고, 원하는 바를 이루시며 치료하여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믿음에 대하여 칭찬을 들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그러면 오늘 주님은 믿음을 말씀하실 때 어떤 시각과 관점에서 보시느냐? 입니다. 주님이 보시는 믿음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실 분임을 믿고 왔습니다. 2절에서 그들의 믿음을 예수님이 보셨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중풍병자나 이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입니다. 4, 5사람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무슨 믿음을 보셨습니까? 예수님께 가면 병을 고침 받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믿음만 있으면 문제는 해결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이성적이기 보다는 감성적입니다. 그래서 앞뒤 따져보지도 않고 ‘믿습니다!’ 라고 합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시는 이 믿음이 과연 누구의 믿음입니까? 엡2:8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믿음이라는 것이 사람의 조건 제공이 아니라 은혜로 인하여 얻어지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선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이 믿음이 나의 소원이나 욕망을 이루는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로 주신 믿음은 반드시 자기가 부인되고 이 믿음을 주신 분이 일하셨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칭찬하신 오늘 본문의 중풍병자와 그를 메고 온 사람들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친구의 삶을 변화 시켜주기 위한 수고와 땀과 불가능의 도전입니다. 중풍병자는 지금까지 살아온 데로 앞으로도 그렇게 살면 됩니다. 예수님에게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하나 그냥 이 사람에게는 관계가 없어도 별 로 사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습관과 생각과 전통이 이 사람에게 멍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틀에서 벗어납니다. 친구들이 동원이 되어서 예수님에게로 갑니다. 생각한데로 사람들이 용신 할 수가 없도록 깍 막혔습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요원합니다. 그런데 상황에 도전을 합니다. 그리고 지붕을 뜯고 레카에 이 친구를 달아 내립니다. 아우성치는 소리가 있어도, 질서와 예의를 지키라는 목소리가 있어도 반드시 되어져야 하는 그 일에만 몰두를 했습니다. 이들이 한 것은 이런 행동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일들과 행동을 예수님은 이들의 믿음으로 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믿음이 있습니까? 이런 것을 믿음으로 보십니까? 오늘 이런 상황을 주님의 시각과 관점은 믿음으로 보셨습니다. 이런 사건을 보면서 우리도 주님에 대한 절대 믿음만 있으면 병도 고침을 받고 죄 사함도 받습니다. 믿음에 대한 시각과 관점이 믿음을 확장시킵니다. 여러분,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보실 때에 믿음이 있다고 하면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원래 믿음은 주님이 주셔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믿음이 생깁니다. 행3:16절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게 합니다. 구걸하던 사람은 돈을 얻고자 그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자 이 사람이 곧 일어나 걷고 뛰었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서 베드로와 사도들을 주목하자 사도들이 왜 우리 개인의 경건과 권능으로 이 사람을 일으킨 것처럼 우리를 주목하느냐면서 이 사람이 완전히 낫게 된 것은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이 사람을 완전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할 때에 그 구걸하던 자가 예수님의 이름을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이 누구로부터 나온 믿음입니까? 예수로 말미암아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선물입니다.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는 이 믿음은 믿음의 주체가 내가 아닙니다.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7:11~19절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열 명의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고쳐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너희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사장에게 가는 중에 몸이 깨끗해 졌습니다. 그 중에 한 명이 예수님께서 와서 감사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감사하는 사람을 보고, 그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여러분, 아홉은 무엇에 관심이 있습니까? 자기 몸 낳은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감사한 사람은 사마리아인입니다. 여러분, 문둥병이 들었을 때는 차별이 없었습니다. 문둥병이 낫자 유대인들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율법의 세계 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평소에 개로 보는 사마리아인은 예수님께 감사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본 사마이라 인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병 고침만이 아니라 죄 사함을 받습니다. 베푸신 은혜를 잊지 않는 것, 이것도 믿음으로 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예배 가운데 우리를 치료하실 예수님을 절대 신뢰하시고 원하는 바를 이루실 뿐만 아니라, 구원 받은 백성이 되어서 온전히 주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치료와 함께 죄를 사하는 권세가 주님께 있습니다. 치료하시면 구원을 선포하시는 주님입니다. 기적만을 행하시는 주님이 아닙니다. 우리를 속죄하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치료에서 속죄함으로 연결이 되는 것을 모릅니다. 왜 그럴까요? 보는 시각과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사건을 그 자체로만 보지 않습니다. 일어난 일이 그 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 모두 기록한 사건입니다. 이 보다 더 놀라운 사건 곧,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사건도 필요에 따라 한 번밖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 사건이 지니고 있는 의미의 중대성이 있습니다. 이 사건이 4복음서 중 3번씩이나 반복된 것은 일어 날 수가 없는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만 또 다른 주님의 시각과 관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사람들 앞에 치료와 함께 죄 사하는 권세를 가진 하나님이심을 처음으로 공개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속죄의 권세는 교훈의 권세, 통치의 권세와 함께 마태복음에서 나타나는 예수님의 세 가지 권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권세입니다. 속죄의 권세가 우리를 영원히 살리셨습니다. 우리가 관계 속에서 주님의 시각과 관점을 통해서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다른 사람을 미워했던지, 속였던지, 심지어 죽였던지 간에 그 당사자와의 관계가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사람에게 한 것이 주님에게 한 것이라고 친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용서도 최종적인 권세를 가지신 주님으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이 권세를 예수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롬8;33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 8:33). 누가 정죄를 하겠습니까요? 우리에게 이 놀라운 감격이 있을 때 우리의 삶이 변하고 우리의 표정이 밝아집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가버나움 사람들은 병 고치는 주님은 알았지만 죄 사하는 주님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적만 보고 따라다녔습니다. 모든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주님 앞에 회개하러 나온 사람이 없었습니다. 중풍병자, 이 사람은 전적으로 거동을 못하는 전신마비의 환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병을 먼저 고쳐주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 원하는 소원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병 고침을 구했더니 죄 사함까지 받았습니다. 주님의 시각과 관점이 오늘 우리를 온전하게 하십니다.
4. 협력과 친구 사랑함이 무엇인지를 주님의 시각과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될 네 사람의 친구가 있습니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들것에 메고 온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 한 사람의 믿음만이 아니라 "‥저희 믿음을 보시고" 4사람의 행위를 칭찬하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병자를 데리고 온 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헤치고 지붕 위에 올라가서 기왓장을 뜯어내고 구멍을 뚫어 결국은 환자를 주님 앞으로까지 인도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늘 생각해야 할 것은 나의 믿음이 내 자신만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내 믿음은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들것을 들고 다녀야 할 사람입니다. 비록 태우려고 해도 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할지라도, 영혼의 문제가 있는 이웃을 주님 앞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기왓장을 뜯어내고 지붕을 뚫는 수고를 아끼지 않고 그들을 예수님과 직접 만나도록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뜨거운 열정이 우리의 신앙 속에 타오르고 있다면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는 살아 있는 공동체요, 주님이 기뻐하시는 공동체가 됩니다. 그런데 이런 행위를 주님은 선한행실, 옳은 행실이라고 합니다. 계19:8절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깨끗하게 정결하게 된 세마포 옷을 성도들이 입고 있는데 이 옷이 성도들의 옳은 행실입니다. 여러분, 형제는 호칭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주님은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말씀하는 형제를 위한 죽음은 이상적인 사상의 바탕입니까? 주님이 당연시하는 형제사랑은 지극히 현실적일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사랑이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는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내 삶을 변화시키고 행동의 결과를 미치지 못하는 정도에 머무릅니다. 형제라는 단어는 관계를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여러분, 예수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하나 됨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형제는 외면이 아닌 관심입니다. 요한1서3;17 누가 이 세상 제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오늘 날 현대 사회는 어떻습니까? 형제들 간에 심한 재산 분쟁으로 연락조차 끊고 사는 것을 많이 봅니다. 지금 롯데 그룹이 그렇고, 삼성과 두산이 그렇습니다. 왜 그럴까요? 물질을 형제보다 중요시하기 때문입니다. 요한1서 3;18절‘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로 하자’라고 합니다. 여러분, 마지막 때일수록, 주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사랑이 식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은 식지 않고 오히려 뜨겁게 불타오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표현하는 것에 있어서 어느 것이 쉬운가? 에 대한 시각과 관점입니다. 3절,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기를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한다고 합니다. 4절, 예수님께서 그 속으로 생각한 것을 아시고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고 하십니다. 5절, 예수님께서 그들의 악한 생각을 아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중풍병자에게 네 병이 고침을 받았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신 이유가 바로 이 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리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죄로 인하여 질병이 온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날 때부터 소경 된 자는 누구의 죄냐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조상의 죄냐 자기 죄냐고 물을 정도로 질병을 죄로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모의 죄도 그 사람의 죄도 아니라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위하여 그렇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율법을 가르치는 서기관들은 죄의 용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으로 인식을 해서 신성모독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 마음에 악한 생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여 주시는 권세를 가지신 분임을 믿지 않는 것이 악한 생각입니다. 지금 이 서기관들은 그들의 율법적인 해석의 잣대로 예수님을 평가합니다. 이것이 바로 악한 생각입니다. 율법의 선생인 서기관들조차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 중풍으로 꼼짝도 못하여 침상에 들려온 자를 어떻게 말 한마디로 일어나 걸어가라고 해서 걸어 갈 수가 있습니까?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모든 일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일과 그 하신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알고 믿게 되는 것입니까? 6절,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는데,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서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상황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표현하실 때, 상대가 받아들이고, 행복하고, 기쁘게 여기는 표현을 사용해야 합니다. 쉬운 표현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표현이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표현일지라도 신앙 안에서 믿음 안에서 한 표현이면 그 결과는 주님이 책임지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시각과 관점을 가지고 해석하고 말하고 행동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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