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솔레 미오
새벽 7시 30분 알바르게, 방에 일제히 불이 들어왔다. 페레그레노들의 동작이 갑자기 부산해진다. 나는 오늘도 먼저 침낭을 꾹꾹 누르고 둘둘 말아서 케이스에 집어 넣었다. 무릎 보호대를 차고, 배낭에서 꺼낸 물건들도 주섬주섬 다시 배낭 속 제자리로 돌려 놓았다. 물과 간식까지 챙겨 드니 꽤 무겁다. 바로 옆 침대에서 잔 마르코도 손놀림이 분주하다. 행장을 마친 우리 둘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아침도 거르고 어둠이 다 걷히기 전에 일치감치 함께 길을 나섰다. 길 바닥에 박힌 조가비 금속을 따라서 산티아고를 향한 발걸음을 시작한 것이다. 밤에 비를 뿌렸는지 길 바닥이 촉촉하다. 새벽인데 여기저기 바르마다 불이 켜 있고 드나드는 출근길 시민들이 제법 된다. 마르코가 자신은 바르에서 요기를 하겠다고 한다. 나도 그를 뒤따라가 커피에 빵 조각 하나로 아침을 먹고나니 조금은 든든하다.
발걸음을 재촉하여 나바라 대학 캠퍼스를 뒤로하며 팔플로나를 벗어나고 호흡을 잠시 가다듬을 즈음 카미노에 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등 뒤에서 해가 떠오른 것이다. "오 맑은 햇빛 너 참 아름답다 폭풍우 지난 후 너 더욱 찬란해 시원한 바람 솔솔 불어올 때 하늘의 밝은 해는 비친다" 이태리 가곡 "오 솔레 미오"가 나도 몰래 입가에서 술술 나왔다. 오늘서야 환하고 따뜻한 햇살을 받는다. 태양의 나라에서 4일 째 되는 날에야 해를 보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아니, 이 기쁨이! 어느새 내 마음이 환해졌다. 태양도 반갑거니와 오늘은 거추장스런 판초를 벗고 걸을 수 있어서 좋다. 비구름을 물리친 파란 하늘엔 슬며시 하얀 구름이 듬성듬성 자리하고 떠다닌다.
카미노가 내 어릴 적 신작로 같아서 친근한 맛이 나고 포근하다. 우선 힘들지 않아서 좋다. 오르막도 아니요 내리막 길도 아닌 그저 평평한 길이 한동안 계속된다. 날씨마저 도와주니 이 아니 즐겁고, 발걸음 가볍지 않을 수가. 지난 3일 간 험한 길 오르고, 폭설을 뚫고 헤쳐온 수고에 대한 보답이란 말인가. 발걸음이 잠시 느려지고 목이 컬컬할 때쯤 길섶엔 벤치가 기다리고 있다. 배낭을 내려 놓고 걸터 앉았다. 그 동안 숱한 카미노들이 여기서 긴 여정의 지친 몸을 맡기고 휴식을 하며 기운을 얻었을 것이다.
왼쪽으로 마을로 이어지는 삼거리에 나무가 하나 서 있는데 그 아래 작은 십자가가 꽂혀 있다. 한눈에 보아도 이 쯤 어딘가에서 순례 중에 숨진 페레그레노를 추모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사진에 이름과 미국 텍사스 출신임을 적어 놓았고 희생된 날짜도 나온다. 크고 작은 돌멩이가 쌍여 있는데 지나가는 순례자들이 애도의 뜻으로 남겼으리라.
멀리 언덕위에는 풍력발전의 하얀 프로펠러가 힘차게 돌아가고 부드러웠던 카미노는 이제 줄곧 오르막으로 이어졌다.언덕의 능선을 따라 좁은 비탈길을 조심스럽게 걸으며 눈을 오른편으로 살짝 돌리면 저 아래 고속도로에서 차들이 여유로운 행진을 한다. 얼마나 더 왔을까. 걸어도 걸어도 가까워지지 않던 프로펠러가 이젠 손을 내밀면 닿을 듯하지만 아직도 꽤 멀다. 앞서 갔던 마르코가 언덕 위의 벤치에 앉아 간식을 먹다말고 나를 보자 시선을 멀리 산으로 돌리며 원더풀 원더풀을 연발한다. 그도 속으론 맑은 날씨에 좀 여유롭게 카미노를 걸으며 멋진 스페인의 자연을 감상하고 싶었을 것이다. 조금 있으니 중년의 두 남자가 우리를 향해 올라 오고 있다. 서로 부엔 카미노를 외쳤다.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에 산다고 했다. 둘의 관계를 물으니 패릴리란다. 누가 형이고 누가 동생이냐고 재차 질문을 던지다. 형제가 아니고 외삼촌 아들과 고모의 아들 관계이니 사촌 사이다. 차림이 좀 가벼워 보인다고 했더니 이번엔 5일간만 더 걷고 나머지 카미노는 가을에 다시 와서 걸을 거란다. 우리 넷은 또 한번 가파른 길을 이겨내고 드디어 페르돈 봉에 섰다.
Alto del Perdon(알토 델 페르돈),우리말로 '용서(容恕)의 언덕'이다. 무엇을 용서???????
먼저, 철로 만든 조형물이 시선을 끈다. 중세 순례자들을 상징하는 조각품인데 “나바라 까미노 친구의 협회”가 1996년에 제조했다고 한다. 안내판은 여기가 해발 770 미터의 페르돈 산맥이라고 알려준다. 바람이 꽤 심하지만 우선 사방으로 탁 트인 전망이 눈을 시원하게 한다. 뒤를 돌아 걸어온 길을 돌아보니중간중간 봤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보이는 산꼭대기에는 하얀 눈으로 덮여 있고, 가까이 보이는논 밭에서는 풀들이 파랗게 자라고 있다. 방향을 바꿔 눈을 앞쪽으로 가져가니 멀리 야트막한 산이 보이고 그 앞으로는 내가 계속해서 걸어내려 가야할 카미노가 여렴풋이 보인다.
이제 오늘 카미노의 절반 정도 왔을 것이다. 배꼽시계가 꼬르륵 점심 먹을 시간이 지났음을 알리고, 체력도 떨어진 상태인데 비탈진 자갈길과 마주쳤다. 이건 길이라기보다 차라리 자갈밭이다. 마치 한적한 공원 근처의 건강 체조 기구 옆에 만들어 놓은 발바닥 마사지용 돌멩이 위를 맨발로 걷는 느낌이다. 내리막 길이라 발에 힘을 주며 천천히 걸어야 발바닥의 충격을 줄일 수 있다. 그련데 다리의 힘도 웬만큼 풀려버렸다. 가만히 있어도 급한 내리막 길이라 두 손의 스틱으로 속도를 제어해도 쉽지 않다. 처음엔 조심조심 걸었으나, 힘이 들어 이내 옛다 모르겠다 하고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는데, 그 혹독한 대가는 며칠 후에 찾아왔다.
우르테가에 이르자 마르코도 에너지 충전이 필요한지 문 연 바를 찾느라 두리번거린다. 마침 지나가는 행인이 일러준 곳에 가보니 알베르게 겸 바르이다.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점심 식사를 하다말고 애덤즈가 환호하며 반갑게 맞는다. 자기는 어젯 알베르게가 아닌 호텔에서 잤다며, 요나따를 못보았느냐고 묻는다. 그는 오늘은 날씨가 맑아서 걷기가 수월하다고도 했다. 오래된 친구를 다시 만난 것만큼이나 나도 반가웠다. 이런 저런 수다를 떨고 있는데 종업원이 어젯밤 동양인 두 명이 그 알베르게에서 자고 갔다며 순례자 방명록을 보여준다. 무심코 들여다보다가, 그러면 그렇지 했다.
한글로 쓴 방명록 끝에 영문 이니셜 CHOI H.J 그리고 한 줄 아래의 글은 일본어로 썼다. CHOI Y.J가 누구일까. 그는 첫날 나와 함께 피레네산맥을 넘은 최효정 씨임에 분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론세스바예스 바르에서 아침 식사까지 같이 했으나 슬며시 자취를 감추었던 그다. 일본인 가마모도 씨도 그랬던 것. 이날 카미노에서 그를 본 사람이 없다 하고 저녁에 알베르게에도 그가 나타나지 않아 아마도 폭설 때문에 준비 부실로 걷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버스로 카미노를 건너뛰었을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그게 맞은 셈이다. 아헤라에 있는 알베르게에서 가마모도를 만날 수 있었다. 효정 씨는 어찌되었는지 물었다. 아침에 함께 카미노길에 나섰으나 잠시 후 각자 따로 걸었는데, 그후 그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효정 씨는 자신의 표현대로 불혹 전에 카미노를 걷고 싶어 다니던 직장도 그만 두고 부산에서 비행기에 올랐다고 했다. 암튼 산티아고까지 순례를 잘 마치고 또한 기대했던 바를 순례길에서 다 이루고 일상으로 돌아갔기를 바란다.
목적지 푸엔테 라 레이나에 도착했다. 초입에 알베르게가 있다. 담장 앞 흑판엔 영어 스페인어 한글로 "산책의 끝" :환영합니다"라는 글귀가 써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비수기인 겨울철에는 영업을 안 하는 모양이다. 조금 더 걸으니 호텔 앞에 페르돈 언덕에서 만난 스페인인 사촌이 서 있다. 4인 조건으로 40 유로 하는 방에 투숙했다며, 마르코와 나도 함께 머물 것을 권유한다. 두 명인면 20 유로씩이라는 말인가. 마다하고 나뫄 마르코는 카미노 화살표를 따라 마을 안으로 더 들어가며 문 연 알베르게를 물색해 보았다.
마을 깊숙히 들어와 한 아담한 알베르게와 마주쳤다. 조식 포함 15유로란다. 여 주인장의 애교에 녹아난 두 남자는 여기서 오늘밤을 보내기로 했다. 그는 한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알베르게라며 나의 환심을 사려했다. 벽에 걸린 세계지도의 한국에는 실제로 많은 핀이 꽃혀 있었다. 나탈리아(Natalia), 그는 브라질 출신인데 스페인인 남편을 따라 이곳에 와서 알베르게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묻지도 않은 말을 거침없이 하며 말도 걸어왔는데 자기 딴에는 아이스 브레이킹(Ice- Breaking)한답시고 그랬을 것이다. 한국인이 적은 방명록 글에 "아줌마가 참 친절하고 좋은데 말이 좀 많은 거 같다" 라는 표현이 더러 있다고 말하자, 마르코는 자기 생각도 그렇다며 피식 웃는다.
나바라대학 켐퍼스
카미노 이정표가 대문에 그려져 있다
오! 솔레미오, 태양이 떠오르자 그림자가 길게 나타났다
평평한 흙길의 카미노를 걸어간다
고맙게도 길가에 벤치가 있다
벤치 사이에 숨지 순례자를 추모하는 십자가가 서 있다
페르돈 언덕 위의 중세 순례자를 상징하는 조각
페르돈 언덕의 필자
알베르게 담에 선 칠판이 손님을 브르는데 한글도 있다.
알베르게 방멱록에 한글로 쓴 글.