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끝나지 않은 마르셀의
회상할수록 아름다운 추억과 여름
블라디미르 코스마 <마르셀의 여름/마르셀의 추억> O.S.T.
19세기 남부 프랑스의 중산층 가족을 주인공으로 한 1990년의 이 프랑스 영화를 다시 보는
2002년 후반기의 한국인 가장들에겐 이른바 ‘주5일 근무제’라는 화두가 사무치도록 피부에 와닿을지도 모른다.
숨에 찬 여름휴가만으로는 가족의 사랑과 화목을 도모할만한 평화로운 일탈을 꿈꾸기에
웬지 각박한 현실. 벼르고 벼르던, 아무도 모르는 비밀의 성으로 우리 가족끼리만 떠나는
상상-영화처럼 또각거리는 마차라도 탄다면 금상첨화겠으나-을 많이 자극하지 않을까?
<마농의 샘>을 쓴 원작자 마르셀 빠뇰(Marcel Pagnol)의 자전적 소설 <어린시절의 추억>을
이브 로베르 감독이 빠뇰의 유족을 설득해서 영화로 만든 <마르셀의 여름>(원제:
La Gloire de mon Pere 아버지의 영광). 속편인 <마르셀의 추억>(원제:Le Chateau de ma Mere
어머니의 성)과 함께 순수하고 소박한 아이의 독백으로 보는 성장과 가족의 이야기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누구에게나 ‘현실의 체험+몽상=소리없는 성장’의 공식을 따르게 되어 있다.
다시말해 그 시절의 꿈/환상은 비현실이 아니며, 오히려 현실보다 더 뚜렷한 체험이 되어
아직 익지 않아 매일매일 자라나는 뇌세포와 마음 속에 고스란히 저장된다.
어른이 되어 자기를 표현하고 다른이의 삶을 이해할수 있는 것도 어린시절의
이 ‘열려있음’이 원동력인 것이다.
산도 구름도 아닌 묘하고 신령한 존재인 신비한 바위산 ‘가르라방’이 있는 프로방스 지방에서 태어난
마르셀. 그의 가족이 휴가를 지내기 위해 온 별장 주변은 ‘가르라방’과 함께 기억속에서
가장 경이로운 풍경 한폭으로 자리잡을 것이 분명하다.
마르셀의 여름 La Gloire de mon Pere
여름방학을 맞은 마르셀이 가족과 함께 온 별장이 있는 낯선 전원마을에서 만난
친구 릴리와 함께 숲속을 걸을 때, 그리고 어린 동생 폴과 함께 아침창문을 열 때,
가족들과 함께 저녁식사할 때 또다른 친구들이 있다.
낮엔 한결같이 이쁜 소리로 노래부르는 풀벌레들 그리고 밤엔 수리부엉이를 비롯해
밤에 우는 새들의 신비로운 울음소리가 그것. 마르셀의 여름은 매미들의 울음이 잦아들면 끝이 난다.
마르셀의 바지주머니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여전히 울어대는 매미는
이 몽상같은 여름휴가를 끝내는게 무엇보다 두려운 마르셀의 마음과 한통속인 것이다.
도마뱀이 다니는 길, 구름이 노는 호수, 덧문을 열면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과 온갖 풀내음이
다 마찬가지다. 학교에선 완벽한 선생님이지만 숲속에선 어설픈 초짜 사냥꾼인 아버지의 화승총에
얼떨결에 맞아 추락한 황제자고새 두 마리.
나이로 보나 경험으로 보나 더 남성적인 이모부와의 (남자다움을 놓고 암암리에 겨루는)
보이지 않는 경쟁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안겨주는 이 커다란 새의 주검은 마르셀의 마음속에
휴가동안 위신이 떨어져가던 아버지에 대한 안쓰러운 존경을 다시 ‘영광’으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마을 신부의 친절한 사진촬영으로 ‘아버지의 영광’ 황제자고새를 자랑스럽게 든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은 흑백 인화지에 영원히 남겨진다.
짐짓 엉뚱하게도 인화지의 의미를 설명하며 ‘지식’과 ‘겸손’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지만
스스로 자랑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아버지, 나아가 같은 어른인 이모부와의 ‘남자다움’을 겨루며 나약함을 감추지 못했던 아버지... 완벽한줄 알았던 그에 대해 이젠 연민을 갖게 된 마르셀...
게다가 낯선 곳에서 알게 된 농부의 아들 릴리-그는 마르셀이 책에서 배운 것보다 더 많은
자연의 비밀을 알고 있고 마르셀로 하여금 여기 동굴의 은자로 남겠다는 결심까지 하게 하는
매력덩어리다-와의 짧은 우정이 오버랩되어 여름 한철을 보내는 어린 마르셀을,
어른을 이해하기 시작한 아름다운 소년으로 성장하게 한다.........
‘일하라 땀흘리라 대지가 너희를 기다린다'
선생님과 아이들이 교실에서 한목소리로 읽는 이 첫 장면의 보이스오버가
원작자의 인생관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어린 시절 어느 여름을 회상하는 마르셀에게는
교사로서의 자부심에 가득한 아버지와, 가족을 위해 가사와 재단사일을 겸하는
아름다운 어머니 두분에 대한 사랑이 인생의 지도와도 같다.
프랑스 영화사상 최대 관객을 기록한 이 평범하고 지루하기까지 한 영화가 갖고 있는
소박한 힘을 한국영화 <집으로>에서의 감상과 비교하는건 무리일까?
상식을 벗어난 사건과 선정주의적인 소재에만 집중하는 대부분의 ‘가족’을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들에 질렸다. 그래설까. 만든지 12년이 지난 지금도 이 무명배우들이
전원속에서 연주하는 ‘가족’이라는 앙상블은 몇번이고 비디오테이프를 되돌리게 만든다.
더욱이 그 속에서 프랑스 특유의 유머러스하고 따뜻한 음성의 나레이션과 함께 듣는
절제된 오리지널 스코어는 문자 그대로 유럽의 시적 낭만 그 자체.
그런데 오프닝과 마지막 엔딩크레딧에 똑같이 들어가 있는 풀벌레소리는 어딘지 정감있기보단
으스스하기도 하다. 유려한 오케스트레이션과는 엇나가는 그 짧고 느닷없는 전자샘플링 소리가
묘한 느낌을 주는데, 웬지 마르셀이 릴리와 함께 소나기를 피하러 들어간 동굴 속에서 만난
커다란 수리부엉이의 당당한 눈을 떠올리게 된다.
푸드득 날아와 눈을 쪼을것같은 그의 빛나는 눈에 그만 겁먹고 마는 천상 어린아이의 마음.
그리고 커다란 매미를 바지주머니에 넣고 처치곤란에 어쩔줄 모르는 마르셀의 불편함과 신기함도
섞여 있다.
여름 내내 하루종일 울어대는 풀벌레들과 신기한 새들의 지저귐은, 마르셀과 가족 그리고
우리들에게 자연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다.
작곡가 블라디미르 코스마(Vladimir Cosma)는 이 전원의 오케스트라들을 위해
사람들의 마음을 들려주는 왈츠풍의 선율로 화답한다.
이 왈츠는 휴가(=영화) 내내 새와 풀벌레들과 사이좋게 어울린다.
사냥에 나섰지만 기세등등한 이모부에 눌린 아빠가 걱정되는 아이 마르셀.
아빠를 도와줄 방법을 궁리하다 길을 잃은 아이는 조금전까지와는 다르게 세상과 혹은 자연과 만난다.
화창함과 풍요로움이 아닌 막막함과 두려움 그 모든 것인 전원.
게다가 나보다 몇배 큰 독수리의 추격까지. 소년의 눈과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이 사물의
변화무쌍함을 공감하게 하는 것은 시종일관하던 왈츠를 어색하게 하는 낮고도 괴기스런 공명의 선율이다.
작곡가의 고향인 루마니아로부터 드라큘라의 음흉한 미소가 잠깐 특별출연삼아 흘러들어온 것일까...
어린 소년 시야를 잠깐 어둡게 하던 공포는 이내 어설픈 사냥꾼 아버지의 총소리로 깨고 만다.
마르셀의 추억 Le Chateau de ma Mere
지난 여름방학을 한순간 꿈처럼 행복하고 아쉽게 보낸 마르셀 가족이 겨울을 맞아
다시 찾아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전편이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라면 속편은 어머니에 관한 알싸한 연민이 느껴진다.
자애롭고 지혜로운 어머니의 기지로 주말마다 벨롱 별장에 갈수 있게 된 마르셀의 가족.
그러나 가난한 교사의 형편이기에 마차가 없어 먼길을 걸어서 별장에 가야한다.
이때 만난 아버지의 옛 제자. 그는 운하의 수로를 지키는 일을 한다.
그의 배려로 네 개의 성을 지나 열배나 시간을 절약하며 별장에 도착할수 있는 지름길과
열쇠를 손에 쥔다.
그러나 커다란 네 개의 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의 사유지를 네 번이나 거쳐야 하는 이 코스는
마음이 약하고 순진한 어머니에게는 두려움의 여정이기도 하다.
붉은 장미꽃 향기를 맡고서야 다시 관문을 지나갈 용기를 얻는 아름다운 어머니...
급기야 고약한 퇴역군인 출신의 관리인에게 온갖 모욕과 수모를 당하자 어머니는 졸도하고,
아버지는 교사자격을 박탈당할지도 모를 위기에 좌절한다.
그러나 결국 운하의 경비원인 옛제자의 기지로 위기는 즐거운 추억으로 바뀌고...
빛나고 아름다운 순간들은 추억이 되고 세월이 흘러 몸이 약했던 어머니는
파란꽃으로 뒤덮힌 마차에 실려 또다른 세상으로 떠나고,
전원의 목동이 된 동생 폴과 친구 릴리 역시 저세상 사람이 된다.
성공한 영화제작자로 성장하여 아름다운 촬영지를 물색하던 마르셀은 우연히도
어릴적 어머니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네 개의 성 가운데 하나를 구입하게 된다.
마지막 관문에서 온가족을 뒤돌아서게 했던 낡은 문을 돌로 내리치며 잊혀졌던 추억을 불러오는 마르셀...
붉은 장미같이 아름답고 사랑스럽던 젊은날 어머니의 얼굴을 다시 떠올린다.
전편에서의 밝고 화사한 여름날의 선율과 리듬보다는 사라져간 사람들에 대한 추억을
쓸쓸하게 음미하는 음악이 인생의 가을과 겨울을 소리없이 실감하게 한다.
블라디미르 코스마(Vladimir Cosma)
한때 ‘고엽’(Les Feuilles Mortes)을 작곡한 조셉 코스마(Joseff Cosma)의 아들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던 블라디미르 코스마(Vladimir Cosma)는 1940년 루마니아의 부카레스트에서 태어났다.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였던 아버지를 이어 국립예술학교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공부했다.
1963년에 프랑스 파리의 국립음악학교에 입학하고 64년부터 미셸 르그랑의 콘서트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면서 세계 여러곳을 여행하게 된다.
1968년에 이브 로베르 감독을 만나면서 <게으름뱅이 만세!>에서 처음 영화음악을 맡는다.
영화음악가로서의 주목을 받게 되는 작품은 1973년의
금주법 시대에 어울리는 경쾌한 스윙 재즈 선율을 소개해 당시 프랑스에 재즈 선풍을 일으킨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으로 꼽기에 적당할만큼 대중적 인기를 끈 영화는 뭐니뭐니해도
1980년 소피 마르소 주연의 청춘영화 <라붐(La Boum)>, 그리고 속편인 <라붐 2>.
각각 ‘Reality' 'Your Eyes' 등의 히트곡을 탄생시켰다.
역시 소피 마르소 주연인 1988년의 <유콜잇러브(L'Etudiante)>에서도 카롤리네 크뤼거의 목소리로
’You Call It Love'를 히트시켰다.
장 자크 베네 연출 1981년의 <디바(Diva)> 역시 그를 거장으로 칭송하게 만든 작품이다.
무려 150편이 넘는 영화와 드라마에서 음악을 담당한 블라디미르 코스마는
다작이라는 의미에서 엔리오 모리꼬네와 비교되기도 하지만 루마니아 태생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유럽인’ 코스마의 음악은 어떤 의미에서 동유럽과 남유럽을 잇는
고전적 낭만성 때문에 더 유목민답게 다가온다.
왕성하게 영화음악가로 활동하던 초기보다 90년대 이후 그의 작품수는 조금 줄어든게 사실이지만,
오히려 루마니아와 프랑스의 음악학교에서 클래식음악을 공부한 그답게 복합적이고도
절제된 선율과 형식을 이 한편의 성장영화에서도 느낄 수 있다.
80년대에 사향냄새처럼 짙은 프렌치팝의 트렌드를 이끌던 열혈 작곡가는 십년 후,
담백하고 낭만적인 왈츠를 빚어낸 것이다.
영화가 제작된지 12년만에 본격적인 라이센싱을 통해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된 반가운 이
오리지널사운드트랙은 낭만적 고전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작곡가 블라디미미르 코스마의 명작을
새삼 반추하며 감상할 좋은 기회가 아닐수 없다.
게다가 <마르셀의 여름>과 속편인 <마르셀의 추억> 두 작품의 주요 테마들이 함께 수록되어 있기에
두편의 영화를 통해 가슴뭉클한 감동을 간직한 이들에게는 더욱 반가울 따름이다.
총 서른 트랙(Tr.1~15는 <마르셀의 여름>, 16~30은 <마르셀의 추억>)의 곡들은
두 편의 영화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들과 함께 한다.
이를테면 속편에서 마르셀을 유혹한(?) 신비하고도 도도한 소녀 이자벨이 들려주는
인상파적인 피아노에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는 마르셀의 표정은 절로 입가에 미소짓게 될만큼
아름답고 귀엽지 않은가.
또한 파리 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절제된 연주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마르셀과 그 가족
그리고 관객의 어깨를 상쾌하게 해준다.
여름에서 시작해서 인생의 가을로 흘러가는 프로방스의 얕은 강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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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에 썼던 Liner Note. 여기 거미줄 생길까봐 오래된걸 올립니다
첫댓글 ^^ 다시 보고 싶어 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