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재인청 춤의 유형과 전승실태
이은주 (시립 인천전문대학 공연예술계열 무용전공 교수)
Ⅰ. 서 론
Ⅱ. 화성재인청 춤의 유형
1. 민속무계열
2. 무속무계열
3. 궁중무계열
Ⅲ. 화성재인청 춤의 전승실태
1.전승계보
1)이동안
(1)생애
(2)계보
(3)춤의 세계
2)정경파
(1)생애
(2)계보
(3)춤의 세계
3)김복련
(1)생애
(2)계보
(3)춤의 세계
2.춤의 전승실태
Ⅳ. 화성재인청류 춤과 전승계보분석
1. 전승계보 분석
2. 전승세대별 춤의 특성 분석
Ⅴ. 결 론
Ⅵ. 제언
Ⅰ. 서 론
화성재인청복원에 관한 중요성은 민속학적, 전통예술학적, 무용예술학적으로 여러 연구분야의 중대한 관심사로 떠올랐다. 재인청의 설립연도 및 활동상황 등에 관한 자료는 미흡하나 현존하는 기록과 재인들의 가계로 전승되어온 흔적을 찾아 재인청이 보유했던 민속예술의 원형을 복원 하는 일은 큰 의미가 있다.
본 연구는 민속예술의 보고였던 화성재인청의 연희 종목 중 무용종목에 국한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한국의 춤을 크게 분류한다면 궁중에서 연희 되었던 정재류(呈才流)와 일반 민중들에 의해 연희 되었던 민속무용으로 나눌 수 있다. 정재류는 국가가 관장하는 기관이 있어 유구한 세월 그 명칭을 달리하면서 전승되었다. 악원이라는 명칭으로 500여년을 이어오면서 광무 원년(1897)에는 종래까지 장악원(掌樂院)으로 불리던 기관을 교방사(敎坊司)로 개칭하고, 융희 원년(1907)에는 이를 장악과로 고치고 악인(樂人)을 국악사(國樂師)로 불렀다. 융희 4년(1910)에는 아악대(雅樂隊)로 개칭하기까지 명칭은 물론 수차례에 걸쳐 장소도 이동하면서 종로구 운니동에 자리를 잡고 명칭도 아악부(雅樂部)로 개칭하니 이때가 1925년 4월이다1).
이토록 궁중무용은 국악과 함께 체계적인 전승제도가 이루어졌으나 반면에 민속무용의 전승은 민간소속의 예인집단인 솟대쟁이・걸립패・굿중패・두레나・사당패 등의 붙박이 예인 집단2)과 가계(家系) 중심으로 전승되었기에 체계적 혹은 제도적 전승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재인청의 설립은 천민계급에서 발생되어 행해지고 있던 민속무용을 교육적 체계를 갖추어 조직적으로 전승시킬 수 있는 교육기관이 갖추어진다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 재인청(才人廳)이 장악원과 더불어 예능 전수교육기관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악원이 일제 시대 일본의 한국문화말살정책으로 이왕직 아악부, 해방 후에는 구황궁(舊皇宮) 아악부 등으로 불리면서 그 기능이 상실 혹은 위축되어 왔지만 다행스럽게도 1951년 이주환을 초대 원장으로 국립국악원이라는 명칭으로 새로이 출발하여 오늘에 이른다. 한편 재인청은 붕괴 되면서 재인들의 성향에 따라 모두 흩어져 일부는 권번으로 일부는 개화기의 물결을 타고 개인이 관장하는 연희단에 흡수됨으로써 전통무용교육집단으로서의 특성을 상실한 채 오늘에 이른다.
한국 전통춤의 대명사격인 승무・ 살풀이춤・ 태평무 등이 화성재인청 출신의 한성준・김숙자 이동안에 의해 전수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화성재인청은 한국춤(특히 무대화된 전통 민속춤)의 산실로 손색이 없었다.
현대에 이르러 굳이 궁중무용과 민속무용을 구분지어 전승한다는 개념을 차치하고라도 춤은 그 유래와 특성상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고려할 때 화성재인청의 복원은 필연적이며 또한 문화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미 여러 학자들에 의해 재인청의 역사예술사성, 기능과 역할, 연희와 음악의 특성 및 그 전승실태 등에 관하여 연구・발표되었으므로 본 연구는 화성재인청에 근간을 두고 추어졌던 이동안류의 춤과 그 전승실태에 국한하여 고찰하고자한다.
1) 서한범,국악통론 (서울:태림출판사, 2005) 260쪽
2) 노동은, 재인청의 역사예술성(경기:화성재인청복원사업추진위원회,2004) 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